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부터 다음날 주일까지 나는 아내와 함께 부산 다대포에 있었다. 토요일 오후 아내는 친구 만나러 가고 나는 지인의 아들 결혼식장에 갔다가 일몰을 한참 앞두고 아미산전망대 3층 카페에 올랐다,
여기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들고 한적한 자리를 잡아 가덕도를 내려다보면 낙동강하구 기수지역에 펼쳐진 모래톱이 장관이다. 가까운 도요등을 시작으로 백합등 장자도 신지도와 가덕도 눌차 및 대마등 신호공단 사이를 살펴보면 멀리 진우도(眞友島)가 가물가물하다.
6·5전쟁 이후 여기에 있던 전쟁고아를 위한 보육시설이 1959년 사라호 태풍을 겪으면서 진우원(眞友院)이란 이름으로 내 고향 김해의 진영읍 신용리로 옮겨 갔다. 1960년대 말 나는 고 강성갑(姜成甲, 1912~1953) 목사님이 세운 진영 한얼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이때 진우원에 살던 5~6명의 원생과 동급생으로 흙벽돌로 지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다. 그 친구들로부터 진우도 시절의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진우도는 서낙동강 하류의 퇴적작용으로 형성된 면적 0.8㎢의 무인도였다.
지금은 다시 무인도가 되었지만, 여기에 진우도아동민주시(眞友島兒童民主市)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는 1954년 8월 11일부터 3일간 여기서 제4회 아동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51년 이 섬에 처음 정착한 방수원(方洙源, 1904 ~ ? ) 선생은 진우도란 이름을 명명하면서 “진우(眞友)란 참된 친구라는 뜻으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우리 아이들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참된 벗으로 진실한 친구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전쟁을 도와준 세계 16개국 연합군(UN)의 고마움을 참 벗으로 기념하는 섬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우도아동민주시는 하나의 주민 자치시(住民 自治市) 형태로 자체 헌법도 있다, 그 조직을 보면 시장, 의회, 경찰국, 산업국, 재무국, 사회국, 병원 등의 기구까지 있어 민주국가 조직과 같다. 인구는 최하 6세부터 최고 18세까지의 330여 명의 남녀 전쟁고아다. 행정 장관인 시장은 2개월마다 한 번씩 개선하고 이때 18명의 시의원을 선거하고 있다. 매주 토요일에 시의회가 개최되고 모든 운영 상황을 이 의회에서 토의 결정한다, 경찰국에서는 25명의 경찰관을 두어 범죄를 단속하고 위생 검사를 시행하는가 하면 산업국이 생산산업을 발전시키고 재무국에서는 자기들끼리 통용하는 화폐를 발행했다.
주요 산업은 농사로 채소밭 2,500평과 5,000평의 밀밭을 개간하여 닭, 소, 말, 돼지, 토끼도 길렀다. 또 주변 바다에서 조개 채취 등 어업도 병행했다. 이들은 과거의 역사는 잊어버리고 오직 현재와 미래의 벅찬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이 섬의 지도자 방수원 선생은 1904년생으로 평안북도 정주시에서 태어났다. 함석헌, 현동완 등과 다석 류영모에 사사하였고,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로, 사회사업가로 활동했다. 1937년 서울 외곽에 보육원이자 실질적으로는 부랑아 보호시설인 향린원(香隣園)을 설립했다. 1940년 당시 200여 명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시설이었다.
방수원 선생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구 선생의 ‘건국실천원양성소’의 교수진으로 참여하였고, 1946년에는 기독교사회사업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향린원영화사를 설립하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지자 향린원 원아들을 이끌고 가덕도 눌차 마을로 피난 왔다. 1951년 3월 눌차 향린원 아이들 가운데 일부를 인솔하여 2개의 큰 천막으로 시작된 진우도 아동시설은 얼마 후 미8군 소속의 민간원조기구(CAC)로부터 미화 45,000불을 지원받고 미국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을 받아 기존 천막 시설을 철거한 자리에 블록 콘크리트 건물 18개 동을 새로 세우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때부터 보호 대상 아이들의 진우도아동민주시라는 민주주의 생활 자치 공동체가 그것도 전쟁 중에 부모 잃은 아동들을 대상으로 진우도에 탄생한 것이다. 이런 자치시는 방수원 원장이 사임하고 떠난 1956년 10월까지 5년간 자립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진우도아동민주시는 미군의 협조와 미국감리교 해외구제위원회(MCOR)의 지원받아 한국감리교회가 운영하다가 사회복지법인 진우원으로 바뀌고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인한 일시 피난처였던 진영 신용리를 거쳐 현재의 여래리 진우복지재단에 이르게 되었다.
진우도를 떠난 방수원 선생은 1960년 제5대 민의원 선거 때 무소속 후보로 서울 성동 을에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고, 1969년에는 계룡산에 들어가 세계종교연합법황청(世界宗敎聯合法皇廳)을 만들어 자칭 신도안 법황 서리를 자처하고, 1980년에는 사회당 산하 기독교 연합봉사단 상임고문을 역임하고, 1983년 물신을 만들어 신고 한강을 건너는 시범을 보이는 등 때로는 기행(奇行)으로 가끔 언론에 등장했는데, 말년 행적은 찾을 수 없고, 온양방씨(溫陽方氏) 문중 자료에도 언제 별세했는지 기록이 없다.
<사진> 낙동강 하구 모래톱/ 아미산전망대/ 폐허가 된 진우도 이모저모/ 진영읍 여래리 진우복지재단(진우원)/ 1960년대 내가 공부했던 진영 한얼고등학교 교사(校舍)/ 1954년 제4회 아동올림픽대회 대한뉴스 영상 캡쳐
[참고자료]
○ ‘아동민주도시 제 손으로 만든 헌법’ (1951.11.25.자 부산일보)
○ ‘보건복지 분야 국가·민간 역할 분담의 역사적 전개와 과제’ 연구보고서 (조성은 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21년)
○ ‘대자연의 선물 진우도(眞友島)’ (2017.7.25.자 강서구보/ 임종성 강서향토사연구소장)
1954년 진우도에서 열린 제4회 아동올림픽
https://youtu.be/Va5kDhdke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