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수필의 역사 / 최원현
1. 들어가며
‘21세기의 문학은 수필’이란 말이 설득력 있게 이해되는 상황에서 수필문학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갈 것이냐는 방향성은 대단히 흥미롭고 기대된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수필문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대구수필 40호 특집으로 한국현대수필의 역사를 함께 상고해 보게 된 것은 대단히 시의적절하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한국 수필문단의 형성은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면서로 볼 수 있는데 한국수필가협회는 1971년 2월 12일 창립되었다. 초대회장이었던 조경희 선생은 그의 자서전에서 한국수필가협회는 1971년 2월 12일 종로2가에 있던 낙원장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조경희 자서전》(2004.정우사)고 밝히고 있다.
한국수필가협회의 창립은 명실 공히 한국수필문단의 정초(定礎)가 되었다. 조경희 회장은 협회 창립과 함께 그 해 4월 수필전문지인「隨筆文藝」(1971.4.10.발행. 발행인 조경희. 편집인 이일동)를 창간함으로써 발표지면을 확보했다. 수필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는 호기를 맞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필문단은 지방에서 먼저 동인회와 동인지의 발간으로 형성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바로 최초의 한국 현대수필 동인지라 할 수 있는《에세이(Essays)》(편집위원 허천 오도환)가 부산에서 김병규(해양대학) 김일두(부산지방검찰청) 박문하(동래민중병원) 이남항(부산시경찰국 공보실) 오도환(경남여자고등학교) 정행득(경상남도 교육과) 장성만(대교그리스도교회) 허천(국제신보사) 등에 의해 1963년 7월 15일 부산수필문학동인회에 의해 창간되었고, 2호(1964. 3. 10. 편집위원 박문하 박지홍)부터는《隨筆》로 제호를 바꿔 현재까지 나오는 것을 비롯하여 시간차는 있지만 1968년 12월 21일 김시헌 이화진 장인문 등이 중심이 된 경북수필동인회(초대회장 최정석. 간사 장인문)를 창립 1969년 12월 동인지《隨筆文學》창간호를 내었고, 서울에서도 현대수필동인회가 결성되어 명계웅 박연구 박찬계 서정범 윤재천 윤호영 윤홍노 정봉구 주종연 등에 의해《現代隨筆》이 창간(1970)되었으며 그 외에도 개인 작가의 수필집들이 많이 출간되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뿐아니라《현대문학》(1955.1.1. 창간)과《월간문학》(1968.9.1.창간)에서도 수필을 게재했다. 그렇다면 본 고(稿)에서 말하고자 하는 한국현대수필의 시점은 언제로 봐야 하는 걸까.
2. 한국 현대수필의 시대 기준
정진권(1935-2019)은「한국수필문학사」에서 산문(한문)의 역사를 수필의 역사로 보고 있다. 한문으로 된 산문이지만 수필은 산문에서 나오므로 결국 산문의 역사가 수필의 역사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역사는 삼국시대 곧 신라가 남긴 산문으로부터 2천년 역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시대별로 나누면 한국수필문학사의 여명기(삼국정립기-신라말)까지의 1천년과 한국수필문학사의 전개기(중세수필-근세수필-근대수필)로 나눌 수 있으며, 중세수필은 고려건국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500년, 근세수필은 조선건국으로부터 갑오경장 전야까지의 500년, 근대수필은 개화기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전후까지의 50년으로 나누었다. 곧 우리 수필문학을 여명기(신라 천년), 중세(고려 500년), 근세(조선 건국으로부터 갑오경장1894 전야까지 500년), 근대(갑오경장부터 해방 전후 1950년대까지 50년)로 나누고 있으니 그러면 현대수필은 근대수필기인 해방전후기(1940년대-1950년대) 이후부터가 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김우종은《한국현대수필 100년》(2014.연암서가)에서 한국현대수필의 기점을 2014년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100년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면 1914년이 100년 전이 되는데 그 때는 일제강점기가 된다.
‘그 1914년 전후의 문학 활동을 살펴보면 1908년(융희2년) 11월에 한국 최초의 월간지 《소년》이 창간되었고, 1919년에 동인지《창조》가 나왔으며, 1920년엔《폐허》가, 1922년엔《백조》가 창간되었다. 또 1924년 10월엔 우리 신문학사상 최초의 범 문단적 문예지로《조선문단》(1936년 6월까지)이 창간되었고. 1938년 10월엔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전문지인《박문》(1940년 8월까지)이, 1939년 2월엔 문학종합지인《문장》(1941년 4월까지)이 창간되었다. 이와 더불어 시인, 소설가 및 지식인들이 산문(수필)을 썼는데 이광수의 <자녀중심론>(1918) <혼인에 대한 편견>(1918)과《금강산유기》(1924), 최남선의《심춘순례》(1926),《백두산근참기》(1927),《금강예찬》(1928) 등 기행수필집이 그때 나왔다.
그 후 1930년대에도 기행수필로 이병기의 <낙화암>, 박종화의 <남한산성>, 이은상의 <신라의 고허>, 현진건의 <석굴암> 등이 이어졌고, 이 영향이 1960년대까지 이어져 정비석의《산정무한》(1963), 김찬삼의《세계일주 무전여행기》(1962), 안병욱의 구미기행기록인《마음의 창문을 열고》(1963) 등이 나왔다.
