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상(恨無常)
호비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여인은 결국 나를 팔아넘겼군. 우리는 서쪽으로 뚫고 나갑
시다.]
호비는 피리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공격
을 해 온 적은 적지않은 수였다. 만약에 원성이 상처를 입지 않았
다면 두 사람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없었다.
원성은 입을 열고 말했다.
[그대는 곧장 서쪽을 뚫고 나가도록 하세요. 나를 생각할 것 없
어요. 나는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책이 있어요.]
호비는 가습 속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강한 어
조로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죽으나 사나 함께 있도록 합시다. 그러니 그대
는 빨리 나를 따르도록 하시구려.]
원성은 그가 거칠게 호통을 치자 오히려 흐뭇한 것이 되려 기분
이 좋았다. 사실 그녀는 중상을 입어 연편을 제대로 휘두를 수가
없는 몸이었다. 그녀는 말고삐를 흔들어 말을 몰고 호비의 뒤를
따랐다.
호비가 손에 칼을 뽑아들고 수 장 쯤 달려나가게 되었을 때 다
섯 명의 어렴풋한 그림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앞을 막아서는 것
이 아닌가?
호비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내가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나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한
칼에 살수를 펼쳐야 하며 절대로 반 푼어치의 사정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시 그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적은 사람의 수로서
많은 사람의 적을 대항하게 되었지만, 먼저 손을 쓰지 않고 뒤에
손을 쓰되 여러 사람을 제압한다는 요결을 지키고자 작정하며, 왼
쪽 어깨를 앞으로 당기듯 하면서 왼손을 비스듬히 뻗쳐내고 오른
손의 칼은 끝이 다리 옆으로 드리워지도록 했다.
복강안 부중에 있는 두 무사 가운데, 한 사람은 철편(鐵鞭)을
손에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비도를 호비를 겨눈 채 일제히
호통을 내지르더니 각기 좌우 양쪽에서 호비의 머리를 노리고 공
격해 왔다.
호비는 그들 두 사람이 손을 쓰는 것을 보자 그들의 무공이 대
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일단 싸움이 시작된다면 삽시간에 승리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더군다나 싸우는 와중에
나머지 사람들이 자기들을 포위한다면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는 것
은 더욱더 어렵게 되는 형편이었다.
이윽고 그는 비스듬히 솟구치며 휙 하니 칼을 들어 다섯 사람
가운데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내려찍었다. 그 무사는 손에
장검을 들고 막으려고 했다. 호비는 몸이 허공에 떠있던 상태에서
내경(內勁)을 돋구고 두 다리를 뻗쳐내며 번개처럼 날쌔게 네번째
무사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발길질에 채인 그 무사는 곧장 날아가
며 미친듯이 선혈을 내뿜었다.
검을 쓰는 무사는 순간 무기에 거대한 힘이 실리며 그 힘이 손
끝에 밀어닥치는가 하더니 다시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느끼게
되었다. 순간 늑골이 일제히 부러지는 충격을 받고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혼절해 버리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그가 일순간에 두 동료를 해치우는 것을 보고 모두
다 경악했다.
귀두도(鬼頭刀)를 든 무사가 호통을 내질렀다.
[호 나으리, 정말 뛰어난 무공이구려. 불초 사도뢰(司徒雷)가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소이다.]
그러자 그 철편을 들고 있는 무사도 입을 열었다.
[불초 사불당(謝不撞)도 고명한 절초를 가르침 받겠소이다.]
호비는 부르짖듯 말했다.
[좋소이다!]
그리고는 칼을 빙글 돌려 자기 몸 주위에다가 허연 광채를 수놓
으며 휙휙! 칼빛을 번득이면서 세번의 허초를 펼쳐내고 곧장 상대
방에게 육박해갔다. 사도뢰와 사불당은 급히 두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세번째의 무사가 부르짖었다.
[불초는 동방(東方)......]
겨우 그 무사는 자기의 성씨를 밝혔을 뿐이었는데 호비의 칼등
은 어느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으며, 그
자는 뇌골이 박살나며 즉시 절명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이름이
동방 무엇인지 밝힐 수도 없게 되고 말았다.
사도뢰와 사불당은 엄히 문호를 지키며 두 걸음을 물러서기는
했으나 호비가 뚫고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피리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네 명의 무사들이 사도뢰와 사불
당의 등뒤로 달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섰다. 호비는 순식간
에 잇따라 세 명의 적을 처치했지만 사도뢰와 사불당은 견문과 경
험이 넓은 듯 앞으로 나와서 직접 호비의 공격을 맞받지 않고 두
걸음이나 물러서며 호비의 퇴로를 가로막았다.
