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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다 yada
알다, 이해하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 know, 이해하다 understand'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낸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신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한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b) 야다는
'구별하다' distinguish를 의미한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이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하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한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된다.
(c) 야다는 '배워서 알다' 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닌다(잠 30:3).
(d)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온다.
(e)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한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한다.
(f)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온다(예: 렘 8:7, 시 95:10).
(g)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h)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신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신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한다.
(i)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이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한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j)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이다.(참조: E. D. Schmitz; Bultmann).
* * *
사순ㆍ대림피정Re: 2021년 3월 19일 사순절 피정(27일) /
나는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 녹취(53:30)
무심.보조 21.03.19 09:59
[2021 cpbc 사순특강] 4회 - 성경이 말하는 회개의 파스카 |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53:30)
...
제가 준비한 주제는 '회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앎', '광야',
'파스카', 그리고 '거룩함', 뭐 이 정도의 어떤 내용이 되겠습니다.
예, 그래서 이제부터 하나하나 그 주제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회개'에 대한 겁니다.
많은 분들이 이제 사실 사순시기 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이 회개의 시기라는 거죠.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제 그런 생각을 하시죠.
'회개' 이러면 뭔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뭔가 나의 행위가
변화되는 거, 이런 것을 '회개' 라고 생각하시면서 이제
"다시는 거짓말 안 할 거야. 다시는 싸우지 않을 거야. 다시는 죄짓지 않을 거야."
이런 이야기를 하시게 되는데 다시는 뭐 뭐 하지 않겠다 라는 말을
늘 다시 하고 계시죠.
예, 다시는 뭐 뭐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의 그 다짐의 공허함과 무력감을
잘 알고 계실겁니다. 회개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어떤 것을 하지
않겠다 라는 다짐이 아니라 인식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될 개념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은 한국말로 '회개' 라고 번역한 그리스 말을 살펴보실 때
좀 더 분명하게 아실 수 있는데요.
'회개'를 그리스 말로 '메타노이아'(Metanoia) 라고 이야기 합니다.
'메타(meta)'라는 그리스말 전치사와 '노이아(noia)'라는 명사가 합성된 단어인데요.
노이아라는 이 명사는 '노에오(voew)'라는 동사에서 파생됩니다.
이 '노이아'라는 동사는 '알다, 인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 영어에 '노우(know)'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뭐 뭐를 '알다' 이럴 때 '노우'라는 단어를 쓰잖아요, 영어에서요.
그래서 이 '노에오'라는 희랍어에서 영어의 '노우'라는 동사가 파생이 됐는데요.
이제 무엇을 알고 인식하는 겁니다.
예, 이전까지 잘 몰랐었던 것을 이제 알게 됨으로써 이제 나의 인식이
굉장히 달라지는 거, 이것을 '회개'라고 이야기 하기 때문에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 칼 라너(1904-1984) 같은 분은 회개를
"인식 지평의 확대"라고 정의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었던 내용이 굉장히 넓어지는 것, 그게 이제
그 '회개'라고 볼 수 있다는 건데요,
여러분들 이런 경우가 있으실 것 같아요.
잘 모르기 때문에 늘 의심하고 불안해 하고 그래서 뭔가 다른 왜곡으로
점차 더 깊어지고 그래서 점차적으로 사실과 아닌 것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매여 있는 이런 것들이 우리 주변에서 굉장히 잘 일어나는
종종 일어나는 그런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았을 때 '아,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리고 나에 대해서 뭔가 이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분이었구나.'
이런 것들을 알았을 때 이제 우리가 그 매임에서 풀려나고
구원되고 해방되는 그런 체험들을 하신 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죄를 뭐라고 이렇게 규정하냐면
하느님에 대한 앎의 부족, 쉽게 말해서 하느님을 왜곡하고 의심한 것이
죄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창조의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 그 다음에 이제 우리가 다뤄야 할
굉장히 많은 주제들이 있거든요.
사랑도 있고 정의도 있고 평화eh 있고 여러가지가 있는데
성서는 바로 '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부터 최초의 인간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의 아들들, 카인과 아벨의 죄 이야기, 노아의 홍수도 사실은
죄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었고 나중에 바벨탑의 이야기까지,
즉 아브라함이, 성조라고 이야기 하는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창조 다음에 꾸준히 다루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근데 그 죄 이야기에서 그 이제 원조들의 죄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데
그 때 죄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에 대한 왜곡으로 시작이 되는데
하느님께서는 에덴 동산의 모든 먹을 것들을 다 먹으라고 하셨어요.