물론 이태준의《무서록》(1941), 박종화의《청태집》(1942), 이양하의《이양하 수필집》(1947), 김용준의《근원수필》(1947), 노천명의《산딸기》(1948), 김상용의《무하선생 방랑기》(1950), 변영로의《명정40년》(1953), 이광수의《돌벼개》(1954), 김진섭의《생활인의 철학》(1954), 전숙희의《탕자의 변》(1954), 천경자의《여인소묘》(1955), 이희승의《벙어리 냉가슴》(1956), 이병도의《두계잡필》(1956), 이주홍의《예술과 인생》(1957), 마해송의《饒舌錄》(1958), 양주동의《문주반생기》(1960)와《人生雜記》(1962), 조윤재의《陶南雜識》(1964), 김소운의《건망허망》(1966)과《하늘 끝에 살아도》(1968), 피천득의《산호와 진주》(1969) 등 개인 수필집에 국제문화사가 발간한《한국수필문학전집》(전5권.1965)과《한국여류수필전집》(1965), 집현사가 출간한《한국수필문학선집》(전6권.1965)도 나왔으며, 홍순성의《隨筆》(1961), 정규남의《隨筆》(1966), 범우사 발행의《現代隨筆》(1970) 같은 잡지 형태의 동인지들도 나왔다. 또한 최초의 현대수필이론서라 할 수 있는 최승범의《수필ABC》(1965)도 나왔는데 이는 끊임없이 우리 수필이 발전해 오며 사랑받았다는 증거이다.‘
김우종의「한국현대수필 100년」에서 김우종은 현대수필100년사의 기점에 대해 ‘신시 신소설에 이어서 한국문학사의 대표적인 선구자 이광수가 등장했다. 그리고 곧 이어서 1919년에 동인지「창조」가 나오고, 1920년에「페허」가 나오고, 1922년에「백조가 나왔다. 이때부터 이광수를 비롯해서 김동인 주요한 박종화 오상순 전영택 등이 소설이나 시를 발표하며 때때로 수필도 쓰기 시작했다. 시나 소설에서처럼 수필도 이때부터 헤아려서 약 100년을 헤아릴 수 있다.’고 했다.
물론 한국현대수필이라는 시대구분에 대해 더 많은 여러 의견들이 있다. 임헌영의 주장을 하나 더 들어 본다면
‘현대 한국 수필문학은 독자나 출판계의 시각으로 보면 1950-60년대 초기의 철학적 인생론(안병욱, 김태길, 김형석)시기를 지나 1960년대 이후의 감상주의적 수필(이어령, 전혜린 등), 이어 정치적인 기현상이 빚은 사회비판 의식의 고조(한승헌, 김중배, 김동길 등)문학을 겪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의 군부독재와 비인간화의 극치 속에서 사회 전체의 정신병리학적인 접근방법의 대두로 정신과 의사의 글(이시형, 김정일, 이나미 등)이 상승 주가에 올랐다가, 곧 종교인들의 글(법정을 비롯한 스님, 신부. 수녀 등)이 베스트셀러 품목을 매웠다. 그 다음 단계가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여성 수기류와 실록, 벗기기 경쟁물이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혼탁한 수필문학의 막가파식 돌격작전은 바람직스럽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이를 깡그리 외면한 채 고고하게 피천득의 <수필>세계만을 고수하는 영혼의 밀폐주의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한쪽은 너무 터졌고 한쪽은 너무 닫은 셈이다.‘라고 했다.
물론 시대 구분에는 저마다의 기준이 있게 마련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고대수필로 보고 그 이후를 현대수필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그 현대수필도 근대적 수필의 형성기(1910-1920)와 문학적인 수필의 본격화기(1930-1940년대), 수필문학의 확산기(1950-1960년대 이후)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사실 광복의 시기인 1940년대와 1950년에서 1960년에 이르는 시기엔 수많은 수필집이 출간되었다. 다른 여타 문학 장르보다 접근하기 쉽고 독자에게 나아가기가 쉬운 문학이란 점이 이러한 출판경향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한상렬이 월간「수필과 비평」에 연재한‘제4장 현대수필문학의 전개(3) 현대수필의 방황기(수필 장르의식의 방황기)-광복 후의 수필문학 ②’에 이정림의 ≪한국수필평론≫(범우사, 2002년, 165-167쪽)에서 이 시기에 출간된 수필집을 소개하고 있는데 ‘1940년대에 출판된 수필집을 발간 순서대로 연대기식으로 나열하면, 이태준의 ≪무서록無序錄≫(박문서관, 1941년), 이은상의 ≪노산문집≫(영창서림, 1942년), 박종화의 ≪청태집靑苔集≫(1942년), 김동석의 ≪해변의 시≫(박문사, 1946년), 김동석·김철수·배호 3인공동수필집인 ≪토끼와 시계와 회심곡≫(서울출판사, 1946년), 김진섭의 ≪인생예찬≫(동방문화사, 1947년), 이양하의 ≪이양하수필선≫(을유문화사, 1947년), 마해송의 ≪편편상片片想≫(새문화사, 1948년), 이광수의 ≪돌벼개≫(생활사, 1948년), 김용준의≪근원수필≫(을유문화사, 1948년), 노천명의 ≪산딸기≫(정음사, 1948년), 이광수의 ≪나의 고백≫(춘추사, 1948년), 김기림의 ≪바다와 육체≫(평범사,1948년), 설의식의 ≪화동花洞시대≫(새한민보사, 1949년), 정지용의 ≪산문≫(동지사, 1949년), 고황경의 ≪인도기행≫(을유문화사, 1949년), 최재희의≪생활의 향기≫(온문사, 1949년), 조연현의 ≪문학적 산보≫(문예사, 1949년) 등이 있다.
