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 운동](1) 전태일 분신자살(上)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6. 22:41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실록 민주화 운동](1) 전태일 분신자살(上)
인기멤버
2024.06.01. 05:08조회 5
댓글 0URL 복사
[실록 민주화 운동](1) 전태일 분신자살(上)
경향신문 입력 : 2003-04-22 17:16:27
1970년 11월13일 오후 1시30분. 청계천 평화시장 주변에는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시장 앞길의 국민은행 근처 여기저기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고, 시장으로 통하는 골목 곳곳에는 경찰과 경비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경찰의 몽둥이에 이리저리 어수선하게 밀리고 있던 한 순간, 누군가가 국민은행 앞길로 뛰쳐나왔다. 화염에 휩싸인 몸. 스스로를 사르는 불길 속에서 그는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감독관과 노동청도, 정치가와 지식인도, 신문도 방송도,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애타는 호소에 귀기울여주지 않았기에 마침내 제 몸을 불살라 불의한 세상을 두들긴 그는 22살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었다.
후일 전태일의 삶을 평전(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가 90년 ‘전태일 평전’으로 개정판 발간)으로 복원한 고 조영래 변호사는 그의 죽음을 ‘인간 선언’으로 묘사했다. “가난과 질병과 무교육의 굴레 속에 묶인 버림받은 목숨들에게도,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먼지구덩이 속에서 햇빛 한번 못보고 하루 16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어린 여공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선언.
“업주들 폭리에 양심도 없어”그 선언은 또한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수출 1백억달러 달성’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달성’을 내걸고 고속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70년대 한국사회에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기도 하였다.
청계천 6가에서부터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600m에 걸친 청계천 연변은 원래 서울의 이름높은 무허가 판자촌이었다. 1959년 시작된 청계천 복개공사로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평화시장이었다. 연건평 7,400여평에 이르는 평화시장 건물은 수백개의 점포와 작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소규모 영세 피복 제조업체와 의류점이 입주했다. 이후 1968년에 통일상가, 1969년에 동화시장이 평화시장 좌우에 들어섬으로써 이들 3개 시장은 1970년 현재 전국 기성복 수요의 70%를 담당하는 국내 최대의 기성복 공급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3개 시장과 근접 상권에는 총 800여개의 피복 제조업체에서 3만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재단사와 재단보조, 미싱사와 미싱보조, ‘시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약 80~90%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공들이었다. 특히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익히는 시다는 대부분 12~15세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들의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은 믿기 어려울 만큼 열악하였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4~15시간, 일요일도 한달에 두번밖에는 쉬지 않았고, 명절 대목에는 2, 3일 철야작업도 예사였다. 그렇게 일하고도 시다는 월 1,800~3,000원, 미싱보조는 3,000~1만5천원, 미싱사는 7,000~2만5천원을 받았다. 가장 임금이 높은 재단사도 1만5천~3만원 수준이었다.
작업 환경도 비참했다. 평균 2평 정도의 작업장에서 보통 1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일을 했다. 심지어 업주들은 이 비좁은 공간마저 위 아래로 갈라 다락방 작업장을 만들기도 했다. 각종 설비와 비품, 작업도구와 재료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는 좁은 공간에서 몸도 제대로 돌리지 못하고 일하다보면 원단 더미에서 나오는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르고 실밥과 먼지가 머리 위로 하얗게 내려앉았다. 더욱이 시장 건물 자체가 통풍과 채광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지어져서 대부분의 작업장들이 3면이 벽이고 출입구쪽 한 면만 복도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평화시장의 경우 1만명 이상을 수용하는 건물이면서도 환기시설이 하나도 없었으며, 대낮에도 거의 햇빛이 들지 않았다. 어두운 실내를 밝히느라 백열전등이 하루 종일, 그것도 작업자의 바로 눈앞에 켜져있었다. 게다가 400여개의 작업장이 있는 평화시장에 상수도는 세곳뿐이었고, 화장실은 2,000명당 3개꼴이었다.