호비는 내심 큰일났구나 생각하며 야전팔방장도식(夜戰八方藏刀
式)이라는 초식을 펼쳐 공격하면서 왼발을 축으로 삼아 한 바퀴
원을 그렸다. 그와 같이 한 번 돌자 어느덧 적의 숫자를 헤아릴
수가 있었다. 서쪽에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 처치한 세 사람을 계
산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은 스물네 명이나 되었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낭랑히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
고 우렁찼다. 그리고 곧이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호형제, 반갑네. 반가워! 매번 자네를 볼 때마다 자네의 무공
이 한층 더 증진된 것을 보니 진정 영웅은 젊은이 가운데서 나오
는가 보네. 정말 훌륭하네. 훌륭해!]
바로 전귀농의 음성이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호비는 아랑
곳하지 않고 서쪽의 여섯 명의 적을 응시했다. 그러자 네 명의 무
사들이 각기 입을 열었다.
[불초는 장녕(張寧)이라고 하오!]
[불초는 정문패(丁文沛)로서 가르침을 받을까 하오!]
[불초 정문심(丁文沈)은 호 나으리께 인사를 드리오!]
[허허허, 노부는 진경부(陳敬夫)이오!]
호비는 그들의 소개가 끌나는 즉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갑자기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왼손의 손가락을 뻗치며 북쪽에 있는 두번
째 무사의 흉구점을 찢어갔다. 그 사람은 손에 한 쌍의 판관필을
들고 있었는데, 바로 타혈(打穴)의 고수였다. 그는 상대방이 손가
락을 뻗쳐 혈도를 짚으려 들자 판관필을 벼락같이 뻗쳐내며 오른
쪽 어깨에 있는 결분혈(缺盆穴)을 짚으려 들었다.
이 일초는 수세를 공세로 전환한 것으로서 실로 지극히 무서운
살수였으며, 호비가 먼저 손을 뻗쳐내기는 했으나, 그 자의 판관
필의 길이가 두 자 두 치나 되어 혹비의 손가락이 그 자의 혈도에
닿기 전에 호비의 결분혈이 먼저 상대방에 의해 짚힐것 같았다.
헌데 뜻밖에도 호비는 왼손을 밀쳐내며 재빨리 판관필을 낚아챘
다. 그러면서 팔관필을 앞으로 내밀자 그 사람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지러졌다. 판관필의 끝이 그의 목구멍을 뚫어 버린 것이
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불초는 황초(黃樵)이오!]
[불초는 오공권(俉公權)이외다!]
검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어느덧 등심까지 뻗쳐오고 있었
다.
호비는 앞으로 덮치듯 몸을 날렸다. 그러자 두 자루의 칼이 허
공을 치게 되었다. 호비는 그 기세로 칼을 돌려 아래에서 윗쪽으
로 황초의 손목을 베어갔다. 이 수법은 호가도법 가운데 가장 정
묘한 무예가 강한 사람들은 필수적으로 익히는 도법이었다. 그런
데 뜻밖에도 황초는 십팔로(十八路)의 대금나수에 정통했으며, 임
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칼이 자기의 손목을 베어 오자
경황 중에도 곧장 무기를 내던지고 손뻗쳐 곧장 호비의 칼등을 움
켜잡으려고 들었다.
그는 두 가닥의 쥐꼬리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머리는 작은 편
이었으며, 눈은 가늘게 찢어져 있고, 얼굴이 넓다란 것이 볼상 사
나운 몰골이었지만, 이와 같은 초식의 변화는 호비보다도 신속한
편이었다. 그는 다섯 개의 닭발톱 같은 손가락이 한번 내뻗는가
했는데 어느덧 호비의 칼등을 움켜잡는 것이었다.
호비는 자기의 힘이 세다는 것을 믿고 칼을 휘둘러 앞으로 쪼개
내려 들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황초의 팔힘 역시 적지 않았기에
호비는 제대로 초식을 펼쳐내지 못했다.
적의 역습을 받고 멈칫하는 순간 호비의 등뒤에서 다시 세사람
이 동시에 공격해 왔다. 등뒤의 세 사람이 공격해 올 때까지는 아
직도 약간의 여유가 있었으나 반드시 짧은 시간 내에 황초를 처리
해야했다.