195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김진섭의 ≪교양의 문학≫(조선공업문화사,1950년), 김상용의 ≪무하無何선생방랑기≫(수도문화사, 1950년), 김진섭의≪생활인의 철학≫(선문사, 1950년), 김소운의 ≪목근통신木槿通信≫(영웅출판사, 1951년), ≪마이동풍첩馬耳東風帖≫(남향문화사, 1952년), 변영로의 ≪명정酩酊사십 년-무류無類실태기≫(서울신문사, 1953년), 이은상의 ≪노변정담爐邊情談≫(민족문화사, 1953년), 전숙희의 ≪탕자蕩子의 변辯≫(연구사,1954년), 변영로의 ≪수주樹洲수상록≫(서울신문사, 1954년), 조경희의 ≪우화寓話≫(중앙문화사, 1955년), 계용묵의 ≪상아탑≫(우생출판사, 1955년), 김동명의 ≪삼오당잡필≫(진문사, 1955년), 천경자의 ≪여인소묘≫(정음사,1955년), 이광수의 ≪병상록≫(광영사, 1956년), 박승훈의 ≪하루살이≫(평문사, 1956년), 고유섭의 ≪전별餞別의 병甁≫(통문관, 1958년), 조연현의≪문학과 그 주변≫(인간사, 1958년), 김팔봉의 ≪김팔봉수필집≫(경기문화사, 1958년), 장만영의 ≪이종표≫(신흥출판사, 1958년), 박목월의 ≪토요일의 밤 하늘≫(범조사, 1958년), 이영도의 ≪춘군집春芹集≫(청구출판사, 1958년), 조지훈의 ≪창에 기대어≫(범조사, 1958년), 유달영의 ≪인생 노오트≫(수도문화사, 1958년), 박두진의 ≪시인의 고향≫(범조사, 1958년), 김진섭의≪청천수필평론집≫(신아사, 1958년), 유치환의 ≪동방의 느티≫(신구문화사, 1959년), 주요한의 ≪자유의 구름다리≫(태성사, 1959년), 조지훈의 ≪시와 인생≫(박영사, 1959년), 피천득의 ≪금아시문선≫(경문사, 1959년) 등이 속속 출간되었다.
1960년대에는 모윤숙의 ≪포도원≫(중앙출판공사, 1960년), 한하운의 ≪황토길≫(신흥출판사, 1960년), 김형석의 ≪고독이라는 병≫(동양출판사, 1960년), 양주동의 ≪문주文酒반생기≫(신태양사, 1960년), 이효석의 ≪효석전집-수필편≫(춘조사, 1960년), 이어령의 ≪지성의 오솔길≫(민중서관, 1960년), 박문하의 ≪배꼽 없는 여인≫(현대사, 1960년), 안병욱의 ≪사색 노우트≫(동양출판사, 1960년), 최태호의 ≪애처론≫(삼중당, 1961년), 이희승의≪좌석 잠꼬대≫(일조각, 1962년), 마해송의 ≪오후의 좌석≫(정음사, 1962년), 김태길의 ≪웃는 갈대≫(동양출판사, 1962년), 조연현의 ≪여백의 사상≫(정음사, 1962년), 안춘근의 ≪살구나무의 사연≫(동민문화사, 1963년), 최신해의 ≪문고판 인생≫(정음사, 1963년), 안병욱의 ≪마음의 창문을 열고≫(삼중당, 1963년),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현암사, 1963년), 천경자의 ≪유성流星이 가는 곳≫(영문각, 1964년), 조지훈의 ≪돌의 미학≫(고대출판사, 1964년), 김사달의 ≪소의낙수小醫落穗≫(수문사, 1964년), 김동리의 ≪자연과 인생≫(국제문화사, 1965년),박종화의 ≪달과 구름과 사상≫(휘문출판사, 1965년), 박문하의 ≪약손≫(아성출판사, 1965년), 김형석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삼중당, 1965년), 김소운의 ≪건망허망健忘虛妄≫(남향문화사, 1966년), 이주홍의 ≪뒷골목의 낙서≫(을유문화사, 1966년), 박현서의≪화려한 숲의 대화≫(여원사, 1967년), 최승범의 ≪반숙半熟인간기≫(형설출판사, 1968년), 김우종의 ≪소양강에 비 내리다≫(홍익출판사, 1968년),방정환의 ≪소파수필선≫(을유문화사, 1969년), 전숙희의 ≪밀실密室의 문을 열고≫(국민문화사, 1969년) 등‘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선 김우종의 구분을 참고하고 임헌영의 구분과 정진권이 근대수필기로 명명한 1950년대 이후인 1960년대(1961년부터)부터를 현대수필기로 보고 우리 수필이 어떤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겪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한국 현대수필의 역사
수필은 동인지·수필전문잡지·개인 수필집 등으로 여느 장르보다 독자에게 가까이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현대수필(1960년대 이후)이 발전한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바로 수필 전문잡지의 창간을 통해 수필문학의 발전상을 살펴보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수필전문잡지란 그 시대의 수필에 대한 독자의 수용도를 볼 수 있는 잣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1. 수필문단 형성 준비기(1960년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1960년대엔 양주동, 조윤제, 피천득의 <산호와 진주> 등 개인 수필집이 나왔다. 또한 한국수필문학전집 전5권, 한국여류수필전집, 한국수필문학선집 등도 발간되었다. 여기에 동인지 형식의 잡지들 특히 부산수필동인회의 (1963)와 <隨筆>(1964), 경북수필동인회의 <隨筆文學>(1969), 서울의 <現代隨筆>(1970) 등이 수필의 시대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에 한국 최초의 현대수필이론서라 할 수 있는 최승범의 <수필ABC>(1965)도 나와 수필 발전에 큰 몫을 했다. 말하자면 1960년대는 한국 수필문단이 형성되기 전의 문단 형성준비기라 할 수 있을 때이다. 거기에 또 하나 힘이 되어준 것은 수필을 게재해준『현대문학』(1955.1.1. 창간)과『월간문학』(1968.1.1. 창간)이다.
3.2. 수필문단 형성기(1970년대)
1971년 2월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수필문학 단체이다. 초대회장은 당시 한국일보 부녀부장이던 조경희였으며 임원으로는 대한공론사 오종식 사장이 명예회장, 권순영 김남중 김봉기 김성진 김진홍 김현옥 김순자 김형석 박두병 이희승 최두고 주영하 최신해 최진순 조순영 피천득 등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했고, 부회장은 이일동(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임헌도(공주사대 교수), 이사로는 김준(시조시인), 金海星(詩人) 羅碩昊(변호사) 朴鍾采(全南每日 編輯副局長) 朴薰相(수필가) 徐廷範(慶熙大 국어학교수) 尹在天(詳明女師大교수) 李揆東(청량리뇌병원 精神科醫師) 李丙幬(東國大學校國文科교수) 田淑禧(수필가) 秦仁淑(建國大 英文學교수)이었는데 서정범 교수가 상임이사를 맡았다.
