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마 인민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사치를 하면 사우디 등 중동 왕족 정도의 악평을 들고 끝나겠지만, 김정일은 국가 경제의 기반을 붕괴시키면서까지 사치를 했다.
1970년대 당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김정일은 혁명 자금이 필요하다는 명분 하에 금광이라든가 북한의 특산품인 송이버섯과 같이 가장 수익성이 좋은 사업체나 기업소를 엄선해 내각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했다. 여기에 각종 밀수, 마약 생산, 위조지폐 유통 같은 범죄 행위로 외화를 조달한 건 덤. 이런 수입원들은 내각 기관의 통제를 전혀 받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 체제가 되었고, 이는 당 경제라는 미명 하에 본인의 개인적인 사치에 이용되었다. 이후 선군정치라는 명목으로 군 경제도 인민 생활 경제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돈을 북조선 '왕조' 관련된 일과 군비 증강에는 말 그대로 퍼다 썼다.[25] 매년 헤네시 코냑 구매에 50만 달러를 쓰는가 하면 연회 중에 즉석으로 1만 달러 다발 4~5개를 쌓아놓고 술 마시기 대회를 열어 상금으로 주기도 했으며, 승마를 위해 말 30여필을 수입하고, 수백억원 상당의 이탈리아제 호화 요트 2척을 구입하려다가 발각됐다던가, 김정은 집을 1,734억 원을 들어 호화 주택으로 개조했다던가 평양 불꽃놀이에서 60억원을 탕진하고, 김정일의 별장과 여가시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리고 해외 비자금이 40억 달러로, 이는 태국산 쌀 1,000만톤어치, 즉 매년 100만톤의 추가 식량이 더 필요하다고 볼 때,10년, 강냉이로는 2~30년 정도를 버틸 정도.[26] 금수산기념궁전에도 막대한 유지비가 들어가며, 이러한 작태는 현 김정은 정권 하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열거했듯 자신은 온갖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중국과 베트남처럼 개혁, 개방 정책이나 국방비 축소를 전혀 안 하고[27] 인민들을 굶주리게 만든 걸 보면 한국 최악의 폭군으로 꼽히는 연산군이나 충혜왕을 능가한다. 더구나 연산군이나 충혜왕은 빨리 무너지기라도 했지, 김정일은 '권력 유지' 하나만은 기가 막히게 잘해서 인민들을 오래 쥐어짰으니 더욱 악랄하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세간에 알려진 김정일의 사치가 딱히 과장이 없는 진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이 워낙에 폐쇄적인 사회라, 그곳에서 나오는 소식이나 정보도 워낙 카더라 통신이 범람하기에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 데 비해, 김정일의 사치에 대한 증언은 출처가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28], 김정일 전속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이탈리아 요리사 에르만노 푸를라니스, 김정일을 직접 수행한 러시아 외교관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최은희, 신상옥 등이다. 이 사람들은 모두 김정일을 직접 마주하며 그의 사치를 보고 들은 사람들이며, 김정일에 대해 굳이 과장되어 말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니 당연히 신뢰도는 어느 탈북자의 카더라 통신에 비해 넘사벽급으로 높다.
만약 김정일이 자신의 사치를 중단하고 그에 쓰일 돈을 식량 구입에 사용하였다면 고난의 행군 시 사망자를 최소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과 탈북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2.3. 잔인성[편집]
1984년 국가안전기획부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서 작성한 김정일 대외비밀 문건이 있다. 이 문건에 나오는 사례만 보더라도 김정일의 잔인성이 쉽게 드러난다. 김정일은 ‘김일성 부자 세습체제’를 반대하는 인사를 극비리에 숙청하기 위해 국가정치보위부 내에 비밀단체인 암살대를 조직, 직접 지휘했다.
암살대는 의사, 저격수, 운전수 등 15~20명으로 이뤄져 있으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령사항을 즉각 수행한다. 1976년 3월 교통사고로 발표한 당시 정무원 부총리 남일의 사망도 실은 ‘암살대’에 의한 암살이다. 김정일은 남일이 소련의 비호하에 주석이 되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죽이기로 마음먹었고, 김정일은 암살대에 평양남포간 고속도로에 대형화물트럭을 세워놓았다가 달려오는 남일의 승용차로 돌진, 충돌하여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암살 후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위장 보도를 지시하였다.
사례-1.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이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를 머리에 던져 심한 상처를 입혔음.[29]
1977년 첩 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공관관리책임자 이수헌을 처형.
1977년 자신의 난잡한 여자관계 등 사생활을 누설한 연락군관 추태식을 처형.
1978년 난잡한 여자관계를 만류한다고 로동당 선전선동부부장 박성수를 처형.
1980년 김일성에게 김정일의 사생활이 너무 방탕하고 퇴폐하다고 진정하는 익명의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2개월의 수사 끝에 선전선동부부부장 이명재의 처를 범인으로 색출, 남편이 직접 총살토록 조치. 이 사건에 대해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씨는 생전 “김정일 비밀파티에 이명재 당시 당 부부장이 참석했는데 이명재 부인이 비밀파티 사실을 알고 김일성에게 바로잡아 주라고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가 중간에 김정일에게 들통이 나서 이명재가 '저런 년은 내가 처단하겠다.'라고 말하고, 이명재가 그 자리에서 자신의 부인을 쏴 죽였다”라고 했다. 우습게도, 이명재가 부인을 총살하는 것을 본 김정일은 이명재를 사면하고 우대하며 총애했다.
1981년 자신과 정을 통한 간호원 이영미가 부모에게 “나는 김정일을 모시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사실을 알고 임신 중임에도(!!) 처형.
1981년 자신의 허가 없이 첩에게 모스크바행 비행기표를 사준 공관관리과장 노종일을 첩이 보는 앞에서 마구 구타.
1981년 김정일이 여동생 김경희와 같이 지방여행 시 동행한 예술단원 한 사람이 술에 취해 추태를 부리자 김정일이 이를 보고 권총을 꺼내 총살하려는 것을 김경희가 만류하여 중지.
김정일이 탑승한 차량이 주행 시, 마주치는 모든 차량은 사전 정지토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여 머뭇거리거나 늦게 정차하는 차량이 있으면 동승한 비서로 하여금 탑승자를 확인해 반드시 처벌.
김정일이 벌인 대규모 숙청으론 심화조 사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https://namu.wiki/w/%EA%B9%80%EC%A0%95%EC%9D%BC/%EC%97%AC%EB%8B%B4#s-2.2.1
첫댓글 빨리 김일가의 세습이 끝나야할텐데…북한 인민들이 넘 불쌍해요
남한에도 무고한 국민 백만명 죽인녀석이 있죠.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