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__시의공간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상처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공존하거나·1
곽상인
인간의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공간은 문학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가거나 혹은 길들여지게끔 한다. 따라서 문학 속에 형상화된 공간을 살피는 작업은 곧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행위라 하겠다. 공간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는 그릇과도 같기에, 그 안에서 거주했던 인간에 대한 역사적인 통찰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공간은 여러 학자들에 의해 그 개념이 다양하게 설명되었다. 예컨대 문학작품 속에 구현된 시간과 공간의 내적인 연관성을 주목하여 그 교차점을 살피는 미하일 바흐친의 ‘크로노토프’, 환경은 단순한 자원을 넘어 깊은 정과 사랑의 대상이자 기쁨과 확실성의 원천이 된다고 주장한 이푸 투안의 ‘토포필리아(장소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중간 지점이기도 하면서 한시적으로 유토피아가 가능하다고 설명한 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그러하다. 그만큼 공간은 일상에서 유용한 존재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볼 서대문구,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살아온 시인들, 그들이 만들어낸 시적인 문장은 서대문구의 시·공간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긴요할 것이다. 문학작품에는 작가가 살았던 시간과 더불어, 그가 현실적으로 경험했던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대문의 곳곳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 형상화가 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 되겠다.
서대문은 사대문의 서쪽 경계로서 북쪽으로는 영천을 지나 구파발로, 서쪽으로는 마포, 남쪽으로는 서소문을 지나 서울역 쪽으로 나아가는 통로 구실을 했던 곳이다. 지금 여기, 눈앞에 펼쳐진 서대문구라는 공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이 고민은 서대문구를 배경으로 한 여러 시편, 서대문구의 풍경이 만들어낸 삶의 다양한 언어, 이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한 시인들의 상상력과 만나면 어느 정도 해결되리라 믿는다.
1.상처로 얼룩진 공간의 일상화 - 서대문형무소와 독립문
서대문구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서울 사람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대개는 서대문형무소를 떠올린다. 그 다음으로 독립문, 대학가(연세대, 이화여대, 명지대), 신촌, 재래시장인 아현시장과 모래내시장 등등을 입에 올린다. 서대문형무소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서대문~’이라고 하는 기호의 미끄러짐 때문이리라. ‘서대문’과 ‘형무소’의 기호적 인접성 때문에 쉽게 연상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겠지만, 또 한 편으로는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숙명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서대문형무소는 우리의 역사 속에 각인된, 그야말로 아픈 상처로 환기되는 공간이라 하겠다.
앞서 언급한, 서대문구를 대표하는 공간은 첫째 역사적인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 둘째 젊음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욕망이 넘치는 대학가를 만들어낸 곳, 셋째 현대적으로 탈바꿈된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맞서 싸우는 재래시장이 있는 곳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다양한 삶의 풍경을 품고 있는 서대문 하늘을, 정호승은 비장하게 그려냈다.
죄 없는 푸른 하늘이었다.
술병을 깨어 들고 가을에
너를 찔러 죽이겠다고 날뛰던 사막의 하늘.
어머니가 주는 생두부를 먹으며
죄 없는 푸른 가을이었다.
죄의 상처를 씻기 위하여 하늘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기보다
눈물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비 오는 창살 밖을 거닐며
아름다운 눈물의 불씨도 되고 싶었다.
(…중략…)
운명을 사랑한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해는 지고 바람은 불어오고
사막의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죄없는 푸른 별들이었다.
죄없는 푸른 사람이었다.
- 정호승, 「서대문 하늘」 부분
정호승은 1950년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을 간행했다. 정호승은 서정적인 문장으로 비극적 현실을 역설적으로 그려내는 데 주력했다고 평가받는데, 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고독감,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따라서 정호승이 「서대문 하늘」을 썼을 때, 서대문 하늘을 ‘죄 없는 푸른 하늘’, ‘죄 없는 푸른 별’, 그리고 ‘죄 없는 사람’으로 상징화 한 것은 서대문형무소를 염두에 둔 탓이라고 판단된다.
