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생각나는 대로 써놓은 수준인데, 퇴고를 예약하며 일단 올립니다..
[9차시 재난] 운수 좋은 삶/신통
사고 소식을 들을 때면 참담한 동시에 죄스러우면서도 내가 화를 피한 것이 다행스럽고, 나도 불시에 사고를 당할까봐 두려워진다. 그렇게 겁을 먹으면서도 나는 사고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적이 없없고, 앞으로도 사고는 나를 비켜나갈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놀랍게도 나는 목숨이 왔다갔다한 사고를 여러 차례 겪었다.
1.
10여 년 전의 일이다. 친구와 나는 졸업을 앞둔 4학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난 뒤, 우리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등산을 하기로 했다. 새해까지는 시간이 얼마간 있었으나, 졸업을 앞두고 뭐라도 좀 더 해내고 싶었다. 시험이 끝난 시간은 2시 반쯤이었다. 정상에서 도시락을 먹겠다는 목표로, 도시락까지 포장하고 출발한 시간은 3시쯤이었다. 그리고 그 산은 무려 북한산이었다. 우리는 평소 등산을 하지 않았고, 등산을 한다고 신경 쓴 차림새가 패딩과 운동화였다. 낙엽이 가득한 산길에 우리뿐이어서 낭만을 즐기며 ‘좋다’를 남발했다. 30분에서 한 시간쯤 지나니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돌길이 나왔다. 이때쯤 되니 하산하는 등산객 무리와 엇갈려서, 나와 친구는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 같았다. 내려가는 사람마다 지금 올라가면 어떡하냐며, 빨리 내려가라고 성화였다.
“네~네. 천천히 올라갔다 가려고요.”
“아이고, 안 돼. 지금 내려가야 돼.”
“네~.”
다들 중년쯤 되셔서 그런지 아직 어린 우리를 걱정을 해주시는 듯하다면서도 참견이 너무 심하다고, 돌아서서 우리 둘은 속닥거렸다. 그렇게 아랑곳하지 않고 산을 계속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생각보다도 어두워졌고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하산하시는 분들이 우리에게 왜 내려가라고 했는지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도 모처럼 등산이고 도시락도 챙겨왔는데, 도시락을 먹을 만한 곳까지는 가보자고 뚝심을 부렸다. 정상은 아니지만 정상 같은 느낌을 주는 돌봉우리가 수정된 목표였다. 운동화로 돌을 체감하면서 마침내 오른 정상은 스산했다. 우리는 애써 높은 데 오르니 경치가 좋다며 도시락을 펼쳤다. 간간이 하산하시는 분들께서 역시나 지금 바로 산을 내려가야 한다며 걱정을 해주셨고, 우리는 “네~ 이것만 빨리 먹고 저희도 갈 거예요.” 대답하며 먼 곳도 한 번씩 바라봐주고 수다도 떨며 도시락을 열심히 먹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 상황이 우꼈다. 사람들은 사라지고 있는데 우리는 도시락을 먹겠다고 난리인 데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가득했다. 아니 무슨, 산에 까마귀가 이렇게 많아? 하나하나가 웃음을 유발했고, 우리가 원했던 대로 청춘답게 마지막을 장식하는 느낌이 들어 만족스러웠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간간이 보이던 등산객마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까마귀 우는 소리도 불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뒷정리를 하고 내려가는데,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들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 들었지. 이거 무슨 소리야? 들개야, 들개?”
“산에 들개가 있나? 사람을 물지는 않겠지?”
이때쯤 내려가면 되겠다고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는 해가 순식간에 졌다. 산에서는 해가 순식간에 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몸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뒷정리를 할 때만 해도 이제는 내려가야겠다는 느낌이었는데, 그 ‘때’가 늦었다는 것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야 깨달았다. 어두운 느낌 정도가 아니라 주변이 어두컴컴해서 잘 안 보였다. 올라왔던 방향이 어딘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야, 이게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어두워질 수가 있나?”
“그러니까. 분명 이렇게 어두울 정도가 아니었는데.”
