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 9
휘이이잉!
서북풍(西北風)이 불었다.
소호(巢湖)에 부는 서북풍은 황량했다. 여름 내 절경을 뽐내던 호
변의 정취는 이제 삭풍에 흔들리는 백양목의 허전한 가지처럼 퇴
색해 있었다.
풍류의 고장으로 알려진 소호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쓸쓸한
무덤처럼 변해만 갔다.
한때는 호수 위에 그림처럼 떠 있는 유선과 한가로운 구름들, 그
윽하게 울리는 주악소리 등이 어우러져 무릉의 선경을 방불케 하
던 서호도 마침내 침잠의 때를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의 법칙이자 순리에 의한 것이었다.
단지 이토록 황량한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호수에 간간이 떠있는
배가 있다면 그것은 고기를 잡아 생계를 연명하는 어부들의 것임
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거운 그물을 던지는 어부의 얼굴에도 다가오는 겨울의
스산함이 떠올라 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삐익... 삐이익!
문득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호변을 울렸다. 뒤이
어 다급한 음성이 서쪽의 풍림에서 들려왔다.
"어서! 어서 가시오! 난... 틀렸소! 날 내버려 두고 가시오!"
처절하면서도 다급함이 실린 음성이었다.
"그럴 수는 없소! 우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하오!"
"크으으윽!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의 의리가 중요하오? 아
니면 안휘성 일대의 형제들의 안위가 중요하오? 어서 가시오! 연
판장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지 모른단 말이오? 빨리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려야 하오!"
"하지만... 이미 늦었소."
두 사나이였다. 그들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호변의 백사장에
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둘 다 중년인이었는데 눈빛이 청명하고 오
관이 반듯한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은 한쪽 팔이 끊어져 있었다. 다른 하나는 어깨
가 피로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숲으로부터 십여 개의 흑영이 솟구쳐 나와 그들을 에워
쌌다.
"크흐흐흐흐! 고작 여기까지 왔느냐? 뛰어야 벼룩이지, 가면 어디
로 가겠다는 거냐?"
열 명의 흑의인 중에서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사나이가 괴소를 흘렸
다. 그들은 두 중년인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한 채 검을 겨누었다.
"......!"
두 중년인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그러나 그들은 굴복하지 않고
각각 검을 꼬나들었다.
"크크크! 선비는 죽을지언정 모욕받지 않는 법이다! 우리를 죽이
는 것은 쉽다. 하지만 적어도 저승길에는 동행을 해줘야 할 것이
다!"
휘익!
어깨가 피로 젖은 사나이가 검을 휘둘렀다.
"크악!"
찰라지간 한 흑의인이 가슴을 안고 거꾸러졌다. 갑작스런 기습에
당한 것이었다. 우두머리 흑의인은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쳐라! 놈들을 난자해라. 권주는 마다하고 벌주만 원하는 놈들!"
촤아아앗!
흑의인들은 일제히 두 중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중상
을 입은 터라 두 중년인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크으윽!"
처절한 비명과 함께 팔이 하나밖에 없는 중년인이 썩은 짚단처럼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두 자루의 간산도가 박혀 있었다.
"감형(甘兄)!"
문득 비통에 찬 부르짖음을 발하던 사나이가 앙천광소를 터뜨렸
다.
"으하하하하하! 네 놈들에게 죽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목숨을 끊
겠다!"
사나이는 스스로 검을 들어 자신의 목을 힘껏 찔러갔다. 그때였
다. 어디선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사나이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 아
닌가?
"목숨은 귀한 것이오. 특히 협사의 목숨은 마졸들의 것과는 비교
도 할 수 없는 것이거늘 귀하는 어찌 가볍게 행동하는 것이오?"
"......!"
사나이는 그 음성을 들었다. 그는 분명 자신의 목을 찔렀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목의 한 치 거리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있었다.
"크으윽... 카악!"
그 순간 참혹한 비명이 꼬리를 물며 사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중년인은 의아해하며 눈을 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방갓을 쓴 청삼인이 흑의인들을 헤치며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삼
인이 가볍게 손을 저을 때마다 병기를 휘두르던 흑의인들은 참혹
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것이었다.