시인은 서울 서대문의 하늘을 비장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주목할 시어들은 ‘죄 없는’ 하늘과 별과 사람이라 하겠다. 서대문의 하늘을 뒤덮고 있는 비장함의 정체는 바로 ‘죄’라 하겠는데, 그 ‘죄’는 이상하게도 ‘푸른 하늘과 별과 사람’과 대치된다. ‘죄’에 색깔을 입힌다면 아무래도 검은 색과 상통할진대, 이와 대비되도록 시인은 ‘푸른’ 색을 ‘죄’에 붙인다. 푸른 색은 긍정적인 이미지와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죄’는 그야말로 ‘죄’가 아니게 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로 판명되어서 억울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들을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죄’는 ‘죄 없는 푸른 하늘과 별’이 되는 것이다.
서대문 하늘 아래,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는 서대문형무소가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안고서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역사는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대문형무소는 격증하는 조선 수형자를 수용하기 위해 일제가 1933년 서대문형무소를 증축한 곳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았던 항일 독립운동가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른다. 이들은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일어나 철저하게 구획되고 분할된 공간에서 엄격한 수감생활을 해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의 명칭은 경성감옥이었고, 1987년까지 운영되다가 문을 닫아서 현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105인 사건’(1911년)을 기점으로 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서대문형무소에 잡혀 들어왔기에, 독립을 염원하던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은 이 공간에서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이곳에는 홍명희를 비롯, 한용운, 김기림, 정지용 등 문학인들도 대거 수감되었다. 이에 서대문형무소는 고통스러운 역사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어서 처절하게 ‘읽힌다.’ 하여, 「서대문 하늘」에 주된 키워드로 등장하는 ‘죄’는 독립을 했던 조선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서, ‘죄’임에도 ‘죄’가 아니고 ‘푸르게’ 읽힌다.
서대문형무소가 현대에 이르러 아무리 박물관으로 운영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가는 시민들은 감옥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는 분위기에 압도당하기가 쉽다. 따라서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들은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제약해야 하는 기묘한 힘을 경험하게 된다. 높게 둘러쳐진 붉은 벽돌 담장은 사람을 기죽이기에 충분하다. 높은 담장은 감시와 처벌이 수월하도록 설계된 흉물이거니와, 바깥세상과 완벽한 단절과 차단을 하기 위한 상징이기도 하다. 근대적으로 잘 설계된 통치의 결과물이 바로 서대문형무소 공간이다.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그 안에 수감된 수형자들은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 속에서 ‘버텨야’ 한다. 그 공간 안에 과연 자비와 은혜가 있을까. 그래서 정호승은 다시 한 번 「서울의 예수」를 통해 그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 정호승, 「서울의 예수」 일부
서대문구치소라 명명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이곳에 과연 죄를 짓고 들어온 이가 있을까. 진정 예수가 살아있다면, 수감되어 있는 자들을 차디 찬 바닥에서 밤을 새우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수감자들에게 인류애적인 구원은 있는가. 그래서 정호승은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신에게 덧씌워진 죄를 견뎌내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는 인간의 모든 슬픔을 안고서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대문형무소 안에 있는 수감자들을 빵과 사랑과 눈물로 위로하고자 한다.