그는 지금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고 상대가 강적이기 때문에 만
약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다면 한 푼의 위협을 감소시킬 수 있
을 것 같았다.
그와 같이 가늠해 본 즉시 그는 신속히 칼에서 손을 떼면서 동
시에 두 손을 앞으로 뻗쳐내 퍽! 하니 황초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황초는 일순 뒤뚱했으나 결코 쓰러지지 않았으나 칼을 잡고 있던
손은 끝내 풀어지게 되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다시 쥐게 되자 몸을 돌리는 즉시 세 가지의
무기를 막아냈다. 그 세 명의 무사들 가운데 한 사람은 오공권이
었고, 한 사람은 노인인 진경부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체구가
우람하고 호비보다도 머리가 하나 반 정도는 더 큰 사람인데 손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숙동곤(熟銅棍)으로 사십 여 근은 족히 나갈
것 같았다. 호비가 그 자의 숙동곤을 칼로 막게 되자 가슴팍이 띵
할 정도로 충격이 전해졌으며, 몸을 날리려고 했을 때 좌우 양쪽
에서 두 사람이 공격해왔다.
원성은 말을 타고 뒤쪽에 있었다. 뭇 무사들이 모두 다 호비를
포위 공격하느라고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록 중상
을 입은 몸이었지만 호비가 다섯 사람을 헤치며 펼치는 일초 일식
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호비의 안위에 쏠
려 있었고, 그가 한번 몸을 날리는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 몸을
날려 피하는 것 같았고, 한 초의 칼부림과 일장의 격출일지라도
그녀가 스스로 손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성은 그가 다섯 사람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즉시 말을 몰아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쪽으로 달렸다. 그녀
는 말채찍을 휘둘러 편법 가운데 양관절류(陽關折柳)
라는 일초를 펼쳐 어느덧 그 우람한 체구를 가진 대한의 머리와
몸을 감았다. 그 대한은 정히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있었다.
[불초는 고일력(高一力)으로 가르침을......]
갑자기 목이 바짝 죄여지자 그만 말을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는 힘이 좋았지만 별안간 호흡이 막히게 되었고, 말이 끌어
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 여세로
옆에 있는 장녕마저도 쓰러지고 말았다.
호비는 두 명의 적이 줄어들자 재빨리 몸을 날리며, 칼을 휘둘
러 어느덧 정문패, 정문심 형제를 찍어 땅바닥을 내꽂았다.
그런데 갑지기 등뒤에서 세찬 파공성이 일며 누군가 바짝 다가
드는지라, 미처 발을 돌릴 사이도 없이 손을 뒤로 돌리며 도와 호
괴망번신(倒臥虎怪 飜身)이라는 수법으로 칼을 선회시키듯 쪼개냈
다.
순간 창! 하는 가벼운 음향이 울려퍼지면서 손에 든 칼이 가벼
워졌다. 그의 칼은 어느덧 적의 예리한 무기에 잘려지게 되었고,
적의 무기는 그 기세를 빌어 들어닥치고 있었다.
호비는 깜짝 놀라 왼발로 가볍게 땅을 차고 앞쪽으로 곧장 일
장 남짓 솟구쳤다. 그러나 왼쪽 어깨에 한차례 격렬한 통증이 오
는 것을 느끼며, 암습을 가한 사람은 바로 전귀농이라는 것을 알
았다. 따라서 그는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귀농의 무공은 별로 대단치 않지만, 그의 보도는 예리하기 이
를데 없어 실로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오른발을 땅에
내려놓으며, 왼손으로 후려치는 동시에 오른손을 갈고리처럼 하여
한 무사 손에 들린 칼을 낚아채며 즉시 그 칼로 휘둘렀다. 이 한
수의 공수탈백인(空手奪白刃)은 깨끗하고도 날렵하기 이를데 없었
으며, 잇따라 칼을 선회시키는 공격 역시 날카롭고 매서웠다.
사실 예리한 무기를 든 적이 잇따라 들어닥치고 있었기 때문에
찰라의 순간이라도 늦는다면 자기의 몸뚱아리는 전귀농의 손에 들
린 보도에 난도질 당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호비는 감히 칼로서 적의 보도와 맞딱뜨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피하면서 경신법을 펼쳐 그와 지구전을 벌였다. 그러나 칠팔초를
겨루게 되었을 때 십여 명의 적이 일제히 그를 에워싸게 되었고,
다른 세 사람은 원성을 공격했다.
