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대서사시와 성경
-헬레니즘과 유다이즘
이스라엘 역사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은 기원전 13세기의 이집트 탈출과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배이다. 전자는 구원과 해방이나 후자는 실패와 좌절의 사건이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태평 시대를 거쳐 남북이 분열되는 비극을 맞았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망했으며, 남 유다는 기원전 587년에 망하면서 바빌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면서 유다인들은 50여 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게 되었다. 바빌론은 군사력으로 지배하여 그 지역의 소수 민족에게 종교와 문화의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페르시아는 반대로 자율성을 허락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귀환 후 사회 전반에서 회복과 재건이 이슈였다. 재건의 두 기둥은 성전과 율법이었다. 즉 제2 성전 유다이즘 시대를 맞았다. 첫 번째 성전은 솔로몬이 예루살렘이 세운 성전으로 패망하면서 파괴되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성전을 다시 세움으로써 사회를 회복하고 재건하였으나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또다시 파괴되었다. 이 시기를 제2의 성전 유다이즘이라 한다.
페르시아 제국도 끝나고 알렉산드로스 제국(BC332)의 역사가 펼쳐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에서 시작하여 이집트는 물론 동쪽으로 뻗어 인도에 이르기까지 점령하였다.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로 명명하게 하였으며 그리스 문화를 퍼뜨렸다. 그래서 그리스 문화와 동방의 문화가 만나 헬레니즘 문화를 이루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23년 33세의 나이에 죽음으로 대국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시리아의 셀루코오스 왕조 시대로 다양한 문화의 충돌이 일어났다. 안티오쿠스 4세는 이스라엘을 박해하자 이스라엘의 마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이 저항하는 마카베오 항전으로 기원전 164년에 예루살렘을 되찾고 성전을 정화하였다. 그 뒤를 이어 하스모네아 가문이 독립적인 권력으로 지탱하다 결국은 기원전 63년에 로마에 넘겨주었다.
헬레니즘은 성경과 관련해서 주목할 것은 70인역 성경이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왜 그리스어로 번역했으며 70인역인가? 70인역은 70명의 사람이 번역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 6명씩 번역가가 모여서 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번역한 이유는 당시에 디아스포라(외국 동포)로 이스라엘의 많은 이들이 그리스 문화권에 살았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공용어가 그리스어로 다음 세대 유다인들을 위해서였다. 또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저술할 때 그리스로 된 70인역을 인용하였다. 70인역 번역 장소는 그리스의 아테네가 아니고 헬레니즘 시대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다.
도전과 응전, 그것의 연속이 역사이다. 도전과 응전의 측면에서 유다인들은 헬레니즘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대해서 응전한 대표적인 것이 70인역 성경이다. 이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성경에서 가톨릭교는 개신교와 책의 목록에서 7권의 차이를 가진다. 이는 개신교는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의 목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가 경전에서 경전 목록을 정할 때 텍스트로 결정하지 않고 책으로 결정했다. 그 책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라는 것이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헬레니즘과 관련성을 논할 때 세 권의 책은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사도행전이다. 이는 헬레니즘 시대에 호메로스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약 성경은 저자 서문이 일반적으로 없으나 유일하게 집회서에 있다. 신약에서 세 권에 저자 서문이 나온다. 이는 전형적 헬레니즘적인 문학 양식이다. 사도행전 서문에서 테오필로스가 언급되어 있고 첫 번째 책에서 저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처음부터 다루었습니다.(사도 1, 1-5) 여기서 첫 번째 책은 루카 복음서를 말한다.
2024. 04. 29. 송창현 신부의 호메로스 서사시와 성경 강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