다만 그 동산의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그 나무만은 먹지 말라.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데 뱀이 뭐라고 왜곡을 하냐면 여기 있는 거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하셨다며? 이렇게 왜곡을 하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롭고 사랑이 풍부하신 그분을
아무것도 못 먹게 하는 굉장히 편협하고 인색한 그런 분으로 왜곡하면서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 왜곡에 휘말렸다고 할까요?
예, 그러면서 이제 인류의 첫 조상들이 죄를 짓게 되죠.
예, '앎'이 부족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죄에 빠지게 되는지,
죄의 상황에 매이게 되는지, 예, 그런 것들을 아시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엇인가를 새롭게 '안다' 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면 뭘 아는 것일까요?
예,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 라는 거,
그리고 '우리 옆에서 함께 동반하신다.'라는 거,
그리고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목숨을 내어주셨다라는 거,
그래서 그런 목숨을 내어 주시는 그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이제 영원히 살게 되었다 라는 거,
이런 것들을 알게 되는 것, 이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뭔가 이렇게 무엇을 알아야지만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좀 더 엄밀히 말한다면
이제 알게 됨으로써 '저절로 동반되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게 되어지는 것,
이것이 '회개'라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그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 '고백록'에서 하셨던
그 내용을 좀 가져와 봤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죠.
"늦게야 님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임께서는 제 안에 계셨거늘 저는 밖에 있었고
밖에서 임을 찾으며 임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피조물 속에
일그러진 저를 내던졌습니다.
임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지만 저는 임과 함께 있지 아니 하였습니다."
예,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주변에 계신 그분을
찾기 위해서 이제 얼마나 그 바깥에서 그런 노력을 했는지를 고백하고 계시고
하지만 이제 그 분께서 늘 저와 그 분과 함께 계셨다라는 그런 것을
이제 알겠다 라고 고백하는 그런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회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시면서
우리와 동반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어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회개'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히 이제
'앎'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회개'는 "인식 지평의 확대다."라고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무엇인가를 이렇게 새롭게 알게 된다 라는 건데요.
이제 우리의 '앎'도 중요하지만 사실은 이제 하느님에 대한 '앎'이
넓어진다라는 이제 그런 것이 되겠죠.
하느님에 대한 '앎'이라는 것이 곧 '신론'이고,
신학의 모든 활동의 내용이다 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그 왜곡이 얼마나 우리를 이렇게 메이지 하는지
그런 부분들 말씀을 드렸고요.
그래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선의를 의심하고 그것을 왜곡하는 것,
이것이 죄의 본질이고요, 그래서 마태오 복음 12장 31절,
또 마르코 복음 3장 29절, 이런데 보면요,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데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고 하느님을 왜곡하는 것, 그분을 믿지 못해서
이런 것은 곧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서 용서 받을 수 없다.
이런 얘기까지 나와 있는데요.
사실 성경 전체는 하느님에 대한 앎을 전해주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도 창세기 1장 1절이 이렇게 시작이 되거든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이제 한국말 번역에서는 맨 처음에 하느님께서 뭐와 뭐와 뭐를
이렇게 해서 창조하셨다 이렇게 되어 있지만
히브리 말 문장은 워낙 그 동사가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한 처음에'라는
부사를 뺀다면 '창조하셨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는 책이 성경입니다.
"창조하셨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라는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한 그런 내용이 될 수 있는데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어떤 조건들, 환경들, 또 모든 사건들,
이런 모든 것들은 하느님과 반대되어서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조건이라는 거죠.
창세기 1장은 사실은 이스라엘에 유배를 갔을 때, 그 뭐라고 할까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배를 거치면서 매우 고통스럽고 그 고난의 역경의 삶을
살면서 나오게 된 신학적 작품입니다.
즉, 그들이 그런 고난과 고통이 시간을 겪고 있지만 그것도, 그 시간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여기에서 분명히 새로운 생명,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믿고 고백했던 그런 신학적인 작품이다
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도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신 조건이며
환경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살아왔던 그리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던,
또 그래서 우리의 우리가 해야 될 하느님의 일을 하지 못했던
이런 모든 것들을 깨우치면서 이제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그런 창조의 시간이다 라고 믿고 고백하는 것이 저희의 일이 되겠죠.