원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자 호비는 마음이 산란해져 멈칫하는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칼은 보도에 의해 다시 잘려지고
말았다. 그 보도의 예리함은 무쇠를 무우 자르듯 하는 경지에 이
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귀농은 호비를 능지처참하겠다는 마음으로 서늘한 광채를 번
득이며 조금도 손에 사정을 두지 않고 일초일식을 매섭게 펼쳐냈
다.
그는 평소 검을 사용했으며, 칼(刀)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도가 예리하기 이를데 없었기 때문에 아무렇게 휘둘러도 호비는
결코 언감생심 그 예리함에 맞서지 못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보도를 휘두르며 곧장 짓쳐 들어왔다.
호비는 다시 적의 무기를 빼앗아 상대하기는 했으나 칼과 창이
이곳저곳에서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도저히 손을 쓸 여유가
없었다.
순간 창! 하는 소리와 함께 왼쪽 어깨를 한 무사의 화창(花槍)
에 찔려 기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호가야, 이제 투항해라!]
[당신같은 호걸이 어찌 이곳에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가?]
[우리들은 사람이 많아 중과부적이니, 패배를 시인하더라도 체
면을 잃는 것은 아니다!]
전귀농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매섭게 보도를 휘두르며 공격
을 해왔다. 호비는 어깨와 뒷등의 상처가 매우 깊어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때 한 여인이 큰 소
리로 부르짖었다.
[오라버니, 그 젊은이의 목숨을 해치지 마세요!]
호비는 이를 악물며 일전을 벌이고 있었으나 그것이 묘부인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호통을 내질렀다.
[누가 당신 보고 알량한 인정을 베풀어 달라고 했소?]
순간 그는 다시 허리춤을 발길질에 걷어차였다. 호비는 극도로
분노하여 오른손을 전광석화처럼 뻗쳐 그 사람의 발목을 움켜잡고
들어올리며 빙글 원을 그리듯 휘둘렀다. 뭇 무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이 이는듯 일시에 짓쳐 들어오지는 못했다.
호비의 손에 들린 사람은 바로 장녕이었다. 그는 무기를 손에서
놓치며 호비가 내지르는 바람에 어지러워져 제대로 발버둥 한번
치지 못했다.
호비는 원성이 마상에서 이리저리 피하기에 급급하며, 그녀가
타고 있는 말도 몇 차례 칼질을 당하여 끊임없이 울부짖는 것을
보고 즉시 장녕을 든 채로 원성 앞으로 내달으며 부르짖었다.
[나를 따라 오시오!]
순간 원성은 몸을 솟구치며 뛰어내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호
일도의 무덤 옆에 이르게 되었다.
무덤 옆의 잣나무는 상당히 자랐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무를 의
지하고 싸움을 벌이자 적의 공격은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게 되
었다.
호비는 장녕을 쳐들고 호통을 내질렀다.
[당신들은 이 사람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작정이오?]
전귀농은 부르짖었다.
[반적(反賊) 호비를 죽이면 복대수께서 크게 상을 내릴 것이
다.]
그 말뜻은 장녕이 죽든 살든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전귀농은 뭇 사람들이 주저하며 망설이자 자신이 먼저 칼을 휘
두르며 달려들었다.
호비는 장녕을 인질로 잡는다 하더라도 적을 물러서도록 위협하
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내심 전귀농이 보도를 손에
들고 있고 무공이 고강한 편이라 그를 잡는 것은 수월치 않는 노
릇이니, 역시 묘부인을 인질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나 묘부인은 십여 장이나 떨어져 있어 아무리 내닫는다 하
더라도 포위망을 뚫고 그곳까지 달려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호비는 전귀농이 한걸음 한걸음 가까이 다가들자 즉시 장녕의
몸을 더듬어 그의 몸에 지닌 무기를 사용하여 잠시간이나마 저항
하려 했다. 과연 그의 몸에는 묵직한 표낭이 달려 있었다.
호비는 왼손으로 그의 혈도를 짚고 오른손으로 그의 표낭을 낚
아채며, 표낭 안에서 묵직한 강표를 한 자루 꺼내 즉시 전귀농의
아랫배를 겨냥하고 휙! 하니 강표를 던졌다.
