찻사발의 모습과 감상
찻사발의 명칭
도자기 부위에 대한 명칭은 동서양이 모두 인체에 비유하는 공통성이 있다. ‘입술이 두툼하고, 어깨가 당당하다. 허리 밑이 너무 훌쭉하지만 굽 다리는 튼실하다’ 등 우리 몸의 일부처럼 말을 한다.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과 흙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도자기의 시작이 결국 한 이치이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찻사발의 부위에 대한 명칭이나 종류별 찻사발의 우리식 명칭이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
일본 다인들이 그동안 우리 찻사발을 종류별로 명칭을 붙이고 하나 하나에도 그들 나름의 이름을 지어 놓았다. 우리 그릇이면서도 일본 사람들이 정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공감이 가지않는 이름을 제각기 아무렇게나 지어 부를 수도 없다. 뜻있는 사람들이 우리 찻사발에 이름 붙이는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해서 의견을 모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현재 정립되지 않은 찻그릇 명칭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다인들이 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찻사발에 대한 명칭이나 용어는 필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 많음을 밝혀 둔다.
찻사발의 차격(茶格)과 크기
사발은 직선의 굽과 반구형의 곡선으로 된 몸통과 원형의 전(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직선, 곡선, 원형이라는 이 세 요소가 조합되어 한없이 다양한 형태의 사 발을 만들어 낸다.
▲ 찻사발이 보통 사발과 다른 점은 차격(茶格)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차격은 찻사발이 가지고 있는 우아함, 의젓함, 당당함을 의미한다. / 사진 雲.中.月 제공
사발은 두 손으로 둥근 물체를 공손히 받쳐든 반구형의 형태로 그 크기가 한 손만으로도 다루기 편하고 내용물 또한 어느 정도 충분한 양을 담을 수 있다.
또 두 손으로 안았을 때 어느 정도 양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도 부담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어서 먹고 마시는 기능에 알맞은 그릇이다. 그러나 이런 일반적인 사발이 모두 찻사발이 되지는 못한다. 찻사발이 보통 사발과 다른 점은 차격(茶格)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차격이 있는 사발이란 차 정신에 맞는 분위기가 있는 사발로 아취, 기품, 충만한 힘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는 사발을 말한다.
찻사발은 다인 손에서 오래 머무르는 그릇이므로 차격이 있으면서도 크기와 무게가 적당해 야 하고 손으로 안는 맛도 편안해야 한다. 찻사발의 높이는 보통 두 손으로 감싸 안았을 때 손바닥 넓이만한 높이거나 이를 기준으로 조금 높고 낮아도 관계없다. 또 사발은 입의 크 기에 따라 큰 것은 입 지름이 17cm, 중간 것은 15cm, 작은 것은 12cm 정도 되고 큰 것을 발(鉢), 중간 것을 완(碗), 작은 것을 소완(小碗)이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큰찻사발, 중찻사 발, 소찻사발이라고 한다.
찻사발 부위별 나눠 보기
찻사발 부위 명칭
▲ 찻사발 단면도 부위별 명칭
찻사발의 굽을 제외한 겉 전체 표면을 겉울이라하고 찻사발의 안쪽 표면 전체를 안울이라고 한다. 겉울은 다시 입술 바로 밑 부분을 어깨, 겉울의 중간 부분을 배, 배와 굽 바로 위까지의 중간을 허리라고 한다. 허리밑에서부터 굽 바로 위까지를 허리붙이라고 한다.
안울 쪽은 겉울의 배자리에 해당하는 곳을 차수건 자리라고 한다. 이는 차수건으로 찻사발을 닦을 때 엄지손가락 끝이 닿는 부위다. 또 겉울의 허리자리에 해당하는 안울 자리를 차솔자리라고 하는데 솔질을 할 때 솔이 움직이는 공간부위를 말한다. 안울 밑바닥 중심에 둥글게 살짝 패인 곳을 차고임 자리라고 한다.
찻사발의 감상
찻사발은 매우 작은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하늘의 숨결과 땅의 정기로 피어 올린 찻 잎의 덕성과 인간의 마음을 담아 내는 그릇이다. 이때 인간의 마음이란 차를 달일 때 자신 과 상대를 위해 차의 신령스런 기운을 가능한 잃지않고 살려내려는 지극한 정성을 말한다. 우리가 찻사발을 감상할 때는 사발 형태의 조형성, 유약의 상태, 소성(燒成)조건, 제작수법에 유의해야한다.
