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천백일(一千百日)의 잠
그렇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천백 일(日), 너무도 오랫동안 잠들었던 것이다.
이제는 깨어나야만 한다! 나는 제거(除去)할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불사조(不死鳥)처럼 살아나야 한다.
너무도 오랫동안 잠을 잤다. 날개를 털고 이제는 날아올라야 한다. 나의 하늘(天)로, 마(魔)의 하늘로!
왜냐하면 나는 마화삼(魔花衫). 나는 마의 바람, 마풍(魔風)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운명(運命), 거역치 못할 나의 숙명이기에!
-무정(無情), 너는 이제 삼십삼대(三十三代) 마화삼(魔花衫)이다. 너는 천기(天機)를 타고났다. 그래서 너는 선택된 것이다. 전 마가(全魔家)의 절대자(絶對者)로!
-네 휘하에는 백만 마도인이 고개 숙일 것이다. 구대마가(九大魔家)는 너를 신(神)으로 섬길 것이고, 너는 천년마고(千年魔庫)를 열며 천하마풍(天下魔風)을 시작할 것이다.
-너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네가 불사조(不死鳥)의 운명(運命)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가면 안 돼, 떠나면 안 돼! 오오, 무화(無花) 너는 떠날 수 없다. 너는 우리의 모든 것이기에……!
봄(春)이다. 이제는 완연한 봄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밤(夜)이면 한기가 심하나, 새벽이 되면 따사로운 햇살이 어머니의 손길처럼 대지를 휘감는다.
아스라한 밤안개는 양광과 함께 사라지고, 곧 신록(新綠)을 예고할 들꽃이 강가를 뒤덮는다.
그리고 하늘빛은 더 푸르고, 물빛은 하늘빛보다 푸른 비단 천이 풀린 듯 이리저리 풀어져 대지를 감싸고 흐르고 있다.
"놀라운 체질입니다!"
"폐하(陛下), 이 사람은 거의 신(神)의 근골(筋骨)을 지니고 있습니다. 몸에 세 군데 지독한 상처을 지니고 있는데도 이 사람은 살아 있습니다!"
"적어도 닷새는 수중(水中)을 표류(漂流)한 듯한데, 이 사람은 단 한 모금의 물도 먹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구식대법(龜息大法)을 시전하며 잠수(潛水)했고, 그 찰나 의식을 잃은 듯합니다!"
"다시 무공을 익힐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 하여간 천하의원(天下醫員)들을 겁먹게 할 신골 마골(神骨魔骨)입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폐하, 이 사람은 태산과 화산과 심연(深淵)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다섯 노인, 이들은 벌써 사흘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전오신의(御前五神醫)라 불리는 사람들, 이들은 수십 년에 걸쳐 의술을 익혔고 수만 명을 치료하는 가운데 의성(醫聖), 의신(醫神)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문 때문에 자금성(紫禁城)에 와서 관복을 입게 되었다.
백초자(百草子) 농양(濃陽),
마곡신의(麻谷神醫) 화검평(華劍平),
의독쌍절(醫毒雙絶) 구야진(歐也眞),
파의편작(破衣扁雀) 제갈화(諸葛華),
귀의(鬼醫) 신무극(申無極).
다섯 사람은 지금 하나의 침상 주위에 시립해 있었다.
침상은 아주 넓었다. 침상에는 핏자국이 검게 남아 있는데, 두 개의 눈이 거기서 흐릿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절세미남자(絶世美男子), 그는 사흘 내내 그러한 시선을 허공에 던지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박박 깎여 있었다. 백초자 농양이 그의 머리에 난 상처를 살펴보기 위해 예리한 면도로 머리카락을 삭발해 버린 것이다.
근골이 잘 발달되어 있는 미청년.
나이는 십구 세(歲) 남짓, 손발에 굳은 살이 없어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는 사흘 내내 눈을 뜬 채 지냈다. 정확히 따진다면 팔 주야(晝夜) 내내!
열두 가지 치료가 베풀어졌으나 그는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살아 있는 이유가 오대신의의 탁월한 의술 때문이 아니라, 그의 천부적인 체질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가공할 잠재력(潛在力)을 한몸 안에 지니고 있는 미청년, 그는 물 속을 떠돌다가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사람의 낚시에 걸려 끌려나왔다.
영락제(永樂帝), 황제 중의 황제라 불리는 성군(聖君).
그는 주머니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안에는 재미있는 물건이 많다. 짐이 생각컨데, 이런 장난감들을 갖고 있는 사람은 강호왕(江湖王)이리라!"
장난감이라니?
강호왕(江湖王)이라니?
영락제는 무엇을 보고 장난감이라 하는 것인가?
"일국(一國)을 이루지는 못하나, 일파(一派)는 이룰 재미나는 물건들이지!"
영락제는 옥패 조각, 대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십절죽부령(十節竹符令),
혈마방(血魔幇) 천마패(天魔牌),
철목염주(鐵木念珠)…….
천하 각 파를 호령할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 물건 아래 굴복하는 사람의 수는 십오만(十五萬)을 넘는다.
십오만이라는 수는 정말 큰 수이다. 하지만 영락제에게는 아주 작은 숫자에 불과할 뿐이었다.
말 한 마디로 천만대군(千萬大軍)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
그는 서른 남짓 나이인데, 중후하면서도 온화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짐은 이런 물건들보다 저 청년에게 심히 관심을 두고 있다."
영락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침상 위, 청년의 눈빛은 그에게 하나의 희망을 주고 있었다.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은 악인일 수 없다!"
"……!"
"……!"
오대신의는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황제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황제 영락제, 그는 군주 화영이 휘하고수들을 이끌고 도망을 갔다는 비보를 듣고 슬퍼하며 강으로 낚시를 갔었다.
청년은 그 때 그에게 발견되었다.
수초(水草)덩이에 휘말린 채, 몸이 뻣뻣이 굳은 상태로…….
"그 때에도 청년은 눈을 뜨고 있었다. 대체 무슨 한(恨)이 그리도 깊어 눈을 감지도 않고 의식을 잃었는지 모를 일이다! 천하에 짐이 모를 일이 그리도 많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영락제는 배포가 큰 사람이었다.
술을 마시면 장군보다 더 많이 마시고, 글을 쓰면 신필(神筆)보다도 더 잘 쓴다.
그는 청년의 이목구비를 유심히 살피며 말을 이었다.
"짐은 저 사람을 살려 짐의 곁에 둘 작정이다. 아무도 풀지 못하는 황궁비고(皇宮秘庫) 최후실(最後室)의 비밀을 풀게 할 것이고, 오백만 황군을 이끄는 도원수(都元首)로 삼거나 팔십일만 금군대교두(禁軍大敎頭)로 삼겠다! 어쩐지… 저 청년은 짐에게 꿈을 준다."
"……!"
"다른 것은 모르되, 짐은 사람 보는 눈은 있다. 저 청년은… 당세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구하라. 이것은 천자지명(天子之命)이다!"
영락제는 말한 후 신형을 틀었다.
그는 조정에 가서 국사를 돌봐야 한다. 생각 같아서는 신의들이 청년을 구하는 것을 보고 싶으나, 그는 떠나가야만 했다.
"오늘 저녁, 저 청년과 함께 술을 들 수 있게끔 말끔히 고치라! 힘들 것이나,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대들에게는 오늘 하루 황궁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겠다."
영락제는 걸어 방을 나갔다. 새벽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대신의는 영락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허리를 폈다.
"휴우, 오늘 안에 구하라시니!"
"지난 사흘 내내 별별 방법을 다 써도 깨어나지 못했는데, 오늘 안에 깨어날 수가 있단 말인가?"
"기적이 아니라면 힘들겠는데?"
오대신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년은 매시진 다른 치료법을 받게 되었다.
제일 먼저 백초자(百草子)의 비전약방문(秘傳藥方文)인 백초청량신단(百草淸凉神丹)이 투여되었다.
