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骨文(갑골문)을 통해 古代 商代社會(고대 상대사회)를 알 수 있다.
甲骨文은 1899년, 北京(북경)의 재주가 처방받은 약재 속에서 처음 발견한 이후로
중국 최초의 문자로서 알려진 현재까지,
발굴된 甲骨文의 대부분은 商(상)이 멸망할 때까지의 273년간
商王室(상왕실)에서 국가의 중대사나 商王(상왕)의 일상에 대해서 점을 친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고대 중국인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현존하는 最古(최고)의 史料(사료)인 甲骨文과 그 글자로 쓰여진 卜辭(복사)에 대한 분석으로 진행되고 있다.
갑골문(甲骨文)는 동북아시아의 고대 상형 문자이다.
주로 거북이의 배딱지(龜甲)와 짐승의 견갑골(獸骨)에 새겼으며,
거북이 배딱지(腹甲)를 나타내는 갑(甲)자와 짐승의 견갑골을 표현한 골(骨)자를 합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명명하였다.
중국 대륙에서 청조 말엽인 1899년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수도였던 은허 (殷墟)에서 왕의영(王懿榮)이 최초로 발견한 이후
중국 도처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발견된 지역 명칭을 따라 은허 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골문자는 상형문자이고 한자의 초기 문자 형태에 해당한다.
발굴된 뼈 연대는 대부분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으로 상 말기에 해당한다.
현재까지는 은허(殷墟)를 위주로 중국 대륙에서만 발견되었다.
요하 동부에서는 갑골을 발굴했지만, 갑골문을 새긴 것은 한 점도 없다.
상추에서 황하를 건너 서북쪽으로 약 350km 떨어져 있다.
안양 시내를 흐르는 환하(洹河) 강변 일대 땅 속에서 갑골문이 발견됐다.
샤오툰촌(小屯村)에 위치한 은허박물원에 도착하니
‘갑골문발견지’라 쓴 바위가 우뚝 서 있다.
간판은 박물원이지만 은허궁전종묘유적지(殷墟宮殿宗廟遺址)다.
갑골문이 발견되기 전에 은이라 불렀기에 터(墟)와 붙여 은허다.
스스로를 은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갑골문 어디에도 은이라는 글자는 없다. 물론 상은 자주 등장한다.
1935년, 은허(殷墟)의 발굴 . 현 후난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의 은허 유적지 서북쪽 구덩이 중 M1004의 발굴 . 두 개의 사각형 청동 가마솥이 출토되었다. 청동 가마솥은 상나라의 대표 유물 중 하나다. 상나라는 갑골문자로 기록된, 사실상 중국 최초의 고대 국가다. 흔히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은(殷)은 상(商)나라의 수도를 말한다. 그전에 하(夏)나라가 있었지만, 고고학적 기록이 미흡해서 실재가 불분명하다. 주(周)나라를 중국 최초의 국가로 보았던 역사학자들은 상나라에 대한 기록이 갑골문으로 발견되면서 중국사의 시작을 상나라로 인정했다. 기원전 1600년부터 약 550년간 존재했던 상나라는 인신 공양과 식인 풍습으로 유명했다. 리숴의 《상나라 정벌》은 인신 공양 구덩이를 발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장과 내용이 기록 필름을 감상하는 것처럼 생생해서, 마치 현장에 있는 기분이 든다. 제정일치 시대의 제사장이었던 왕은 인신 공양 의식을 축제로 만들었다. 인간을 죽여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은 구경꾼들에게 정신적 자극과 만족을 주는 ‘성대한 잔치’였다. 희생자의 수가 부족할수록 방법은 더 잔인해진다. 팔다리를 자르고 비명을 지르게 하고 최대한 죽음을 늦추어 군중을 각성상태로 만들었다. 고대 로마 검투사들의 격투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의 심리 변화와 유사했을 것이다. 인신 공양은 청동기 시대에 주로 포로들을 제물로 바치다가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노예로 전환하면서 점차 사라졌다는 게 정설이다. 검투사의 격전장인 로마의 콜로세움이 건축예술로 남겨졌듯, 비슷하게 인신 공양의 풍습을 가진 마야문명이나 아즈텍도 인신 공양을 위한 건축물을 세우고 조각, 그림 등으로 예술적 기록을 남겼다. 거대한 피라미드 제단에서 사람을 처형하고 시체를 떨어트리면 밑에서 환호하던 군중들이 달려들어 시신을 받아먹던 식인 풍습도 있었다. 인신 공양 의식에서 웅대한 건축물은, 사람들에게 전시와 공연에서의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한 필수적 장치로 여겨진다. 그런데 문자의 기록이 있었던 고대 중국은 단지 구덩이로만 흔적을 남겼다. 왜 그랬을까? 은허의 왕릉 유적지에서는 수백 개의 인신 공양 구덩이가 발굴되었고, 규모가 큰 무덤마다 거의 항상 수십, 수백 명의 산 채로 묻힌 인간 순교자가 있었다. 발표 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유골 통계에 따르면 상나라 말기에 희생된 사람의 수만 총 14,000명이 넘는다. 상나라의 주왕은 제후국인 주나라 문왕을 의심해서 그를 투옥했는데, 세 아들이 술과 음식을 들고 찾아와 아비를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주왕은 장남 백읍고를 죽여 제사의 음식으로 쓰고 문왕에게 하사했다. 상나라의 인신 공양에서, 제물인 인육을 같이 먹는 의식은 신에게 축복받는 일이었다. 주왕의 관점에서 보면, 장남을 바친 문왕에게 불신을 거두는 일종의 신뢰 회복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식의 삶은 고기를 먹어야 했던 문왕은, 결코 그 일을 잊지 못했다. 절치부심, 문왕은 죽으면서 둘째 아들 무왕에게 상을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또한 형의 살점을 피눈물로 먹었던 기억을 아비와 공유하고 있었다. 무왕은 상나라를 정벌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주 왕조는 치밀한 ‘과거사 지우기’로 주나라 이전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공백으로 만들었다. 갑골 문서는 모두 철저하게 파괴했고 상나라를 실존마저 의심스러운 전설로 만들어버렸다. 