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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화페속의 인물 비녜(노르웨이 50Kroner) 태어남
비녜(Aasmund Olafson Vinje)1984년 발행 1818. 4. 6 ∼ 1870. 7. 30 노르웨이의 시인·언론인.
노르웨이 문학사상 가장 훌륭한 서정시를 남겼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학위를 받은 후 교사·작가 공무원으로 일함.
1851년 오슬로에 있는 한 신문사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1858년 〈될렌 Dølen〉이라는 신문사를 직접 차려 새로 표준어가 된 신노르웨이어, 즉 '뉘노르스크'라는 노르웨이 방언으로 신문을 펴내기 시작했다.
비녜는 자신의 신문에 철학·문학·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쳐 기사를 썼다.
40세가 되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시는 대부분 산악 풍경을 비롯해 자연의 여러 모습을 노래한 서정시였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1860년 여름의 여행을 돌이켜보며 Ferdaminni fraa sumaren 1860〉는 그가 직접 스웨덴령 노르웨이 새 국왕의 대관식을 취재하기 위해 오슬로에서 트론헤임까지 도보여행을 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수필과 시가 어우러진 재치있고 재미있는 기록이다. 그밖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연작시 〈스토레구트 Storegut〉(1866)와 영국 여행에 대한 기록인 〈한 노르웨이인이 본 영국과 영국인 A Norseman's View of Britain and the British〉(1863)이 있다. 그의 서정시는 단순함과 솔직함,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산문작품은 풍부한 상식과 더불어 유쾌하면서도 때로는 날카로운 기지가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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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화폐속의 인물 아벨(노르웨이:500Kroner) 세상떠남
아벨(Niels Henrik Abel) 1978년 발행 1802. 8. 5 ∼1829. 4. 6 노르웨이의 수학자.
근대 수학의 여러 분야를 발달시킨 선구자이다.
가난한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아들이었던 아벨은 태어나자마자 가족이 노르웨이 남동쪽에 있는 리쇠르 마을 근처의 예르스타드 교회로 옮겼으므로 그곳에서 성장했다.
1815년 오슬로의 대성당 학교에 들어갔을 때 수학적 재능이 교사의 눈에 띄었는데, 교사는 그에게 고전수학 문헌을 소개하고 독창적인 문제들을 풀라고 제시했다. 강하게 자극받은 그는 17세기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아이작 뉴턴과 그당시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독일),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프랑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독일)의 저서를 연구하고 그들 수학 논법의 차이를 찾았다.
1822년 대학에서 예비 학위를 받았고, 스승의 계속적인 보조금으로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했다.
1823년에 발표된 첫 논문은 함수방정식과 적분에 관해서였고, 적분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해(解)를 내놓았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독일과 프랑스에서 연구하도록 노르웨이 정부에 장학금을 요청했다. 국왕의 포고를 기다리는 동안 1824년에는 5차방정식을 대수적으로 풀 수 없음을 증명하여 자비로 출판했고 이것이 인정받기를 바랐다.
그는 이 소책자를 가우스에게 보냈으나, 가우스는 유명한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를 무시했다.
1825∼26년의 겨울을 베를린에서 고국의 친구들과 함께 보내면서 토목공학자이며 독학을 한 수학광인 아우구스트 레오폴트 크렐레를 만났는데, 그는 훗날 아벨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아벨의 따뜻한 격려로 크렐레는 〈순수 및 응용 수학 저널 Journal fur die reine und angewandte Mathematik〉을 창간했고,
1826년 초판에 5차방정식에 관한 더 정교한 이론이 포함된 아벨의 논문들을 실었다.
다른 논문에서는 방정식이론, 함수방정식, 유한형식의 적분법, 이론역학 문제 등을 다루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수학의 새로운 추세에 자극받아 더욱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했으나, 사회가 혼란스럽게 되자 곧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1826년 여름에 파리에 도착한 뒤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을 방문했고 초월함수에 대한 논문을 완성했다.
이 주요논문에는 대수함수 적분론, 특히 아벨 정리로 알려진 결과 등이 들어 있다.
이 정리는 나중에 아벨 적분론과 아벨 함수론의 기초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아벨의 연구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절제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과학 아카데미에 발표할 연구논문집을 보냈으나 성과가 없었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만성감기로 의사를 찾아갔는데, 진찰 결과가 결핵으로 나왔다.
그는 많은 빚을 지고 노르웨이로 돌아와서, 가정교사, 대학으로부터의 약간의 보조금, 그리고 1828년에는 대리교사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살았다.
가난과 나쁜 건강에도 그의 활동은줄지 않았는데, 이 기간 동안에는 주로 방정식이론과 타원함수에 관해 많은 논문을 썼다.
이중에는 아벨군과 아벨 방정식 이론이 있다.