이렇게 창세기 1장부터 이미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고
있는 내용으로 시작이 되고 있고요.
아까 제가 죄에 대한 이야기에도 하느님의 선의를 우리가 어떻게 믿고
보전해야 되는 지에 또 말씀을 드렸고 또 이 성조들의 이야기 이런 것들도요,
계속해서 하느님, 어떤 하느님임을 알려주느냐 하면 하느님께서
굉장히 많은 후손과 그 다음에 당신께서 주시겠다라는 땅을 약속하셨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약속을 꼭 지켜주시는 꼭 준수해 주시는 그래서 이루어 가시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말씀 하신 대로 다 이루셨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그럴 수 있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탈출기', 이 책도 사실은 사순 시기 때
저희가 가장 많이 읽게 되는 그런 책이죠.
구약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한 책이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책인데요.
이 중요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그 주제가 뭘까.
'탈출기'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아, 이스라엘이 탈출한 거
하느님께서 그들을 해방 시키신 거, 뭐 여러가지 그 뭐 내용들을
이야기 하실 수 있는데 사실 탈출기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어 있는 주제는
그분에 대한 '앎'입니다.
"'앎'이 곧 해방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책이 '탈출기'인데요,
아무리 물리적으로 노예 상태에 있었던 이집트를 탈출했다 하더라도
'앎'이 부족하면 여전히 해방되지 못한 채 매어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반역의 죄들이죠.
그래서 진정한 탈출과 해방은 물리적인 조건의 이동, 아니면
그 어떤 장소의 이동, 공간의 이동 이런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뭘 원하시는 지를 알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앎'이라는 것을
아주 주구장창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 '탈출기'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탈출기'에서 매우 이렇게 반복되어진 '후렴구'처럼 나오는
그런 문장이 있습니다.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이거를 저희가 인지 공식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주님이심을, '주님'이라는 말은 '주인님'이시라는 뜻이잖아요?
주인님이시라는 말을 저희가 줄여서 주님이 이렇게 부르고 있는데
모든 것의 주인이심을 알게 하는 이 인지 공식이라는 이 문장이 아주
그 후렴구처럼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탈출 뒤에 어떤 그 아주 중요한 핵심은
이제 이런 '앎'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이 광야를 건너면서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용은
이제 하느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렇게 누구 누구의
제 3자의 하느님이었던 그분을 이제 그들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그래서 3인칭적인 시점에서의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제 1인칭과 2인칭적인
그런 아주 긴밀한 관계에 관점으로 옮아가게 되는 '앎'의 심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광야라고 할 수 있고요.
이 '앎'이 충만했을 때 그들이 하게 되는 것이 '계약'을 맺는 일이죠.
계약을 맺을 때 상대방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 계약을 맺지 않으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 신앙을 위해서 계약을 맺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당신이 주님이심을 알게 하는 사건들을 보여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이런 부분을 이제 찬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고 그 분은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믿고 사는 것, 이것이 '계약'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이 유다인들은요, 이 '앎'이 충만해지는 거, 아주 깊어지는
그 '앎'에 대해서 히브리 말로 동사 '야다' 라는 동사를 씁니다.
이 '야다'라는 동사는 지금 제가 '회개'에 대한 주제부터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이 '앎' 어떤 것인지를 좀 잘 알려 주는데요.
이 '야다'라는 히브리 말은 무엇인가를 이제 어떤 정보를 습득해서
알게 되는 거, 좀 어떤 외적인 정보에 대한 것도 물론 포함하지만
사실은 그것에 대한 아주 내적인 정보까지도 파악하는 거,
그분의 어떤 마음, 그 사람의 마음, 또 그 사람의 어떤 특성,
그 사람이 어떤 본질, 이런 모든 것까지도 알았을 때를
이제 내가 완전히 그를 알았다, 그때 '야다'라는 동사를 쓰게 되는 거죠.
유다인들이 굉장히 그 머리가 좋은 민족이다 이런 얘기 많이
들으셨을 것 같은데요, 머리가 좋은 백성이다라는 것은
그만큼 이제 아주 깊은 인식 체계를 가지고 있다 라는 거고
그들의, 유다인들의 그 인식 체계에는 '알다'라는 개념이 굉장히 다릅니다.