당시 수필문학 단체의 결성은 곧 수필문단 형성과 직결되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이면서도 특별한 활동능력을 가진 조경희 회장은 그해 4월 10일『수필문예』를 창간하여 발행인 조경희 편집인 이일동 주간 서정범으로 수필가들의 발표 지면을 확보해 냈다.
조경희 회장은『수필문예』」창간사를 통해 ‘수필 하는 가족들의 옳은 성장 발전 그리고 문학 영격에 미치는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한 ‘생각하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생각하는 사색과 생활을 수필이란 형태로 표현’하는 터전과 무대가 되고자 한다고 했다. 그 당시 한국문인협회장은 김동리, 한국시인협회 회장은 박목월,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은 서정주, 한국평론가협회 회장은 조연현, 한국아동문학가협회 회장은 이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회장은 백철 선생으로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되고 기관지인『수필문예」까지 발간케 된 한국수필가협회 또한 명실 공히 수필 장르의 대표주자로 문단확보를 공표한 것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隨筆文藝」는 1집 2집 3집 등으로 제6집까지 나오고 제7집 대신『한국수필』로 제호를 바꿔 1975년 봄호로『韓國隨筆』창간호가 되어 나왔다. 본격 수필잡지로의 전환이다.
1970년대에 또 하나 수필발전에 획기적인 일이 생겨났다. 바로 월간『隨筆文學』의 창간이다. 한국수필가협회가 창립(1971)된 다음 해인 1972년 3월 한국 최초의 수필문학 전문 월간지로 월간『隨筆文學』이 창간되었다. 당시 관동출판사를 운영하던 김승우 교수가 ‘수필문학의 좌표를 구축하고 각광받는 문학영토를 키워가기 위해서’라며 창간했다.
월간『隨筆文學』의 창간은 한국수필가협회의『隨筆文藝」만 존재하던 수필계에 큰 힘이 되었다. 비록 106쪽의 얇은 잡지였지만 발행인 김승우 편집인 김효자 주간 박연구로 특집과 설문, 신작수필 및 교단수필에 학생작품 및 해외에세이까지 다양한 편집력을 보였다. 특히 1972년 통권 3호부터는 윤오영의 <수필문학 첫걸음>을 싣기 시작하여 13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2호부터는 동매실주인이란 필명으로 <수필문학 강론>을 6회에 걸쳐 연재하여 수필이론의 부재시대에 가뭄 중 단비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또한 1960년에 절필을 했던 금아 피천득 선생께 펜을 들게 하여『隨筆文學』1973년 11월호에 <인연>을 싣기도 했다.
1972년『隨筆文學』의 창간 당시 수필가 현황은 ‘전국수필동인회 동인주소록’ 월간 『隨筆文學』창간호 권말부록으로 알 수 있는데 1972년 2월 15일 현재 서울은 현대수필동인회 24명, 부산수필동인회 19명, 대구 경북수필동인회 23명, 마산동인수필회 22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하지만 『隨筆文學』의 계속적인 발간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서 이를 살려보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니 ‘한국수필문학진흥회’(1977.1.1. 창립. 초대회장 김태길)였다. 공식적인 제2호 수필문학 단체가 되는 셈인데『隨筆文學』을 창간한지 5년째 되는 1977년『隨筆文學』1월호(통권 제56호)를 발간하면서 잡지 발간을 돕는 한편 수필문학의 정착을 위한 문학운동체로 발족한 것이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는 문학상 제도도 만들어 그 상의 이름을 한국수필문학상이라 정하고 1977년 3월 제1회 수상자로 피천득 교수를, 2회(1978)는 이희승 교수, 3회(1979)는 김소운 선생에 수여했다. 또한 10년 이상 경력자에게 주는 신인상도 제정하여 정진권(1회.78년), 김열규(2회.79년), 김효자(3회.80년), 이병남·유혜자(4회.82년 공동수상) 등의 수상자를 냈다.
한국수필진흥회의 지원에도 월간『隨筆文學』은 1982년 3월호(통권 제109호)로 발간이 중단되었다. 이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제2대 회장인 차주환 교수는 새로운 발표지면을 모색했고 그 해 9월『<隨筆公苑』(초대발행인 차주환. 편집인 김종윤. 편집위원 김태길 김우현 김열규 손광희 유경환 김우종)을 창간했다.『<隨筆公苑』은 제5호까지는 부정기로 간행되었으나 1984년 여름호(제6호)부터 정기간행물로 발간케 된다. 어떻든 1970년대에는『隨筆文藝」에서 제호가 바뀐『韓國隨筆』과 월간『隨筆文學』이 수필가들의 구심점이 되어 한국수필의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3.3. 수필 문단 확립기(1980년대)
1980년대는 우리의 정치·사회·문화의 급변기다. 5.18광주 항쟁과 10.26사태와 12.12 등 정치적 사건들이 자유와 정의의 쟁취 형태로 나타났다. 언론이 통폐합되고, 유수 잡지와 문예지가 강제 폐간을 당하는 탄압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수필문학은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해 갔다.
