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용헌 | |
전남 담양군 일대에는 조선 선비들의 풍류를 전해주는 누정(樓亭)들이 많이 남아 있다. 계산풍류(溪山風流)의 산실인 소쇄원을 비롯하여 면앙정, 식영정, 송강정 등과 같은 품격 높은 정자들이 즐비하다. 이 가운데서 필자가 자주 찾는 곳은 면앙정(?仰亭)이다. 봉산면 제월봉의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면앙정은 세 칸 규모의 작은 정자에 지나지 않지만, 여기에서 바라보는 전망만큼은 일품이다. 추월산에서부터 시작하여 무등산에 이르는 장장 일백 리의 경치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마치 파노라마 카메라의 광각렌즈처럼 180도 각도의 주변 들판이 모두 눈에 들어오는 정자이다. 이러한 호쾌함을 주는 차경(借景)도 찾기 힘들다. 일백 리의 전망 속에는 학자가 배출된다는 문필봉, 봉황이 알을 품는 비봉포란, 재물이 쌓인다는 창고사 등등의 봉우리들이 차례로 도열하고 있다.
면앙정의 주인이었던 송순(宋純·1493~1582). 그는 당시 존경받던 호남유림의 어른이었으며 가단(歌壇)의 좌장이었다. 그의 나이 87세 때에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회방(回榜) 잔치가 열렸는데, 인근에 살던 호남의 명사 100여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이었다. 그날 잔치를 마치고 송순이 언덕 위의 면앙정에서 내려올 때 제자 4명이 손가마를 만들어 스승을 메고 언덕길을 내려왔다고 한다. 정철, 임제, 고경명, 이후백이 바로 그 4명이다. ‘관동별곡’을 쓴 정철, 황진이 묘 앞을 지나면서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고 읊었던 임제, 임진왜란 때 아들 두 명과 함께 순절한 고경명 등 이들 4명의 제자들은 후일 너무나 유명하게 된다.
4명의 제자들이 스승의 가마를 멨던 이 일화는 두고두고 호남 식자층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말의 문장가였던 이건창이 면앙정에 들르면서 지었던 칠언율시 가운데 마지막 구절이 ‘금수담아아담수(今誰擔我我擔誰)’이다. ‘누가 내 가마를 메주고 나는 누구를 메어줄 것인가.’ 이건창이 읊었던 한탄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시대에 송순처럼 가마를 메어줄 만한 스승은 있는가. 요즘 사회가 양쪽으로 나뉘어 서로 기관총을 쏘아대다 보니 남아나는 인물이 없다. 소국에서는 인물나기 어려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