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춘향
신사임당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이당(以堂), 다른 이름은 양은(良殷)이다. 1892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御眞畵家)를 지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제미전(帝美展)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에 입각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도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 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림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무엇보다 인물에 있었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 이래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線描)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산수풍경, 문인화(文人畵)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간성(看星)》《향로》《군리도(群鯉圖)》《춘향초상》《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두산백과]
김은호는 친일활동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왜색풍을 수용하여 유포시켰고 제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 채색화풍 수용과 제자 배출은 우리 현대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김은호는 인천의 부농 집안 출신으로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07)를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쳤고(19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김은호는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과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하였고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쳤다(1912∼17). 그의 입학은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등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이'(以)는 주역의 24괘 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그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었다(1915, 1928).
초상화가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 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 경력은 김은호가 친? 1ff8 軀?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인 셈이다.
서화미술회 졸업 후 김은호는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 1921년에 첫 협회전 가짐)전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까지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하는데, 특히 일본식 채색화 기교에 치중하면서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식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1922년 이후의 작품 경향과 '선전' 참여 활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 대부호 김용문의 도움으로 다녀온 3년여의 일본 유학(1925∼28)은 자신의 전통적 기법에 기초한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정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의 사생기법과 접목시켜 자연사생 중심의 새로운 일본 풍경화풍을 일으킨 화가이다. 김은호가 귀국하여 제7회 '선전'(1928)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暮春の朝) 이후 섬세한 채색화에는 그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김은호는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그 이전부터 이미 장식적인 일본 채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선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구미에 맞는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인데, 김은호는 1회 '선전'에 [미인승무]로 4등상, 3회 때 [부활 후]로 3등상, 7회 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전'(제국미술원전람회)의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하였고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등상을 받았다(1928). 이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제8회 '선전'(1929)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하였고 한때 발길을 끊었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하였다. 이 행동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미술인의 전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는 허백련과 2인전을 갖거나 김용문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고, 특히 후진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8년 만인 제16회 '선전'(1937) 때부터 '참여'작가로 선정되는데, 바로 그 해 가을 앞서 설명한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김은호는 자신의 출세욕에 따라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화단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니 주변에는 자연히 많은 사회 저명인사 애호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았고, 한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지칭되듯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以墨會)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고, 이들 중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은 따로이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1936년부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박광진, 김복진과 함께 체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설하였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섬약한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 문하 '청전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3대 후진양성 통로였다.
이러한 세 유형의 화가 모임 가운데 특히 '후소회'의 활동이 가장 돋보여 해방 후 국전 운영과 화단까지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된다. 여섯 번의 정기전(1936∼43) 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선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장덕), 김기창, 장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였고, 제21회 '선전'(1942) 때에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또 2점이 특선하여 세상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매일신보}, 1942. 5).
뿐만 아니라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은 최고상과 특선 등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시샘과 방해공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창이 16회부터 19회까지(1937∼40) 연속 4회 특선으로 김은호의 제자 중 첫 작가로 선정되는데, 19회 특선 때의 일화가 그 한 사례이다. 심사중 특선후보 작품 속에서 일인 심사위원이 김기창 작품을 치워 놓자 안면 있는 다른 심사위원에게 간청하여 재심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심사위원이 김은호의 제자사랑에 감복하여 무감사 특선으로 밀어 주었다고 하며 김은호는 답례로 자신이 아끼던 고려청자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청각장애자인 제자를 생각하는 김은호의 '인정미'와 심사원 자격으로 '참여'한 정치력을 한껏 과시한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화단에 친일파 화가의 대량배출,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과 왜색조의 채색화풍을 풍미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적절히 시사해 준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며 해방 후 화단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관변을 맴돌며 친일행각은 철저히 감춰지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제11회 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에 못지 않게 김은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도 존경과 찬사로 일관된다. 이은상은 팔순기념으로 김은호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 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해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 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인물이 조화 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鶴壽)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石壽)를 사오리다 문생들 화통을 이어 백대장생 하오리다." (畵仙以堂頌, 1971. 8)
또한 김은호에 대한 기존 미술 1ff8 계의 회화사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로 '근대·현대 한국화단에 새로운 채색화 계파를 형성시킨 유일한 존재'(이구열, 1990)라거나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논평되고 있다.
그의 친일 협조에 따른 반민족 행위와 왜색조에 물든 회화세계에 대하여는 '아쉽다'라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가 이룬 사실주의나 제자 육성의 공적에 비하면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 이태호(전남대 교수·미술사, 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봄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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