쓰러지는 흑의인들의 목에서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분출했다.
"어리석은 마졸들이여, 어찌 불나방처럼 불꽃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 말인가? 너희들에게는 죽음밖에 줄 것이 없구나!"
문득 그것을 지켜보던 사나이는 놀라 외쳤다.
"대협! 뒤에......"
사나이는 흑의인들의 우두머리가 뒤에서 암습하려는 것을 본 것이
었다. 그러나 사나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삼인은 뒤도 돌아보
지 않고 손가락으로 흑의인의 오구검(烏句劍)을 잡았다.
이어 손가락을 가볍게 퉁기는 순간 오구검은 방향을 바꾸더니 우
두머리의 목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으아악!"
우두머리는 피가 솟구치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렇게 되자
살아 남은 대여섯 명의 졸개들은 졸지에 투지를 잃고 말았다.
"사, 사람 살려!"
그들은 분분히 병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사나이
는 냉막하게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갈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했거늘......."
싸늘하게 내뱉은 청삼인은 발끝으로 땅에 떨어진 검을 차올렸다.
그 순간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쐐애액!
발길질에 의해 섬광처럼 날아간 검이 한꺼번에 세 명의 등을 산적
처럼 꿰어 버린 것이었다. 나머지 두 명은 혼비백산하여 오금이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마음은 백 번이나 달아나고
싶었으나 아무리 달아나려 해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청삼인은 혀를 찼다.
"쯧쯧! 자력으로 갈 수 없다면 내가 보내주지."
그는 두 흑의인을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 순간 무형의 강기가
장심에서 뻗어나갔다.
"크아악!"
일순 흑의인들은 그 자리에서 핑그르르 돌더니 비명을 지르며 가
슴에 구멍이 뚫린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실로 공포스러운 광경이
었다.
"으으......!"
그것을 지켜보던 중년인은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세상에 이런
무공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청삼인을 바라보았다.
흑의인들을 모두 추살한 황의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몸을
돌려 백양목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 명의 백의를 입은 가
냘픈 체격의 소녀가 기대 서 있었다.
소녀는 안색이 몹시 창백했다. 사나이가 다가오자 소녀는 호수를
바라보며 핏기없는 얇은 입술을 열었다.
"오빠, 호수가 참 아름다워요. 저기 저 배는 고기잡이 배인가요?
한 번 타보고 싶군요."
소녀의 음성에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바람만 불면 금
방이라도 날아갈 듯 가냘픈 몸매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한 쌍의
검은 눈동자에는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빛이 어려 있었다.
청삼인은 시선을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멀리 작은 어선이 한
척 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수아. 춥지는 않느냐?
우선 이 옷을 걸쳐야겠다."
사나이는 자신이 걸치고 있던 청삼을 벗어 소녀의 가녀린 어깨 위
에 걸쳐 주었다. 청삼 속에는 짧은 백색의 단삼이 걸쳐져 있었다.
소녀는 배시시 웃었다.
"오빠는 참 친절해요. 저는 오빠를 보면 언제나 침봉자(針棒子)가
생각나곤 해요. 아아! 침봉자는 어찌 되었을까요? 전 그를 본 지
한참이나 되었어요."
방갓 쓴 사나이는 탄식했다.
"수아. 침봉자는 죽었단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다."
문득 소녀의 창백한 얼굴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부르짖었다.
"아니예요! 아니예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침봉자는 죽지 않았어
요. 그는 저에게 약속했어요. 절 영원히... 영원히 아내로 삼겠다
고 했단 말이에요. 전... 그 분의 아내예요......."
소녀의 음성은 꿈처럼 잦아들었다. 그녀는 몽롱한 시선을 들어 호
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전... 침봉자의 아이를 낳을 거예요. 침봉자는 말이에요. 조금
멍청하기는 해도 정말 잘 생겼어요. 제가 아이를 낳으면 그를 닮
아 무척 예쁠 거예요. 전... 꼭 아들을 낳을 거예요. 침봉자를 꼭
닮은 사내아이를 말이에요......."