땅속 유적의 갑골문이 발견되기 이전, 중국사 최초의 국가는 주나라로 기록되었다.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 중 하나인 주나라 문왕상의 일부. 중국 명나라 때 그려진 주나라 문왕의 초상화를 원본으로 17세기에 에도시대 화가 카노 산세츠(狩野山雪)가 다시 그렸다. 중국 유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그리는 '歴聖大儒像' 중의 하나로 그려졌다. 주의 철저한 역사 지우기는 후대 사마천의 《사기》에도 그대로 답습되었다. 과거사를 지우는 것은 필연적으로 허구의 신화를 동반한다. 강태공과 문왕, 주공, 공자는 신격화되었으며 심지어 공자는 모범적인 이상 국가로 주나라를 찬양했다. 중국 고대 질서의 기틀을 다진 왕조로 평가되는 주의 철저한 행적은 오랜 기간 성공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승자의 기록은 유적에서 갑골문이 출토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중국 고대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상나라가 망한 이유는 주왕의 가렴주구 폭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상나라가 동진 정책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힘의 공백이 생긴 서쪽을 주나라가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상을 정복한 주나라 무왕의 아비 문왕은 상당히 치밀하고 학구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상나라의 갑골 점복을 배워 괘로 예측하는 기술을 새롭게 개조해서 《역경》의 텍스트를 창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왕의 저택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역경》의 갑골문이 출토되었다. 저자 러쉰의 《상나라 정벌》은 책의 상당 부분을 《역경》에 할애한다. 문왕이 남긴 《역경》은 《주역》으로 진화했는데, 출토된 갑골 문헌이 해독되면서 수천 년간 오독되었음도 밝혀졌다. 《역경》은 지혜의 책이 아니라 포로 사냥과 인신 공양 제사를 기록한, 사실상 피와 보복에 관한 책이었다. 끊임없이 인신 공양 제사를 지내는 상나라에, 속국 주나라 또한 제사용 포로를 끊임없이 바쳐야 했다. 북송 휘종대(1100~1125)에 편찬된 《宣和博古圖》에 실린 상나라 청동기의 모습. 제사용 술 항아리로 추정된다. 《宣和博古圖》는 송나라 황실에서 수집한 상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의 청동기와 청동조각 등 청동유물 839점의 도판을 수록하고 있다. 책은 이야기를 은주 혁명으로 끝내지 않고, 고대 중국의 신석기시대부터 상고시대인 하·상·주까지 954쪽에 걸쳐 천 년의 역사를 새로운 관점으로 기술했다. 고고학 현장에서 출토된 갑골문과 고증으로 중국 고대사가 새롭게 쓰였다. 단순히 승자의 기록으로 볼 것인지, 인신 공양 의식은 왜 구덩이로 남고 건축물은 없는지에 대한 의문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볼 일이다. 책을 한번 잡으면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흥미진진하다. 《시경》에 기록된 문왕의 ‘상나라에 대한 저주’를 읽는다. 문왕이 말했지. “묻노라, 묻노라, 너희 은상이여! 너희는 본래 의로운 부류여야 했으나 강포하게 굴며 많은 원망을 야기했지. 헛소문을 옳다고 여기고 올바른 이들을 쳐서 내쫓았지. 쉼 없이 일을 일으켜 제사 지내며 계속 멈추지 않았지.” |
사모무(司母戊)라 적혀 있다.
높이가 133cm이고 무게가 832.84kg에 이르는 초대형 솥(鼎)이다.
중국 10대 보물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는다.
상나라 23대 통치자 조경이 걸출한 정치가인 어머니 부호를 위해 만든 제기(祭器)다.
약 3,000년 후인 1939년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안쪽에 새긴 글자 그대로 유물의 이름이 정해졌다.
50년이 흐른 후 전문가들이 사(司)를 후(后)라 해석했다.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할 뿐 아니라 고문에서 사와 후는 하나의 글자였다.
후는 황후라는 논리다. ‘후모무정’이라 명명하고 베이징 중국국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안양에서 전시할 때는 ‘사모무정’이라 한다. 하나의 솥, 두 개의 이름이다.
뒤쪽에 상사공음(商史跫音) 전시관이 보인다.
상나라 역사의 발자국 소리라는 작명이 재미있다. 은허와 갑골문에 관한 전시로 빼곡하다. 관모와 관복 차림의 왕의영이 보인다.
국자감 제주(교장)로 고문과 금석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말년인 1899년 학질에 걸렸다.
치료를 위해 약재로 애용되던 용골(龍骨)을 구입했다.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가 재료였다. 용골에 무언가 긁힌 자국이 보였다.
전문가 눈에는 예사롭지 않은 보물이었다.
약재가 골동품이 됐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이 13만 개에 이른다.
글자도 약 5,000자에 이른다.
상당한 분량은 이미 가루가 돼 사람이 삼키고(呑) 난 후였다.
‘사람들이 상나라 역사를 삼켰다’고 아쉬워한다.
전시관 복도의 벽에 갑골문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자의 뜻과 갑골문 모양을 대조하며 읽어보니 나름대로 흥미진진하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갑골문도 많다.
상중하 3줄로 끝까지 길게 이어진 갑골문 학습장이다.
어떤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는지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누구 생각인지 모르나 매 글자마다 감상을 적었다.
고시를 인용하기도 하는데 약간 억지스러워 보인다. 감칠맛을 풍기는 비유도 있다.
모(母)에 대한 감상평은 ‘자애로운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로 먼 길 떠나는 아들의 옷을 깁네’로 시작하는 당나라 시인 맹교의 유자음(游子吟)을 인용했다.