한국수필가협회의『隨筆文藝」는 1975년 봄호로『韓國隨筆』이 되어 본격 수필전문 잡지의 기능을 하는 한편, 월간『隨筆文學』이 고전을 하면서도 역시 수필전문지로서의 자리를 지키다 결국 발간이 중단되고 말았지만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수필문학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1981년 10월 9일 김태길 차주환 김우현 등 27명이 서울 파나여행사 회의실에 모여 ‘한국수필의 위상과 수준을 높이고 그 이론을 탐구하여 비평 풍토를 조성키 위해 ’수필문우회를 창립했다. 초대 회장은 김태길, 간사에 윤형두, 운영위 주간에 김우현을 위촉하고, 매월 수필작품 합평회를 갖는 일, 한국수필문학진흥회와 공동으로 수필잡지를 출판하고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 동인들의 연도 수필선집 간행 등을 사업으로 하기로 했다.
『隨筆文學』의 발간 중단으로 한국수필문학진흥회는 1982년 9월『<隨筆公苑』을 창간했다. 5호까지 부정기로 간행하다 제6호인 1984년 여름호부터 정기 계간물로 출간했다. 하지만 이 또한 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었다. 다행히 한샘출판사를 경영하는 서한샘 수필가가 1986년 여름호(제14호. 제3대 회장 겸 제2대 발행인 이응백)부터 10년간 출판 및 제작을 맡아주기로 했다.
이때까지 70년대의 수필잡지《한국수필》과 월간《수필문학》의 뒤를 이은《수필공원》의 시대였는데 80년대로 들면서《현대문학》《한국문학》《월간문학》등에서도 수필가를 배출했고 신문사에서는 문화센터를 설립 수필강좌를 열었다. 수필문학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높아지고 그 열망은 수필 전문잡지에 대한 필요를 부추겼다. 그 힘이 작용하여 나오게 된 게《월간에세이》와《수필문학》이다.
《월간에세이》는 당시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던 수필가 원종성 선생이, 격월간《수필문학》은 출판사 교음사를 운영하던 수필가 강석호 사장이 창간한 수필 잡지이다. 해서 80년대에 이르러 기존《한국수필》과《수필공원》에《월간에세이》와《수필문학》이 합류한 4종의 수필 전문잡지 시대가 된 것이다.
《월간에세이》는 당시 기업가이면서 수필가인 원종성 선생이 독자들이 찾는 잡지를 만들어보겠다는 신선한 각오로 출발했다. 동양에레베이터 회장실이 곧《월간에세이》편집실이었다.
《월간에세이》의 특징은 문학잡지가 대중잡지적 성격을 띠며 태어났다는 점이다. 물론‘소박하고 담담하고 평범한 잡지’라고 했지만 독자의 눈을 끌어당기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글을 쓰는 사람들만 읽는 잡지가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즐겨 찾는 잡지이고자 했던 것이다. 해서 ‘생각하는 잡지, 생활에 빛과 지혜를 주는 잡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지켜주는 잡지’를 표방하면서 보편적인 공감으로 묶여질 수 있는 다양한 군의 사람들 작품으로 채워졌다. 특히 시와 그림 그리고 예술 전반에 걸쳐 폭넓게 이들 모두를 수용하는 자세로 잡지를 편집했다. 해서 독자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기획이었다.
《월간에세이》는 1987년 4월 25일 창간호를 냈다. 창간 축하의 글을 통해 당시 우리나라 문예지의 상황도 알 수 있다.
김동리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은 ‘많은 문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광장으로’란 제하에 ‘지금 우리나라는 7종류의 순 문예 종합지들이 월간으로 나오고 있고, 여기에 계간 문예지와 시, 소설, 수필 등 각 부문별 문예지가 몇 개씩이나 나오고 있다’면서 ‘이천 명을 상회하는 오늘의 문단 인구들’이라 했으니 당시 한국문인협회 회원이 이천 명 정도 되었다는 말이 된다.
정한모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은 ‘우리 문단에 수필 잡지가 2.3종 나오고 있으며, 꽤 오랜 전통과 수준 높은 내용으로 알차게 발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하여 당시《한국수필》과《수필공원》이 나오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월간에세이》는 ‘독자를 위한 기획특집’으로 ‘수필은 어떤 문학인가?’를 다루었는데 김태길(철학박사·전 서울대 교수)교수의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가>와 차주환(단국대 대학원) 교수의 <수필의 개념과 특성>은 수필가 및 수필애호가들에게 아주 좋은 내용이었다.
《월간에세이》가 창간된 다음 해인 1988년 9월 격월간 수필전문지《隨筆文學》이 창간되었다. 발행 겸 편집인 강석호, 주간은 오창익이었다.
강석호 발행인은 출판사인 교음사 사장이면서 수필가였다. 오랫동안 수필을 써왔고 수필을 사랑하는 수필가로 한국수필가협회 창립시부터 한국수필 문단을 이루는데 힘써 온 사람이다. 출판사를 하는 수필가로써 좋은 수필잡지 하나 만들어 보겠다는 뜻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주간을 물색했고, 당시 수필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좋은 수필을 쓰는 인천전문대의 오창익 교수를 영입하게 된다. 이렇게 출발한 수필문학은 창간호를 내면서 그때까지 작품 위주의 글만 싣던 잡지에서 이론과 비평을 곁들인 새로운 방향의 잡지로 태어났다. 그 뜻이 창간사에 잘 나타나 있다.
강석호 발행인은 창간사에서 수필은 모든 문예를 흡수할 수 있는 미래 문학의 중추가 될 것이라고 전망 하면서 올바른 수필문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하고 좋은 수필을 제공하는 전문매체의 탄생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 해서 비평의식과 작가정신이 빈약하고 추억의 반추 내지 자기 자랑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양산되고 있는 수필문단을 간과할 수 없기에, 이러한 수필문학의 필요성에 부응하고 새로운 방향모색을 자담하고 나섰다고 했다. 따라서 수필문학 전문잡지로서 질적 향상을 위한 이론 및 창작기법을 제시하고 비평 부재의 수필작단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수필작가 및 독자 상호간의 유대강화를 위한 공동의 광장이 됨은 물론, 내일의 수필을 이끌어 갈 신인의 발굴육성을 그 사명으로 하고 나왔다고 했다.