한편 청삼인에 의해 생명을 구하게 된 중년인은 머뭇거리며 다가
왔다. 그는 이 두 사람의 대화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가 보기에 백의미소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청삼인은 그런
소녀를 몹시 가엾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철판자(鐵判子) 육공(陸工)이 구명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철판자 육공. 그는 강호에서 강골로 소문난 인물이었다. 육공의
무공은 비록 평범하였으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무림에서는 상
당히 이름이 나 있었다.
하지만 육공의 말을 못들었는지 청삼인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이렇
게 말하고 있었다.
"수아. 배를 타고 싶다고 했지. 내가 태워주마."
육공은 다급해졌다. 사나이가 이대로 떠나도록 내버려 두면 안된
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 잠깐. 불초가 할 말이 있소이다."
청삼인은 그제서야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
하는 것이었다.
"이젠 안심해도 좋소이다. 귀하를 추적하던 천사교 합비지단(合丕
支壇)의 졸개들은 더 이상 길을 막지 못할 것이오. 뒤쫓고 싶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 테니까."
육공은 흠칫했다.
"대협께서 모... 모두 처치하셨단 말입니까?"
"세 방향의 추적대는 모두 섬멸되었소. 서북쪽으로 가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소이다."
"아!"
육공은 거듭 놀라고 말았다. 그는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다. 육공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대협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이 일은... 극히 중요할 뿐더
러 무림의 수백 수천의 협의지도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부디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사나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문득 담담히 물었다.
"연판장과 관련된 일이오?"
"그, 그걸 어떻게?"
육공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사나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
했다.
"그저 스쳐들었을 뿐이오."
육공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천사교에 대항하는 협의도의 수는 점차 많아지고 있
습니다. 최근에는 안휘성의 협의도가 연판장에 서명한 후 뜻을 함
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실로 말씀드릴 수 없는 극비의
사항이 연루되어 있으나... 이 사람이 부주의하여 그만 안휘성의
비밀집회 장소를 알리는 비밀첩(秘密帖)을 놈들에게 탈취 당했습
니다. 이제 놈들에게 비밀이 흘러 나갔으니 자칫하면 수많은 협의
도들이 놈들의 마수에 몰살을 하게 되었소이다. 대협께서는 부디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사나이가 문득 담담히 물었다.
"귀하는 내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믿소?"
육공은 또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뇌리에는 한 신비인
물이 떠올랐다. 눈 앞의 사나이야말로 그 인물과 너무나 부합되었
다.
육공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은... 은공께서는 죽어가는 무림정기를 부활케 하시지 않았습니
까? 우리는... 이제 흑사풍(黑死風)이 아니면 이 시대의 암흑을
종식시킬 분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흑사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은공께서는 부인하지 마십시오. 흑사풍이란 이름은 이미 무림도
의 불멸혼(不滅魂)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사나이는 방갓을 더욱 눌러쓰며 중얼거렸다.
"흑사풍이라... 그것이 날 지칭하는 별호란 말인가?"
사나이의 반문에 육공은 엄숙하게 말했다.
"은공께서는 천사교의 지단을 차례로 붕괴시키지 않았습니까? 강
호에선 대협의 위명이 진동된 지 이미 오래이며 정도의 정신적인
영도자로 숭앙받고 있습니다."
육공의 부언에 사나이는 문득 기소를 흘렸다.
"후후! 그런 일이 있긴 있었소.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와
천사교간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한 것이었지, 무림을 위하는 일은
아니었소."
"......!"
육공은 그 말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대에게서 싸늘
한 냉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흑사풍은 정도무림의 희망이자 저항정신의 핵이 되고 있었다. 그
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잔혹한 행동은 살인마나 다름이 없었
다. 만일 그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해 천사교의 지단을 섬멸하였다
면 또 한 명의 거마(巨魔)일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육공의 전신에서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이때 흑사풍이 입을 열어 물었다.
"집회장소와 일시는 어찌 되오?"
육공은 잠시 머뭇거렸다. 알려줘야 할지, 아니면 말하지 않아야
할지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의 결정
을 내렸다.
'설혹 흑사풍이 정인(正人)이 아니라고 해도 그가 천사교와 원수
지간인 이상 정도로 보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이미
천사교가 알고 있는 이상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는 일이 아닌가?'