강표가 세찬 파공성을 일으키며 전귀농의 아랫배 격중되려는 순
간, 그는 급히 칼을 휘둘러 막았다. 강표는 즉시 두 토막으로 잘
라지며 앞의 뾰족한 부분이 세찬 기세로 전귀농의 오른쪽 허벅지
에 박히며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동시에 악! 하는 외마디의 비명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한 명의 무사가 목에 강표을 얻어맞고
는 뒤로 나동그라졌다.
전귀농은 욕을 했다.
[이 좀도적아. 네가 오늘 어디로 도망치는지 두고 봐야겠구나.]
그는 감히 짓쳐들지 못하고 뭇 무사들에게 호령하여 두 사람을
에워싸도록 했다.
복강안 부중에서 이곳으로 온 무사들은 전귀농을 포함해서 모두
스물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 중 호비의 칼에 베이거나, 강표에
적중되고, 발길질에 채여 쓰러진 사람이 모두 아홉 명이나 되었
다. 하지만 호비도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상대방은 열여덟 명이나 되었으며,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이때는 이미 완전히 승기를 잡은 편이라 몇몇은 호비를 아끼는
마음에서 그에게 투항하라고 외쳤다.
호비는 원성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동쪽으로 뚫고 나가 사람들을 유인할테니 그대는 빨리 서
쪽으로 달려가구려. 백마는 소나무 아래에 매여 있소.]
원성은 담담히 말했다.
[백마는 그대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예요.]
호비는 힘주어 말했다.
[지금 니꺼 내꺼 따질 여지가 어디 있소? 나는 그대를 돌볼수는
없지만 포위망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은 할 수 있소.]
원성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나를 돌봐줄 필요는 없으니 그대나 이대로 떠나도록 하세요.]
호비의 계획대로 한다면, 한 사람은 질풍같이 말을 달려 이 자
리를 빠져 나가고, 한 사람이 용감하게 칼을 휘둘러 적들을 추풍
낙옆처럼 쓰러뜨리며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결코 가망없는 일 만
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원성도 호비도 서로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
람은 이 생사의 고비길에서 서로 헤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아니면 두 사람은 내심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며 함께 죽
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호비는 원성의 손을 잡고 말했다.
[좋소. 원소저, 우리 함께 죽도록 합시다. 나는...... 나는 무
척 기쁘오!]
원성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나는 출가외인이예요. 나를 원소저라고 부르지 말
아요. 나는 성이 원도 아니예요.]
호비는 침울해졌다. 생사의 고비길에 처해 있는데도 원성이 호
의를 가지고 대해 주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만 내세우는 모습을 보
자 일말의 슬픔을 느낀 것이었다.
이때 무사 한 명이 하얀 광채를 번득이며 단도를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육박해 왔다. 호비는 돌맹이 를 하나 집어 들고 하얀 광
채의 테두리 안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그 무사는 칼을 들어 돌맹
이를 튕겨냈다. 호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표를 내던져 그
무사의 가슴에 적중시켰다. 그 무사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에
고꾸라져 절명하고 말았다.
전귀농이 부르짖었다.
[저 젊은 도적은 흉악하기 이를데 없으니 일제히 덤벼들도록 하
자! 설마 그가 정말 머리가 세 개 달리고, 팔이 여섯 달린 괴물이
겠는가?]
호비는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바탕의
결전을 벌여야 하며, 설사 서너 명은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저
하늘의 달과 별, 푸르른 들판과 아름다운 들꽃들, 이 모든 것과
영원히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에 밀려왔다.
전귀농은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며 십육 명의 무사들에게 사방으
로 공격하여 저 도적놈을 난도질하라고 독려했다. 이에 무사들은
일제히 응대했다.
전귀농은 다시 한 마디를 덧붙여 부르짖었다.
[저 녀석은 무기가 없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를 난도질하
여 육젖을 담그도록 하세!]
묘부인이 갑자기 다가서며 말했다.
[큰 오라버니, 잠깐만요. 나는 저 젊은이에게 할 말이 있어요.]
전귀농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란, 이쪽으로 오지 마오. 저 젊은 도적이 미쳐 날뛰면 당신
을 해칠 지도 모르오.]
묘부인은 여전히 굽히지 않았다.
[그는 곧 죽게 될 건데 뭘 그러세요. 내가 그에게 한 마디 한다
고 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전귀농은 더이상 말리지 못하고 달래듯이 말했다.
[좋소, 그렇다면 한번 이야기해 보구려.]