범인에게는 반쪽이면 족하나, 특이한 체질을 지닌 청년에게는 무려 백 개가 동시에 투여되었다.
단약은 청수(淸水)에 녹여졌고, 궁내부(宮內府)에서 나온 여의원(女醫員) 하나가 청수를 입에 물었다가 청년에게 먹여 주었다.
그리고 여의원의 얼굴은 홍시처럼 달아오른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흐음!'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청년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흐릿한 눈빛,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백초자는 반시진을 기다리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노부로서는 더 이상 다른 방도가 없소. 그러니 이제는 마곡 노인의 비전인 침술(鍼術)이나 구경해야겠소이다!"
백초자가 혀를 내두르는 이유는 청년이 깨어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곡신의(麻谷神醫) 화검평(華劍平).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품을 뒤졌다.
"노부의 방법이 성공할지……!"
마곡신의는 백골(白骨)에 살을 붙인다는 신의였다. 그러나 그도 지금은 회의할 뿐이었다.
"문제는 뇌호혈의 상처요. 정말 묘하게도… 상처가 중첩되었소. 수년 전의 상처가 있고, 이상한 제혈법(制穴法)이 가해졌고, 도기(刀氣)가 새로 가해졌소!"
마곡신의는 품에서 금갑을 꺼냈다.
금갑 안에는 천하명장(天下名匠) 노반(魯般)이 만들었다는 우모세혈침(牛毛細穴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은 휘어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고, 굵기가 머리카락의 반에 달했다.
놀라운 것은 그 안에 동혈이 뚫려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머리카락같이 가는 침에 구멍이 있고 그 구멍을 통해 썩은 피가 빨려 나온다는 것이다.
침은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따라 꽂혔다.
보통 의원들은 감히 침을 가할 수 없는 대혈(大穴)과 사혈(死穴)과 요혈(要穴)에 침이 놓여졌다.
침은 끝만 겨우 보일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한데, 일각(刻)도 되지 않아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어어, 침이 절로 뽑히다니……?"
"의원 노릇 구십 년에 이런 일은 처음 본다."
"아아, 마곡신침술이 절로 파괴되다니!"
의원들이 넋을 잃은 이유는 혈도에 박힌 침이 스스로 뽑혀지기 때문이었다.
두 눈, 청년의 두 눈은 여전히 허공을 보고 있다.
-너무도 긴 잠이었다. 나는 깨어나야만 한다. 불사조의 날개를 털며 악마의 하늘로 훨훨 날아올라야만 한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한다! 아무도…….
그의 뇌리에는 지금 말이 떠오르고 있었다.
반은 죽고 반은 산 상태, 그리고 이상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정말 기이한 상태.
천 년을 통해 한 번도 나타나기 힘든 사태가 청년에게 나타나고 있었다.
마곡신의가 살패한 후, 의독쌍절(醫毒雙絶)이라 불리는 구야진(歐也眞)이 치료를 맡게 되었다.
이미 대낮이었다. 그러나 의독쌍절의 얼굴은 밤중의 박쥐마냥 초췌하기만 했다. 그는 천하의 한 사람에게만 의가(醫家)의 상석(上席)을 양보했었다.
마의화타(麻衣華陀) 석중옥(石中玉).
아직도 천하의원들의 뇌리에 군림하고 있는 일대신의(一代神醫).
그가 아닌 누구도 의독쌍절보다 더한 의술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런데 의독쌍절이 지금 겁을 먹고 있었다.
"무섭다, 이런 체질을 본다는 것은. 아아, 끊어졌던 경락(經絡)이 꿈틀대며 저절로 이어지고 있다! 속도는 느리나 저절로 치유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두면 백치(白痴)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물론, 죽지도 않을 것이다."
"불사신의 체질이란 말이오, 구야노인?"
"아아, 짐작대로군?"
"정말 이상한 사람이오."
"구야노인밖에 없소, 구할 사람은!"
"노부 파의편작(破衣扁雀)이나 저기 계신 귀의(鬼醫)는 이미 손발 다 들었소. 그러니 구야노인 한 분만이 계시다 할 수 있소!"
노신들은 잠도 잊고 있었다.
의원들에게 있어 인간이란 하나의 돌에 불과하다. 의원들은 그 돌을 깎고 다듬는 장인(匠人)이고, 석수(石手)이다.
돌을 다루던 석수들, 이들이 처음으로 금강옥석(金剛玉石)을 볼 때에도 지금 신의들이 짓고 있는 표정을 지을 것이다.
"방법은 오직 하나요. 충격요법이라는 것으로… 이독제독(以毒制毒)이오!"
의독쌍절 구야진은 무려 두 시진 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
충격요법(衝擊療法), 이독제독(以毒制毒).
의가의 상리를 깨는 특별난 수법이다.
독으로 독을 제거하고, 죽음을 줄 수 있는 충격으로 잠재력을 일깨운다.
"노부는… 이 사람을 믿소. 이 사람이라면 능히 만독(萬毒)을 녹일 수 있소. 그래서 그 방법을 생각한 것이오!"
의독쌍절의 입술은 검게 탔다. 그는 충격요법을 결정짓기 위해 심한 번뇌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리고 결국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사람이 죽는다면… 노부는 자결하겠소!"
그는 반신반의하는 투로 말하며 탁자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흰 종이 한 장이 있고, 탁자 가에는 붓을 집어 주는 역할을 하는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소녀는 구야진의 제자였다. 그녀는 구야진이 자결한다고 소리에 울먹이며 붓을 집어 주었다.
"다시는 이런 번뇌가 없겠지. 사실, 의원이란 힘든 직업이다!"
구야진은 제자들을 향해 미소지으며 붓을 받아 들었다.
잠시 후, 그는 난잡한 필체로 글을 적기 시작했다.
<혈천사오공(血天死蜈蚣) 내단(內丹).
이천 년 이상 묵어 독기가 완전히 성숙된 것이어야 함.
극오풍초(剋烏風草).
성약 오풍초를 태우는 절독초로, 황궁비고의 약실에 한 냥(一兩) 남아 있음.
옮길 때 조심해야 함. 병이 깨어진다면 십 장 안에 있는 사람이 일순, 모두 녹아 죽을 테니까!
고루혈지균(古陋血芝菌),
만사흑혈산(萬邪黑血散)…….>
의독쌍절은 이름을 적어 나갔다.
잠시 후, 백지를 가득 채우며 약방문이 완성되었다.
소녀는 약방문을 들고 걸어나갔고, 구야진은 눈길을 청년에게 주고 있었다.
"이제… 운명의 손만 남았을 뿐이다!"
그는 중얼대며 청년의 입술을 바라봤다.
"……!"
청년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나의 경련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했다.
잠꼬대하듯,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말을?'
구야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귀의(鬼醫) 신무극(申無極)을 봤다.
"신노인은 독순술(讀循術)의 달인이신데……!"
그가 운을 떼자, 귀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노부는 입술의 떨림으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소!"
"그럼… 청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진작 알아봤겠군요?"
"물론이외다. 하지만 그 말은 악몽에 의한 잠꼬대인지라 말하지 않았소이다!"
"무슨 말이었소?"
의독쌍절 구야진은 바짝 긴장을 한다.
"헛헛… 들으나마나 한 기이한 소리요."
귀의는 피식 웃고 만다.
"무엇이기에?"
"그 말은… 나를 죽여 주시오, 라는 것이었소!"
-나를 죽여 주시오!
눈을 뜬 채 의식을 잃은 청년은 꿈 속에서 말하는 듯 계속 그렇게 지껄이고 있었다.
나를 죽여 달라니?
그는 지금 어떠한 잠을 자고 있기에, 계속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다섯 명의 어의(御醫)들.
이들은 지금 전율과 경외감을 맛보고 있었다.
-제발 나의 잠을 깨우지 마시오, 하늘(天)이여! 나를 이대로 잠들게 하시오. 이 차가운 눈(雪) 위에서! 다시는 내가 깨어나지 못하게 하시오, 하늘이여!