채광없는 작업장서 밤샘예사이런 작업환경 속에서 하루 14~15 시간을 일하다보니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예외없이 만성 위장병, 신경통, 피부병, 각종 기관지 질병, 눈병에 시달렸고 폐병에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가도 3년밖에 못써먹는다”는 말이 떠돌아다닌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 들어간 때는 1964년, 그의 나이 16살 때였다. 그때까지 그가 살아온 삶은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면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가 또 돌아온다는 것이 무서운” 밑바닥 삶이었다.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인 아버지 전상수와 어머니 이소선 사이에서 태어난 4남매의 맏이였다. 부산에서 소규모 양복 제조업을 하다 망해버린 그의 아버지는 전태일이 6살 나던 해인 54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역 근처의 염천교 밑에서 몇달간 노숙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들 가족의 생활은 이후 굶주림, 이산(離散), 부랑으로 점철되었다.
아버지가 미싱 한두대를 집에 들여다놓고 일을 해서 입에 풀칠이나마 하는 행복한 때도 간간이 있었지만, 10여년 동안 그들 가족은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용두동의 천막촌, 이태원의 산마루턱, 시장 한편의 임시 잠자리, 토막(土幕) 단칸방을 전전하며 극빈의 삶을 살아야 했다. 낙담한 아버지는 폭음과 술주정, 매질을 일삼았고 어머니는 병이 들었다. 가장이 되다시피한 전태일은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신문팔이, 삼발이 장사, 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대구에서 살던 15살 때, 급기야 어머니가 돈을 벌러 서울에 간다며 집을 나갔고,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다 못한 전태일도 막내 동생 순덕을 등에 업고 상경했다.
동생을 보육원에 맡기고 남대문 시장에서 손수레 뒤밀이와 구두닦이를 하던 중 그는 형을 뒤따라 혼자 서울로 와서 거지생활을 하고 있던 남동생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가 평화시장에 시다로 취직한 때는 바로 상경 1년 만에 동생을 만나 형제가 함께 구두통을 메고 다니던 그 즈음이었다. 구두를 닦으러 돌아다니다 평화시장의 어떤 학생복 맞춤집 앞에서 ‘시다 구함’이라는 광고를 보고는, 누더기 옷을 깨끗이 빨아입고 다음날 다시 찾아가 취직한 것이다.
여공 작업도중 피토하며 실신하루 14시간 일하고 월급은 1,500원(당시 커피 한잔이 50원이었다). 시다로 취직할 당시 그가 꿈꾸었던 것은 어서 기술을 배워 안정된 생활을 하며 뿔뿔이 흩어져있는 가족들을 다시 모으는 것, 고생만 하신 어머니를 한번 편하게 모시는 것, 그리고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뒤 15살 때 대구의 청옥고등공민학교를 잠시 다닌 것으로 끝나버렸던 학업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참담한 현실은 부랑 노동자에서 임금 노동자로 변신한 전태일의 소박한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러한 환경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전태일의 수기 중에서).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 지극한 연민 때문에 그는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을 맹세하게 된다.
전태일은 미싱보조와 미싱사를 거쳐 1967년 봄 재단사가 되었다. 그동안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이 다시 모여 살게 되고 무허가 판잣집이나마 도봉산 기슭에 집도 마련하는 등 생활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하였다. 평화시장의 현실은 그가 어떻게 해보기에는 너무나 철벽 같았다. 재단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결심했던 것처럼 그는 여공들을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했다. 차비를 털어 배고픈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먼 길을 걸어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사흘 밤이나 잠 안오는 주사를 맞고 일을 해 눈도 보이지 않고 손도 마음대로 펴지지 않는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시다 앞에서 그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는” 현실은 일개 재단사의 선의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미싱사 한명이 일을 하다가 재봉틀 위에 피를 토하는 일이 일어났다. 전태일이 직접 그 처녀를 데리고 병원엘 갔는데 폐병 3기였다. 병을 이유로 미싱사는 해고되었고, 이 일은 전태일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그 자신도 사사건건 여공들 편을 든다는 이유로 곧 해고되고 말았다.
〈후원/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취재지원/한국언론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