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터키공화국의 수도가 되기 전에는 작은 도시였으나 초대 대통령인 아타튀르크 케말이 수도로 정한 이후로 행정, 문화, 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헬레니즘과 로마시대에는 앙카라를 갈라티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부터 무수히 들은 이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터키공화국의 전신은 오스만터키제국이다. 1차 세계대전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그래서 연합국에 의해 오스만제국은 분할점령당했다. 그때 케말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터키를 점령한 그리스 군대를 몰아냈다. 그리고는 이름뿐인 술탄 정부를 무너뜨리고 1923년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슬람 국가임에도 국교를 폐지한 것,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남녀 교육의무화를 실시한 것, 여성 참정권을 실행한 것 등 그의 업적은 개혁적이었다.
터키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을 보여주는데 추도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고 기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주변에 한국공원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늦은 시간이라 문은 닫혀 있었지만 문에는 태극기와 터기국기가 새겨져있었다. 그들이 '형제의 나라'로 부르는 한국, 국교수립이후 만들어진 공원이다.
문 안으로 탑이 밝은 조명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모두들 자다가 일어나서 공원의 문과 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은 조금 웃겼다. 그리고 경주의 불국사 석가탑을 자세히 본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사진을 찍지 않을 것이다. 내눈에는 석가탑 원래의 모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공장에서 생산해 낸 제품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의미는 한국전에 참가한 터키인의 명단이 적혀있고 한글로 된 추도글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둠속에서 그 의미를 볼 수 없었을 뿐이다. 대신 '한국공원'이라는 단어에 문닫힌 공원밖에서 모두들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앙카라 야경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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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어가 매일 똑같은 일정을 반복했다.
가방을 열고 정리를 한 후 씻고, 그 사이 디카와 핸드폰 충전을 하며 내일을 준비한다.
일기는 이제 메모에만 의존한다. 이러다가 한꺼번에 정리하기 힘들텐데...생각은 하면서도 그냥 잠들어버리기 일쑤이다. 너무 피곤하다. 즐기는 여행이 아니고 끌려다니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라도 해야지...하는 생각이 이렇게는 하지 말아야지...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설레이는 여행이었는데 이제는 집생각이 나며 지쳐가고 있었다. 5일 넘게 외국에 있어본 적이 없는 나와 한달 정도 유럽에 다녀온 딸과는 그런 점에서 차이가 났다. 그건 체력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아침 호텔 식사를 할때마다 그리스 가이드샘이 한 말이 생각났다.
초기의 호텔식당에서는 한국의 여행자들이 하도 계란을 많이 먹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가는 것을 안 이후로는 인원에 맞게 내놓고 추가를 안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조금 늦게 가면 계란이 없었다. 우리 말고 다른 한국 일행을 보며 저 팀 가이드가 계란 이야기를 안해주었나보다 하며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어쨌든 집에서보다 많은 식사를 하고 시간에 맞추어 움직였다.
우리팀은 시간약속때문에 애먹이는 경우는 없었다. 모두 일찍 나왔고, 버스안에서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하루를 시작했다. 다행히 아픈 사람도 없었다. 이 또한 모두 감사할 일이었다.
버스안에서 가이드샘이 터키 이야기를 시작할 때 메모를 하려고 가방을 여는 순간 공책을 호텔에 두고 온 것을 알았다. 이런, 낭패다. 모든 것을 공책에 기록했는데...다행히 호텔에 있다고 하여서 한 달 후에라도 받을 것을 기약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연락이 없는 것을 보면...그때그때마다 느낌이나 에피소드를 메모했는데 너무 아쉽기만 하다.
이제 정말 너무 지겨운 버스를 한참 타고 이스탄불 입성!
유럽과 아시아가 1km의 다리 하나로 연결된 독특한 곳, 이스탄불.
육상 실크로드의 끝이며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인 이스탄불까지 마침내 왔다.
과거 유럽의 정신적 요람인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리웠던 곳의 첫 인상은 다양한 튤립과 정갈한 도로, 그 도로 옆으로 보이는 골든혼의 푸른빛이 가슴뛰게 하였다. 거리마다 튤립이 피어있고 활기차보이는 도시였다.
보스포루스해협을 사이에 놓고 서쪽이 유럽지구, 동쪽이 아시아지구이다. 유럽은 골든 혼 해협으로 다시 나뉜다.
보스포루스 해협입구와 마르마라 해협으로 뻗어나온 반도가 하기아 소피아가 있는 비잔틴 제국의 심장부였다고 한다.
이스탄불에서는 하기아 소피아성당, 블루 모스크, 톱카프 왕궁 박물관, 5000여개의 상점들이 있는 바자르등을 본다.
이스탄불에서 처음 간곳은 톱카프 궁전.
터키에 도착한 이후 계속 들어온 터키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케말 아티튀르크도 이제 익숙해졌다.
지금의 터키공화국은 술탄을 몰아내고 설립된 나라이다. 케말은 일하는 여성을 위하여 히잡을 쓰지 않도록 하고, 이슬람교를 개편하는 등 여러 개혁을 시도한 결과 지금까지 터키의 정신적인 기둥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이라는 명칭도 케말 아타튀르크 개혁부터였다.