가슴 부위에 두 점을 표시하고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모양이다.
애(愛)는 ‘두 사람이 서로 지원해 앞을 향해 똑바로 나간다’는 모양이다.
원래 원조(援助)의 뜻이다.
현대의 사랑과 좀 다르다. 미(美)에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원정(怨情)이 등장한다.
‘미인이 주렴을 걷고는 줄곧 이마를 찌푸리고 있네’라는 의미의 미인권주렴(美人卷珠簾), 심좌빈아미(深坐顰蛾眉)이다. 머리에 꿩 깃털을 꽂은 모양이다.
모든 갑골문에 시를 읊고 있지는 않다.
긴 복도를 설마 시구로 채우나 하는 걱정 아닌 걱정은 기우였다.
안양 은허박물원의 종묘 제사 갱도.
은허박물원 종묘 제단 갱도의 유골.
1937년 처음으로 궁전종묘터가 발굴됐다.
지금까지 54곳이 세상에 나왔다.
후침과 조정, 묘원을 갑을병으로 나누고 숫자까지 있어 헷갈린다.
종묘의 제사 공간이 발굴됐다. 세월만큼이나 깊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현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땅 속 갱도를 유리로 덮어 안쪽이 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니 앉은 자세의 유골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갑골문은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이다.
거북의 껍질과 동물의 뼈에 새긴 글자다.
상나라는 점복(占卜)의 나라였다.
삼라만상을 모두 점을 치고 해석한 그대로 통치했다.
껍질과 뼈 안쪽에 작은 구멍을 내고 불에 구우면 바깥쪽에 가로세로로 균열이 생긴다.
다양하게 생긴 균열을 점괘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점괘와 실행한 내용을 고스란히 기록했다. 그야말로 조선왕조실록과 다르지 않다. 갑골 비림에 30개 정도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갑골학 전문가 2명이 엄선한 ‘실록’이다.
앞면에는 갑골문을 보여주고 뒷면에는 한자 번역을 새겼다.
갑골학 책 몇 권 읽고 다시 봐야 친근해질 듯하다.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왕릉유적으로 간다.
은허박물원에서 왕복으로 운행하는 관광차를 타니 약 10분 걸린다.
강을 건너 시골길을 달려 우관촌(武官村)에 이른다.
대형 무덤 13곳과 부장묘와 제단이 2,000여 개가 발견됐다.
청동기, 석기, 옥기, 도기 등 유물도 엄청나게 쏟아졌다.
무엇보다 보물인 사모무정이 출토된 곳이다.
황량한 들판 가운데 커다란 솥만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다. 세
계문화유산에 빛나는 은허다. 갑골문을 창제한 상나라 생각에 걸음은 느리다.
안양 문자박물관에 전시된 갑골문.
시내에 있는 중국문자박물관으로 간다. 국가1급박물관으로 갑골문, 금문(金文), 간독(簡牘), 백서(帛書)를 비롯한 유물과 한자의 발전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여권을 보여주면 무료 티켓을 발매해 준다. 2009년에 개관한 첨단박물관이다. 3만5,000㎡ 면적으로 소장 문물이 4,000건이 넘는다. 갑골문을 비롯해 1급 문물이 305건이다. 무엇보다 갑골문을 아주 가까이서 또렷하게 볼 수 있다. 은허의 궁전이나 종묘, 왕릉에서 본 갑골문에 비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돋보기가 있어 갑골문의 획과 크기를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안양 문자박물관에 전시된 갑골문 조자 방법. 회의자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는 전시물이다.
은허에서 발굴된 5,000여 개 갑골문 중 해석이 가능한 글자는 1,500개에 이른다.
조자(造字) 방법을 따라가니 한자와 연관성이 보인다.
모양을 본뜬 상형을 기본으로 한다.
사물은 아니지만 방향처럼 그냥 봐서 알 수 있는 지사(指事)는 간단하다.
합체해서 만든 회의(會意) 글자는 생각보다 많다.
소리와 뜻을 구분해 결합하는 형성(形聲)도 있다.
발음이나 모양을 빌려서 만드는 가차(假借) 등을 소개한다.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볼수록 신기하다.
안양 문자박물관에 금문을 새긴 서주 시대 내반이 전시돼 있다.
안양 문자박물관에 도문을 새긴 전국 시대 연나라 도기가 전시돼 있다.
청동기 속에 새긴 금문의 변천도 알려준다.
갑골문에서 변화한 금문이다.
복제품이긴 해도 서주 시대의 내반(逨盤)이 진열돼 있다.
진품은 해외 전시 금지 문물로 분류돼 있다.
대형 쟁반 안에 21행 360자가 새겨져 있다.
서주의 왕을 보좌해 출정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등의 내용을 적었다.
갑골문이 청동기 속으로 들어오니 세련되고 단정해진다.
도자기에도 글자를 새겼다.
전국 시대 연나라의 진품 도기에 새긴 도문(陶文)이 있다.
설명이 없어 무슨 글자인지 불분명하다.
화폐나 도장에 새긴 문자도 전해진다. 전국칠웅이라 했으니 나라마다 표기가 달라졌다.
안양 문자박물관의 전시물.
진나라는 문자일통(文字一統)을 구현했다.
무력으로 통일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표준이 생기니 좋았다.
대나무 조각에 새긴 간독과 비단에 쓴 백서도 생겨났다.
종이가 발명되자 서체도 다양해지고 아름다워졌다.
어휘는 날로 발전했으며 지식은 기록이 됐다. 책으로 전승됐다.
한자문화권에서 살아가는 까닭에 갑골문은 남다르다.
세상의 모든 일을 꼼꼼히 기록한 상나라 후기의 호모사피언스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껍질과 뼈를 빌려준 거북과 동물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갑골문은 1899년 청조 말기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 수도였던 은의 폐허에서 왕의영(王懿榮)이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당시 한약재로서 쓰이고 있었다.