사발의 조형성을 볼때는 굽의 모양, 크기를 주시하고 그 굽위로 뻗어 나간 울선(몸통선) 오름새의 힘과 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 찻사발은 도공의 마음과 흙과 불이 완성하는 작업이다. 묵전요 장작가마 작업/ 변희석 기자
유약의 상태를 볼 때는 속살흙과 유약이 어우러져 나타내는 질감, 유약의 확산과 응결상태, 유약의 투명성 여부와 빛깔등에 관심을 갖는다.
소성조건이란 흙으로 만들어진 사발이 어떤 상태의 불속에서 새 생명을 얻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가마 속의 불이 맑은 불이었는지, 연기가 있는 탁한 불이었는지, 그 중간 불이었는지 또 얼마나 높은 온도였는지에 따라 그같은 요인들이 사발표면의 질감과 빛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눈여겨 본다. 제작수법에서는 몸통의 물레선과 굽을 깍아낸 칼질등에 표현된 자연스러움, 운동감, 힘 등을 느껴보고 사발을 안았을 때 이러한 것들이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맛을 감상해 본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외형적 감상법에만 마음을 뺏겨 정작 사발이 주는 큰 의미를 놓쳐서 는 안된다. 사발의 형태를 이루는 울의 선은 굽에서 시작해서 사발의 입술에 이르러 그 오 름새의 흐름이 끝난다. 그러나 또 다른 눈으로 보면 오름새의 선은 입술에서 시작하여 그 울선의 곡률을 따라 공간으로 무한히 확장되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작은 찻사발의 공간은 확장하면 무한 공간을 담아 내고 축소하면 다시 본연의 몇치 안되는 작은 공간으로 돌아온다. 차사발은 작은 그릇에 불과하지만 청정한 하늘과 차나무의 생명력으로 끌어올린 땅의 정기와 차를 통해 자신과 남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의 인격을 하나로 모아 담아 낸다. 차의 정신에 비추어 세계를 보려고 하는 다인들에게 있어 찻사발은 지상의 모든 그릇중에 가장 큰그릇이 된다. 다인이란 차그릇이 담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 차생활은 아름다움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티&피플 제공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에 따라서 지나친 추상적 관념론이라고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그 러나 사물은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그 의미대로 내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내가 의미를 주 었지만 나중에는 그 의미에 의해 내가 만들어진다. 모든 구체적인 낱낱의 사물은 자신을 다 듬는 화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김춘수님의 ‘꽃’이라는 아름다운 시는 의미심장하고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명상으로 이끄는 대상으로 나에게 다가 오면서 하나의 화두가 된다. 다인들에게 있어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담는 찻사발은 영원 한 화두의 대상이면서 인생의 역정(歷程)을 함께하는 도반이기도 하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
찻사발은 동양 정신을 담는 그릇
차는 그 덕성을 가장 잘 살려 주는 도자기를 만남으로써 다인들의 정신 영역을 확장시켜 주고, 영성(靈性)을 적셔주는 동양의 고전(古典) 음료이다. 도자기 또한 차와 만남을 통해 찻사발이라는 형이상학을 담는 철학적 그릇으로 변모한다.
도자기는 흙으로 만든다.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보다 더 많은 철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흙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를 그 안에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에도 하나님이 흙을 취해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은 자연을 낳고 기른다.
▲ 찻사발은 도공의 연륜과 흙과 불의 조화이다./ 변희석 기자
그래서 흙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어미가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죽은 후에도 다시 품속에 모두를 받아들인다. 끝내는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지막과, 흙에서 만들어짐이 시작되는 도자기의 운명이 ‘도자기와 인간과의 관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시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찻사발이라는 도자기는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 도자기는 흙으로 만든다. 흙은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질보다 더 많은 철학성을 내포하고 있다./ 왕방요 신용균 作 변희석 기자
찻사발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대지의 한 줌 흙으로 만든 아주 작은 공간이다.그러나 이 작은 공간은 채우기 위해 비어 있어야하고, 비우기 위해서는 채워져야 하는 진리 의 법기(法器)이기도 하다. 노자의 말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흙을 반죽해 그릇[器]을 만든다. 그 무(無)에 기인하여 그릇의 쓰임이 있다. 문과 창을 뚫 어 방을 만든다. 그 무(無)가 있음에 방의 쓰임이 있다.’
