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 (449)
삭신댁
산삼에 눈멀어 얕은꾀 쓰다가
능구렁이들이 짜놓은 판으로
삭신댁 귀가 쫑긋 솟았다. “최 처사는 산삼 밭을 가꾸는가? 어떻게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이 산삼을 캐는가 그래?” 풍기에서 가장 용하다는 황 의원이 묻자 약초꾼 최 영감은 “어험 어험” 점잖게 헛기침하고 나서 “지난해 가을 올무에 걸려 발버둥 치는 새끼 밴 사슴을 살려줬더니 그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산삼 밭을 알려주지 뭡니까 글쎄.”
황 의원 방과 약제실 사이는 창문으로 가로막혀 있지만 처방전을 받아 한지로 포장하는 약제실의 삭신댁은 미닫이 너머 의원 방의 숨소리까지 듣는다. ‘처사는 무슨 얼어 죽을 처사, 흥정할 때만 능글맞은 황 의원이 약초꾼 최 영감을 처사라 치켜세우지.’
볼품없는 홀아비 최 영감은 인물이 반반한 청상과부 삭신댁을 처음 봤을 때부터 줄기차게 구애하고 있지만 삭신댁은 콧방귀만 뀐다. 하오나 ‘산신령님이 산삼 밭을?’ 삭신댁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밤 산삼값을 받아 전대가 무쭐한 최 영감이 너비아니 안주에 청주를 마시고 막 주모와 해웃값을 흥정하는데 이럴 수가, 삭신댁이 하얗게 분을 바르고 입술은 새빨갛게 칠한 채 주막에 들어서면서 최 영감을 찾는 게 아닌가!
이튿날 해가 중천에 올라왔을 때 주막을 나선 최 영감과 삭신댁은 손을 잡고 소백산 첩첩 산골 오솔길에 들어섰다. 밤새도록 힘을 탕진, 오르다 쉬고 오르다 쉬면서 저녁나절에야 최 영감의 세칸짜리 너와집에 다다랐다.
개다리소반에 닭 한마리를 묶어놓고 다락에서 머루주를 꺼내 맞절하고 합환주를 마신 후 혼례식을 마치자 신부 삭신댁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에 들어가 훤칠한 솜씨로 닭볶음탕 저녁상을 차려왔다.
사흘 동안 닭 다섯마리를 잡아먹으며 신혼 깨를 쏟아 내고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삭신댁이 찾는 것은 단 하나, 산삼 밭이다. 삭신댁도 바지를 입고 종아리를 끈으로 묶고선 부지런히 최 영감을 따라다녔다. 뜨거운 밤이면 삭신댁이 코맹맹이 베갯머리송사로 산삼 밭을 물어보지만 꾀가 졸졸 흐르는 최 영감이 선뜻 패를 깔 턱이 있나!
사실 소백산 속에 산삼 밭이 있기는 있다. 단양 사는 젊은 약초꾼 배 총각의 조부가 생전에 산삼 씨를 몰래 소백산에 뿌려두고 가끔 마른 쇠똥 가루도 뿌려주며 산양삼을 길렀다. 진짜 산삼은 산삼 씨를 산새들이 따 먹고 멀리 날아가 새똥이 땅에 떨어져 자연적으로 발아된 것이지만 산양삼은 사람이 산삼 씨를 받아 뿌려 키운 거라 약효가 떨어진다.
가끔씩 최 영감 너와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는 단양의 젊은 심마니를 미행해 산양삼 밭 위치를 알아내 몰래 훔쳐서 풍기 황 의원에게 팔았던 것이다. 엉큼한 황 의원은 첫눈에 산양삼이라는 걸 알았지만 값을 후려치고 부자 영감들에게는 진짜 산삼인 양 비싸게 팔았다.
황 의원은 최 영감의 입을 막기 위해 실컷 데리고 놀아 싫증이 난 조제실 삭신댁을 최 영감에게 넘겨준 것이다. 뒤가 구린 것들이 서로서로 약점을 물고 순조롭게 톱니가 물려 돌아가니 삭신댁 혼자 힘으론 최 영감의 숨겨진 패를 까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나무에 밧줄을 묶고 백하수오를 캐러 절벽을 내려가던 최 영감이 떨어져 고관절이 박살 났다. 밧줄이 풀려 있었지만 최 영감은 삭신댁을 족치지 않았다. 족쳐봐야 실익이 없다는 걸 꿰차고 있었다. 최 영감을 업고 집까지 왔고 삼시세끼 밥 수발을 하며 황 의원에게 가서 접골 약을 지어오는 건 삭신댁인 것이다.
“처사님∼ 약값이 떨어졌소.” 최 영감은 속으로 이를 갈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지 않을 수 없어 산양삼 밭 위치와 황 의원을 겁박하는 방법도 일러줬다. 삭신댁이 산양삼을 망태에 넣어 황 의원 진료실에 들어왔다. 황 의원이 삭신댁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문을 잠그고 삭신댁을 쓰러뜨렸다. “버릴 때는 언제고.” “유부녀는 달라.”
접골 약을 짓고 푸줏간에서 사골을 사서 집으로 갔다. 장마철이 지나자 욕창으로 온몸이 짓물러 최 영감은 한 많은 이승을 하직했다. 염을 하고 양지바른 산자락에 묻어준 것은 산양삼 밭 주인인 단양의 배 총각이다. 최 영감을 묻고 내려온 배 총각과 삭신댁이 부엌에서 목간을 하고 호롱불을 끄자 너와집이 흔들렸다. 삭신댁은 삭신이 노글노글해졌다.
첫댓글 항상 재밌게 잘봅니다ㆍ
역시나 그건 종겨
죽은 최영감만 불쌍하게 됐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