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識)이란? 사람이 죽으면 육식(六識)이나 7식(七識), 8식(八識)의 구분이 없는 영식(靈識)이 된다. 그러다가 태어나 육신(肉身)을 가지면 육신과 관계를 짓는 제6식(第六識)이 현재의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제7식(第七識)과 제8식(第八識)은 잠재의식으로 감춰진다. 살아 이승에서 성불과 보살도는 6식의 올바른 역할을 통해 7식과 8식 함께 개선되고 성숙해 나간다.
잠재의식은 현재의식으로 깨어나야 한다. 잠재의식은 깊고 안정된 의식이지만 그대로 두면 잠든 의식이고, 그 안에 저장된 업의 종자가 개선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식인 육식으로 일깨워 참회와 보은(報恩)을 통해 잠재의식을 개선시켜야 한다.
염불을 할 때 뜻을 놓친 채 입으로 달달 외는 단계가 잠재의식의 발로이고, 뜻을 놓치지 않음이 현재의식의 현로(現露)가 된다. 곧 현재의식이 잠재의식을 일깨움이 되고, 결국 인간의식은 올바른 방향으로 성숙된다.
불교신앙은 인격이고 인품이다. 금강경을 소리 높여 외워서 뜻과 소리가 일치하고 순숙하여 깊어지면 삼매가 된다.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의 완벽한 일치다. 잠재의식이 현재의식으로 인해 다스려지고 개선이 되고 조절이 될 때, 삼업[身口意]이 법으로 나란한 법성인격(法性人格), 불성인격(佛性人格)의 구현자가 된다. 이렇게 인격[身口意]이 점차 깊어 감은 인품이 저절로 높아감이 된다. 인격은 심천(深淺)으로 판명이 되고, 인품은 고하(高下)로 드러나게 된다. 불성인간의 참모습이다.
불교의 교리나 경은 불교신앙을 이해시키고 뿌리내리게 하는 이성적인 설득으로 출발한다. 따라서 모든 경은 신앙을 심어주고 키워주는 가르침인 것이다. 생각의 힘을 키워준다고 해도 좋겠다.
예를 들어 자기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드러내어 고쳐나가는 것이 사람의 능력 중에서 가장 진실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인격을 갖추고 인품을 향상시켜서다. 이는 현재의식을 통해 잠재의식까지 개선하는 일이고 안팎을 온전히 하는 일이다.
사회는 사람의 생각[識]이 마치 전선줄처럼 얽혀있고 교차해 있다. 이런 생각들에서 혼선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려면 ‘연기(緣起)·중도(中道)’의 질서를 가져야 한다. 통찰을 말한다. 공성(空性)과 공상(空相)을 동시에 관하는 것이다. 반야교학의 통찰은 반야바라밀다이다. 공성과 공상의 실현이다.
불교의 신앙은 인생과 우주의 질서인 진리를 받아들임이고 거기에 따라서 사는 거다. 그럼에도 참선이나 염불을 제대로 해서 인격적으로 온전하고 향상의 드높은 인품을 갖춘 사람은 드물다. 대개가 인격의 성숙 없는 지혜의 칼날은 지적(知的)인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불교에서 신(神:靈識)은 깨달음[覺]이라고 말한다. 오대산 탄허스님은 1977년 10월에 ‘깨달음이 신이라는 뜻의 각유신(覺有神)’의 결정구(決定句)를 붓글씨를 써서 남기기도 했다. (물론, 신에 대한 개념은 일신교(一神敎)의 유일신과는 다르다.)
아무튼 사람이 죽어서 신이 되면 더 이상의 정신적인 진보나 향상은 없다. 제아무리 좋다는 천상세계도 마찬가지다. 가장 큰 원인은 남 돕는 선행을 할 수 없어서고, 물론 육체가 없어서다. 따라서 진보와 향상, 심지어 퇴보마저도 육체를 가졌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럼으로 천상의 신은 오로지 그 세계[精神]에 부합하는 합당한 조건만 누리다가 그 조건이 다하면 다른 정신단계로 이동한다[輪廻·還生]. 이승이나 저승, 그 어느 곳에서든 시작이 있었다면 필경 끝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든 것[一切]은 변천(變遷)하고 존재는 운동이기 때문이다[諸行無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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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관세음보살 합장.
소중한 영상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합장.
소서절기 날인 주말 아침시간에 컴앞에 앉자서
좋은글을 읽으면서 머물다 갑니다 오늘의 날씨는 곳에 따라서 장마비가 내린다고 합니다.
주말 외출시 우산을 챙겨나가시고 무더운 찜통더위에 몸 관리도 잘 하시고 즐거운 주말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