육공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은현장(隱玄莊)에서 이틀 후 미시(未時)에 열리기로 되어 있습니
다."
육공의 말이 끝나는 순간 흑사풍은 몸을 돌렸다. 미소녀의 손을
잡은 그는 육공이 지켜보는 가운데 훌쩍 신형을 날려 백여 장이나
떨어진 곳에 정박해 있는 어선을 향해 날아갔다.
한 사람을 안고도 그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어 보였으며 호수를 스
치듯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새와도 같이 자유로와 보였
다.
"아아, 인간의 신법이 아니다."
육공은 흑사풍이 어선에 사뿐히 내려앉는 것을 바라보며 그만 경
이의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육공의 마음 한 구석이 무겁
게 가라앉았다.
은현장(隱玄莊).
안휘성에 사는 무림인이라면 은현장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것은
은현장의 장주인 구세인의(救世仁醫) 경우량(京雨亮)이 너무나 유
명하기 때문이었다.
구세인의는 명호 그대로 무림에서 손가락을 꼽는 신의였다. 그의
의술은 신기에 가까웠다. 따라서 중원에서도 그의 의술을 칭송하
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구세인의는 인술에
바탕을 두어 사람을 구하고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 더욱 세인의 존
경을 받았다.
그가 은현장을 세운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천사교가 중원무림을 장악하자 무림에서의 은퇴를 선언하고 은현
장에 틀어막혔다.
그가 무림을 은퇴한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천사
교의 독패군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물론 천사교에서도 그런 사
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교가 눈을 감아주는 이유는 그의 신기에
가까운 의술능력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때에 그의 의술이 필요할
지 모르는 것이 정사를 막론한 무림인의 처지였던 것이다.
단지 숨만 붙어 있다면 살릴 수 있는 것이 경우량의 의술이었던
것이다.
"......."
천둔산(千屯山)에 위치한 은현장으로 가는 길은 평소에 사람이 끊
이질 않았다. 많은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
이다. 하지만 오늘은 지나는 사람들이 없었다.
경우량의 치료를 받기 원하는 환자들은 은현장에서 십리 가량 떨
어진 길목에 설치되어 있는 외장(外莊)이라 불리우는 가건물에서
신청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많은 환자들을 경우량이 일일이 보살필 수가 없었기 때문
에 취해진 방도였다. 따라서 그다지 심각한 병이 아닐 경우에는
외장에 상주하는 제자들의 치료를 받기도 했다.
결국 외장에 있는 제자들이 고칠 수 없는 병을 지닌 환자들만 특
별히 안내를 받아 은현장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외장의 문 앞에 일남일녀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한눈에 보아도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남자는 삼십 가량의 농부차림이었고, 여자는 그의 누이
인 듯한 시골처녀였다. 남자는 누런 얼굴에 키가 컸으며 여자는
중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몸이 허약해 보였다.
외장의 문을 지키는 사람은 사순 가량의 장한이었다. 그는 농부남
매를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왔느냐?"
뻔히 알면서도 장한은 그렇게 물었다. 그의 오만한 말투에는 농부
남매에 대한 멸시감이 담겨 있었다. 농부청년은 손을 모으면서 공
손히 말했다.
"신의 나으리의 명성을 듣고 천리를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소인
의 누이동생이 괴질에 걸려 신의 나으리를 만나 진맥을 하려고
왔......."
하지만 농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중년인은 불쾌한 듯 말했다.
"돌아가게. 장주님께서는 당분간 환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셨네."
그 말에 청년은 울상을 지었다.
"나으리... 소인의 누이는 얼마 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발 자
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농부는 애원을 하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중년인의
눈썹이 곤두섰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느냐? 당분간 환자를 받지 않는단 말이다! 나
중에 와도 너같은 놈을 치료할지 어떨지 모르거늘 왜 귀찮게 구느
냐?"
그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순간 농
부청년의 송충이 눈썹이 곤두섰다. 하지만 그는 더욱 애원하는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으리. 저희 남매는 천리를 마다 않고 찾아왔습니다. 이제 돌아
갈 수도 없으려니와 어쩌면 저의 누이는......"