겁먹은 것을 애써 둘이 말로 풀면서 더듬더듬 내려가는데, 끝이 안 보였다. 우리 하산할 수 있을까? 산에서 조난 당하는 것이, 실족사 하는 것이 비현실적인 일이 아니었구나. 이렇게 가다가 밤샐 수도 있나? 설마,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 별의별 생각을 하던 그때, 웬 사람이 한 명 나타나 우리는 기겁을 했다. 물병을 한 병 든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 역시 그 깜깜한 산길을 우리 둘이 내려가는 것을 보고 놀라서 다가오신 것이었다. 위험하니 길잡이를 해주시겠다며 잘 따라오라고 해주신 덕분에 우리는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동시에 산길 외진 곳에서 이곳에 능숙한 성인 남성을 따라가자니 두렵기도 했다. 여전히 두려운 마음과, 그래도 전보다는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우리는 할아버지를 좇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병 한 병 들고 북한산을 우리보다 높은 데까지 갔다가 이 깜깜한 산길을 훠이훠이 내려가시는 분답게, 우리를 기다려주시는데도 축지법을 쓰시는 것처럼 빠르셨다. 혼자 산을 내려가셨으면 진작 내려가고도 남았을 것이 쉬이 예측되어 죄송하고 감사했다. 그래서 우리는 민폐가 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아까 낭만적이었던 낙엽이 보이지 않는 산길에 가득해서 미끄러지기를 여러 번. 다행히 낙엽이 동시에 쿠션 역할을 해주어 다치지는 일은 없었다. 친구와 나는 번갈아 미끄러졌다가도 오뚜기처럼 오뚝오뚝 일어났다. 얼마나 남았는지보다 할아버지께 더 이상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이 무서운 산에 또 남지 않게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는지 모르겠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주변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바닥에 있는 낙엽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정말 칠흑처럼 깜깜했던 장면과, 산을 내려가는 내내 반복적으로 울려 오들오들 떨게 만든 들개 소리, 그 길을 홍길동처럼 내려가 시야 끝에 걸쳐 우리를 기다리시는 할아버지의 형체,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낙엽에 미끄러졌다가도 오뚜기처럼 일어서서 내려가며 힘이 되주었던 친구의 모습뿐이다. 어느 순간, 할아버지께서 이제 다 왔다고 하셨고, 우리는 가로등으로 환한 초입의 계단에 금세 다다랐다. 근처에 있는 동네는 평화롭게 집집마다 불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무사히 살아남은 지금은 무용담처럼 늘어놓으며 그때 우리 진짜 웃겼다고, 얘기만 나왔다 하면 웃음을 참지 못하게 되는 추억이다. 그러다가도 은인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한번씩 얘기가 나오며 오들오들 돋는 소름을 느낀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우리한테 천운이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었고, 와이파이가 터지는 인터넷 환경도 차이가 있었다. 119를 부를 생각도 못했지만, 119를 불렀다 한들 우리 위치를 얘기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 쉬이 그려진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우리의 산행이 그렇게 위험천만한 것이었다는 것을 몸소 겪으면서야 알 수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집에서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귀에 딱지가 앉게 외셨는데, 직접 위험한 상황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산행의 위험성을 알았으니 기가 찰 노릇이기도 하다.그럼에도 주변 분들은 ‘너 어디 된통 당해봐라’ 하고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셨다. 아직 잘 모르는 우리가 안전하게 산을 내려가기를 바라며 할 수 있는 선에서 조언을 하고 도와주셨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국가적 재난이 되면 그렇게 비난 댓글이 들끓는다. 내가 산행에서 위험한 순간을 겪었던 이때가 2013년 대학교 4학년 때였으니 23세(만 21세)였다. 비슷한 연령층이 많이 참여한 2022년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서 믿을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다. 새벽에 동생이 깜짝 놀라서 뉴스를 틀었다. 이태원에서 압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믿기지 않았다. 이후에 벌어진 일도 믿기지 않았다. 가장 충격적인 말은 ‘놀러갔다 죽은 애들’이란 말이었다. 지역에서 장려한 축제였다. 압사라는 말은 서태지와 아이들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전해 들어보기만 했다. 매년 열리던 이태원 핼러윈 파티에서 압사라니, 그것도 2022년에.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책임이 있는 기관들은 참사 희생자들이 비난을 받는 것도 보호하지 않았다.