그는 카를 구스타프 야코비와 겨루어 타원함수 이론을 서둘러 전개했다. 이때 아벨의 명성이 모든 수학연구기관에 알려져서, 프랑스 아카데미의 한 모임에서는 그가 적당한 자리를 얻도록 노르웨이-스웨덴의 왕 바르나도테에게 소원(訴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크렐레는 베를린에서 그를 위한 교수직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했다. 1828년 가을에 병이 악화 겨울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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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화폐속의 인물 부르기바(튀니지:1/2 Dinars) 세상떠남
하비브 이븐 알리 부르기바(Bourguiba, Habib)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1957∼1987)
1903. 8. 3 ∼2000. 4. 6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던 아랍권의 대표적인 지도자.
하비브 부르기바는 작은 어촌 알무나스티르에서 퇴역한 베이(튀니지의 통치자) 군장교의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튀니스로 옮겨가 아랍어와 이슬람교 교리를 공부하는 한편 프랑스어와 서유럽 사상의 습득에도 관심을 가졌다.
1924~27년 파리의 소르본대학교에서 법률과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 및 알제리·모로코의 독립운동가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1927년 튀니스로 돌아온 부르기바는 이후 7년 동안 변호사업에 종사했고
1932년 프랑스어판 민족주의계 일간지를 창간했다.
1934년 그때까지 대(對)프랑스 독립투쟁을 주도해왔던 데스투르당이 쇠퇴의 기미를 보이자 당내 소장세력은 데스투르당을 탈퇴, 신(新)데스투르당을 창설했고 부르기바를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부르기바는 1934년 이래 튀니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한 단계 한 단계의 축적이 실질적인 진보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진주의의 확신은 훗날 '부르기비슴'(bourguibisme)이라는 개념으로 보편화되었다.
그는 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집약해낸 장본인이었으며 도시 인텔리겐차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어왔던 튀니지 독립운동을 거국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탁월한 조직가였던 그는 인적이 드문 벽지 촌락에까지 당조직을 확장시켰고 식민 당국의 무력탄압에 대비, 간부들을 대거 육성함으로써 체포나 추방으로 인한 지도부의 진공상태를 능히 극복해냈다.
신데스투르당은 도합 8차례 조직개편을 거듭하면서 10여 년 동안 당 지도자가 구금되는 역경 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프랑스의 비시에 억류되어 있던 부르기바는 연합군의 승리를 충분히 예견하고 먼저 튀니지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며 추축국의 연합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계대전 종식 후 1945~46, 1951년에 그는 중동·미국·극동·유럽 지역을 순방하면서 각국 지도자들에게 튀니지 독립의 필연성을 납득시켰다.
1954년 피에르 맹데스 프랑스 총리는 부르기바와 협상을 시작했고 이듬해 4월 부르기바는 에드가 포레 총리와의 협상과정에서 외교·국방을 제외한 자치권의 획득을 성공시켰다.
1956년 3월 20일 기 몰레 내각은 튀니지의 독립을 공식 승인했으며 이듬해에 비제르테를 제외한 튀니지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협정원칙이 합의되었다.
같은 해 군주제가 포기된 직후 하비브 부르기바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2년 후 선포된 신헌법에서 그는 대통령으로서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일부다처제를 폐지하는 한편, 이혼을 억제하고 노동생산성에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논란이 되어온 라마단(이슬람력으로 제9월)단식을 받아들였다.
경제발전을 이룩하는 동시에 군사 쿠데타의 위험을 제거해야 했던 부르기바는 최소한의 군사력을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통령인 그는 프랑스의 군사통치를 받던 남부지역에 5만 명의 유목민들을 정착시켰고 근대적인 행정원칙에 입각해 전국을 14개 주로 분할 통치했다.
튀니지의 경제는 대외원조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대통령은 주로 중립주의 외교노선을 견지했으나 오랫동안 문화적·교육적 교류 속에서 프랑스와의 관계가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튀니지와 프랑스의 관계구조는 향후 2가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61년 주변 아랍 국가들의 압력을 받은 듯 대통령은 1956년의 협정에 따라 프랑스의 육·해군 기지로 남아 있던 비제르테에서의 철군을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지 않자 그는 비제르테에 대한 군사공격을 명령했고 철군은 2년에 걸쳐 1,000여 명의 인명을 살상시킨 대가로 확보되었다.
1964년 프랑스 거류민의 소유지를 포함한 전국토의 국유화 조치는 또다시 양국 사이에 긴장을 야기시켰다.
비제르테의 철군은 프랑스로부터의 경제원조를 단절시킴으로써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으나
부르기바의 대내외적인 위신은 크게 부각되었다.