1928년 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동작빈 선생 주도하에 본격으로 발굴하고 조사하였다.
현재까지 십육만 편, 오천 자가 발견되어 그중에 천 자 정도가 완벽히 해독되었다.
세계 각국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다.
은허에서 출토된 거북이 배딱지와 짐승 견갑골에 새긴 상형문자로서 한자의 원형이다.
이것은 점치는 데에 사용했으므로 복사(卜辭)라고도 하는데 반경 (盤庚)에서 주왕조까지 12 왕, 273년간에 제작되었다.
거북이 배딱지나 짐승 견갑골을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 에 행했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상(商)뿐이다.
현재 알려진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성 요소가 있으나 순수한 회화 문자 보다 진보했다.
지금까지 한 연구로써 밝혀진 내용은 제사·풍우·전렵(田獵)·농경·군사·사명(使命)·질병·복점 등이다.
발굴 이후 상의 제사·정치·사회·경제 등을 연구했고
전설로만 전해졌던 상 이 중국에서 가장 오랜 왕조라는 사실을 규명했다.
최초의 한자 사전으로 꼽히는 <설문해자>는 중국 후한 때 학자 허신(58년께~147년께)이 편찬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허신은 황제의 사관인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영감을 얻어 문자를 발명했다고 썼다. 그러나 한자는 특정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창작이라 보는 것이 정설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0~4000년 전인 은나라 때 점술에 쓰이던 갑골에 새겨진 글자 갑골문이
한자의 원형으로 꼽히는데,
기원전 3000년 전후의 대문구(大汶口) 유적에서 발견된 도문(陶文),
또는 아예 기원전 4500년 전후 반파(半坡) 유적에서 발굴된 인면어(人面魚) 문양을 한자의 기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자의 풍경>은 원시 한자의 탄생에서부터 <설문해자>가 편찬되기까지 한자의 출현과 발전에 투영된 중국 사회와 문화의 변모를 추적한다. 상형문자로 출발한 한자가 추상화·복잡화하면서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외적 삶 역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우리에게도 친숙한 한자 어휘들의 유래와 함의를 알려준다. 도기나 갑골에 글자를 새기던 데에서 출발해 청동기를 거쳐 죽간과 목간, 비단과 종이 책의 출현으로 이어지는 매체의 발달사가 곁들여진다.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에서 착안해 한자를 발명한 것은 아니라 해도 지금의 한자에는 “새와 짐승을 관찰하던 고대 인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횟수를 나타내는 한자 번(番)은 원래 짐승의 발을 의미하는 글자였다. <설문해자>에서는 이 글자의 윗부분 변(釆) 자는 짐승의 발톱을 나타내고 아랫부분 전(田)의 형태는 짐승의 발자국이 땅에 찍힌 모양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변(釆) 자는 자세히 관찰하거나 분석한다는 의미 요소가 되어 자세히 살핀다는 뜻을 지닌 심(審), 분석한다는 석(釋), 자세히 알다는 뜻을 지닌 실(悉) 같은 글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들 자(子) 자와 설 립(立), 집 가(家), 모일 집(集) 같은 글자들이 그림문자에 가까운 초기 금문에서 추상적인 글자로 바뀌는 과정. 사계절 제공
지금 중국에서는 보기 힘들어진 코끼리를 가리키는 글자 상(象)이 갑골문에는 매우 자주 등장한다.
게다가 ‘하다’는 뜻을 지닌 위(爲)의 갑골문 자형은 분명히 한 손으로 코끼리를 끌고 있는 모습이다.
갑골문이 쓰일 당시 중국 중원 지역에는 코끼리가 많았으며 생활에 중요한 존재였는데
기후와 환경의 변화 때문에 멸종되다시피 하면서 그야말로 상상의 동물로 남게 되었다.
그 뒤 상 자는 코끼리를 지칭하던 데에서 ‘닮다’(像)라는 의미로 전용되어
‘형상’ ‘기상’ ‘현상’ 같은 말에 쓰이게 되었다.
주나라의 이름인 두루 주(周) 자는 경작지를 구획하는 울타리 사이에 농작물이 빽빽하게 자라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주나라가 농업을 강조하는 국가임을 알게 한다.
같은 농사 농(農) 자라도 갑골문은 한 손에 칼이나 도끼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잡고
숲에 서 있는 모습을 형상한 데 반해,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에서는 농지의 경계를 표시한 전(田) 자가 추가되었다.
한편 갑골문에서는 마음 심(心) 자가 심장이라는 신체 기관을 가리키는 데 그쳤고
금문에서도 심 자로 이루어진 글자가 20여 자에 불과한 반면, <설문해자>에서는 심 자를 부수로 하는 글자가 263자로 크게 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이성이 예리해지고 감성이 풍부해짐에 따라 글자들이 계속 추가로 만들어진 결과”라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산시성 허우마(후마)시에서 발견된, 춘추 시대의 유일한 필기 문자 자료인 후마맹서(侯馬盟書)는 북방을 대표하는 진(晉)나라의 문서인데 그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후베이성 쑤이저우의 초(楚)나라 증후을묘(曾侯乙墓)의 죽간 글씨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로써 제후국끼리 언어는 서로 달랐을 가능성이 있으나 동일한 문자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확인되었다.” 북방 유목 민족들이 중원을 차지했을 때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포기하고 한자를 공식 문자로 채택함으로써 중국이라는 문명의 동일한 정체성을 이어 올 수 있었다.