그릇은 점토로 둘러싸인 공간이 있어 그 기능이 있고, 방은 벽으로 막아놓은 공간에 의해 그 효용이 있다는 뜻이다. 찻사발의 본질 또한 공간이라는 무(無)에 있다. 이때 찻사발의 형 태는 안쪽에서 작용하는 ‘무(無)의 충실’이 외면으로 나타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 고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공간’은 다인의 삶과 꿈을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찻사발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
동양 정신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의 명품 찻사발 또한 자연주의 정신을 담아내던 그릇이였다. 조선의 찻사발은 형상의 원형과 그 변형의 미학적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빚어낸 ‘또 하나의 다른 자연’이란 형태로 우리 앞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런 자연주의 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미(美)다.
▲ 우리 찻사발을 말할 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무심, 무기교의 기교, 불완전의 미, 질 박과 소박미 등의 수사는 무위자연의 미에 대한 구체적 언어다./ 변희석 기자
무위(無爲)란 글자 그대로 ‘아무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새삼스럽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즉, 작위(作爲)가 없고 자연 그대로라는 뜻이다. 또 선종(禪宗)에서는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이상적인 경지를 무위라고 한다. 무위자연은 타고난 그대로 꾸밈이 없는 상태로서 천연의 모습이 자연에 합일되는 것이며, 차 정신의 심미적 요구에 부합되는 개념이다.
우리 찻사발을 말할 때 붙어 다니는 수식어가 있다. 무심, 무기교의 기교, 불완전의 미, 질 박과 소박미 등의 수사는 무위자연의 미를 표현하는 구체적 언어다. 이와 같은 수식어들은 사기장들이 찻사발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손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기교를 넘어선 무기교, 완전을 이해한 불완전, 모든 설명적 요소를 걷어낸 후에 얻어 지는 생략의 아름다움으로서의 소박미는 익을 대로 익은 숙련된 손만이 만들어 낼 수 있고, 유심과 무심의 경계를 넘어선 자만이 얻어내는 ‘무위자연의 미학’인 것이다.
사람의 손이 덧붙여졌을 뿐, 무위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재현해낸 최고의 사발을 무 작지작(無作之作)이라고 한다. 만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만들어진 것같은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런 사발 중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이도다완’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이 사발을 아인 (亞人) 박종환님이 걸림이 없다는 뜻에서 ‘무애(無碍)사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 조선의 명품 찻사발 또한 자연주의 적 정신을 담아내던 그릇이였다./ 변희석 기자
미국 클리블랜드 박물관(미국내 두번째 규모이고 동양 예술로는 첫째가는 박물관) 관장을 지낸 셔먼 리(Sherman Lee, 관장 재임기간 1952 - 1983년)박사는 우리 찻사발을 중국과 일본의 찻사발과 비교하면서 그 무위자연주의적 특징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 다완은 자연스럽고 순박한 민중들의 요구에 맞도록 신속하고 간단하게 만들어졌다고 본다. 한국인들에게는 고려 청자에서도 보여 주었듯이, 중국 다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모든 요소에 있어서 완전성(everything perfection)이 있어야 한다는 바탕에 우려하지 않는 전통이 있는 것 같다. 한국 다완에는 '접근의 자유(Freedom of approach)'랄까, ‘생긴대로 그대로 둔다(let things happen)'라는 저변이 깔려있다. 완전성을 우려치 않고 변형을 수긍(acceptance of accidence)하는 한국 다완의 기질(quality)에는 분명히 사실적인 그 무엇이 존재한다. 일본 다완은 이러한 한국 다완의 자연스런 ‘변형의 수긍’에 영향을 받았지만 지나치게 왜곡 과장한 감이 없지 않다.”