자신의 죽음을 기원하고 있는 자, 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신(神)이 아니면 악마(惡魔)요."
백초자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아, 모르긴 해도 범인은 아니오!"
"정말 모를 사람이오!"
신의들이 말할 때, 의독쌍절만은 달리 말했다.
"이 사람은 살고 싶어하오. 보시오. 이 사람은… 지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지를 않소? 이 사람은… 인간 중의 인간이오. 노부는 그렇게 생각하오!"
과연, 청년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는 살고 싶어하는 것이다.
졐苛逾떴?十大毒物).
황궁비고 안에서 잠자고 있던 고금십대독물이 한 곳에 모였다. 의독쌍절이 적어 준 약방문에 따라 십대독이 한 곳에 모인 것이다.
의독쌍절은 특수한 장갑을 낀 후에야 독물을 만질 수 있었다.
녹피(鹿皮)를 영약에 담가 피독성을 띠게 한 피독투(避毒套).
그것은 매미 날개처럼 얇고 빛은 황금색이었다. 그것을 끼면 독이 피부로 침입하지 못한다.
의독쌍절은 피독투를 낀 후에야 독물을 만질 수 있었다.
"상리를 초월한 방법을 쓴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오. 이 일은 십 중 구(十中九) 실패할 것이오. 노부는… 그 마지막 하나의 가능성을 바라고 있는 것이오!"
의독쌍절의 표정은 정말 진지했다. 그는 심혈의 대작을 깎는 장인과 같은 표정이었다.
청년, 그는 자신의 육체가 외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지 모르는 상태였다.
허무(虛無)하고 공허한 두 눈의 느낌은 풀잎 위에 매달린 이슬과 같다.
곧 빛이 사라질 듯 애처롭기까지 한 눈빛.
하지만 눈빛 이외의 모든 부분은 절대적이었다.
검미봉목(劍眉鳳目), 한 일자로 꽉 다물려진 입술, 근육이 잘 발달된 앞가슴.
아아, 그 위 한 송이 꽃이 피어 있지 않는가?
화려한 황금빛의 꽃 한송이, 그것은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꿈틀거렸다.
그 모습은 살아 있는 꽃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마화(魔花)!
그건 천하에서 가장 정교한 문신이었다.
"우선 독을 하나로 뭉쳐야 하오. 독물은 하나의 그릇에 담긴 채 잘 찧어져서 독왕액(毒王液)이 될 것이오. 일단 여러분은 자리를 피하시오. 자칫 독무를 마시다가는 낭패를 당할 테니까!"
"헛헛… 독무를 마셔 죽는다 하더라도 나갈 수 없소. 왜냐하면, 노부는 의원이기에!"
"이 장관을 어찌 놓치겠소? 걱정하지 말고 하던 일을 계속하시오!"
의원들은 범인이 아니었다. 이들은 목숨보다는 목숨의 이치를 더 좋아한다.
의독쌍절은 담담한 미소로 그들의 말에 응답하며, 독물을 사기 그릇에 넣고 조심스럽게 찧기 시작했다.
독물은 퍼퍽 소리 가운데 물로 화한다.
시꺼멓고 비린내 나는 용액, 의독쌍절은 독왕액을 찧으며 백발로 화해 갔다.
반백이던 머리카락이 독왕액의 독기로 인해 백발로 화해 버리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손톱은 샛노랗게 물들었다.
그리고 서탁 위에 있던 문주란(文珠蘭)은 찰나적으로 누렇게 말라 죽었다.
독왕액은 반시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의독쌍절 구야진은 비지땀으로 목욕을 한다. 평생을 통해 이처럼 초조하기도 처음이었다.
황제의 무릎에 박힌 화살촉을 꺼내기 위해 황제의 다리에 칼을 댔을 때에도 이처럼 초조해하지는 않았었다.
'하늘이여, 이 청년을 도우소서!'
그는 평생 처음으로 천지신명을 찾았다.
'노부로서는 약을 쓰기만 할 뿐이고, 살리는 일은 하늘이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성공할 경우, 공치사 받을 사람은 하늘이다.'
그는 조금 멋쩍게 웃고 있었다.
"이제… 먹일 때요! 누구든 저 청년을 비스듬히 일으켜 주시오!"
"노부가 하겠소!"
백초자가 재빨리 침상 가로 다가갔다.
반시(半屍)가 된 청년은 비스듬히 상체를 쳐들게 되었다.
독왕액이라 명명된 심독의 혼합 액체는 사기 그릇 가장자리를 태우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아, 그것을 인간에게 먹이다니……!
"자, 어서 입을……!"
"힘있게 벌리시오. 입을 너무 세게 다물고 있는지라 벌리기가 힘이 드오!"
"에잇!"
오의가 총동원되어서야 청년의 입이 벌어졌다.
그리고 검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오르던 액체는 한 방울 남김없이 청년의 입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으으, 으으… 유정(有情)! 네놈이 감히 나를?"
일순, 청년의 눈알에서 혈광이 쏟아져 나왔다.
"유, 유정… 감히 나를? 네가… 네가 나를?"
청년의 살색은 순간적으로 시꺼매졌다.
그는 외치는 가운데 독액을 마셨고, 갑자기 다친 호랑이의 숨소리를 내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흑……!"
"기다립시다!"
"십 중 구는 죽고… 십 중 일(十中一)은 사오. 산다면 함께 살 것이고, 죽는다면 함께 죽을 것이오!"
"주상은 이 청년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소! 모르긴 해도 이 청년에게 어떤 대업(大業)을 맡기실 듯하오!"
"그러나 이 골칫덩어리가 그것을 행할지는… 왠지 의심스럽소이다."
눈(雪)이 쏟아진다.
그는 비틀거리며 가고 있었다. 펄펄 날리는 함박눈 속으로… 만취한 듯 휘청거리며 그는 끝없이 가고 있었다.
뒷머리에서 피를 토했고, 오공은 검은 피로 물들어 있고, 전신에서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나는……!"
그는 허공에 대고 외치고 있었다.
아아, 선혈이 너무 많이 뿜어진 탓에 이제는 안력(眼力)조차 희미했다.
"가, 가야만 한다. 삼십일대 혈화삼이 세운 천년마고로! 거기 가면… 나는 불사마(不死魔)가 된다!"
휘청휘청…….
그는 비틀거리며 설중(雪中)을 헤매인다.
이제는 눈이 따뜻하기까지 하다.
어깨 위에도, 머리 위에도… 아아, 눈은 이제 그의 배꼽까지 차 올랐다.
"마, 마화삼(魔花衫)! 나는 마화삼이야! 죽을 수는 없다. 절대로!"
그는 중얼거리며 의식을 잃었다.
어디일까? 보이는 것은 모두 화려하기만 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주렴이었다.
수정(水晶), 마노(瑪瑙), 비취(翡翠), 호박(瑚珀), 홍옥(紅玉)… 온갖 보석을 정교하게 꿰어 만든 주렴이 대전(大殿)의 한쪽 벽을 덮고 있었고, 바닥에는 황금색 주단이 깔려 있다.
그는 의자에 앉혀진 채 가고 있었다.
의자를 밀고 있는 사람은 아주 초췌한 백발노인인데, 짓고 있는 표정만은 득의만만한 것이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으음, 너무도 오래 쓰러졌었다.'
청년, 그는 털이불에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얼굴의 반은 푸르고 반은 자색이었다. 그는 방금 전에 피를 세 사발이나 토하며 깨어났고, 직후 새옷을 입고 바퀴 달린 의자에 앉혀졌다.
-아직은 말을 할 수 없을 걸세, 소협(少俠).
-구태여 생각하려 하지 말게. 자네는 뇌호혈에 큰 상처를 입었고, 그것이 다 낫지 않은 상태라네!
-자네를 구하신 분이 자네를 부르시네!
-천자(天子)시네, 그분은!