《隨筆文學》은 매해 12월호는 그 해의 좋은 수필들로 연간집으로 발간키로 하여 창간된 해인 1988년 12월호로《순간이여, 영원이여》라는 ‘88연간 대표수필선집’을 낸 것을 시작으로 1989년《그리움이 별이 되어》등을 매년 12월호 별책으로 발간하고 있다.
1988년 첫 번째 연간대표수필선집은 장백일 유한근 이유식 박연구 강석호 오창익을 편집위원으로 하여 김규련의 작품 <감성의 물결>을 비롯한 73명의 작품을 실었다. 책머리에서 ‘88년 수필계는 세계 속의 한국으로 도약했던 서울올림픽만치나 호황에다 경사까지 겹쳤던 한 해였다’면서, ‘7대 문예지에서 배출한 신인만도 20명에 달하고 작품도 월평균 90여 편으로 줄잡아 올해의 수확은 1천 편을 상회한다’고 했다. ‘해서 본지는 본격수필 완성기의 뚜렷한 획을 그은 88년 수필계를 총결산하고, 또한 그 창작 의욕을 오래 기리자는 뜻에서 <88연간 대표 수필선집>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12월호 별책으로 내놓는다’ 했다. 당시 7대 문예지에 연간 수필 발표 수가 1천 편을 상회하는 수필의 시대 1980년대는《韓國隨筆》《隨筆公苑》《월간에세이》(발행인 원종성)《隨筆文學》(발행인 강석호)이 수필계를 이끌었다.
3.4. 수필문단 발전기(1990년대)
1990년대는 수필문학이 발전기에 든 때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수필전문지인「한국수필」「수필공원」「월간에세이」「수필문학」이 좋은 신인 수필가를 배출해 냈고,「현대문학」「월간문학」「동양문학」「문학예술」「문학공간」「장르」등 종합문예지들도 신인수필가를 배출하고 수필 게재 영역을 넓혀갔다.《서울 뻐꾸기》(윤모촌)《그대 피어나라 하시기에》(반숙자)《인간속의 흔적》(허세욱)《내 마음의 오솔길》(김학래)《봄이 열리는 길목에서》(한석근) 같은 수필집이 출간되어 읽혀졌다. 인터넷의 확대로 정보 검색이 용이해져 다양한 지식이 수필 속에도 접목되고 1980년대의 감성위주 수필들은 지적 수필로 경향을 바꾸기도 했다. 수필창작에 대한 이론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수필작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주제의 전달방법>(공덕용) <주제의 설정 방향>(정재호) <주제와 문학성>(이정림) (이상「수필문학」1990년 3월호)등 주제에 대한 내용과 <수필의 멋>(조용만) <수필의 필수와 한계>(정규복) <수필문장의 사상성>(김병규), <수필문장의 표기>(이응백) <수필과 미문>(이정림) <수필 문장 考>(고임순)(이상「수필공원」1990년 가을호) 등 수필작법에 대한 내용들이 수필지의 특집으로 다루어졌고, 제9회 한국수필가협회 세미나(1990.6.23.-24. 대전 유성관광호텔)에서는 <21세기의 사회 변동과 그 주제적 전망>(이유식) <내가 다루는 수필>(윤모촌) <내가 쓰고 싶은 수필의 주제>(김영배) 등의 발표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수필문학이 보다 지경을 넓혀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으며 이러한 분위기는 수필전문지들의 추가 창간으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1990년대는 우리 수필문단이 가장 큰 발전을 이룬 때라고 볼 수 있다. 창작수필·현대수필·수필과비평·계간수필·수필춘추 등 수필전문지가 대거 창간되고 수필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 때이다.
계간「창작수필」은 1991년 가을호(1991. 10. 1)로 창간되었다. 편집·발행인 오창익, 주간 문형동으로 출범했다.
「創作隨筆」은 수필이 문학이어야 한다는 대 명제를 큰 소리로 강조하고 나섰다. ‘수필의 형식적 자율성을 보다 확실하게 체질화하고, 스스로 그 ‘答’을 구체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당위성‘에서 창작된 수필과 수필이론 외에는 어떤 것도 게재하지 않겠다는 발행인의 의도가 담겨있는 잡지다. 발행인 오창익 교수는 수필가요 수필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수필이론가로「수필문학」(발행인 강석호)의 창간과 함께 주간으로 참여했다가 수필문학의 주간을 그만 두고 수필전문잡지「創作隨筆」을 발행케 된다.「수필문학」창간호가 나온 지 3년 후「創作隨筆」창간호가 나왔다.
계간「현대수필」은 1992.4.10. 1992년 봄호(300쪽. 값4,000원)로 태어났다. 유근조 시인의 창간 축시처럼 ‘새벽에 일어나 신선한 바람에/통속적인 생활을 씻고/사랑과 지성으로/오래 버려두어 막힌/나와 우리네 이웃간의/소중한 창을 닦자’고 창간했다.
윤재천은 명실공히 한국현대수필 발전에 큰 몫을 한 이다. 윤재천은 상명여대 교수로 학과장을 맡게 되었을 때 수필을 정규 과정으로 신설했다. 대학에서 수필이 정식 커리큐럼으로 인정된 것이다. 1969년에는 현대수필동인회를 주관하여 동인지를 발간했고 수필의 날을 제정해 매년 행사를 해오다 지금은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로 이관하여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1992년 봄호로 창간한 계간「현대수필」은 윤재천 교수가 수필의 꿈을 펼쳐 보인 수필나무였다. 몸통만 있던 나목에 움이 트고 가지가 자라고 잎이 피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은 수필에 쏟는 남다른 열정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현대수필」창간에 부쳐 발행인 겸 편집인인 윤재천은 권두언에서 그것을 ‘도도히 흐르는 진실의 맥’이라 피력했다.