찻사발에 담긴 연두빛 찻물은 그 속에 차의 정취가 솔바람 소리, 물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릇이 갖는 본래의 기능 속에 이런 차라는 자연의 풍정이 보태어질 때, 그 그릇은 비 로소 완전한 예술품으로서 생명을 얻고, 이것에 담긴 차는 인간이 마시는 녹색의 보석이 된다. 그리고 다인은 이 한잔에 담긴 차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엔트로피의 미
엔트로피(entropy)란
찻사발의 자연주의 미학은 다른 말로 엔트로피의 미학이다. 엔트로피는 ‘여러 형태의 에너 지가 관계되는 제 현상’을 설명하는 열역학 제2법칙에 해당하는 물리학 용어다.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찻사 발의 미학에 원용(援用)할 만하다. 차를 마시는 일은 우주의 살림살이를 이해 하려는 노력 의 일부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어떤 시스템의 무질서의 정도를 나타내는 척 도’로 정의되지만, ‘무질서’ 또는 ‘덜 유용한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너지는 항상 질서(쓸모있는 상태)에서 무질서(덜 쓸모있는 상 태)로 변화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법칙이다. 따라서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말은 ‘무질서의 도(度)가 높아진다’ 또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유용성이 떨어진다’ 라는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듯 하다.
▲ 찻사발의 자연주의 미학은 다른 말로 엔트로피의 미학이다. 언젠가는 이 찻사발도 자연의 흙으로 돌아간다. / 변희석 기자
질서의 고향은 무질서
우리가 석탄이나 가스를 태우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고농도의 에너지는 열로 바뀌어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데, 이 열이 다시 모여 본래의 석탄이나 가스, 즉 질서나 유용한 상태로 되돌아 가지는 않는다.
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에너지가 관계 되는 모든 현상을 지배한다. 이때 인간의 눈으로 보는 무질서는 자연의 입장에서는 자유를 의미한다. 모든 질서 있는 것들의 고향은 무질서다. 그리고 무질서로 회귀하려는 사물의 몸 짓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현상의 최고 질서체계를 갖추고 있는 인간조차도 늙고 마침내는 죽음을 맞이한다. 인 간의 노화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가는 과정이고 죽음은 무질서의 완성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제약, 구속, 형식, 틀, 전통 등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시 대의 사회 체계이며 질서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깬다는 점에서는 무질서)이 또다시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일으킨다.
자연스럽다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이 왜 좋은가에 답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친숙의 감정’과 ‘좋다 또는 편안하다는 의식’은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 되어 있는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대한 무의식적인 순응 반응이다. 이 반응은 모든 존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우주의 보편적 원리인 엔트로피의 법칙을 인식하는 무의식이다. 또한 무질서라는 존재의 고향에 대한 회귀 본능의 내재적 감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 또한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또 하나의 작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것은 왜 좋은가?
우리의 삶을 둘러보면 엔트로피 법칙이 보여주는 예로 가득 차 있다. 방을 어질러 놓기는 쉬워도 스스로 정돈되지는 않는다. 시계를 분해하기는 쉬워도 스스로 다시 조립되지는 않 는다. 이같은 예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하는 시간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엔트로피의 개념들을 통해 우리가 찻사발을 감상할때 막연히 ‘자연스럽고 작위성이 없는 것이 좋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왜 자연스러운 것이 좋은가? 왜 작위성이 없는 것이 좋은가? 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본능적으로 사람들은 자연스런 것이 좋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왜 자연스런 것이 좋은가’ 라고 질문하지는 않는다. 이 장에서는 자연스런 것이 왜 좋은가에 대한 고찰과 찻사발의 미학에 따라붙는 자연주의에 대한 의미 를 알아 보려고 한다.
존재의 본질은 자유
우주의 본질이 운동과 변화라고 한다면 이는 에너지가 형태를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의 속성은 자유를 지향하고 있다. 높은 산도 언제인가는 자신을 허물어 뜨려 평원의 자유에 안기기를 꿈꾼다. 공들여 쌓아 놓은 장엄한 탑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인간의 의지로 구축된 질서를 깨뜨리고 지면으로 내려와 편안한 자세로 무질서의 자유를 누 리게 되기를 원한다.
오래된 사원의 폐허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주춧돌이나 탑석, 신전에 외롭게 서있는 돌기 둥 등을 볼때 인간의 입장에서는 황량한 폐허가 주는 무상감에 젖겠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질서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모습이다.