청년은 그런 말을 오던 도중 들을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장소, 이 곳은 천 명은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러나 이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단책상 뒤쪽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는 천 권의 서적이 꽂힌 자단목 서가가 있고, 서가 가운데에는 고검(古劍) 두 자루가 십자로 교차되어 걸려 있었다.
천추황검(天樞皇劍), 비천신룡검(飛天神龍劍).
두 자루 모두 상고시대의 신검이었다.
방 안의 모든 것은 화려하고 고귀했다.
하지만 청년이 다가서는 것을 보고 만족해하고 있는 금포인(金袍人)의 기도만큼 귀한 것은 없었다.
"살아났군. 좋았어!"
청년을 보고 미소짓는 사람, 그는 영락제였다.
의자는 그에게서 오 장 떨어진 곳에 와서 멈춰졌다.
영락제, 그는 명조의 제삼대 황제였다. 그리고 훗날 성조(成祖)로 불린 인물이다.
그는 황세자의 지위에서 천자(天子)가 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제위를 찬탈한 사람이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정변을 일으켜 대명조의 삼세(三世) 황제가 된 인물.
그는 남경(南京:금륭)에 있던 국도를 북경으로 옮긴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하나, 그는 본시 북경 일대를 다스리는 연왕(燕王)으로 그의 세력기반은 북경 일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 이름은 주태(朱泰). 그는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章)의 이십사자(二十四子) 가운데 넷째 아들이었다.
그는 제이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의 황족 탄압정책에 반발해서 난을 일으켰었다.
정난지변(靖難之變)!
그는 건문제를 패배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앉았다.
그는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축출한 패황(覇皇)인데, 매우 온화한 면모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그는 동창(東廠)이라는 조직을 지니고 있었다. 그 조직은 바로 어전의 대신들을 감시하는 조직이었다.
동창의 인물들이야말로 바로 금삼시위(金衫待衛)들이었다.
육부(六部)와 도찰원(都察院),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포정사사(布政使司),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동창의 금삼시위들은 이러한 집단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영락제는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
그는 거인(巨人)이었는데, 아직도 위세를 잃지 않은 북원(北元)을 꾸준히 공략했고 훗날 정화(鄭和)라고 불리는 인물을 등용시켜 머나먼 안남(安南)까지 정복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귀주(貴州)를 자신의 영토로 삼고, 만주를 황권의 지배 하에 넣고, 온 천하를 장악하려는 무서운 정복자!
그는 뜻밖에도 젊었다.
의독쌍절은 그 지점에 이르러 의자 등에 달려 있던 손잡이를 놓고,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했다.
"천신만고를 겪었으나, 폐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청년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격동된 어조로 말하자, 영락제가 자상스럽다는 듯 웃으며 치하했다.
"안색이 나쁘구려?"
"기쁨이 더 큽니다. 피로보다는!"
"헛헛… 수고했소."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의독쌍절은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헛헛… 신의, 그대의 소원이 무엇인가? 짐의 수급을 달라는 소원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겠네!"
"신(臣)에게 소원이 있다면 오직 하나, 이 청년 곁에 머물며 간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헛헛… 짐의 생각과 같도다. 그리고 신의의 고향집에는 이미 마차 한 대가 갔다. 황금을 가득 실은!"
"망… 망극할 따름입니다!"
"훗훗… 자금성을 떠난 후 은거할 장소도 한 곳 마련해 두었지. 갈석산(葛石山) 일대의 초평동부(草平洞府)인데, 기온이 좋아 약초도 재배하기 좋다더군!"
영락제는 말하다가 턱끝을 끄덕였다. 그 뜻은 이제 물러가라는 뜻이었다.
의독쌍절은 다시 절한 다음, 조심스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청년은 입가를 야릇하게 찡그리고 있었다.
"으음, 천… 천자(天子)!"
그는 아직도 비몽사몽간에 있었다. 외상(外傷)과 내상(內傷)이 너무도 컸고, 충격요법(衝擊療法)으로 인한 후유증도 지극히 컸다.
그는 오감을 완전히 찾지 못했다.
영락제는 뒷짐을 진 채 청년 앞에 이르렀다.
"짐은 광오한 사람이야!"
"……!"
"게다가 천자인지라 타인에게 속마음을 함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네!"
"으음……!"
"자네가 짐과 비슷하네그려. 짐은 자네를 낚시로 건져 올리는 순간, 마치 짐이 물에서 끌려나온 듯한 착각을 느꼈다네!"
"물?"
청년이 반문했다.
"자네는 강속을 떠돌고 있었다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못… 못하오!"
더듬거리는 말이나, 알아듣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이제야 조금 살아났군.'
영락제의 미소는 더욱 온화해졌다.
"짐은 인재를 사랑하네."
"……!"
"짐이 보기에 자네는 천만 명 중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사람이네. 그래서 자네를 성의를 다해 구하라, 어의들에게 명한 것이네!"
"으음!"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자네에게 긴히 물을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
영락제는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그가 벽을 향해 슬쩍 눈짓을 할 때, 열려 있던 문에서부터 금삼시위 하나가 나는 듯 달려나왔다.
"시위대장 황룡무존(黃龍武尊) 대령이오!"
거구의 홍안백발 노인이 영락제 앞에 넙죽 절을 했다. 체구가 어찌나 큰지 앉은 키가 영락제의 선 키와 필적할 정도였다.
"시위대장, 기다리느라고 수고했네."
"과찬이십니다, 폐하!"
"자네를 대기케 한 이유는 한 가지 물을 것이 있어서이네."
"무엇인지요?"
"저 청년을 잘 보게!"
"……!"
황룡무존은 조심스럽게 청년을 바라봤다.
'정말 잘생겼다.'
황룡무존은 적이 감탄하고 말았다.
그림자가 되어 황제를 보필하는 시위대장, 그는 자신의 역할 탓에 많은 사람을 보게 된다.
어지간한 사람은 그를 놀라게 할 수 없는데, 청년은 미모만으로도 그를 놀라게 했다.
그 때였다.
"자네는 강호인사(江湖人士)를 잘 안다던데?"
"예, 폐하!"
"그 청년을 아는가?"
"글, 글쎄요."
"잘 보게. 누구라던가, 누구와 닮았다던가… 할 말을 생각해 보게!"
황룡무존은 그제서야 천자의 심중을 알 수 있었다.
천자는 그를 통해 청년의 정체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었다.
황룡무존은 수십 번 살펴봤다. 결국,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신, 죄송하오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흠, 모른다는 말인가?"
"예,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좋아, 그럼 돌아가게!"
"예!"
황룡무존은 몸을 날려 즉시 사라졌다.
천자의 명은 바로 하늘의 명이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아야 한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황제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자네는 특이한 옷을 입고 있었네. 그 옷은 바로 화영군주라는 말괄량이가 병정놀이를 하기 위해 만든 화영친위대 복장이었네!"
"아……!"
"그 옷은 찢어지고 물에 불어 버렸네."
"……!"
"자네는 친위대 사람인가? 말해 보게!"
"아니오, 나는!"
청년은 오랜만에 또렷하게 대답을 했다.
지금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잠시일지 모르나, 그는 불사조처럼 정신력을 되찾고 있었다.
"나는 갈 길이 급한 사람이오. 그러니, 나를 보내 주시오. 아니라면 내 힘으로 떠나겠소, 나으리!"
그는 천자를 폐하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의 오만함은 영락제를 노하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즐겁게 했다.
"고집쟁이군. 훗훗, 고집쟁이와 아야기한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 그렇지만 짐에게는 다 말해도 되네. 짐은 사람이 아니라, 천자니까!"
"글쎄, 할 말이 별로 없소.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소. 나는 정말 오랫동안 잠을 잤다가 깨어났소!"
"흠, 너는 누구냐? 그것은 말해 줄 수 있겠지?"
"나는 마무정(魔無情)이라 불렸던 것 같소!"
마무정! 그것은 청년의 이름이었다.
마무정(魔無情)!
왜 그는 백무엽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눈 속에서 설향에게 발견되어 백무엽이라 이름이 붙여졌던 백무엽.