1942년 후난성 창사의 초나라 묘지에서 발견된 백서(비단에 쓴 글씨)인 초증서(楚繒書)는 지금까지 발견된 백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데, 가로 47㎝, 세로 38.7㎝의 직사각형 모양의 비단에 붓으로 쓴 약 1000여자의 글자와 기괴한 모양의 신화적 도상으로 유명하다. 사계절 제공
갑골문과 금문 시절의 문자가 “소수 지배층의 장식적 전유물에 불과”했다면,
춘추 전국 시대에 출현한 사(士) 계층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위치해 실무 관료로 활동하는가 하면
지식의 전수자 역할을 했다.
제자백가로 알려진 지식인들이 대부분 이 계층 출신이었고 그 시대를 선도한 사상가가 공자였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하면서 진(秦)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육국의 역사를 모두 불태워버렸지만,
진나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문서 행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렇게 첫 번째 제국 진나라는 시작부터 문자의 왕국이었다.”
통일 제국으로서 진나라는 지역별 문자 차이를 극복해야 했다.
승상 이사는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주문(籒文)이라는 글자체를 기준으로
좀 더 간략해진 문자인 소전(小篆)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전체는 진에 이어 한나라 초기까지 행정용 문서체로 사용되다가 나중에 예서로 대체되었지만, 아름다운 형태와 고전적인 분위기 때문에 지금도 많은 서예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돌이나 금속 등에 글자를 새기는 전각은 말 그대로 ‘소전을 새긴다’는 뜻이다.
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까지 존재했다. 한자로는 상(商)이며, 국성은 자(子)였고 수도는 은(殷)이었다.
수도의 이름에서 따와 은나라라고도 부르며 중국 고대국가의 '하 · 은 · 주'의 은이 상나라를 뜻한다.
한때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은허와 갑골문의 발견으로 실존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 받고 있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 기록을 의심하는 의고학이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자들 대부분이 상나라는 실존했던 나라라고 인정한다고 한다.
좀 더 정확히는 갑골문이 처음 발견된 시점만 해도 약재로 인식한 사람도 많았고,
상나라의 실존이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은허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상나라의 주요 도시이자 수도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은허의 위치. |
'은'(殷)[14]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은 반경(盤庚)부터 제신(帝辛)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였는데,
당대에는 '의'(衣) 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은을 도시 이름으로만 쓰고, 부족 이름은 '상'이라 했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라 이름이 은이라 불린 것은 서주의 성립부터로, 초기에는 상과 혼용하다가 후에 은으로만 부르게 되었다.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 요즘에는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은나라라는 명칭은 은(오늘날의 은허)에 도읍을 두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고,
상이 부족명으로 쓰였기 때문에 은보다는 상나라라는 명칭이 중국 고대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쓰인다.
다만 갑골문은 주로 은에서 나왔기 때문에 갑골학사에서는 은이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이는 중동의 히타이트와 비슷하다.
히타이트도 네샤에서 하투샤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기들을 네샤인이라 불렀으나 주변 국가들은 하투샤인이라는 뜻으로 하티라고 불렀다.
상인, 상업 등의 商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의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상추시 역시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
학계에서는 상나라를 건국하고 지배한 종족에 대해서 독립적인 표현을 쓸 때
상(商)이라는 나라의 이름을 따 상족(商族)이라고 칭하고 있다.
상나라는 제후국이었던 주나라 즉 왕과 신하의 관계에서 신하였던 주나라의 역성혁명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화하족이 세운 주나라의 입장에서는 이민족인 상족(商族)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으므로
무왕은 제신(주왕)의 아들이었던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봉해 제후로 삼았다.
하지만 무왕이 붕어한 후, 무경은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말았다. 관숙과 무경은 처형되었고 채숙은 추방되었지만 상족(商族)들과 이들에게 협력하는 동이(東夷)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기에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기까지는 수 년이 더 걸렸다.
삼감의 난을 진압한 주나라는 자신들에게 협조적인 상나라의 왕족인 미자 계를 송(宋)나라에 봉해
상나라 유민인 상족(商族)들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상나라의 옛 수도인 조가(朝歌)에 무왕의 아우인 강숙 봉을 봉하니 그의 봉국이 위(衛)나라였다.
상나라의 옛 수도에 그대로 봉했던 무경 때와 달리 상나라 왕족인 미자 계는 상나라의 옛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봉했고,
상족(商族)을 나누어 강숙 봉에게 봉했기 때문에 상족(商族)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이 건국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었다.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한 명인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상나라의 시조인 설(卨, 契)이 제곡과 연결되는 것처럼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 역시 제곡과 연결된다.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 상나라의 도읍이었던 하남성을 시작으로 수년간 수소문하여 자료를 수집해 기록한
상나라의 왕실 족보는 20세기에 중국에서 출토된 상나라의 갑골문자와 그 기록이 정확히 일치했는데
이를 보면 주나라의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당시에 그저 상나라의 계보를 토대로 가탁하여 자신들의 조상 계보를 돋보이게 하고, 왕실의 권위를 미화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 역사서에서야 당시의 중국이 통일된 국가인 양 묘사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측면의 주장에서는
주나라는 상나라의 왕실 지배층인 상족과는 민족부터 다른 성읍 수준의 부족이었는데
오랜 세월 문화적으로나 통치적으로나 중국 최초의 중앙집권국가인 상나라에 종속되어 있는 주종관계였다.
중국 학계에서는 상나라가 하나라의 주변국가였다고 보지만 하나라는 역사적인 증거가 없는 가상의 국가일 뿐이고,
하나라는 역사적으로 그 존재가 명백히 증명된 중국 문명 최초의 문자이자 상나라의 문자인 갑골문을 토대로 소급해 유추한 것일 뿐이기에 탕왕이 무언가를 정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고 한들 하나라의 존재가 그저 허구라면 당시 시대상은 그걸 달리 여기거나 건국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중국 왕조사에서 "건국자" 내지는 "개국군주" 같은 표현은 기존에 있었던 중원 왕조를 밀어내고,
새로운 왕조가 중원에서 패권을 잡도록 한 군주에게 사용한다. 따라서 성탕이 건국자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사실 갑골문에서도 읍을 건설한다는 서술은 있어도 건국이라는 표현 자체는 쓰지 않는다.