「현대수필」은 끊임없는 변화와 새로운 도약을 추구하며 실험을 쉬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수화(隨畫)수필, 아포리즘 수필이다. 보다 함축된 언어로 수필을 만들어내는 실험, 그림과 수필의 어우러짐 그리고 다양한 실험을 쉬지 않았다.
격월간「수필과 비평」은 1992. 9. 1일(342쪽, 값4,500원) 창간호를 내었는데 발행인 서정일(서정환)·편집인 겸 주간 이철호·부주간 정주환 체제로 출발했다. 1992년 9.10월호로 창간된「수필과 비평」은 격월간으로 나오기 전 1987년 여름호로 무크지가 먼저 창간되었다. 무크지「수필과 비평」은 발행인 서정일, 편집인 겸 주간에 ‘한국에세이문학회 대표 전규태’로 하여 1987. 8. 1일 발간된 잡지다. 그 무크지에서 주간 전규태는 에세이문학의 고급화를 위하여’란 권두언을 통해 ‘에세이문학을 고급화하고 질적으로 향상시킴으로서 문학의 당당한 장르로 정립하고자’ 창간한다고 했다.
대다수의 문예지가 서울 중심인 문단에 지방에서 새바람을 일으킨 주역이「수필과 비평」이다. 무크지로 출발한「수필과 비평」은 5년 후인 1992년 격월간지로 창간되었다.
「수필과 비평」은 비평부재의 수필계에 수필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따라서 수필전문지의 책임인 수필을 수호하고 그 영역을 확고히 하는 파수꾼이 되겠다고 했다.
한국문인협회 황명 이사장은 <순탄하게 발전하기를>이란 축사에서 ‘우리 문단에 등록된 수필가의 수가 4백 명이 넘는데 수필의 질을 저하시키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런 현실적 숙제와 과업을 안고 수필의 이론과 역사 및 이애 대한 체계적 연구도 함께 곁들이는 수필지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국제펜한국본부 문덕수 회장도 <수필 문단의 새 불씨>란 축사를 통해 ‘본격적 수필이 바로 ’수필과 비평‘지를 통해 뿌리박고 아름답게 꽃피기를 바란다’고 했고, 한국수필가협회 조경희 회장도 <수필문학의 꽃을 활짝 피우도록>이란 축사를 통해 ‘수필문학의 이론을 확립하고 나아가서 격조 높은 잡지가 되어 수필문학을 선도해 가는 잡지로 자리해 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1992년 당시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의 수가 400명이었다는 말이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가「수필공원」에서「에세이문학」으로 발전해 가는 동안 수필문우회는 발표 지면을 두고 많은 고심을 해야 했다. 수필문우회의 회원들은 한국수필문학진흥회의 초기 회원들이다. 월간「수필문학」(발행인 김승우)의 폐간으로 창간했던「수필공원」이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두꺼운 잡지로 변하면서 생긴 갈등은 그 원래의 의도를 살릴 수 있는 잡지의 필요성으로 대두되었다. 해서 수필문우회는「계간수필」을 창간케 되었다. 1995년 8월 15일 가을호 창간호는 발행인 김태길. 편집인 허세욱. 편집위원 김태길 윤모촌 박재식 허세욱 김영만으로 128쪽으로 발간되었다.
「계간수필」창간호는 작은 잡지이면서 알찬 잡지로 수필의 깊고 넓은 영역을 용해하기를 표방하며 출발했다. 수필문우회가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1981년 발족한 후 달마다 합평을 통해 수필을 연마해 오면서 더욱 마당을 넓혀 수필의 문학성과 수필의 문단적 위상을 높이고 수필이 거리에서도 읽히고 젊은 세대들의 손에도 들려지게 하려 기관지격으로 창간한 잡지이다.
「계간수필」이 창간(1995.8)된지 3년 후인 1998년 3월 봄호로 계간「수필춘추」가 창간되었다. 1990년대 들어 다섯 번째 창간된 수필잡지다.「수필춘추」는 표지의 판형을 새로 길이의 차별화로 이목을 끌었다. 표지 제자는 한·일·중 서예문화교류협회 회장인 이상우(李祥雨) 서예가의 글씨이고, 표지화는 오세영 화가의 작품이다.
계간「수필춘추」는 발행인 최낙성, 편집주간 이현복, 편집장 임정원 체제로 1998년 봄호(1998. 3. 2)로 창간되었다.
「수필춘추」창간호의 편집 특성을 보면 수필을 성향이 같은 것끼리 모아 편집을 했다. 사회적수필·서사적수필·풍자적 수필·명상적 수필·학리적 수필·생활서정수필 등으로 분류한 것이다. 또한 ‘수필 감상’의 장을 별도로 두었고, 수필문학의 문제점을 제기하는 논단도 실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권말에 수필춘추 실천사항을 싣고 있다.
수필춘추는 등단을 이유로 돈을 받지 않습니다. 수필춘추는 글 싣는 이유로 책을 팔지 않습니다. 수필춘추는 틀린 글을 싣지 않습니다. 수필춘추는 글 값을 드립니다.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들이겠으나 당시의 현실이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등단을 이유로 돈을 받는 잡지, 글을 실어주고 책을 파는 잡지, 되는대로 글을 실으며 원고료도 주지 않는 잡지, 그런 현실에서「수필춘추」는 벗어나겠다고 이 네 가지의 문제를 정면에서 반박하고 실천하겠다 나선 것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우리 문단 현실이 그런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이 심히 안타깝다.
1990년대는 이렇게 창작수필, 현대수필, 계간수필, 수필춘추의 계간지와 격월간 수필과 비평의 창간으로 가장 풍요로운 수필의 시대를 이룩한 때요 그만큼 수필문학의 양적 질적 큰 성장을 이룬 때였다.