2.
어렸을 때, 초등학생이었을 때로 기억한다. 외할머니 생신에 온 친척이 집합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만 7남매인데, 왕이모의 손녀가 나와 동갑이었으니 가족 수가 어마어마했다. 당시 내 또래 중에서도 동갑내기인 또 다른 친척과, 내 동생은 가슴에서 배 정도에 물이 찰랑거리는 깊이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궁금해졌다. 동생 튜브에 우리가 다 같이 매달리면 어떨까? 우리는 궁금증이 생기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동생 튜브에 우리가 매달려도 물에 살짝 떠있을 수 있었다. 신이 난 우리는 좀 더 깊은 곳까지 갔다. 그러자 튜브가 물살을 따라 순식간에 떠내려갔다. 우리는 물살에 떠내려가며 살려달라고 울어제꼈다. 그 물길에서 놀고 계시던 아저씨께서 한 팔로 나를 잡아주셨던 기억이 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생도, 동갑내기 사촌도 무사했다.
감사하게도 주변에 계신 분들의 도움으로 큰일 없이 잘 살고 있다. 한 아이를 돌보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건 여기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그런데 최근 택배 차량에 치여 숨진 아이의 부모에게 비난 댓글이 들끓었다.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며, 아이를 떠나보내 힘들 부모에게 거센 비난이 이어졌다.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진다. 아이한테서 눈을 떼면 안 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는 일이다.
3년 전쯤 담임 반의 중학교 1학년 아이의 목에 사탕이 걸리는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수업 중이었고, 마침 교무실에 계셨던 체육 선생님께서 하임리히 법으로 학생이 사탕을 토해내게 하셨다. 무사하기에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그때 교무실에 하임리히 법을 할 수 있는 선생님께서 안 계셨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하다. 최근 체험학습으로 또 말이 많다. 기사에 나오는 학부모는 교사가 직무를 유기한다며 비난하고, 기사에 나오는 교사는 이제 참지 않겠다며 맞선다. 이 말도 저 말도 맞다. 개근거지라는 충격적인 말이 나올 정도로 문화체험의 기회가 중시되고 있다. 체험학습이 필요한 것도 맞고, 과도한 부담도 무리이다. 생명에는 개인이 책임지기 어려운 막중함이 있다. 싸움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 완벽할 순 없어도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방법을 찾아나가야 하는데, 개인 소송이나 교사의 책임으로 맡겨두는 판국이다. 그리고 교육청이나 정부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오리무중이다.
3.
작년에 농구를 하다가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다친 직후만 해도 심각성을 몰랐다. 병원을 가봐야 한다는 코치님 말씀에 동네 병원을 방문했더니, 새끼손가락이 꺾인 상태가 영구히 지속될 수 있다고 했다. 치료를 신속히 해야 한다며 병원을 몇 군데 추천해주셨다. 하필 할 일이 많은 기간이었다.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해서 부랴부랴 수술을 잡았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보니, 수술을 하나 안 하나 차이가 없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술을 해버려 입원에 물리치료 때문에 왕복까지 해야 했다. 추천받은 병원은 공장형이었고, 대기만 한 시간씩 걸렸다.
이번 학기에 이태준의 돌다리를 수업하는데, 주인공인 창섭이란 인물이 과거에 의사의 오진으로 어린 동생을 일찍 떠나보낸 이야기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에 본 영상이 기억 나서 검색을 해보았다. 의사의 오진으로 아내를 떠나보낸 남편이 청원을 올렸다는 내용이었다. 병원을 한 군데만 가보고 결정한 것을 비난하는 댓글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이 닥쳤을 때 신중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두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것이다. 금방 낫는다고 했는데,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면 오진임을 의심해볼 만하다. 그런데 다른 진단을 내린 병원에서조차 오진임을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이런 문제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생명을 다루는 문제이므로 개인이나 소속 단체에 책임을 묻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개인, 시민, 의사, 병원의 입장은 있지만 정부의 입장은 없다. 이쯤되면 재난 상황에서 정부가 부재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지경이다. 목숨을 운에 맡겨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