인간이 그것들을 모아 다시 쌓아 올려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한 그들은 무질서로 향하는 자유를 계속 향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 이전의 질서 있는 모습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에너지가 모습을 바꿀 때 질서 상태에서 무질서 상태로만 이동할 뿐 스스로 질서상태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장작가마 1200도의 고온에서 찻사발은 탄생하여 차인들로 인해 생명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 변희석 기자
흙맛과 원형(原形)을 지향하는 변화의 미
일방적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해 가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떠올리며 찻사발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원형(圓形)이면서 정원형이 아닌 입(구연부), 가끔은 속살이 들어나 보이는 완 전하지 못한 유약씌움[施釉], 차심이 들어가 있는 빙열이나 비샘 자국, 완전히 녹지 않은 반자화된 태토, 굽 안의 불규칙적인 소용돌이 모양과 덜익고 들떠 있는 듯한 유약, 겉울과 안울 표면에 불길이 지나간 흔적에 따른 색상의 변화 등은 완전에 대한 불완전, 질서에 대한 무질서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찻사발의 몸에서 발견 할 수 있는 ‘일부러 흔적을 남기지 않은 흔적’ 즉 무위(無爲)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찻사발의 이런 모습들은 찻사발의 원래의 고향인 자연상태의 흙을 떠올리게 하고 이런 느 낌을 우리는 흙맛이라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흙맛은 질서의 형태인 찻사발로부터 무질서 상태였던 흙을 느끼게 하는 감성이고 무질서의 원형(原形)에서 느껴지는 ‘불완전에 대한 미 의식’이다. 찻사발의 흙맛과 사발 몸의 변화에 대한 다인들의 미학적 호감은 항상 본디 모습[原形]을 지향하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무의식적 이해이며 본질회귀의 향수라고 말할 수 있다.
정동주님은 ‘불의 지문’이라는 소설에서 이도다완의 미학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의 참모습 을 형체에 집착하지 않는 변화의 의미 속에서 찾고 있다.
'변화는 그 자체가 태초이자 종말이지만 계속되기 때문에 태초도 종말도 따로 느껴지지 않지요. ....형체를 지닌 모든것은 변합니다. 우주 자체가 변화를 설법하는 진리거든요. 인간 에게서 변화는 곧 슬픔으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헤어지는 것을 말하니까요. 인간의 참모습은 변화를 절실하게 깨닫고 형체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데 있는지도 모르지요. 형체는 만남이라 는 단계와 이별이라는 단계로 구성되는데 시간과 장소에 따라 끝없이 변화된 형체로 만남 과 이별이 반복된다고 봅니다. 그게 슬픔이지요. 슬픔은 인간의 참마음이며 이도차완은 그런 인간의 마음이 투영된 그릇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찻사발로부터 배우는 자유의 미학
‘흙맛과 자연스런 변화미’를 갖춘 찻사발은 곧잘 우리를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그것 은 단지 미의식의 각성 뿐 아니라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한다.
▲ 정호다완(井戶茶碗) 찻사발의 당당한 모습 . 묵전요 김태한 作 / 변희석 기자
세월이 인성을 바꾸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발 또한 변화해 간다. 다인은 변화하는 사발 모습에서 엔트로피 의 증가를 보고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얻을 수 있다. 이때 ‘삶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한국미의 이해」라는 책에서 김영기님은 ‘현상계의 무상함과 그 배후에 깃든 어떤 영원 한 숨결을 깨달아 삶의 자유를 새롭게 자각하고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은 생성이라는 질서에서 소멸이라는 무질서로 이동해 가는 변화와 운동의 경험 이라고 말할 수있다. 세월은 인간의 자기완성 과정에서 필요한 질서에 대한 삭힘의 과정이고 따라서 무질서로 가는 것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결이 삭는다는 것은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뜻이고 결이 삭은 사람은 언제인가는 무질서로 회귀하는 인간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온갖 고통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을 영위하게 된다. 이렇게 세월 속에서 삶을 가로막고 있는 괴로움, 슬픔, 홀로감과 외로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인생의 결을 삭혀야 한다는 것과 결이 삭아 본래의 원형(原形)으로 돌아가려 것이 사물의 본성(자유)이라는 것을 찻사발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사마저 뛰어 넘고 희, 로, 애, 락의 감정에도 매이지 않는 진정한 자유의 삶을 희구한다. 엔트 로피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찻사발의 미학은 바로 자유의 미학이다. 그리고 찻사발의 엔트로피의 미학은 다인들에게 근원으로서의 자유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찻그릇에 따라 달라지는 차맛
차맛의 구성
녹차의 맛은 떫은 맛, 단 맛, 쓴 맛, 감칠 맛 등이 적절히 조화돼있다. 떫은 맛은 카테킨류 (類)의 성분이 내고, 단맛은 유리당류(遊離糖類), 쓴맛은 카페인, 감칠맛은 주로 데아닌과 구루타민산 등의 아미노산 맛이다. 녹차는 쓴 맛과 떫은 맛을 중심으로 여기에 감칠 맛과 단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은 맛을 내기 위해서는 본래 녹차가 가지고 있는 맛의 구성 범위 내에서 조화되어 있어야하고, 또 알맞은 농도를 필요로 한다. 보통 고급차에는 감칠 맛을 내는 아미노산(데아닌, 구루타민산)이나 카페인이 많고, 하급차에는 유리당류가 많은 경향이 있다. 고급차이든 하급차이든 그속에 함유된 떫은 맛을 내는 카테킨의 양은 별 차이가 없다.