4. 나가며
1990년대까지만 살펴보고 말았지만 2000년대에는 계간 수필세계·에세이21·수필시대·격월간 에세이스트·월간 에세이플러스(한국산문)가 창간되었다. 최근 2019년 9월엔 계간「수필오디세이」(발행인 안성수)도 창간 되었다. 이만하면 가히 한국 수필문단의 발전 정착기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2021년 현재 한국문인협회의 수필분과 회원 수는 4천여 명이다. 가입하지 않은 수필가와 시인 소설가 화가 음악가 영화 연극인 및 경제인 의료인 할 것 없이 수필을 쓴다. 족히 1만명 수필인이 헤아려진다. 여느 장르와 다르게 수필잡지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모든 문학지들이 수필란을 두고 있지만 수필 전문지만도 무려 30여 종이 넘는다. 수필 전문잡지 중 한국수필·수필문학·월간에세이·한국산문·수필과비평⋅좋은수필은 월간이다. 에세이스트·그린에세이는 격월간이고, 창작수필·현대수필·계간수필·수필춘추·수필세계·에세이21·수필시대·선수필·수필미학⋅창작산맥⋅수필오디세이 등은 계간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월간 <한국수필>은 범 수필문단인 한국수필가협회(이사장 최원현) 창립 50주년을 맞는데 2021년 10월 현재로 통권 320호를 내고 있다. 매년 국내·해외심포지엄을 개최하고 있고, 한국수필문학상⋅해외한국수필문학상⋅인산기행수필문학상⋅한국수필올해의 작가상⋅한국수필신인작가상⋅한국수필독서문학상 등 6개 분야와 신인상에 걸쳐 시상제를 두고 있다. 1981년부터 시행하고 있는 한국수필문학상은 제 40회, 국내심포지엄도 40회, 그리고 해외 심포지엄이 23회 진행되었다. 조경희 이사장 사망 후 이철호 유혜자 정목일 지연희 장호명 최원현으로 이어지며 한국수필 문단 종가의 위치를 잘 지켜내고 있다.
한국수필문학진흥회(회장 이상규)는 <수필공원>에서 <에세이문학>으로 제호를 바꿔 통권 155호를 내고 있으며 여전히 질 높은 수필지를 발간하고 있다. 현대수필문학상과 매원수필문학상, 윤오영문학상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으며 역시 매년 세미나를 열고 있다.
<월간에세이>는 한때 15만 부라는 경이적인 발행부수를 낸 적도 있었지만 지금도 꾸준히 좋은 잡지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통권 354호를 발간했다. 월간 <수필문학>은 2021이면 연간집 35집을 내게 되며 현재 통권 289호를 내고 있다. 강석호 발행인의 사망으로 차남 강병욱이 2세 경영 및 발행인이 되어 있다. 신인상 제도가 아닌 2회 추천등단제를 고수하고 있는 잡지이기도 하다. 격월간에서 월간이 된 <수필과비평>은 240호를,격월간 <에세이스트>는 99호를 내고 있다. 계간 <창작수필>은 통권 121호를 내고 있고, 금년에 창간 30주년을 맞는 <현대수필>은 통권 120호를, <계간수필>은 105호를, <수필춘추>는 95호를, 격월간에서 계간이 된 <수필시대>는 92호를, 계간 <선수필>은 72호를, <수필세계>는 70호, <에세이21>은 69호를 내고 있다.
한국현대수필문학의 역사를 수필전문잡지의 창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것도 1990년대까지 창간된 잡지까지만 살펴봤다.
우리 수필문학은 가장 큰 도전을 받고 있다. 수필인구의 급증만큼 좋은 작품을 독자에게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큰 문제이고 고령의 신인 등단 역시 많이 우려되는 부분이다. 수필작가는 너무 많다 보니 발표되는 작품 수도 많고 그러다 보니 독자들에겐 작품을 골라 읽는 재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좋은 작품을 선별해야 하는 수고와 부담도 갖게 한다.
2021년은 2020년에 이어 코로나로 문학계 또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한국수필문단이 겪는 이 많은 변화는 더 좋은 문학의 길을 열 것이다. 좋은 쪽으로의 타 장르와 선한 경쟁도 필요하겠고 무엇보다 수필 본질의 좋은 작품 창작이 우선되어야겠다. 작가정신 및 산문정신에 투철한 좋은 작품이 나올 때 수필문학의 발전도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정진권, 『한국현대수필문학사』, 학연사, 2010.
김우종, 『한국현대수필 100년』, 연암서가. 2014.
김진악, 『한국수필의 표정』, 지식더미. 2007.
조경희, 『조경희 자서전』, 정우사. 2004.
최원현, 「수필 전문지를 통해 본 한국현대수필발달사(1)」, 『수필미학』 2015 봄호.
최원현, 「수필 전문지를 통해 본 한국현대수필발달사(2)」, 『수필미학』 2015 여름호.
최원현, 「수필 전문지를 통해 본 한국현대수필발달사(3)」, 『수필미학』 2015 가을호.
『隨筆文藝』 창간호(1971년 4월 봄호) - 6호, 한국수필가협회.
『韓國隨筆』 創刊號 1975년 봄호(통권 제1호), 한국수필사, 1975.
『隨筆文學』 創刊號 1972년 3월호(통권 제1호), 수필문학사, 1972.
『隨筆公苑』 創刊號 1982년 가을호(통권 제1호), 한국수필문학진흥회, 1982.
『에세이문학』 1999년 봄호(통권 제65호),에세이문학사, 1999.
『創作隨筆』 創刊號 1991년 가을호(통권 제1호), 창작수필사, 1991.
『現代隨筆』 創刊號 1992년 봄호(통권 제1호), 현대수필사, 1992.
『隨筆과批評』 創刊號 1992년 9.10월호(통권 제1호), 수필과비평사, 1992.
『季刊隨筆』 創刊號 1995년 여름호(통권 제1호), 계간수필사, 1995.
『隨筆春秋』 創刊號 1998년 봄호(통권 제1호), 수필춘추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