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26]자네 고향에 철쭉을 보러 갔다네
친구야, 어제는 ‘동네 아가씨’들, 태국 여성노동자 등과 함께 운봉 바래봉 철쭉축제(4.22.-5.21.)를 보러갔지 뭔가? 아가씨하니까 진짜 미혼처녀 얘기인가 하겠지만, 1명은 49년생, 2명은 56년생. 그중에 2명은 진즉 남편과 사별한 과부寡婦라네. 흐흐. 놀리는 말이 아니고 대접하는 의미로 ‘아가씨’라 부르며, 종종 외식도 한다네. 특히 운봉雲峯은 자네의 고향이지 않은가. 운봉에 머무는 몇 시간 동안, 자네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 마음이 참말로 짜안했네. 바래봉 정상의 철쭉은 아직 다 활짝 피지 않았고, 무슨 놈의 날씨가 4월 하고도 하순인데 춥고 바람이 불어, 자네와 같이 걷던 그 길은 포기했네.
대신 <지리산 허브밸리>를 갔는데, 축제기간에는 입장료 4천원이 공짜더군. 코끼리열차를 타고 전망대를 가니 철쭉군락지가 펼쳐 있어 장관壯觀이더군. 영락없이 진달래 닮아 꽃을 따먹어보니 철쭉임을 알겠더군. 우리 동네 아가씨들이 ‘늙은 호박꽃’을 데리고 봄나들이, 꽃나들이를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며, 5일장 운봉장에서 장터국밥을 사주더군. 자네가 있었으면 아무리 바빠도 당장 합류하여 분위기를 한층 업시켰을텐데, 못내 그리고 내내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절절하더군. 자네는 이제 어디에 정착하여 편안하게 쉬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은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 급하여 황망하게 우리 곁을 떠났단 말인가?
제법 고지대인 운봉을 자네 덕분에 알게 됐지만, 우리 둘만의 추억이 무릇 기하이던가? 황산대첩비, 국악의 성지 송흥록 생가, 피바위, 비전마을(동편제마을), 그리고 꾀복쟁이 친구가 운영하는 운봉식당, 무엇보다 바래봉을 두세 번 같이 올랐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바래봉 정상을 오르고, 하산하며 심하게 고생했던 기억. 어찌어찌 고생해 인월로 내려와 전통시장 순대국집에서 막걸리 한 잔. 운봉은 벌써 모를 심었더군. 우리 동네보다 최소 한 달은 빠르다며 30여마지기 논에 이앙기로 모를 직접 심던, 당당한 농사꾼이었지 않은가. 수확철, 경상도 어느 군에서 논뙈기로 사가버리는 마당에 내가 지은 쌀을 몇 번 사먹기도 했지. 나는 5월 20일(토) 세 번째로 모를 심네. 작년에 세 다랭이(필지)는 모를 심고, 1필지는 이모작(옥수수와 메주콩)을 해, 그래도 기백만원은 벌었지. 흐흐. 솔직히 고생은 막심했지만, 논농사의 두 배는 족히 되지. 콩타작을 하면서 울 뻔 했네. 우리 월급쟁이 시절엔 토-일요일 다 쉬면서 한 달에 사오백만원이 저절로 통장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것도 적다고 불평했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게 뭔가? 내 인건비는 대체 어디에서 건질꼬? 단돈 일백만원 벌기가 이렇게 힘든 것을. 그런데 자네는 늘 싱글싱글 웃으며 정말 청년인 것처럼 농사를 즐기지 않았던가. 작년에 야산에 심었던 두릅을 자네가 투병할 때, 우리 친구 서넛이 가 몇 푸대 따와 서울의 친구들과 한 두릅파티 소식은 알고 있는가?