술탄을 만나기 위해 의자에 앉아 기다리게 하고 알현실에서 만나면 머리를 조아리고 알현하게 하였다. 또한 철저한 보안유지를 위해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측근인 환관 역시 비밀유지를 위해 청각장애인을 두었다고 한다. 무슨 비밀이 그리 많았을까...그럼 지시는 어떻게 알아들을까? 궁금한데 가이드샘도 그것까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별 걸 다 물어보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안에서는 자유관람이었다. 보석관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볐는데 특히 86캐럿 다이아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 외에도 커다란 사파이어와 루비 등 보석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대단한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의상전시실에는 술탄이 입었던 옷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목이 아주 좁아보였다. 어떻게 숨을 쉬었을까 할정도로 목을 죄인 옷이다. 주어진 시간이 또 부족했다. 많은 외국인들이 바람을 맞으며 서있는 테라스로 갔다. 보스포로스 해협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서 그 순간을 흠뻑 즐겼다. 그리고 히야신스 향 가득한 정원에서 사과를 맛있게 먹는 것으로 충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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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간 곳은 하기아 소피아 성당!
360년의 최초의 하기아소피아는 화재로 불타고 세번째로 재건된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소피아는 지혜를 뜻한다. 길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 뒤로 한참을 서서 입장했다. 그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1453년 5월 29일. 비잔틴제국은 멸망했다.
1200여년동안 이어온 비잔틴 제국을 무너뜨린 사람은 메흐메드 2세였다. 그는 오스만제국의 술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기독교권을 이슬람권으로 바꾼 인물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에 소장된 콘스탄티노플 공략도에 72척의 배로 산을 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수난은 전란과 이코노클래즘, 그리고 지진이었다.
이코노클래즘은 726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콘은 동방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벽화나 모자이크, 목판등에 신성한 인물이나 사건등을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이콘을 파괴하는 운동을 말한다. 성상파괴운동의 시작은 레오 3세이다. 이콘은 우상숭배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 운동은 726년부터 787년, 두번째는 813년부터 843년까지이다. 이 기간동안 많은 성상이 파괴되었다.
하기아소피아성당도 이코노클래즘에의해 더 큰 피해를 있었다.
우리일행은 각자 이어폰을 사용하여 가이드샘의 말을 들을만큼 그 안은 더 혼잡했다.
넓은 실내의 모습에도 놀라고, 안의 장식을 보고도 놀라며, 그 안에 부딪칠 정도로 많은 사람들때문에 놀랐다.
경건함을 자아내는 중앙의 둥근 돔을 쳐다보느라 목이 뻐근해질 정도였고, 그 아래 우리가 서있는 사각공간은 예배공간으로써
엄숙함이 전해왔다.
기독교사원이었던 이곳은 정복당한 후 모스크로 바뀌었다. 메흐메드 2세는 아름다운 소피아성당의 내부를 손대지 않았다. 모자이크화를 훼손한 것은 증손에 해당하는 쉴레이만 1세였다.
성당안의 벽화나 바닥장식등은 모자이크 기법이다. 모자이크화는 내구성이 뛰어나 오랜 세월이 지나도 색이 바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 모자이크화들은 쉴레이만 1세 때 회반죽으로 덮여져 있었다. 지금은 그 벽화를 복원하기 위해 공사가 한창이어서 더 어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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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인들은 하루에 5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한다. 이 시간을 알리는 소리를 '아잔'이라고 한다.
터키에 있는 내내 아잔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아잔때문에 하던 일을 멈추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케말의 개혁조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어수선한 소피아성당을 나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탁심광장에 도착하니 뱀의 원기둥이 보이고 그 뒤로 잘려진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뱀의 원기둥은 3마리의 뱀이 기둥을 감고 있는 조각이었으나 머리부분이 없다. 나중에 뱀 두마리의 머리부분이 발견되어 하나는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다른 하나는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전쟁에서 진 페르시아군의 무기를 녹여서 만든 청동기념비라고 전해진다.
20m의 오벨리스크를 이집트에서 가져온 사람은 유리아누스이고, 경기장에 세운 사람은 테오도시우스 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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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어가니 그랜드바자르.
바자르는 페르시아 도시의 공공시장을 가리키던 말이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간 그랜드바자르는 작은 골목길도 많고 상점도 많고 패키지 여행객들과 일반 여행객등이 뒤엉켜 정신없는 시장이었다.
우리의 남대문시장과 같은 곳이니 흥정을 잘 하라는 가이드샘의 말이 아니어도 닳고닳은 상술이 난무하는 곳이었고, 냄비받침을 사려고 간 우리는 기싸움에서 밀려 여운이 좋지 않은 곳으로 기억되었다.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젓는 등 그동안 친절했던 터키사람은 사라지고 침튀듯 뱉어내는 짧은 한국말들로 흥정하는 장사하는 사람만 있는 곳이었다.
그동안 터키에 대해 들었던 많은 이야기와 '형제의 나라'를 제대로 몰라던 나름 미안했던 감상이 이곳 그랜드바자르에서의 경험으로 흐릿해졌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