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 (2) 전태일 분신자살 (하)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7. 3:38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실록 민주화운동] (2) 전태일 분신자살 (하)
인기멤버
2024.06.02. 01:55조회 3
댓글 0URL 복사
[실록 민주화운동] (2) 전태일 분신자살 (하)
경향신문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노동자
전태일은 해고될 즈음, 해방 직후 어느 방직공장에서 파업에 가담한 경험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최소한의 노동조건을 명시한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있다니! 좌절하고 있던 그에게 이것은 실로 가슴 벅찬 희망이었다. 그는 뜻이 맞는 재단사들을 모아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6월 결성된 이 모임의 이름은 `바보회'였다.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살았으니 바보다. 그러나 이제라도 바보처럼 우직하게 이 비참한 현실을 고치는 일에 나서보자"는 취지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그 직후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사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이란 것이 있다"고, "우리 힘으로 근로조건을 고칠 수 있다"고 역설하고 다니는 동안 그에게는 `위험분자'라는 딱지가 붙고 말았다. 업주들이 그를 기피해 그는 일자리를 얻기가 불가능해졌다. 더욱이 8, 9월쯤 실태조사용 설문지를 돌린 뒤로는 바보회 회원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서 모임 자체가 해체위기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회수된 설문지를 근거로 진정서를 작성해 시청 근로감독관과 노동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그러나 전태일은 그 조롱과 냉소 앞에서 더욱 성숙해졌다. 69년 가을 이후 그는 약 1년간 건축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집 근처의 기도원에 칩거도 하면서, 자신이 그 동안 겪고 느낀 것을 정리하였다. 일기와 수기, 진정서, 호소문, 소설 초고, 사업계획서 등 다양한 형식으로 남아 있는 이때의 기록은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스물두 살의 밑바닥 노동자가 무허가 판잣집 골방에서 썼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고 절절하며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70년 8월9일의 일기에서)
전태일은 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다시 재단사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틈나는 대로 서울시청, 노동청을 찾아다니며 진정서를 냈다. 방송국을 찾아가 방송을 통해 평화시장의 실태를 알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은 재단사들을 모아 `삼동회'를 결성하고, 곧바로 실태조사용 설문지를 돌렸다. 10월6일 전태일은 노동청장 앞으로 101명이 연명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진정서를 제출한 이튿날 경향신문 사회면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란 표제 아래 이들의 진정서 내용이 톱기사로 실렸다. 세상이 그들에게 보인 최초의 관심이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나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 300부를 사서 평화시장에 뿌렸고,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그러나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국정감사를 앞두고 있던 노동청 근로감독관이 찾아와 반드시 고치겠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하는 바람에 시위 계획을 두 번이나 미뤘지만, 기만적 회유만 일삼을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당국에 분노한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다시 시위를 계획했다. 11월13일 점심시간을 이용해 평화시장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국민은행 앞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기로 한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날 그는 "사랑과 분노의 육탄(肉彈)"이 되어 시대의 양심에 박혔다.
병원으로 실려간 전태일은 그날 밤 10시 숨을 거두었다. 숨지기 전 그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꼭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친구들에게도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숨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배가 고프다…"였다. 12일 아침 집을 나설 때 먹은 라면 한 그릇이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았다.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 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청옥 고등공민학교 시절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전태일의 죽음은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1월16일 서울대학교 법대 학생 100여명이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전태일의 장례식을 거행할 것을 밝히고 어머니 이소선의 허락을 얻었다. 이를 시발로 하여 연세대·고려대·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서울대에는 휴교령까지 떨어졌다. 개발독재가 낳은 야만적인 노동현실을 규탄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곧 종교계와 지식인 사회로 번져갔다. 기독교계는 11월25일 신·구교 합동으로 추도예배를 가졌는데, 이날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태일의 죽음은 `인간 최소한의 요구'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던 노동자들, 빈사 상태에 빠져 있던 한국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1월20일 청주시의 여공 50여명이 체불임금 청산을 요구하며 노동청 앞에서 항의농성을 한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전에는 볼 수 없던 격렬한 항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전태일이 남긴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아들에게 약속한 대로 어머니 이소선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정신적 구심이 되어 청계피복노동조합을 탄생시켰고, 청계피복노조는 군사독재 정권 내내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으로 전체 노동운동을 견인했다. 또한 그의 죽음을 계기로 결집한 학생들과 지식인, 종교계 인사들은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 진영의 모태로 성장 발전하였다. 그 자신 70년 당시 서울 법대생으로서 전태일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변호사 조영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전태일은 이 시각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민중의 숨결 속에 눈물 속에 죽음 속에 살아 있으며, 역경 가운데서도 생존권과 인간다운 노동을 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우리 노동자들의 뜨거운 가슴 속에 살아있다"
전태일은 폭압의 시대를 넘어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흔히 `전태일 사상'이라 일컬어지는 정신, 즉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전체의 일부' `또 다른 나'이며, 따라서 `어떤 한 인간에게라도 적대적인 현실은 곧 모든 인간에게 적대적인 현실'이라는 그의 통찰은 소외되거나 억압받거나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불의와 억압이 있는 곳이라면, "이 지구상의 어느 곳에 사는 어떤 인종·계층·신조·사상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전태일은 반드시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의 심장을 두들기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소리칠 것이다"(`전태일 평전' 가운데서)
'절망어린 선택' 오빠뜻 이을 것
-여동생 전순옥 박사
전태일의 여동생 전순옥씨(48). 1970년 전태일 분신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하던 그가 오빠가 죽음으로 알리려 했던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오빠가 그렇게도 안타까워했던 `여공'으로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다.
전씨는 오빠의 죽음 이후 가족사가 호기심의 대상으로 비치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가장 전태일의 `특별한 죽음'은 가족들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 사실이다. 어머니 이소선씨를 비롯, 남은 가족 모두가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굶주림과 당국의 24시간 감시가 이어졌다. 89년 전씨가 영국 유학길에 올랐지만 그곳까지 감시자가 따라올 정도였다. 그는 영국 워릭대학에서 노동문제로 박사학위를 받고 2001년 4월 귀국했다.
"오빠가 죽은 지 며칠 뒤 평화시장 사업자단체와 노동청 관계자들이 어머니께 거액의 돈뭉치를 들고 와 빨리 장례를 치르자고 종용했어요. 어머니가 우리 3남매를 밖으로 부르시더군요. 그러고는 `저 돈을 받으면 집도 살 수 있고 너희들 모두 대학까지 공부할 수 있지만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 받지 않으면 더 힘들어지겠지만 오빠의 뜻을 이을 수 있다'면서 저희 보고 결정하라고 했어요. 우리는 모두 후자를 택했죠"
그래도 오빠의 죽음이 원망스럽지는 않았을까. "20대까지만 해도 오빠가 꼭 분신을 선택했어야 할까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죠. 하지만 오빠가 남긴 일기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 오빠의 절망어린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출처] [실록 민주화운동] (2) 전태일 분신자살 (하) |작성자 바람소리
hanjy9713님의 게시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