국(國)은 전근대에 States를 지칭하기보다는 도시에 사용했다.
《사기》에서도 상왕실의 시조인 설을 상에 봉한 것이 제순 유우씨 시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상나라는 이때 건국되었으되, 하나라를 내쫓고 중원의 1인자인 천자가 된 건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라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상나라의 뒤를 잇는 주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삼황오제의 시대와 상나라 사이에 하나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사기》에서는 하, 상, 주의 조상이 모두 황제 헌원씨로 나오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장 이상한 경우는 주나라다. 상나라는 출토된 유물인 갑골문으로 나라의 존재와 왕들의 계보인 왕실 족보가 명백히 사마천의 기록과 일치함이 증명되었는데 황제 헌원씨에서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걸왕까지 총 20대,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 중흥의 군주인 탕왕까지 총 17대이며, 황제 헌원씨에서 상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제신(주왕)까지는 총 46대이다. 그런데 주나라의 기록에서는 황제 헌원씨에서 서주의 초대 군주인 무왕까지 총 19대에 불과하다. 밀양 박씨에서 약 1,000년 동안 약 20대가 벌어졌는데, 이를 적용하면 주나라는 직계에서 매우 먼 자손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의 족보 기록은 상나라의 것을 바탕으로 가탁한 것으로써, 이것은 주나라 희성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했던 행위로 보여진다.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역대 왕명은 모두 십간을 따라 지었다. 상나라가 제정일치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갑골문으로 확인한 왕명과 순서가 사마천의 《사기》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다 같은 것은 아니고 마지막 왕 '제신'(帝辛)의 기록은 다르다. 그동안 제신의 평가는 사마천의 《사기》에 의존했는데 갑골문이 발견되면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역사
중시조인 탕왕 이후 상나라는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으로는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 출토가 드물다. 사실상 갑골문은 상나라의 문자가 명확하며, 은허 이전의 갑골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갑골문이 쓰이기 전 고고학적으로 드러나는 상나라 전기에 대해서는 관련 전공의 석사 과정 학생이 최근 중국 고중세사 분야 주요 학술지에 논문을 내기도 했다.#
기원전 13세기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20][21]으로 서방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했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인 미자(微子) 계(啓)에게 공작위를 수여하여 제후국인 송(宋)에 봉했고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祭祀)를 계승하도록 했다.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는 다르게 주나라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전 왕조의 후예를 대우한 것이었다.
국가 구조
상나라의 영역 바깥에 다른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중앙집권적인 왕조로 볼 수 있으며 다른 문명들도 존재했겠지만 아직 역사적인 증거가 없고, 있어도 소수의 부락 수준이었다. 주나라가 건국하고도 몇백년 뒤인 주나라 후기 동주시대 수도인 낙양 서쪽 산에 이민족 부락이 발견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었으니 상나라를 가장 오래된 문명국가이자 중앙집권적인 최초의 왕조로 보는건 합당하다. 주나라의 봉건 통치 이후에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분열하여 생겨났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서로 교류하거나 규합하는 과정을 거쳐서 통일왕조인 한나라에 이르러서야 한족이라는 중화의 민족적 정체성이 생겨났다. 중화의 대표적인 민족이라 할 수 있는 한족이 확정된 것은 전체 역사로 보면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게 아니었다.
국제사회라는 표현은 저자가 어떤 맥락에서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현대의 표현이기 때문에 고대사까지 소급해서 적용하기는 다소 곤란할 수 있다. 국제사회는 미국 위주로 돌아가긴 하나 명목상 대등한 관계이다. 그러나 상(商)나라는 갑골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최소한 주변 국가들에게 명목상으로도 상나라의 주도권을 인정할 것을 촉구한 듯 보인다.
왕이 가지는 권력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르다. 당시 중국에는 상나라를 섬기는 성읍국가와 상나라를 섬기지 않는 수많은 이민족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어느 지점을 경계로 나뉜 것도 아니었다. 이민족 사이에 상나라 성읍이 있기도 했으며 상나라 성읍 사이에 이민족 부락이 있기도 했다는 것이다[22]. 이는 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상, 주의 영향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으니 더 많은 성읍들이 복종해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민족은 토벌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다. 결국 한나라 시대가 되면 파촉, 형남, 강남에는 가야 이민족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동화되었다.
영토형 국가가 아니라 상나라가 주도하는 성읍국가 간의 네트워크였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치체제 발전이 덜 되었던 것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중원의 자연환경이다. 상고시대만 해도 황하 주변은 많은 지역이 습지 밀림이었다.[23] 이 때문에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 잦은 전쟁 때문에 황하 유역은 평지가 되었고, 교통이 발달했으며 거대한 국가가 등장했다. 반면 남쪽의 장강 유역은 여전히 밀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았거니와 그마저도 몇몇 거점도시에 밀집되어 그 밖으로는 이민족이 여전히 많았다.
따라서 하나라의 존재 근거가 없는 상태이므로 하나라와 다른 실체가 있는 집단에서 상나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면 상나라 자체 내에서 문물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새롭게 정비했거나 상나라가 생겨났다고 예측되는 시기보다 더 이전부터 점차적으로 영토를 확장했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상나라의 왕인 성탕의 존재만 그간 갑골문 연구를 통해 추가 증명되었을 뿐이며, 하나라를 입증할 역사적인 증거는 전혀 없어서 입증이 불가한 전설속 국가지만 국책연구사업으로 인해 연표는 확정되어 있는 기묘한 상황이다.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갑골문에서는 전설과는 다르게 탕왕이 하나라를 물리친 역사 기록이 없으며 하나라에 대한 흔적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상•주 3대의 관계
중국 학계에서는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의 유적으로 추정하긴 하나 아직 확실한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멸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한 후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
중국의 청동기시대에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이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없이 유지되었다. 부연하자면 춘추시대까지도 하나라의 후손은 기나라, 상나라의 후손은 송나라의 왕족으로 대우받았다.