단순히 외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만으로 '안다' 라고 하지 않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사건이든,
아주 내부적인 정보까지도 함께 알았을 때, 내외적으로 온전히 알았을 때,
'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런 인식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그들을 이제 매우 지혜로운 민족이다 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그를 외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까지 아는 것,
예, 이것이 '야다'이고 그래서 이 '알다'라는 개념은요,
'관계를 맺다'라는 개념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의 내부적인 상황까지 '알았다'라는 것은 이제 그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거죠.
하느님을 제대로 안다라는 것은
그 분과 아주 아주 깊고 구체적이며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그런 관계에 들어섬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제 성서에서
계속 다루어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앎'이구요.
이번에 제가 그 '성경 본문 증언'이라는 책을 쓰게 됐는데요,
이제 여기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것이 지금 말씀드리는 이 '앎'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세사적인 관점'에서 본문들을 선정해서 좀 깊이 들여다 봤는데
'구세사적인 관점'이라는 건 뭐냐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계시고
당신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하느님의 관점에서 봤다'라는 거거든요.
한 번 참조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탈출기'에서 등장하는 그 부문을 몇 개 가지고 와 봤는데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를 알려주시는 그런 본문들입니다.
탈출기 2장 24절부터 25절,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4-25)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거고요, 그리고 계약을 기억하시는 분이라는 거고,
그리고 당신의 자손들을 살펴 보시는 분,
아주 꼼꼼하게 우리의 모든 사정들을 살펴보시는 분이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처지를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고 선언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음과 아 또 우리의 처지와 이런 모든 것들을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살피시고, 그 다음에 알고 계신 그런 분이라는 거죠.
탈출기 3장 7절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예, 똑똑히 보시는 분이시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고,
그래서 정말로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시편 139편 1절부터 4절인데요.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 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1-4)
예, 시편 150편 중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이제 정말 위로가 되는
그런 시편인데요, 정말 '살펴보시어 다 아신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멀리서도 다 아시고 앉거나 서거나 다 아시고,
그래서 제가 이런 게 필요하고, 저는 이런 게 고통스럽고,
저는 이런 것이 당신께 요청하는 바이고, 이런 것들을 채 혀에 올리기도 전에
주님, 당신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 우리가 '주님 저는 이게 필요한데요. 저는 이게 괴로운 데요.'
이렇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미 너무나 정확하게, 나보다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분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 6장 3절 6절인데요.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중략)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3-6)
예, 이 호세아서 6장은 앞에서 읽었던 탈출기나 시편과는 조금 다르죠.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라는 건데
이제 그런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드리자는 겁니다.
즉, 그래서 주님을 알고 힘을 알도록 힘쓰고
이제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이 표현도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건 정말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거든요.
'너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너 어떻게 하면 좋겠니.
내가 어떻게 해야 돼?' 이런 표현들.
그걸 얘기 하고 계시는 거죠.
에프라임은 북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고
유다는 남 유다를 대표하는 얘기죠.
즉 이스라엘 전체를 이야기 하시면서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건데,
그런 하느님이신 것을 우리가 알아드리는 것,
이제 이게 신앙의, 저는 핵심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앙은 뭐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제가 생각하는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그렇게 모든 걸 알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우리 또한 알아드리는 거,
이것을 저는 '신앙이다' 라고 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내가 알아드리고
그래서 그분을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것,
이게 '신앙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 이런 '회개'에서 시작된 '앎'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곳이 이제 '광야'입니다.
광야는 그래서 뭔가 이렇게 '앎'의 여정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앎'이 부족했을 때 나오는 현상들이 뭐냐면
의심, 의혹, 불평, 불만입니다.
이집트를 떠나온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불안해 하면서 그러면서 이제
모세와 사실 모세에게 불평했다라는 것은 하느님께 불평했다라는 거죠.
불안해 하고 자기네들 안에서의 어떤 두려움, 공포, 이런 것들이 있으니까
끊임없이 이제 하느님을 배신하려고 하고 이제 불만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앎'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현상이죠.
그래서 심지어는 모세를 죽이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노예 상태였던 곳으로 다시 노예가 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시는 당신의 구세사의 계획을
인간이 방해하고 그것을 포기하려고 하는 것, 좌절 시키려고 했던 거,
이런 것이 이스라엘 불평과 불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앎'이 이제 완성이 됐을 때, 충만해졌을 때
그들은 이제 계약을 맺게 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