세월이 흘러 서대문형무소에는 군부세력과 맞싸웠던 인사들이 대거 수용된다.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김지하, 황지우 등이 유신체제에 반기를 들다가 이곳에 수감되었다. 수감자 중 황지우는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라는 시를 지어, 체포를 당하는 순간부터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상황까지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침에 학교 가려고 나왔다가 아파트 앞에서 나는 체포되어 다시 감방에 처넣어졌다. 재수감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문민정부에서도 이럴 수가 있냐고 물었고, 곧 나는 후회했다. ‘문민정부’라는 말이 뭘 구걸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五舍下 감방은 옛날 그대로였지만 구서대문구치소 일대가 유적지 보존 조치로 깨끗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사형장 앞에 주차된 웬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고 나는 그들을 향해 소리를 질러대려 했으나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멀리 아스팔트 바닥에 반사된 1980년 7월 2일 오후 1시의 햇살을 받아 독립문 아치 하늘이 어떤 영원감을 잠깐 보여주고 지나갔다. (…중략…) 그 당시 가득 넘쳤던 폭력범들, 계엄포고령 위반자들,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관련자들은 다 나가고 감방은 텅텅 비어 있었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기 보다 엄청난 공포감이 덮쳐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소리는 안 나왔다. 이번에 이탈리아에 갔던 것은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나의 시나리오 작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말했지만 땜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옛날의 그 26호실 앞에 두고 가버렸다.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나는, 창살로부터 저녁 햇살을 집중시키고 있는 떡갈나무 한 그루가 마루 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 황지우, 「감옥 안에 있는 떡갈나무」 전문
황지우는 1952년 해남에서 태어났다. 가까운 바닷가에서 느꼈던 죽음과 관련한 상처는 그의 시에서 죽음의 이미지와 더불어 이상향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그에게 남아있는 상처는 빨치산이었던 삼촌의 죽음과 관련하기도 한다. 1972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하여 문학활동을 시작하다 이듬해 유신반대 시위를 하여 연행되었다. 주요 시집으로는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게 눈 속의 연꽃』,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있을 거다』 등이 있다.
황지우는 1980년 7월 햇살이 좋은 날에 체포되어 수감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정장 차림을 하고서 안개꽃 한 다발을 들고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로 나갔다. 안개꽃 안에는 광주시민 학살을 규탄하는 유인물이 감춰져 있었는데, 계엄군이 그것을 눈치 채고 체포했다. 그 이후 황지우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군부독재의 잔상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취조를 당할 때에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에 절망을 느낀다. ‘이번에 이탈리아에 갔던 것은 타르코프스키 감독과 나의 시나리오 작품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는데도, ‘땜통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곧 진실을 말해도 진실로 전달되지 못하는 현실적인 억압과 압박과 왜곡을 황지우는 시로 그려냈다.
그가 뱉어낸 시어에는 증오와 분노의 시선이 다분히 녹아있다. 그렇게 상처를 깊게 남긴 공간이 지금은 역사공원 형태로 복원되어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시인은 스산한 분위기의 사형장과, 유관순이 투옥됐다 순국한 지하감옥을 보며 과거의 아픔을 현재적으로 느끼는데, 시민들은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황지우는 관광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것을 목격하다가 그들을 향해 싫은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현실이 변했음을 인식하며 허망해한다.
이처럼 서대문형무소 공간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독립문과 연계되어서 현재에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발길을 당기고 있다. 서대문형무소와 인접한 곳에 위치한 독립문은 강춘남 작사, 김성국 작곡의 <서대문구민의 노래> 가사 첫 소절에 등장할 만큼 서대문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구민가를 살펴보면 ‘독립문 빛난 얼을 가슴에 품고 우뚝 선 안산 위에 햇살이 밝다’라고 되어 있다.