인근 친구들의 근황을 전하네. 남원의 근봉친구 부부는 올해부터 농사에 일절 손을 떼기로 했다네. 대신 집 앞 200여평에 나무를 심었지만, 그것도 남 보듯 할 수 있는가? 아영의 ‘막걸리 귀신’ 고룡친구는 지금도 여전하다네. 겨울엔 서울집에서 당구와 막걸리로 소일하다, 농사철이 되어 최근 내려왔다네. 지라산을 훑으며 각종 약초와 고사리 채취에 정신없다 보면 포도농장 일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고. ‘소리 없는 미소’가 그 친구의 매력이지 않던가. 제 속내를 나타내지 않지만, 나보다 그 친구가 자네와 추억이 훨 많을 터. 우리는 만나면 속상할 게 뻔하므로, 자네 이름이 금기어禁忌語가 됐다네. 친구의 기쁜 일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알고, 슬픈 일에 똑같이 슬픈 마음이 되던 자네. 송동에 사는 친구는 마을 이장이 되었는데, 그것도 장난이 아니라고 한숨을 쉬더군. 지난주는 사매 출신 친구가 내려와 둘이 노적봉에서 풍악산까지 5시간동안 산행을 해 즐거웠다네. 별내의 별난 친구는 골프연습장 짓느라 여념이 없는 모양, 불쑥불쑥 우리집에도 잘 내려오더만, 요즘 뜸하다네. 또 한 친구는 남춘천에서 봄철을 맞아 해장국 팔기에 바쁘고. 또 어떤 친구가 궁금한가? 말해보시게. 내가 다 근황을 전해 줌세. 흐흐.
아 참, 내 소식을 안전했군. 97세 아버지는 아직은 정정하다고 해야 맞겠지. 늘 나만 보면 "니가 고생이 많다. 나 때문에" 혀를 차시네. 듣기 싫은 소리. 작년처럼 깡냉이(옥수수)를 8000여개 (일일이, 손수) 심었는데, 놀랍게도 출수율出穗率이 90%가 넘었다네(작년 70%). 이대로 끝까지 가야 할 텐데, 그걸 누가 알겠는가. 올해만 하고 그만할라네. 6월말 그 중간중간에 콩 심을 일이, 그리고 타작할 일이 심란해 못하겠네. 그래도 이삼백 벌어 임플란트할 수 있기를 빌어야겠지. 흐흐. 내년에는 아내와 비행기를 몇 번 타볼 생각이네.
자네의 고향 신기리의 사정은 어떤가? 시범사업이던 ‘미니 양배추’는 어떤가? 병원에 있으면서도 양배추 한 푸대씩 받은 친구들이 모르긴 몰라도 30-40명은 될 거네. 나부터 이장이랑 이웃 친구들에게 안겼으니. 참, 어제 복숭아농장 꾀복쟁이 친구와 그가 데리고 있는 태국의 여성노동자 두 명도 같이 갔다네. 좀 상한 복숭아를 대여섯 상자 가지러 달려왔지 않은가. 그것을 밤새 고아 복숭아쨈을 만들던 자네. 저녁이고 새벽이고 농사정보 주고받을 때 “최기자”라고 부르며 얘기를 시작하던 자네. 우리집 뚤방(토방)에 ‘돌옷’을 입혀주고, 시암(샘) 주변에 타일을 붙여주는가 하면 진입로에 넓적넓적한 현무암을 깔아주고, 집 주위에 멋진 칼라블록으로 담을 한여름 쌓아주며 비지땀을 흘리던 자네를 잊으면 내가 어찌 사람이고 친구일 것인가?
읍사무소 주차장에서 만나 옥천 나무시장도 가고, 바래봉도 오르며, 겨울엔 비닐푸대 한 장 들고 친구들과 눈썰매 타자던 자네. 운봉읍 탁구장을 휩쓸고, 고교 후배까지 챙기던, 상남자 벽곡. 오랜만에 오롯이 자네만을 생각하며,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니 눈물이 나네. 오죽했으면 자네를 잃은 형수는 두어 달만에 ‘흰 머리 소녀’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자네의 뒤를 이어 ‘민중의 지팡이’ 경찰 7년차라는 든든한 아들이 있으니 너무 걱정마시게. 자네만의 특유의 ‘엉뚱한 순진함’으로 모든 시름 다 잊어버리고, 영면永眠하시게나. 자네가 '영원한 안식처'로 이사移徙를 올 때나 보기로 하고, 이만 접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