그는 죽고, 그의 과거가 살아난 것인가?
"그 이상은 아니 되오! 왜냐하면… 나도 잘 모르는 일이기에. 훗훗……!"
"비웃음 하나는 마음에 든다. 훗훗, 짐은 자네를 늘 곁에 두고 자네에게 시위대를 통솔하게 할 작정이다!"
"나더러 개(犬)가 되란 말이오?"
"개라니?"
"황실의 개! 훗훗……!"
"으음!"
영락제는 처음으로 노기를 느꼈다.
'마성(魔性)이 강하다. 눈빛은 맑고 아름다운 동시에, 처절하고 사악하다. 정말 모를 자로다.'
영락제는 아까운 눈으로 마무정을 유심히 바라봤다.
마무정도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입가에 아주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날개를 잘린 용(龍), 여의주(如意珠)를 잃은 신룡!
그를 표현할 말은 그 말밖에 없을 것이다.
무공을 찾을 길이 거의 사라졌고, 일신의 건강을 회복하려 해도 백 일 정도는 족히 걸린다.
반 폐인, 그의 입에서 아름다운 말이 흘러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영락제는 끈기 있게 그를 바라봤다.
"사람은 잡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지!:"
"……!"
"하나는 영원히 잡는 것이요, 하나는 일시적으로 잡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잡기 위해서는 황금을 주고, 영원히 잡기 위해서는 풀어 준다. 짐은 그것을 철학으로 삼고 있다."
"무슨 뜻이오?"
"글쎄, 마음대로 하라고 한다면 쉬운 말일까?"
"마음대로?"
"자네는 이미 짐의 사람이야. 그러니 약간의 자유를 줘도 무방하지 않을까?"
영락제, 그는 산(山)과 같은 사람이었다. 당세에서 그만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단 하나뿐이리라.
바로 마화삼(魔花衫). 그라면 천자만한 신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자네를 믿네. 특히 그 두 눈을…그 눈은 화영군주를 닮았다네!"
영락제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그는 제왕(帝王)의 자리에 앉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다.
"짐은 천기를 믿네. 그리고 천심(天心)은 바로 민심(民心)이라고 믿고 있네. 과거, 짐은 그것을 믿고 제위를 얻은 바 있다네. 훗훗, 바란다면 짐은 자네에게 약간의 자유를 주겠네!"
"자유?"
"훗훗… 휴가라고 해도 좋겠지. 왜냐하면 자네는 훗날 짐의 사람이 될 테니까!"
"흠!"
"시종들을 딸려 주고 명마(名馬)를 하사하겠네. 어디든 자유롭게 갔다가 오게. 훗훗……!"
"글쎄, 천자께서 소생을 가둘 수 있으리라 믿지 않소!"
"훗훗… 대장부라면 적어도 그런 배짱은 있어야지! 물론, 지금은 아니 되네. 훗훗……!"
영락제의 말이 거기에 이를 때였다.
"크으으……!"
돌연 그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의 오공(五孔)에서는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처절한지 핏빛 눈망울을 허공에 던지다가는 의식을 잃었다.
영락제는 그가 나직한 신음 소리를 내며 혼절하자, 고개를 가로젓는다.
"용(龍)은 용이되, 어떤 용인지……?"
영락제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짐이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그렇다! 나는……
그는 자금성 북쪽의 비궁(秘宮)에 거소를 잡게 되었다.
자부밀원(紫府密院).
영락제가 달포마다 가서 주흥을 즐기곤 하는 장소였다.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정원을 뒤덮고 있고, 밀원 일대에는 적송림이 가득하다.
자부밀원에는 금삼시위(金衫侍衛)들이 연공하는 장소도 있었다. 또한 오대어의(五大御醫)도 당분간 거처를 자부밀원으로 옮기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다.
황궁의 대신도 존재 여부를 모르는 자부밀원, 그 안에는 가공할 집단이 하나 형성되어 가고 있었다.
척천검대(拓天劍隊)!
일명, 동창(東廠)의 밀위대(密衛隊)!
그들은 십여 년 전부터 무공을 배우며 때를 기다리고 있다.
어명에 따라 조직된 척천검대, 그는 그 곳 소속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를 태운 팔인교(八人轎)가 자부밀원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시위들은 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넋을 잃어야만 한다.
팔인교 바닥에 구멍 하나가 뚫렸고, 그는 핏자국을 조금 남겨 놓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최후의 한숨 진기를 발휘해, 시위들의 눈을 속이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어디로…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영락제는 뜨락을 거닐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은 꽤나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는데, 영락제는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헛헛… 가긴 어디를 가겠는가? 떠났다고 한들, 여전히 짐의 대륙(大陸) 위에 있지 않겠는가?"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하늘(天), 무한한 광활함이여! 거기에는 푸르름과 원대함이 있다.
"짐은 늘 하늘을 닮으려 했었다!"
그는 뒷짐을 지고 거닌다.
"하늘은 넓고 위대했기에!"
구슬을 꿰어 만든 신발이 풀잎을 지려 밟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야 하늘의 위대함은 넓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어인 말씀이신지요?"
"하늘의 위대함은 허허(虛虛)로움에 있지 않을까? 헛헛, 짐은 배짱 좋게 짐의 손아귀를 빠져 나간 그 맹랑한 청년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말도 되네!"
"부러워하신다고요? 폐하께서 그를?"
"프핫핫… 그는 야수(野獸)이지, 가축은 아니었다. 프하하핫! 지금쯤은 짐의 얼굴조차 잊어버렸을 거야!"
영락제는 호쾌히 웃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떠오르는 한 줄기 허탈한 기색마저 감춰지지는 않았다.
'천하대업(天下大業)을 함께 논할 초기재(超奇才)였는데, 짐이 흉금을 열기도 전 떠나갔군. 그 몸으로는 견디기 힘들 텐데… 대체 무슨 한(恨)이 있기에 그러할까?'
야수(野獸)! 그는 한 마리 광야(曠野)의 야수였다.
눈은 여전했다.
중원의 최북방이라는 기련산. 이천 리에 걸쳐 드러누워 있는 한 마리 거룡(巨龍)의 산은 쏟아지는 폭설(暴雪)에 가두워졌고, 하늘도 땅도 모두 흰빛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눈에 뒤덮였다. 바다라도 묻어 버릴 기세로 퍼부어지는 대설(大雪).
휘이이- 잉-!
산을 에이는 북서풍과 골수 속으로 파고드는 냉기(冷氣)가 삼라만상을 얼어붙게 할 때였다.
"가야만 한다! 마가(魔家)의 한(恨)을 풀어야만 한다!"
바람 소리일까? 눈 속에서 처절한 흐느낌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대자연(大自然)을 거역하며 기이한 눈빛을 흘리며 가고 있다.
꿈에 취한 듯, 보는 듯 보지 않는 듯…….
"나는 가야만 한다! 기다려라! 내가 간다, 기다려라!"
그는 쉬지 않고 가고 있다.
강풍에 휘청이고, 빙벽에서 미끄러지고… 그는 쉬지 않고 걸음을 내딛었다. 무엇인가에 끌리듯이, 그는 바람과 눈을 뚫고 보름째 가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는 곳이 미래인지 현재인지도 모른 채…….
하여간, 그는 쉬지 않고 헤매이고 있었다.
하늘(天), 구름(雲)!
동천(東天)은 아득하기만 했다.
깎아지른 천마애(天摩崖) 위, 그는 무려 한 시진 가량이나 천마애 위에 서서 구름이 바람에 흐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십육 세 남짓, 깎아지른 벼랑의 기개를 닮은 헌헌(軒軒)한 기도를 지닌 미소년.
그는 지극히 차갑고 강한 동시에, 말할 수 없이 허무한 기운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하늘이여! 그대는 정녕 존재하는 것이오?"