독립문은 서대문구 현저동 941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1896년 독립협회를 이끌던 서재필이 고종에게 발의하여 세운 것인데, 청일전쟁 당시 헐린 영은문 자리에 조선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려고 하였다. 이후 독립문은 1898년 1월 중순에 완공됐다. 화강석으로 쌓은 이 문은 높이 14.28미터, 폭 11.48미터로 설계되었다. 현재는 1979년 금화터널과 사직터널을 연결하는 고가도로가 건설되면서, 서북쪽으로 70미터 떨어진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옮겨졌다. 독립문 앞에는 사적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은문 기둥받침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서대문형무소 대신 독립공원이라 불리기 시작하면서 심어진 쪽나무가 고개를 비쭉 내밀고 공원을 순시하고 있다 군데군데 헐어있는 붉은 벽돌의 옥사 위로 봄 햇살이 잘게 무너지고 푸른 잔디에 곱게 싸여있는 사형장 옆으로 유모차를 밀며 젊은 아낙이 우윳병을 들고 지나간다 (…중략…)
이제는 깨끗하게 단장돼 연인들의 은밀한 데이트 코스인 공원은 끝내 입을 다물고 사형장 잠긴 열쇠는 아직도 풀릴 줄 모른다 지붕 아래 화기 단속 책임자 정·부 표지판만 페인트 글씨로 남아 며칠 전의 호외 찢어진 신문과 함께 독립공원 이름을 지키고.
- 강형철, 「독립공원」 부분
이 시를 지은 강형철은 1955년 전라북도 군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숭실대학교에서 수학하여 숭의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시인이자 교수다. 1985년 「아메리카타운1」로 데뷔를 했으며, 대표시집으로는 『환생』, 『도선장 불빛 아래 서 있다』 등이 있다. 강형철은 위 시를 통해,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녔던 독립문의 상징성이 탈각되어버린 현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시인은 그 공간이 지닌 역사적 중요성을 잃어버리고, 일상 공간으로 변해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변화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되레 형무소라는 이름 대신에 독립공원이라 불리기 시작하면서 생명체가 고개를 내밀고, 견고해 보이던 붉은 담장이 군데군데 헐어있는 것을 보며 그 어떤 안도를 느낀다.
서대문형무소의 현재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햇볕이 내리쬐던 날이었다고 해도 과거 서대문형무소 안에는 볕이 잘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옥사 위로 따뜻함이 전해지고 서슬 퍼렇던 사형장에도 푸른 잔디가 덮이게 되었다. 게다가 사형장 옆을 지나가려면 서늘한 기운을 이겨낼 용기가 필요했을 법도 한데, 지금은 유모차를 밀면서 우윳병을 들고 자연스럽게 지나갈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 이 공간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기에 연인들은 은밀한 데이트를 이 공원에서 즐긴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수감자들을 위해 백년여관에서 하숙을 하며 옥바라지를 했던 과거의 연인들은 이제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2.젊은이의 낮과 밤 - 신촌, 그리고 대학가(1)
서대문구는 역사적 상처를 품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젊음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대학이 밀집되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대문구를 대표하는 대학으로는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그리고 명지대학교를 들 수가 있겠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의 경우는 신촌역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신촌역을 중심으로 해서 젊음의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명지대는 남가좌동에 위치해 있어서 신촌역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신촌동은 서부 연희방의 새터말이라 부르던 곳이다.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연희방 새터말이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편입되면서 고양군 신촌리가 되었다가 1936년 1월 경성부의 지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일본식 지명인 신촌정이 되었다. 1946년 10월,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을 동(洞)으로 고칠 때 신촌동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신촌동이 휘황찬란한 불빛을 밤낮으로 밝히면서 ‘욕망’하는 이미지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공간으로 바뀌었으나 과거에는 외딴 섬처럼 그려지던 곳이기도 했다. 김동명의 시를 보면 그렇다.
여기 호박꽃 피는 마을/ 비둘기장 모양 주택이 여섯 형제// 뒤로 돌아 둘째 번 202호는/ 나의 세인트헬레나섬// 인생 오십 년을 건너/ 천정만 바라본다// 대륙이 멀어 서룬 지점이기에/ 국화 한 그루 기르며 산다
- 김동명, 「신촌동」 전문
김동명은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내 마음은」의 일부)라는 시 구절을 만들어내 유명해진 시인이다. 그는 1900년에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전원적인 정서와 민족의 비애를 시로 형상화했다고 평가받는 그는 192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그곳에서 김동명은 낮에는 도쿄 아오야마학원(청산학원) 신학과에서, 밤에는 니혼대학 철학과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8년 5월부터 1960년 6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한 바 있어서 신촌동과는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집으로 『파초』, 『삼팔선』 등을 남겼다. 특히 『목격자』라는 시집에는 서대문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으로 「북아현동」, 「신촌동」 등이 있다.