차맛 변화의 요인
차의 맛은 똑같은 성분의 같은 차라고 해도 담는 그릇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도자기가 아닌 금이나 은 등의 금속이나 플라스틱 또는 음용 종이 등으로 만든 잔으로 차를 마셔보면 도자기 잔을 사용했을 때와 차맛이 다른 것을 곧 알 수 있다. 이런 맛의 차이는 첫째는 도자기로 만든 다기에서 발생하는 원적외선 때문이고 두번째는 다기의 광물질 성분이 물에 녹아 나온 차의 성분과 만나 일으키는 화학 반응이 그 원인이다.
▲ 돌확을 이용한 찻자리. 여름 시원함이 한잔의 찻잔에 담겨 있는 듯하다./ 변희석 기자
원적외선이란
사람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광선을 가시광선(可視光線)이라고 한다. 이 가시광선 중에 파장 이 가장 짧은 광선은 보라색 광선이고 가장 긴 광선은 적색 광선이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는 볼 수 없는 더 긴 파장의 적색 광선이 있다.
이 같은 장파장가운데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시(不可視) 광선을 적외선이라 한다. 적외선은 파장 길이의 긴 순서에 따라 근적외선, 적외선, 원적외선으로 나뉜다.
그 가운데 25 마이크로 미터 이상의 긴 파장의 광선을 원적외선(遠赤外線)이라고 한다. 원적외선은 열을 많이 내는 전자기파의 일종으로 열선(熱線)이라고 하며 몇 가지 특별한 성질이 있다.
맛을 변화시키는 원적외선과 분자운동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광물 성분은 일반적으로 다른 물질에 비해 더 많은 원적외선을 낸다. 또 같은 물질이라도 원적외선의 방사량은 온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상온(常溫)에서 내는 원적외선의 방사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물질의 온도가 높아지면 그 양이 증가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따라서 광물성 점토로 만든 도자기 그릇에 차를 넣고 더운물을 부으면 뜨거워진 다기는 더 많은 원적외선을 방사한다.
바위같은 무생물이나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거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물질의 분자는 고유의 진동 운동을 하고 있다. 도자기 다기에서 방사된 원적외선 또한 파장이라는 진동이다. 이 원적외선의 파장이 찻물(물에 차의 여러가지 성분이 녹아 있는 상태)분자의 진동에 흡수된다. 원적외선의 파장이 찻물을 구성하고 있는 각 성분 분자의 진동과 합쳐서 공명하고 이 공명(共鳴)이 더 큰 공진(共振)운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이 찻물을 활성화시킨다. 이 분자들의 공명(共鳴)과 공진(共振)운동이 차맛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광물 성분은 일반적으로 다른 물질에 비해 더 많은 원적외선을 낸다. / 변희석 기자
맛을 바꾸는 원적외선의 수화성(水和性)
빛은 파장이 짧으면 잘 반사되고 파장이 길수록 물질에 잘 흡수되는 성질이 있다. 물질에 잘 흡수된다는 것은 어떤 물질에 깊이 침투된다는 뜻이다. 적외선의 주파수는 물질을 구성 하고 있는 분자의 고유 진동수와 거의 같기 때문에 물질에 부딪치면 잘 흡수되어 공명하는 성질이 있다. 이 공명현상으로 진동이 점점 증폭하게 되어 공진(共振)을 일으킨다. 이때 증 폭된 진동에너지 중 일부는 열로 변하고 일부는 분자운동을 활성화시키는 활성에너지로 작 용하게 된다. 특히 원적외선은 찻물 같은 유기화합물 분자에 대한 공명 및 공진 작용이 커 서 수화성(水和性)을 높이게 된다. 수화성이 높다는 것은 물의 분자와 차를 구성하는 각종 성분의 분자가 짧은 시간 내에 고루 잘 섞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차맛과 물맛이 겉돌지 않아 차맛이 부드럽고 조화로워진다.