그의 주사빛 나는 붉은 입술이 가볍게 벌어지더니, 냉소하는 듯 차디찬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훗훗… 야망(野望)이라는 이름 아래 그대를 물들인다 해도, 그대는 이제 나를 막지 못할 것이외다! 나, 마무정(魔無情)을!"
그는 고졸한 웃음을 지었다.
마무정(魔無情).
그는 천마애 일대에서 생애의 전부를 보낸 소년이었다.
그에게 습관이 있다면 오직 하나, 시간이 있을 때마다 천마애 위에 올라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돌아가자, 세가(世家)로!"
그는 아주 천천히 신형을 틀었다.
'내일이면 운명(運命)의 그 날이다. 아니,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고 할 수 있겠지.'
운명! 그의 운명은 대체 어떠한 것인가?
천마애는 눈에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설상(雪上)에는 소년 마무정의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아아, 그는 답설무흔(踏雪無痕)으로 걸어다녔단 말인가?
보라! 소년 마무정이 하나의 흑선(黑線)을 끌며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그는 탄지지간마다 십오 장씩을 지나쳐 갔다.
마치 바람(風)처럼…….
뜨거운 차 한 잔이 차게 식을 시간이 지났을 때, 마무정은 천마애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마황단(魔皇壇) 근처에 이르게 되었다.
일대에는 살기(殺氣)가 팽배하고 있었다.
눈 속, 나무 뒤, 바위 속… 숨도 쉬지 않고 맥도 멈춘 채 포검(抱劍)하고 있는 일단의 무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는 일백팔(一百八).
천시지청술(天視地聽術)을 쓰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잠신(潛身)해 있는 사람들!
그들은 마무정이 나타나는 찰나, 일제히 발검(發劍)을 했다.
차앙- 창-!
현란히 일어나는 검기!
"제일소가주(第一少家主)님, 이제 오십니까?"
"헛헛… 기도가 훨씬 헌헌해지셨습니다!"
"속하들은 제일소가주님이 제이소가주 유정(有情) 어르신네를 제치고 소총사(少總師) 자리에 오르리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허공으로 뻗어오르는 백팔 줄기의 검홍(劍虹), 그것이 마무정의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백팔 마왕(百八魔王), 늘 수고가 많네!"
차가움은 그의 후천적(後天的) 기질이고, 아름다움은 그의 선천적(先天的)인 기질이었다.
"내가 마화삼이 되면 제일 먼저 그대들이 하루 십이 시진 내내 숨어 세가를 호법서야 한다는 금제부터 풀겠네. 핫핫……!"
"역시 자상하시군요!"
"푸하하… 소가주님께 충성합니다!"
숨어 있던 백팔 명은 그렇게 외쳤고, 마무정은 일순 검은 화살이 되어 북천(北天)으로 신형을 폭사시켰다.
"수고들 하게!"
그는 목소리를 남기며 모습을 감추었다.
천마애에서 마황단까지, 일대는 천하에서 가장 거대한 기문진에 뒤덮여 있었다.
외인들은 절대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아아, 바로 신(神)의 영역!
이 곳은 천 년(年)을 두고 무림의 밤(武林夜)을 통치해 왔다.
보라! 마황단 위에 표표히 솟아오른 하나의 혈성(血城)을.
깎아지른 단애 위에 우뚝 솟은 피의 성.
당장 허물어질 듯한 피의 성에는 거대무비한 횡액 하나가 걸려 있었다.
<절대마가(絶代魔家)!
전능마공(全能魔功)으로 천 년을 지배하고, 절대마혼(絶代魔魂)으로 강호에 군림(君臨)하며, 무적마공(無敵魔功)으로 영세를 장악하리라!>
금빛 횡액에는 피같이 붉은 글이 적혀 있었다.
오오, 전설적인 성역 절대마가!
이 곳은 바로 십대마가(十大魔家) 중 제일마가(第一魔家)인 절대마가란 말인가?
고대로부터 무림계의 마도를 장악해 온 무적의 마의 가문!
마무정은 이 곳 사람이었던가?
절대마가(絶代魔家),
철혈세가(鐵血世家),
호접세가(蝴蝶世家),
뇌정세가(雷霆世家),
월영세가(月影世家),
무장세가(武藏世家),
화화세가(花花世家),
천외마가(天外魔家),
마병세가(魔兵世家),
천리세가(千里世家).
천 년 전 십대가문이 하나로 뭉쳤다. 이들은 피와 죽음을 맹세하고 하나의 집단이 되었다. 그리고 천 년이 지났다.
강호 최고의 비밀이라는 십대마가!
마무정은 그 곳에서조차 선택받은 절세기재였다.
폐부를 쥐어짜는 마기(魔氣), 숨을 막히게 하는 요기(笑氣), 육중하게 하늘을 누르는 음기(陰氣)!
아아, 악마(惡魔)의 대지(大地)여!
절대마가의 하늘은 검게 찌푸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핏빛으로 되어 있는 대전(大殿) 안.
이 곳에는 서른네 명이 머물러 있었는데, 그 중 삼십일 인(人)은 산 사람이 아니었다.
아아, 숨을 막히게 하는 사기(死氣).
사옥혈강(死玉血鋼)이라는 요옥(妖玉)으로 깎아 만든 서른한 개의 조각이 있다.
살아 있는 듯 서 있는 삼십일 인!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
어이해 이들은 죽어서도 신(神)이 되어 숭앙받고 있는가?
지금, 핏빛 꽃이 흔들린다. 꽤 너른 소매에는 핏빛 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초대 혈화삼이 되신 전능마존(全能魔尊)은 무림계의 백도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시고 이십 년 간 쫓기셨다!"
생명의 기운이 혈무(血霧)로 뒤덮인 괴인 하나, 그는 혈전을 거닐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무정(魔無情)이 있고, 또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마무정에 비해 체구가 장대했고, 보다 과묵해 보였다.
나이는 십오 세 남짓, 강철 같은 근골에서 피에 굶주린 야수의 감성을 흘리는 사기(邪氣)에 가득 찬 소년.
마유정(魔有情).
그 역시 선택받은 소년이었다.
무정(無情)과 유정(有情), 둘은 조금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마무정은 냉소적이고 허무한 기질을, 마유정은 끈질기고 강한 집념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 가득 사기에 충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분은 만천하에 복수하기 위해 가문을 이룩하셨고, 그로부터 마가의 전설은 시작되었다."
"……!"
"……!"
"이어 이대 혈화삼이신 비사무황(飛獅武皇)이 강호계의 다른 마가와 연합하기 시작하셨고, 칠대 혈화삼이신 만사존자(萬邪尊者) 대에 이르러 십대마가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
"으음!"
"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본가가 수좌에 오르지는 못했었다. 본가가 통치자가 된 데에는 삼십일대 혈화삼이신 그분의 공이 크다! 그분 대에 이르러서야 우리 절대마가는 전 마가의 통치자(統治者)가 될 수 있었다!"
아아, 혈화삼!
저주(咀呪)와 겁(劫)의 대명사인 혈화삼.
그 이름은 하나의 전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화였단 말인가?
"너희 둘 중 하나가 그분의 뒤를 이을 것이다. 선택된 자는 마화삼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다!"
"으음!"
"아아, 마화삼!"
"그는 천년마고와 옥화삼, 백만 휘하를 유산으로 물려받을 것이며, 내가 이루지 못한 무림일통(武林一統)의 대업(大業)을 이룩하게 되리라!"
무림을 하나로 일통하다니……?
다른 사람이 말한다면 하나의 광언에 불과할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혈화삼의 입에서 나온다면 광언만은 아니다.
"전능한 권력으로 천하를 통치할 자, 그는 너희 둘 중 하나일 것이다."
"……!"
마무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고, 마유정은 손바닥에 땀을 쥐며 마무정을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으으, 으으……!"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가 되었다. 내일 새벽, 이 곳에서!"
* * *
서재(書齋).
이 곳은 폐부를 쥐어짜는 마기(魔氣)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다.
마무정은 이 안에서 잔뼈가 굵었다.