묘부인은 넌즈시 입을 열고 물었다.
[당신은 누이의 유골도 묻지 못하고 죽을 작정인가요?]
호비는 당당히 말했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요? 나는 여인에게 욕을 하고 싶지 않
으니 당신은 좀 더 멀찌기 떨어져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묘부인은 다소곳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부모에 관해서 이야기하겠다고 응낙했어요. 당신
은 곧 죽게 될 몸인데, 그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으세요?]
전귀농이 호통을 내질렀다.
[아란, 당신은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를 하는거요? 당신이 알
턱이 없지 않소?]
묘부인은 전귀농을 아랑곳하지 않고 호비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세 마디만 하겠어요. 모두 당신 아버지와 관계
가 있는 이야기예요. 당신은 듣겠어요?]
호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나는 의문의 응어리를 남긴 채 눈을 감지는 못할 것 같
으니 어디 한번 말해보시오.]
묘부인는 정색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만 조용히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나를 인질로
잡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당신은 응낙할 수 있겠어요?]
호비는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의문을 풀어준다면 나
는 매우 고맙게 생각할 것인데 어찌 당신을 해치겠소. 천하에는
사내대장부가 많다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이 전귀농처럼 비열한
소인배인줄 아시오?]
전귀농의 안색이 울그락 푸르락 했지만 노기를 참고 있었다.
그는 남란이 호비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평소 그녀의 비위를 거스르지 못한 처지인데다가 곧 죽을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자 이것까지 막
을 수는 없다고 여기며 내심 생각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나의 명성에는 누를 끼치는 말을
할 것이니,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
다.)
묘부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호비 앞으로 다가서서 호비의 귀
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당신은 유골 항아리를 묘비 뒤 석 자쯤 되는 성 곳에 묻도록
하세요. 그곳을 파면 보도(寶刀)가 한 자루 있을 거예요.]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즉시 물러서서 낭랑히 말했다.
[이 일은 오직 묘인봉과 관계가 있을 뿐이예요. 당신은 이일을
안 이상 죽어도 미련이 없을 것이니 빨리 유골을 묻어주고 편히
잠들 수 있도록 하세요. 더우기 당신은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셈
이니 안심하고 죽을 수 있을 거예요.]
호비는 내심 많은 의혹을 느꼈으며, 그녀의 진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기에 그녀가 일부러 자기를 희롱하고 있지는 않다
는 생각이 들어 내심 작정했다.
(일단 둘째 누이의 뼈를 묻고 나서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자.)
이윽고 그는 묘비 뒤쪽의 석 자쯤 되는 곳을 가늠하고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전귀농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아란은 그의 부친이 묘인봉의 손에 죽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했었구나.)
그 생각에 그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리고 그녀
를 바라보았다. 그는 남란이 호비에게 유골을 묻어주라고 하는 소
리를 듣고, 어쨌든 호비는 조만간에 죽게 될 것이니 서두를 필요
는 없다고 생각하며 무사들에게 손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십육 명이나 되는 무사들은 무기를 들고 호비와 일 장 정도의
간격을 두고 둘러서서 감시를 했다.
원성은 호비가 정영소의 유골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것을
보고 내심 생각했다.
(저이도 나도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와 같이 생각하면서 그녀는 무릎을 꿇고 합장의 예를 올리며
나직이 불경을 낭송했다.
호비는 왼쪽 어깨 상처의 통증이 더욱 심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도 정성스레 땅을 파 내려갔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원성이 단정
히 무릎을 꿇고 합장하고 있었다. 호비는 그녀의 표정과 태도가
장엄하고 엄숙한 것을 보자 마음이 편해지며 내심 생각했다.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부처님께 귀의하였는데 어찌 내가 환속
하라고 강요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 그녀가 응낙하지 않았기 망정
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죽을 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편치 못할 것
이다.)
별안간 손끌에 얼음처럼 차갑고 딱딱한 촉감을 느꼈다. 묘부인
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천하제일의 보도가 있을 거예요!)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않고 양쪽을 더듬어 보니 과연 칼집에 칼
이 꽃혀 있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쥐고 가볍게 뽑았다. 칼날이 한
치 남짓 뽑혔으나 푸른 예기가 번득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
다.
(묘부인의 이 일을 오직 금면불 묘대협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칼은 묘대협이 묻어놓은 것이 아닐까? 설마 묘대협이
우리 아버님을 기리기 위해 이 칼을 묻어놓은 것일까?)