부르기바는 아랍권 정치에서 이채로운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는 아랍 연맹의 만장일치 결의나 일방적인 강요에 대항해 대담한 독자노선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 튀니지는 대통령의 온건 사회주의 정책기조에 입각, 비교적 엄격한 농업협동조합주의와 무역 및 산업에 대한 국가통제를 실시했으나 경기침체의 위기는 쉽게 해소되지 않자 그는 다시 점진적인 개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75년 튀니지 국회는 하비브 이븐 알리 부르기바를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의 건강이 난조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권력승계의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1986년 초로의 부르기바는 측근 자문관들과 손수 지명한 후계자인 모하메드 음잘리 총리를 해임시키는 등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7년 초기에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부전복기도를 분쇄해낸 벤 알리 내무장관을 총리로 임명했고 그해 11월 벤 알리는 "부르기바 대통령은 건강이 좋지 않고 너무 노령이어서 더이상 국정을 수행하기가 어렵다"라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한 뒤 스스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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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조선 고종 8) 미군, 강화도 쳐들어옴(신미양요)
미국 상선 셔먼 호가 평양 관내까지 들어와 무역거래를 요구하다가 평양시민과 충돌하여 불태워진 진상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콜로라도 호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광성진까지 함락시켰다.
백병전까지 벌인 치열한 싸움으로 중군 어재연 등 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전사 3명에 부상 10명이었다. 미군은 결국 40여일만인 5월 16일에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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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프랑스 소설가 모파상(1850-1893), 대형 요트로 지중해 항해
"나는 모든 것을 갈망했으나 어느 한 가지도 향유하지 못하였다. 무한한 힘과 능력이 나에게 주어지고, 목숨이 천 개나 있었어도 부족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는데, 왜 나는 이렇게 삶이 고통스러울까." --모파상의 기행문 <물 위>에서
모파상은 36세 때인 1886년 대형 요트를 사서 4.6부터 14일까지 지중해를 항해하였다. 이 때 하루하루의 생활을 기록하여 단편집으로 출간한 것이 위의 작품이다. 모파상은 작품생활 10년 동안 360편이 넘는 단편을 포함, 29권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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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 탄핵 해임
2004년 4월 6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독직(瀆職) 혐의를 받아온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팍사스 대통령은 2003년 1월 대선 당시 재정적 후원자였던 러시아 사업가 유리 보리소프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것과 대통령 취임선서 위반, 국가기밀 누설, 사적 이해관계의 개입, 국가기관 불신, 측근의 권력 남용 방치 등 6건의 혐의로 의회에서 탄핵안이 상정됐었다.
리투아니아는 우리와 달리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의회 표결 절차로 탄핵안을 처리토록 돼 있다. 의회(전체 141석)에서 의원 36명 이상이 발의하면 대통령 탄핵안이 상정되며, 86명 이상이 찬성할 경우 탄핵이 확정된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2003년 12월 팍사스 대통령에 대한 의회 조사위원회 보고서 공개를 승인함에 따라 대통령 탄핵 수순에 들어 갔었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2004년 3월 16일부터 3주 동안 최종 심의를 벌인 헌재가 31일 대통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자 이날 표결 절차를 걸쳐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리투아니아 헌법에서는 탄핵된 대통령의 재출마 제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팍사스 전 대통령이 소속당인 자유민주당에 의해 대선 후보로 옹립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국내 역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던터라, 이날 팍사스 대통령의 탄핵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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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타계
2005년 4월 6일(현지시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가 향년 81살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반세기 전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으로 세기의 로맨스를 만들었고, 60년 가까운 통치 기간 모나코를 세계적인 금융, 관광 중심지로 발전시킨 주역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23년 5월 31일 모나코 공국의 샤를로트 공주와 피에르 드 폴리냑 백작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스위스, 프랑스에서 문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인 1944년 프랑스군에 자원 입대, 알자스 탈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또 전후 베를린에서 프랑스 정부의 일원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대령으로까지 진급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1949년 조부인 루이 2세가 서거한 뒤 왕위를 이어 받았다.
1956년 4월 18일 미모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은 그와 모나코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세기의 로맨스로 불리는 이 결혼으로 레니에 3세 부부는 선남 선녀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그레이스 왕비가 1982년 교통사고로 숨지는 불행을 겪었다. 두 사람은 슬하에 알베르 왕자, 카롤린 공주, 스테파니 공주를 뒀다.
그는 결혼으로 인한 유명세 등에 힘입어 관광, 금융, 도박 산업 중심으로 모나코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고 국제적 위상도 높여갔다. 특히 1990년대에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도박 산업 의존도를 4% 대로 낮추며 산업 구조의 변화를 이뤄냈다. 1974년엔 국제 서커스 대회를 창설해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행사로 발전시켰다. 1962년 헌법을 개정해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민회의와 권력을 공유했고 군주의 통치신성권 원칙을 폐지하는 등 정치개혁도 이뤘다. 1993년엔 모나코를 183번째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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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1년 유비 황제에 즉위(건안 26년)
1086년 북송 정치가, 학자 왕안석 사망.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 왜구 고성.울주.거제 침구.