마닥에서 천장까지를 가득 메운 십만 권 마경(魔經).
마무정은 십 년에 걸쳐 그 모든 것을 암기(暗記)했다.
그가 절대마가의 소가주로 선택된 이유는 천부적인 암기력(暗記力)과 오성(五性)이 있기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운명이 결정지어진다!"
마무정은 서탁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잔혹한 동시에 슬퍼 보였다.
'아아, 악마의 숙명! 절대자의 운명! 그것이 과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일까?'
마무정은 허공을 바라봤다.
'유정, 차라리 네가 마화삼이 되면 좋겠다. 하지만 너는 절대로 나를 이길 수가 없다. 불행히도…….'
마무정의 마음에는 마성과 신성이 함께 들어 있었다.
"어리석은 녀석! 색(色)을 밝히지만 않았더라도 나와 마화삼 자리를 두고 싸울 만한 자격이 되었을 텐데!"
마무정은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친아들이고, 무정이란 놈은 가난한 학사(學士)의 아들입니다!"
그는 절규하고 있었다.
대전 바닥은 얼음같이 차가웠다. 벌써 두 시진째, 그는 치를 떨고 있었다.
"한데, 어이해서 무정이 놈에게 마화삼의 자리를 전하려 하십니까?"
마유정! 천부적인 철골(鐵骨)로 태어난 소년이었다.
그는 이미 천팔백 종의 마공을 몸에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의 마도서열은 제삼위(第三位)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혈화삼과 마무정이 있다. 그는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 치를 떨고 있는 것이다.
"못난 놈! 내게는 아들이 둘이지, 하나이더냐? 너도, 무정이도 모두 내 아들이다. 너는 본가가 다른 구대마가를 장악했으면서도 천하를 통치 못하는 이유를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혈화삼은 서 있었다.
언제나 핏빛 안개를 피워 내고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마유정의 친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가에서 혈연(血緣)이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성(魔性)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전 마가에 얼마나 공헌을 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전 마가는 현재 일만 명(名)의 마혼첩을 구파일방을 포함한 천하 정파에 심어 두었다!"
"으음……!"
"그리고 제일외단(第一外壇)과 제이외단(第二外壇)이 암중에 힘을 넓히고 있으며, 사대순찰당(四大巡察堂)이 조직되어 새로운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
"그뿐이 아니다. 황궁에도 손이 닿아 있다. 쌍위(雙衛)인 북검왕, 남도제는 오래 전 황궁에 세력을 만들었다!"
"압니다!"
"안다고, 네놈이? 늘 계집만 끼고 지내며 연공을 게을리하는 놈이?"
"으음……!"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네놈은 음씨쌍아(陰氏雙娥)와 선이 닿아 있다. 호접세가의 천한 것들과!"
혈화삼은 차게 말했고, 마유정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기랄, 모르는 것도 없군.'
그의 눈은 바로 악마의 눈이었다.
혈화삼은 혈무를 더욱 짙게 흘렸다.
"아직 선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네가 마화삼이 될지, 무정이가 마화삼이 될지는 새벽에 비무를 해 봐야 한다!"
"으음……!"
"너는 무정이와 똑같은 가르침을 받았다. 십만 권 마경이 쌓인 서재 안에서 온갖 혜택을 받으며 마공을 익혔다!"
"……!"
"이제는 비무만 남았다. 한데, 무정이는 차분한데 너는 들뜨고 있다. 너는 무정이를 겁내고 있고, 이미 위축당했다!"
"제, 제가 그런 천한 놈에게 위축될 리 있습니까?"
"어리석은 녀석! 너는 질투하고 있다. 무정이의 탁월한 오성과 천품을!"
"크으……!"
마유정의 입술 사이에서는 쥐어짜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혈화삼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체하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세는 전 마가의 천년야망(千年野望)이 달성될 때이다!"
"……!"
"우리는 숙원이던 동영사막(東瀛死幕)의 정복을 달성했다!"
"으음……!"
"그들은 혈시고혈마분(血屍膏血魔粉)에 당해 우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적을 처단하고 천하를 얻는 것뿐이다!"
혈화삼의 눈빛은 더욱 강해졌다.
적(敵)! 그녀는 그 말을 힘주어 되풀이했다.
"적은 셋이다! 너는 그것을 아느냐?"
"압니다."
"누구 누구냐?"
"인(忍)과, 사(邪), 정(正)입니다. 사실, 저는 연공은 게을리했을지 모르나 온갖 마병서(魔兵書)를 깨우쳐 그들을 철저히 쳐부술 원대한 계획을 가슴 속에다 세워 두었습니다!"
"원대한 계획?"
"제가 마화삼이 되기만 하면 천 일 안에 그들을 분쇄할 수 있습니다. 자객집단인 인문(忍門)은 단 백 일에, 정법회(正法會)라는 무리는 단 오백 일에, 그리고 사천황궁(邪天皇宮)은 최후에!"
무척이나 자신있는 어조였다.
"호호… 하여간 좋다, 유정! 나는 네가 마화삼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너란 놈은 무정이의 발끝도 못 따라갈 것이나!"
"으음……!"
"마가가 천하를 얻지 못한 이유는 이제껏 혈통에 따라 가주 지위를 전승했기 때문이다. 해서, 삼십일대 혈화삼께서는 혈통에 따라 가주 지위를 승계하지 말고 재주에 따라 가주 지위를 승계하라는 유언을 남기셨다!"
"……!"
"그 이유는 고금제일지(古今第一智)만이 그분이 남긴 천년마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그 정도는 됩니다!"
"안 돼. 왜냐하면 너의 마성은 너무 강하다!"
"예?"
"마가의 뿌리는 마성이나, 불행히도 마성이 강하면 암기력과 오성이 떨어진다."
혈화삼은 철저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아니라, 전 마가(全魔家)의 힘이었다.
그리고 천 년의 꿈은 그녀의 소원이며 이상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하리라!
"유정, 너란 놈은 잔혹하고 편협하다. 아느냐?"
"……!"
마유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낯빛은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유정, 아직도 기회는 있다. 마화삼은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마, 마화삼!"
마유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서재(書齋).
마무정는 빙긋 웃고 있었다. 방금 전 쪽지 한 장이 석문(石門) 아래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달 아래에서 형을 보고 싶소!>
난잡하게 쓴 글씨이다.
"녀석, 나를 보고 싶다고? 훗훗, 죽어도 내게는 형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녀석이 나를 형이라고 하다니……."
마무정은 웃으며 쪽지를 움켜쥐었다.
달 아래(月下).
백설천하(白雪天下)이고, 동시에 천자만홍(千紫萬紅)이었다.
눈 속에 꽃이 피어나는 이유는 지열(地熱) 때문이었다.
마도인들이 꿈의 장소로 생각하는 절대마가. 그 깊은 곳은 사악하기보다 아름다웠다.
미(美)란 정사(正邪) 개념 이전의 인간 개념일까?
아름다움이란 정과 사의 갈래보다는 끈질긴 인간의 꿈일까?
절대마가의 뜨락은 지극히 아름다웠다.
꽃(花)과, 눈(雪)과, 달(月)이 한자리에 있다.
마무정은 흑색유삼을 걸친 채 뜨락으로 나섰다.
이 곳은 월하정(月下庭)!
마유정은 금빛 옷을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형제치고는 아주 묘한 형제였다.
마무정은 천기에 따라 선택된 마가의 제일소가주, 마유정은 피의 인연에 따라 마가의 제이소가주가 된 소년이었다.
둘은 거의 비슷하게 자라났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배우며.
그런데 삼 년 전부터 마무정과 마유정은 큰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마무정은 능력이 일신우일신되어 혈화삼에 필적할 정도가 되었는데, 마유정은 아직도 치기를 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절세기재임에는 틀림없었다. 마무정만 없다면 그는 천하제일 기재라 불릴 것이다.
눈과 눈!
형제의 눈빛이 강하게 마주치기도 오랜만이었다.