우선 하와 상의 관계를 보면 갑골문에는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하왕조 같은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 하(夏)라는 글자는 보이지도 않고, 1년을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또한 하나라 후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와 상나라 초기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가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하-상의 교체는 상-주의 교체와 달리 지배층 내부의 계승분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반면 상과 주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다. 위치가 낙수, 황하, 제수 사이로 비슷한 하-상과 달리 주의 근거지는 관중지방이었다. 또 주나라가 승리한 후 산동 지역에 친척을 분봉하고 강족을 이주시켜 토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다. 문화면에서도 제사 대상은 제→천으로 바뀌고 점을 치는 방법은 동물뼈→나뭇가지로 변화했는데 문화가 큰 변화가 없는 하-상과는 차이가 있다. 《사기》, 《시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는 고공단보 대에 융적을 피해 기산 아래에 정착했다. 그후 서방에서 인심을 얻으며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초기에는 상나라와 대립했으나 점차 상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주나라의 근거지인 기산, 풍경, 호경이 있는 관중 지방은 상나라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이었고 주나라의 세력도 무시못할 만큼 강력했기 때문에 상나라의 복사를 보면 주나라를 정벌할까요? 같은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나라를 경계했다. 주문왕의 아버지인 왕계(계력)가 상왕 문정에게 감금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주문왕이 상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나라는 주나라가 일단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제 통수칠지 모른다고 여긴 것 같다.
전통적으로 주나라의 국성인 희성은 강성과 통혼하는 관계였다. 고공단보의 아내로 계력의 어머니였던 여성은 태강이었고, 주무왕의 아내는 읍강이었으며 훗날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내친 신나라 출신의 왕비 또한 신나라가 강성 제후였기 때문에 강성이었다. 그런데 주나라의 세력이 강력해지면서 다른 성이랑 통혼하는 경우도 생겼는데 주문왕의 어머니는 임(任)성이었고, 아내는 사(姒)성이었다. 《주역》의 <효사>를 보면 상나라 주왕의 아버지였던 제을이 주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내용이 있다.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세력이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왕(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감금한 것도 주나라에 대한 견제정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상왕 문정이 계력을 감금해 죽였지만 계력의 아들인 서백 창, 즉 주문왕의 시대가 되면 상나라의 근거지와 가까운 우, 예, 숭 등을 정벌할 정도로 세력이 강력해졌다. 제신이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하면서 계속 견제는 했지만 결국 서백 창의 아들인 주무왕 희발의 치세때 주나라를 수장으로 강(羌), 용(庸), 촉(蜀), 무(髳), 노(盧), 팽(彭), 복(濮) 등 서쪽의 국가들이 연합하여 목야에서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패권을 쟁취했다.
주나라가 패권을 쟁취하긴 했지만 상나라의 유민인 상족(商族) 세력은 여전히 강했는데 주나라가 상족(商族)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주공단, 미자계, 송나라 문서 참조.
문화면에서 주나라와 상나라는 결과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고공단보 시절이면 몰라도 상나라와 한판 붙은 주무왕 시절의 유물을 보면 상나라와 대동소이하다. 꾸준히 상나라와 교류하면서 문화도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주나라 또한 상나라처럼 동물뼈로 점을 친 흔적이 있는데, 민족의 기원은 달랐을 수 있어도 상주교체기 무렵에는 문화가 비슷해진 모양이다.
상대의 청동 항아리 |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이 아로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느라 애를 먹는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케임브리지 중국고대사》 <선진>편에 따르면 대략 4~5개 정도의 구분이 존재한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기술이 후퇴해서가 아니라 청동기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나라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새겼음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인 가치는 오히려 주나라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27]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함은 둘째 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잦아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문명에도 있었던 풍습으로, 이때문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인골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때 건축물들이 어땠냐 하면...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했던 신은 제(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했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帝) 신앙은 상나라의 멸망 후에도 불멸에 가까울 정도로 유지가 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영성 조씨의 진나라에서는 위대한(皇) 상제(上帝)라는 뜻의 황제(皇帝)가 등장했고, 진나라 멸망 후 전한과 후한 시기에 발흥한 도교 신앙과 결합이 되어 도교의 최고 신인 옥황상제가 등장했다. 그리고 16세기때는 외부 종교와 결합을 했는데 바로 기독교였다. 마테오 리치는 기독교의 신을 중국어로 표현하기 위해 신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수집을 했고, 결국에는 상제라는 단어가 중국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져 상제로 번역을 해 이후 천주 외에는 어떠한 단어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교황의 칙서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선교에서 폭넓게 쓰였다.
천제께 제사를 지내는 제례는 천자의 특권이었으며, 때문에 상나라가 멸망하고 나서도 주나라를 비롯한 당시의 인식이 아직은 모든 면에서 상나라 자성 왕실의 후예를 함부로 할 수 없어 그들을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후 송나라에서 상왕실의 후손인 공자의 부친이 자성 송씨에서 자성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 정착하게 되었는데 공자는 상나라 왕실의 종친이며 죽기 직전까지 상나라 왕족의 후예인 것을 밝히며 상왕실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장례할 것을 유언했다. 그 말대로 공자의 조상은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제신)의 둘째 형 미중(微仲) 연(衍)이었다. 공자는 미중 연의 15세손(=14대손)이었다.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이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이다.