위 시에서 신촌동은 현재의 활기차고 발랄한 젊음을 표상하는 공간과 사뭇 다르게 묘사되고 있다. 신촌동에서 시인은 어떤 희망과 기대를 바라본다기보다 인간애의 상실과 고독감, 그리고 삶의 공간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읽히는 이유는 202호로 표상되는 자신의 공간이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에서 1,9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섬으로,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해진 곳이 세인트펠레나 섬이다. 김동명의 젊은 시절은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였기에, 그가 살았던 공간도 시인의 마음과 같이 활기차고 발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202호 공간에서 기거하는 자신의 모습과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의 모습이 하나로 겹쳐져서 이 시의 비애감은 증폭된다고 하겠다.
이처럼 삭막한 공간으로 묘사됐던 신촌은 정현종에 이르면 다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과거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탈각시켜버린 곳, 그리하여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표현되는 공간으로 신촌동은 묘사된다.
여름밤은 깊어가고
취객들은 거리에 넘친다
(…중략…)
문득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 둘이
내 쪽으로 빨리 몸을 쏠리며 소리쳤다
아저씨, 저 사람 좀 보세요, 자꾸 따라와요!
보니, 한 녀석이 회오리바람으로 불어제치고 있었는데
거두절미 시 잘 쓰는 학생이었다
녀석을 보자 나는 고개를 돌려
계집애들한테 소리쳤다
이년들아, 나래두 느이들을 따라가겠다
- 정현종, 「막간幕間-신촌의 밤」 부분
정현종은 1939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고 군 제대 후 <신태양사>에서 일하게 된다. 이 무렵 황동규, 김화영,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에 참여한다. 대표시집으로는 『고통의 축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상의 나무들』 등이 있다. 위 시에서처럼 정현종이 묘사하고 있는 신촌(신촌의 밤)은 젊은이들의 문화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잠시 살펴보자. 취객들은 넘쳐나고,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밤길을 돌아다니며, 그녀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시 쓰는 학생이 휘파람소리를 내며 따라간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무의식적 욕망을 다음과 같이 토해낸다. ‘이년들아, 나래두 느이들을 따라가겠다’고. 이 한 구절로 신촌의 밤은 절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시적 묘사는 기존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읽혀진다. 따라서 신촌은 젊은 세대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것 같다. 신촌 공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다른 공간에 비해 제약을 덜 받는다. 모든 것들이 자율적으로 소비가 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특히 밤이 되면 디오니소스적인 풍경들이 펼쳐지는 공간이기도 한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곳은 1970년대 초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은 곳이었다. 대학생, 회사원, ‘~족’들, 노동자 등등 대체적으로는 젊은 계층의 무리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문화적 공간을 만들어냈던 곳이다. 지금도 지하철 신촌역 안에 문화공간이 잘 형성되어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촌은 이제 물질을 넘어서서 이미지, 사람들의 욕망을 소비하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공간을 걸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욕망의 상호 교환이 가능해진 것이다.
거대 자본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건물을 만들어내는 동력이 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 공간 안에서 배회하도록 하는 동력도 된다. 개성의 문화, 상상이 실현되는 문화, 하위문화의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바로 신촌이라 하겠다. 이 공간은 현재 경제 문화적인 특구가 되어 있으며, 특히 신촌역 인근에 중국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본의 투입은 곧 욕망의 발현과 맞물린다고 할 수 있는바, 따라서 여기에는 공간의 정치경제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2부에서 계속)
곽상인 / 1976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났으며, 2002년 제2회 사이버문학상에 단편소설 「타래」로 입선했다. 저서 『손창섭 신문연재소설 연구』, 『이병주』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