"할 말은 형이 더 잘 알 것이오!"
밤(夜)이다. 그러나 달빛이 강해 밤 같지가 않았다.
마무정의 어깨는 금빛으로 물들었다. 달빛은 그의 모든 부분을 화사하고 촉촉하게 물들였다. 강한 금빛으로…….
"글쎄……."
마무정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흘리자, 마유정은 질투의 눈빛을 쏘아 보냈다.
"형은 마도대총사(魔道大總師)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오! 그것은 나보다는 형이 더 잘 아는 사실이오!"
마무정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넘겼다.
"나는 운명에 따라 살고 있을 뿐이다!"
"제기랄, 운명이라……!"
"유정, 비무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네가 이길 수도 있다!"
마무정이 온화하게 말하자, 마유정은 살광(殺光)을 흘렸다.
"형은 너무 건방지고, 너무 영리하오. 나는 그것이 싫소."
그의 허리에 매달린 마검 한 자루가 강한 살명(殺鳴)을 흘려냈다. 마의 기운으로 뭉친 소년 마유정, 그는 마무정보다 키가 한 치나 더 컸다. 겉으로 보면 마유정이 형 같았다.
우웅… 웅……!
마검은 쉬지 않고 살명을 흘렸다. 하지만 검은 뽑혀지지 못했다.
"그 정도로는 안 돼, 유정!"
마무정은 조금 기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다리를 가볍게 벌리고 팔짱을 가볍게 낀 자세, 그 자세가 마유정을 움찔하게 했다.
"이미… 환광구류도(幻光九流刀)까지 익혔군?"
환광구류도는 절대마가의 비전절학 중 한 가지였다.
그것은 검마백보(劍魔百譜)와 통천신검경(通天神劍經)을 달통한 후에야 시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유정은 두 권의 검보를 채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한데, 마무정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익힌 것이다. 그의 허무하고도 치밀한 자세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내가 계집질만 안 했더라도 저 놈을 능가했을 텐데…….'
마유정의 손에는 진땀이 쥐어졌다. 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이마에 갖다 댔다. 그리고 마무정은 자세를 조금 다르게 했다.
"역시 안 돼!"
천마탁탑공(天魔托塔功).
가장 완벽한 수비자세이다.
천지인(天地人) 삼재를 동시에 딛고, 사방(四方)에서 다가설 검을 찰나적으로 차단할 준비를 갖추는 자세.
그 자세는 마유정이 슬쩍 시전하려 한, 한 가지 수법에 극성(剋性)이 되는 수법이었다.
미심마화지력(眉心魔花指力).
마유정은 그것을 쓸 생각이었는데, 마무정은 그것을 알아보고 수비자세를 취한 것이다.
싸움은 이미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미 졌다. 비무는 있으나마나다!'
마유정은 두 번 거푸 패한 셈이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두 소년의 만남은…….
"유정, 너는 너무 패도(覇道)적이다. 속하된 자들은 너를 두려워한다!"
"충고 마시오!"
마유정이 치를 떨었다.
"유정, 바로 그런 기질 때문에 나는 너를 꺾고자 한다."
"뭐라고?"
"너는 극패(極覇)다."
"……!"
"네가 마화삼이 되면 즉시 천년대전(千年大戰)이 벌어진다."
"으음……."
"너는 천년마고 따위야 하며, 그 안에서 각골연마할 생각은 없고 백만도(百萬徒)를 이끌고 중원과 변황을 동시에 칠 계산만 하고 있다."
마무정은 차고 나직하게 말을 했다.
나직한 말인데도 힘이 있는 이유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너는 백도를 경시하고 있다. 그들의 전통적 저력(底力)을 너는 모른다."
"닥치시오."
"닥칠 수 없다, 나는!"
"제기랄!"
"유정, 너는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것을 모른다. 네가 그것을 알았다면… 나는 네게 져 줬으리라."
"져 줬다고?"
"나는 남의 머리 위에 서고 싶지 않다. 진심이다. 그러나 네가 마화삼이 될 경우, 전 마가의 패망이 닥쳐 올 것이 뻔하기에 나는 마화삼이 될 것이다."
마무정이 강직하게 말하자, 마유정은 욕하듯 떠벌렸다.
"클클… 내가 백도를 모르면 너는 백도를 아느냐? 너는 지피지기 하느냐?"
마유정의 두 눈에서는 흉흉한 살광이 거듭 흘러 나왔다.
쿵-!
그는 가슴을 치며 사납게 쏘아 댔다.
"너는 한 가지를 모른다."
"너를 모른다고?"
"빠드득-! 나는 네 아래 있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 해도!"
"어리석군. 너와 나는 힘을 합해야 한다.
"제기랄, 더 이상 나를 훈계하지 마라. 내게 양보하지도 않을 처지에서, 내게 훈계마저 하겠단 말이냐?"
마유정은 이를 갈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죽어랏, 종놈!"
콰아아- 쾅-!
폭음이 일며 꽃잎이 하늘 가득 흩뿌려졌다.
유령혈사강풍(幽靈血死强風)!
마유정이 최근에야 연성한 수법이다.
땅거죽이 뒤집히고 흙보라가 치솟을 때였다.
"그 정도로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유정!"
마무정의 몸은 어느 틈엔가 나무 위에 있었다.
그의 옷에는 흙 알갱이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손을 드는 찰나, 피했다. 마귀허허보(魔鬼虛虛步)마저 익혔구나!'
마유정은 얼굴을 희게 물들였다. 이제 그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무정의 적이 아니 된다는 것을…….
달(月)과, 꽃(花)과, 두 소년(少年)! 그리고 어디선가 바람이 흘러들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 때, 마유정은 돌연 웃음을 흘렸다.
"좋아, 형! 그대는 뛰어난 사람이야! 하하! 내일 형은 마화삼이 될 것이고, 나는 패배자로 전락하겠지."
비감 서린 웃음, 그는 차가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위로 날아올랐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형에게도 약간의 책임은 있을 것이오."
금빛 그림자가 흐르더니, 마유정의 몸은 울울한 숲을 깨고 사라져 갔다.
마무정은 그가 가는 것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네게 미안할 뿐이다. 네게……."
그는 중얼거리며 조용히 땅으로 내려섰다. 그는 불철주야 마공을 연마했다. 마유정은 혈통을 믿고 연마를 게을리한 탓에 마무정에 비해 칠 성(成) 수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가 벌써 색마(色魔)가 되지 않았더라면, 내일 새벽의 비무는 용호상박의 결전이 되었을 것이다.
꽃(花)! 마무정은 한 송이 꽃 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일으켜 주마, 내가!"
마무정은 허리 꺾인 금잔화(金盞花)를 살포시 쳐들었다.
손(手), 희고 깨끗한 손이다. 마무정은 너무도 화사한 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꽃을 세우며 빙긋 웃었다.
"좋은데?"
두 눈, 혈화삼의 두 눈은 그제야 껌벅여졌다.
"재능으로는 무정이가 단연 뛰어나다. 하지만 기질에 있어서는 무정이보다 유정이가 났다. 그러나 대총사는 필히 무정이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진짜 아들은 유정이가 아니라, 무정이니까!"
그녀는 두 소년을 보고 있었다.
"나의 아들, 너를 마도의 꿈에 바치리라."
아아, 마무정이 그녀의 친아들이란 말인가?
'유정이는 고아이고, 무정이는 나의 아들이다. 내가 그것을 거꾸로 소문낸 이유는 나의 아들을 아끼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짐작대로 되어 갔다. 무정이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노력으로 극복하여 천품을 모두 살렸다. 녀석, 너야말로 전 마가의 우상이다. 물론, 유정이도 사랑한다. 친아들처럼! 그 녀석은 장차 너의 오른팔 노릇을 잘 해낼 것이다. 힘을 합해 전 마가를 통치하리라.'
마가(魔家) 사람들, 그들은 야망(野望)을 숭상한다. 그리고 야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희생한다.
천 년(年), 그렇게 천 년이 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