생활 속에서 경험하는 원적외선
자갈 위에 구운 고구마는 타지 않으면서 구수한 맛이 난다. 자갈이 뜨거워지면 자갈로부터 침투력이 강한 원적외선이 많이 나와서 고구마의 겉과 속이 동시에 같이 익기 때문에 타지 않고 맛을 좋게 한다. 일반 불로 고구마의 속까지 익히려면 겉이 먼저 많이 타게 되므로 자갈이 내는 원적외선의 열과 침투력을 이용한 것이다. 이때 열은 고구마 속 40-50 미리 정도까지 전달된다. 요즘에 쓰는 전자렌지도 마찬가지 원리를 이용한것이다.
이런 원적외선의 성질은 우리 몸으로 직접 느껴 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30도의 물 속에 들어가 있으면 따뜻하다는 느낌을 거의 못 느낀다. 그러나 같은 온도의 햇볕을 쐬 고 있으면 따스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물은 몸 표면만 덥게 하지만 햇볕 속의 원적외선은 피부 깊숙이 침투하여 열을 내기 때문이다.
다기와 찻물과의 화학반응도 맛을 바꾼다
원적외선 외에 차맛을 변화시키는 다른 원인으로는 다기의 태토에 함유된 광물질 성분과 물에 녹아 나온 찻잎의 성분들이 일으키는 화학 반응이 있다. 은수저가 계란의 노른자와 접촉하면 순간적으로 검게 변하듯이 다기에 찻물이 담겨도 매우 빠른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도자기와 찻물과의 화학반응은 찻물이 유약의 빙열을 통해 태토에 잘 스미는 기공이 발달한 도질자기(陶質磁器) 경우에 더 현저하게 나타나고 차맛의 변화 또한 크다.
그러나 청자와 백자는 태토가 치밀하게 자화(완전히 녹은 상태)되어 있어 찻물이 스미지 않는다. 다만 유약의 유리질과 찻물이 화학 반응을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원적외선의 효과를 제외하고 화학반응 효과로만 말한다면 청자나 백자의 경우 차맛이 우리가 느낄 만큼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차맛은 찻잎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각 성분 분자의 떨림[振動]과 도자기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광물 성분의 각 분자의 떨림 그리고 원적외선 파장의 떨림이 같이 떨면서[共鳴] 울림[共振]이라는 대합창이 만들어 내는 맛의 교향악이다.
차에 따라 다기 골라쓰기
다관의 경우, 안에 유약을 바른 것보다는 바르지 않은 것이 태토와 찻물이 직접 반응하므로 맛을 더 순하게 만든다. 또한 태토에 함유된 광물의 구성 성분에 따라서도 그 영향이 달라진다. 그러나 차맛이 순하고 부드러워 진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고급 녹차처럼 맛이 섬세하고 담백한 차는 그 맛이 너무 순해지면 싱거워지고 자칫 미묘한 본연의 풍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의 특성에 따라 알맞는 다관을 선택해 사용하는 것도 차 생활의 지혜 일 수 있다. 화학적 변화 측면에서 볼 때 청자나 백자다기는 기공이 없어 비교적 차맛에 영향을 덜 주므로 고급 녹차를 마실 때 사용하면 좋다. 또한 보온성이 떨어져 찻물이 빨리 식으므로 여름에 쓰도록 한다.
다공성의 도질 자기로 만든 다기는 맛이 강한 발효차나 맛이 덜한 하급 녹차류를 우려도 풍미가 좋아진다. 그리고 보온성이 좋으므로 겨울에 사용하기에 적당하다.
/김동현 (차문화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