1461년 조선 세조,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1483년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S라파엘로 출생.
1520년 라파엘로 사망
1773년 영국철학, 경제학자 J밀 출생.
1789년 조지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1803년 영국 고고학자-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사망
1818년 독일인 칼 드라이스, 최초의 자전거 `드레지엔` 파리에서 공개
1826년 프랑스 회가 G모로 출생.
1830년 조지프 스미스, 몰몬교 창시 선포
1877년 정언, 김기룡 등이 서얼금고제를 혁파할 것을 상소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조인-조선 고종 19년.
1883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조인
1887년 조선전보총국 창설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그리스 아테네), 13개국 참가-종합우승 미국.
1900년 철도원(鐵道院)을 신설하고 황실(皇室)소속 철도를 관장케 함.
1901년 일제시대 최고의 부흥사 이용도 목사 출생
1909년 미국 로버트 피어리, 북극탐험 성공.
1911년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대사작용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리넨 출생
1917년 제1차 세계대전/미국, 1차대전 참전.
1919년 간디, 1차 비폭력저항운동 개시.
1927년 장작림의 북경정권, 반공산당 선언.
1928년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 출생
1928년 소련공산당 중앙위, 신농업 정책 채택.
1930년 간디 2차 비폭력저항운동(소금행진) 시작
1930년 국내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중국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
1931년 선박사고/영광 안마도근해 어선60척 파괴 사망60명 실종250명
1936년 시인 신경림 출생
1938년 프랑스뒤퐁사 연구진, 내열성수지인 네폴론 합성.
1941년 제2차 세계대전/독일군, 그리스와 유고에 침공.
1943년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출간
1945년 소련군 오스트리아 수도 빈 침입
1948년 소련-핀란드 동맹 조약 조인.
1949년 트루먼 평화를 위해 원폭사용 불사 발표
1950년 국회, 이윤영씨 총리인준 부결.
1950년 농지개혁 실시
1950년 브라질서 철도붕괴 사고로 열차 추락 - 108명 사망
1954년 회오리 바람, 미국 달라스시 강타
1960년 야당의원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
1967년 홀트 호주 수상 내한
1968년 정부, 지방자치백서 발표
1969년 티우 월남대통령 6개항의 평화안 제기
1971년 미국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사망
1973년 경주 155호 고분 발굴 시작
1973년 정부, 반사회적 기업인 73명 발표
1973년 태양계 탐사선 파이오니어 11호 발사
1978년 박정희 대통령, 국산 고성능탱크M48A3. M48A5의 성능시험 과정 참관
1979년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장
1979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1982년 헤이그 미국 국무장관 미국의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 시사
1984년 미국 챌린저호 발사. 우주에서 위성 수리 성공
1990년 상영금지된 `파업전야` 6개도시에서 상영
1992년 미국 과학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사망
1994년 르완다 내전상태 돌입
1994년 비행기 폭발로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시프리엔 온타리아미라 대통령 사망
1995년 전기통신사업법 개정 시행
1996년 금호그룹 박정구 회장 취임
1998년 파키스탄, 사정거리 1,500km에 달하는 장거리 지대공미사일 발사시험에 성공
1999년 500여년 전 잉카 어린이 미라 발견
2000년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1957~1987) 부르기바 사망
2000년 파키스탄 샤리프 전총리 종신형
2003년 LG생명과학의 국산 신약, 미국 FDA(식품의약청) 첫 승인을 받았다고 발표
2005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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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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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새로운 한주가 시작 되었습니다."오늘의 소사"도 새로운 사실이 많은 날이군요. 항상 감사 드리며 오늘도 퍼 갑니다.
일일소사는 읽어야 겠고.... 4월은 여러가지로 정신없으니 .... 그저 인사글만 남기고 갑니다. 회원님 건강관리 잘 하세요
오늘은 화폐속의 인물이 많군요. 잘 읽었습니다. 매일 잊지 않고 이렇게 올리는 것이 얼마나 큰 정성이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제가 회사 싸이트에 올려보니 그렇더군요.
신미양요의 발발과 79년의 북한 화폐개혁이 보입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화폐속의 인물에 대해 많이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송이양 자신의 희망대로 훌륭하게 성장하기 바랍니다. 르네상스 3대화가 라파엘로가 태어나고 죽네요. 르네상스는 지금도 번성의 의미로 각국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경주고분 등 우리나라의 유적들이 70년대 부터 많이 개발되고 발견됩니다. 일제하가 아니라 참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