"시끄럽다! 말이 말같지 않느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생떼를 쓴
단 말이냐?"
중년인의 얼굴에는 경멸의 빛이 드러났다. 그러다 문득 그는 청년
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돈도 한 푼 없을 것 같은 놈이......"
그의 말은 나직했다. 그러자 청년은 흠칫하더니 따지듯이 말했다.
"소인은 신의 나으리께서 환자를 치료할 때 절대로 은자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다음 순간 중년인의 눈썹이 곤두섰다.
"이 더러운 놈이! 어서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그 순간 청년의 음성은 더욱 커졌다.
"못 가겠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누이의 병을 고치기 전에
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죽이려면 죽이고 살리려면
나으리 마음대로 하십시오!"
"뭐, 뭣이?"
중년인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그는 청년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에 몹시 당황을 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한 가닥
낭랑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채관사. 무슨 일인가?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그러자 채관사는 만면에 당황의 빛을 드러내며 황급히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동냥꾼이 찾아와 소인이 쫓아보내려는
중입니다."
그 말에 농부청년은 크게 화가 나 소리쳤다.
"동냥이라니! 내 비록 땅을 파는 농부지만 한평생 남에게 동냥을
한 적은 없소. 함부로 사람을 모욕하지 마시오."
놀라 안색이 창백해진 채관사는 급히 주먹을 날렸다.
"이놈이!"
퍽!
청년은 정통으로 얻어맞고 나가 떨어졌다.
"어이쿠! 사람잡네! 알고 보니 은현장이란 곳은 사람을 고치는 곳
이 아니라 병신을 만드는 곳이었구나! 어이쿠, 나 죽네. 사람 살
려라!"
청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채관사는 더욱 놀랍고 분
노했다.
"이 거지 발싸개 같은 놈이 어디서 감히!"
채관사는 이번에는 발로 걷어차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한 줄기
인영이 번쩍하더니 채관사의 발을 가로막았다.
"세... 셋째 공자!"
채관사는 나타난 백의청년을 보고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채관사의 발길을 막은 백의청년은 이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오관
이 바르고 눈빛이 맑은 영준한 서생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
로 땅에 쓰러져 뒹구는 청년을 내려보며 물었다.
"형씨는 어떻게 찾아왔소이까?"
농부청년은 누런 얼굴에 한껏 비분의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나는 누이를 데리고 평소 흠모하던 신의 나으리의 의술 하나만을
믿고 불원천리하고 찾아왔소이다. 그런데 이 돼지같은 작자가 날
거지로 취급하지 않겠소? 이곳이 병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병신으로 만드는 곳인 줄 알았다면 결코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
오."
그 말에 백의청년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채관사. 어찌된 일이오?"
"공자. 그것은......."
채관사는 어쩔 줄 모르며 우물쭈물했다. 농부는 때를 만났다는 듯
악을 썼다.
"그 놈은 내게 돈이 있느냐고 물었소. 돈이 없으면 치료를 받을
자격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오. 흥! 구세인의가 병을 치료해 주고
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구료! 난 이 소
문을 퍼뜨리겠소!"
"다, 닥쳐라, 이 놈!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이냐?"
채관사는 대노하여 당장 달려들어 따귀를 치려 했다. 이때 백의청
년이 위엄있게 말했다.
"채관사. 내 그렇게 일렀거늘. 의술은 인술이라는 것을 여태껏 깨
닫지 못했단 말이오? 어찌 장주님의 청백함을 그대가 더럽히려 하
는 것이오?"
"고, 공자......"
채관사는 그만 고개를 푹 떨구었다.
본래 그는 욕심이 많고 성질이 고약한 위인이었다. 그는 구세인의
경우량의 부인과 먼 인척지간이었다. 그는 그것을 기회로 이곳에
서 관사의 일을 보면서 치료를 원하는 환자들에게 돈을 뜯어내거
나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잦았다.
은현장의 사람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그와 부인의 관
계 때문에 그를 박대할 수 없었다.
"형씨.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청년은 정중히 포권하며 말했다. 농부청년은 채관사에게 눈을 흘
기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리고 마지못한 듯이 누이의 손을 잡고
따라갔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