그의 짐작은 틀림없었다. 다만 그는 묘인봉이 묘부인과 혼례를
올리게 된 사연이 바로 이 냉월보도(冷月寶刀) 때문이고, 또한 이
보도 때문에 금슬 좋은 부부의 연이 깨어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두 사람 이외에 이 일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비는 칼자루를 쥐고 고개를 돌려 묘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
가 나직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이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
지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어져 갔다.
전귀농이 큰 소리로 불렀다.
[아란! 객점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이 젊은 도적을 죽인 후에
우리 함께 축배를 들도록 합시다!]
묘부인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황량한 들판을 가로질러 점차
멀어져 갔다.
전귀농은 호비를 바라보며 호통을 내질렀다.
[이 젊은 도적아, 빨리 묻어라! 우리들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
다!]
호비는 냉랭히 응수했다.
[좋다. 더 기다릴 것도 없다!]
그리고는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순간 푸른 광채가 눈 앞에 번
득했으며 서늘한 한기가 뻗쳐왔다. 그의 손에는 이미 시퍼렇고 기
다란 칼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칼빛은 추수와 같았고, 차가운
달빛 아래 파도처럼 춤추며 일렁이고 있었다.
전귀농의 뭇 무사들은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비는 뭇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칼을 휘둘러 공격해 나
갔다. 쨍그랑! 창! 창!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세 명의
무사들의 무기가 잘리웠고, 두 무사의 팔이 잘라져 나뒹굴었다.
호비는 전귀농이 칼을 비껴들고 베어오자 막았다. 순간 보도와
보도가 맞부딪히며 석고(石鼓)를 두드리듯 쩡! 하는 소리가 길게
여운을 남기며 울려퍼졌다. 두 사람은 두둥실 몸을 솟구치며 세
걸음을 물러섰다.
달빛 아래 바라보니 서로의 손에 들린 칼은 똑같이 조금도 손상
을 입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보도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뛰어
난 칼이었다. 호비는 자기 손에 들린 칼이 전귀농의 보도와 견줄
수 있는 것을 보자 대뜸 호랑이에게 날개가 돋힌 듯 쾌속무비한
공격을 펼쳐냈다. 그는 호가도법을 펼쳐 삽시간에 다시 세 명의
무사를 해치웠다.
전귀농의 보도는 호비의 보도와 막상막하였으나, 도법은 훨씬
뒤떨어진 편이었다. 더우기 전귀농의 무기인 장검을 들고 싸우더
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판인데 어찌 단도를 들고 호비의 호가도법
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삼사 초를 겨루자 전귀농의 팔과 다리는
잇따라 칼에 얻어맞게 되었다. 만약에 옆에 있던 무사들이 도와주
지 않았더라면 호비의 칼 아래 목숨을 잃고 말았으리라.
상처를 입지 않은 무사들은 어느덧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어떤 무기일지라도 호비의 손에 들린 보도와 맞부딪
치면 즉시 토막이 나서 맨손으로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호비는 더이상 살생을 하고 싶지 않아 부르짖었다.
[보기에 여러분들은 모두다 뛰어 난 분들인 것 같은데 어이해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것이오?]
전귀농은 형세가 불리한 것을 보자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줄행
랑치고 말았다. 뭇 무사들은 상처를 입거나 죽은 동료들을 일으켜
낭패한 몰골로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뭇 무사들은 몇 년이 지난 이후 그 보도가 어디서 생긴 것인지
애써 생각하고 여러모로 의논을 해보았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호비의 행동이 신출귀몰하여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예측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비호(飛狐)라는 외호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강호를
휘몰아치는 그의 호걸다운 풍모는 후대의 청년 호걸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잡게 되었다.
호비는 칼을 퉁기며 맑고 우렁찬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감개무
량했다.
호비는 칼을 칼집에 꽃고 다시 구덩이 안에 넣어 그 보도가 영
원히 지하에서 부친과 함께 하도록 했다. 이윽고 정영소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정성스레 넣고 흙을 잘 덮어주었다.
합장을 하며 읊조리는 원성의 불경 소리가 은은히 울려퍼졌다.
[모든 사랑은 열매를 맺으나,
무상하여 오래가지 못하나니.
세상에 나면 번뇌가 끊이지 않고,
이승의 연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니라.
사랑으로 인해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으로 인해서 번뇌가 일더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면,
근심도 번뇌도 사라지느니.]
단아한 독경소리가 울려퍼지며 조용히 그녀는 서쪽으로 말을 몰
아 나아갔다.
호비는 낙빙이 준 백마를 끌고 뒤쫓아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는 이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오. 그대는 몸도 성치 않으니,
역시...... 역시......]
원성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몰아 떠나갔다.
호비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비의 가슴 속에는 그녀가 읊조리던 불경 소리가 끊임없이 맴
돌고 있었다.
백마도 원성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더니 불현듯 구슬피 울부짖
었다.
고개도 한번 돌리지 않고 떠나가는 원성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
전히 사라지자 호비와 백마는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完 結>
저자후기
비호외전(飛狐外傳)은 본래 1960년 - 1961년 무협과 역사라는
소설 잡지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연재 소설이었으므로 분량의 제
한을 받아 제대로 작품을 쓰지 못했다는 마음이 들어 다시 수정을
가해 집필을 한 것이다.
이 소설의 문학적 스타일은 중국 고전 소설의 전통과는 비교적
차이가 있는 셈이고, 단지 두 가지 정도만 고친 것이다. 첫째로
대화 가운데 현재적인 어미가 있는 표현이나 관념을 삭제했으며,
인물이 생각하는 말 역시 그러하다. 둘째로, 너무나 새로운 문예
적인 말투와 외국어 문법과 유사한 구절을 고쳐서 썼다.
이 책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의로운 일을 행
하는 협사(俠士)를 그리고자 했다.
무협 소설 가운데 진정으로 협사를 다룬 작품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고, 대다수는 주로 무공을 연성하고 펄치는 것이지 의협의 길
을 걷는 사람을 표현했다고 볼 수는 없다.
맹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귀하다고 해서 음탕해서는 안되며, 가난하고 천함에 구애받
지 않고, 강한자 앞에서 굴복하지 않아야만이 사내 대장부라고 할
수 있다.]
무협의 인물은 부귀와 빈천을 마음에 두지 않고, 더우기 강한
자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사내 대장부의 표준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이 모두 꿋꿋하게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
다.
이 책에서 나는 호비에게 약간의 요구를 보태고자 하였다.
즉, 그로 하여금 미색에 현혹되지 않고, 사랑과 미움에 사로잡
히지 않으며, 체면에 구에받지 않고 당당히 행동하도록 한다는 것
이다.
영웅은 미인관(美人關)을 넘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호비는
원자의 같이 아리따운 소저에게 마음을 기울인 바 있고, 그녀 역
시 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가 아무리 부드러운 말로 봉천남을
용서하라고 부탁을 해도 그녀에게 응낙하지 않는 것은 기실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웅호걸은 부드럽고 애절한 부탁에는 잘 넘어가지만, 강
압적인 요구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것이다. 봉천남이 금은보화
와 화려한 저택을 선물했으나, 호비는 시종 이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또한 그가 잘못을 시인하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데도 그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더욱이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강호에서 가장 엄히 따지는 것은 체면과 의리인데 주철초 등이
그와 같이 호비의 체면을 세워주고 사정하다시피 봉천남에 대한
감정을 떨쳐버리도록 부탁을 하지만 호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
다.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는 것은 아마 영웅호걸에게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대목인 것이다.
호비가 봉천남을 응징한 것은 단지 종아사 집안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는 그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였고, 교분도 없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자기가 몸 담고 있는 강호의 체면을 져버리고 간악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 대장부의 힘찬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그런 대장부의 모습을 힘차게 그려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깊이 있
게 묘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묘사한 많은 남
성인물(男性人物) 가운데 호비, 교봉(喬峯), 양과(楊過), 곽정(郭
靖), 영호충(令狐沖)등 몇 명은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격의 소
유자이다.
무협소설에서 좋지 못한 인물들은 정파의 인물에 살해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되고 있으며, 나 역시 그들의 죽음에 연연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상노태(商老太)라는 인물을 묘사한 것은 악한
사람이 피살되었음에도 그의 친지들은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고 판단하며, 여전히 그를 숭배하고 사랑하며 늙어 죽을때까지 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우기 악적을 응징한 사람에 대해 그 친
족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증오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
타내려고 했다.
아무쪼록 이 책을 읽고 꿋꿋한 사내 대장부가 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金庸 -
첫댓글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사랑이 이루어지지않는 안타까운 무협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듯....ㅎ
재미있게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