상나라는 인신공양으로 유명하지만, 상나라뿐만 아니라 고대에 인신공양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청동기 시대 정복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포로들을 잡기 시작했고, 인신공양 풍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노예제도가 확대되고 포로들을 노동력으로 인식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30]. 상나라와 동시대였던 중동에서도 여러 인신공양 기록이 남아 있고[31], 유럽의 바이킹은 중세 중기까지 인신공양을 행했으며, 고대의 생산력에 머무르던 남미에서는 15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올 때까지도 이런 풍습이 남아 있었다.
상나라가 인신공양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상나라 시대부터 자세한 기록문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상서》(尙書)에는
고 할 정도로 중국 최초의 역사 기록이 상나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갑골문의 형태로 갑골문자는 한자(漢字)의 원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나라에서는 약해졌다지만 주나라 시기의 인신공양도 만만치 않았다. 인신공양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인신공양을 본격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한 건 춘추전국시대 유가(儒家)가 발흥하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상나라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이다. 그래서 주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송나라에서도 인신공양 풍습이 있었다. 다만 인신공양은 점차 사람이 아닌 소나 말로 대체되어 갔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제물로는 노예들이나 유목민들인 티베트계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상나라에서의 인신공양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썼다고 한다. 건축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다. 이는 주로 건물의 기초에 제물이 된 사람의 시체를 파묻는 형태로 이루어졌다.[32]
신정일치(神政一治) 국가였던 상나라에서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卯)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다. 한자의 모양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 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정형할 때 모습을 상상하면 편할 것이다. 갑골문 기록 중에
라고 점치는 기록이 있다.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皿)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낸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나라(상나라)의 주왕 제신이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이다.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정도의 혹형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나라의 많고 많은 잔악한 짓들의 일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신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다.[33]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툭하면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문자로 눈(目)에다가 칼을 쑤셔 박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즉 민(民)의 기원은 매우 잔인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인(人)은 지배층만을 향해 말하는 개념이었으니, 저 시대에는 더욱 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방식으로도 인신공양을 했는지 붉을 '적'(赤)은 사람 모양 아래 불 모양이 있는 형태로 사람을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 이를 두고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봤지 머리라고 보지는 않았기에, 무덤 주인의 혼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실제 사람들이 건강을 챙긴다고 각종 보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혼의 보양식 개념으로 순장한 것이라고. 어쨌든 이 잘린 머리들은 뼈 공장으로 보내져 뼈 그릇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솥 안에 삶긴 사람 머리가 있었다.[34] 결국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한 원인들 중에는 제후국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행했던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의 대상이었던 주변 제후국들이 같은 제후국인 주나라의 편을 들었던 것도 있는 듯하다.[35]
주나라는 상나라에 비해서 잔인성이 약해졌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36]을 받는 가운데 차츰 줄어들다가[37]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대체로 사라지고, 청나라 중기에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은허유적지(2024년 1월 6일)
은허유적지(殷墟遺蹟地)는 야외 박물관으로 대략 크기가 10만평이 되어 보인다. 은허(殷墟)는 중국 고대 상(商) 왕조 후기(BC 1300~BC 1046)의 수도로, 청동기시대 전성기의 초기문화와 기술·과학의 황금기를 보여 준다. 이 유적지에서는 80채 이상 규모의 궁전 초석과 제단을 포함하여 후대 중국건축의 원형이 된 수많은 왕족의 무덤과 궁전들이 발견되었으며, 상 왕조의 왕족 푸하오[부호(婦好)]의 무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은허궁전종묘유적 패방>
은허는 상 왕조 후기의 고대 수도로, 중국 청동기 시대 전성기의 유적들이 남아 있다. 서기전 17세기경에 상족(商族)은 하(夏) 왕조를 무너뜨리고 봉건왕조를 세웠다. 상 왕조는 동쪽으로 황해, 서쪽으로 쓰촨성[사천성(四川省)], 북쪽으로 랴오허강[요하(遼河)]유역, 남쪽으로 둥팅호[동정호(洞庭湖)]까지 세력권을 형성했으며, 청동기시대 동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의 하나였다. 그러나 은(殷)나라는 동이계 상(商)족이 건국했다는 주장도 강하게 나온다.
<갑골문 발현지>
BC 1300년경에 상나라 임금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허로 옮기면서 웅장한 도시를 지었다. 이때부터 255년 동안 8세대 12명의 왕들이 통치하며 상나라는 청동기시대의 전성기를 누렸고, 은허는 중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BC 1046년경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에 패하면서 은(殷)은 버려지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로써 역사 기록에 은의 이름이 은허(殷墟, 은의 폐허)가 된 것이다.
<회룡고미(回龍顧尾)>형 문양>
붉은색 철문 중앙에 ‘은허궁전종묘유지(殷墟宮殿宗廟遺址)’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해 폐허로 변해버린 곳에서 은허궁전과 사묘(四廟)·왕릉, 상나라의 궁전·종묘건축 유적과 왕릉, 제사갱(祭祀坑), 가족묘지군, 공방(工房)유적, 갑골저장고 등이 발견되었으며, 은허유적은 크게 궁전종묘유지(宮殿宗廟遺址), 은허왕릉유지(殷墟王陵遺址), 원북상성유지(洹北商城遺址) 등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은허박물관 표지석>
붉은색 철문을 통해 들어가면 ‘갑골문발현지(甲骨文發現地)’라고 쓴 집체만한 큰 바위 표지석이 너른 공간을 채운다. 그 뒤로는 ‘은허박물원(殷墟博物苑)’이 쓰인 붉은색 철문이 또 나온다. 그 옆의 갑골문비림(甲骨文碑林)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또 다른 바위와 입간판에는 ‘은허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다. 보통 ‘원(苑)’은 ‘야생동물들과 어우러진 동산 같은 넓은 의미의 정원’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은허박물원(殷墟博物苑)>
갑골문(甲骨文) 발견은 안양 소둔에서 출토된 용골(龍骨)에서 시작된다. 소둔의 농지에서 발견한 부서진 뼛조각을 학질의 묘약인 용골(龍骨)로 믿어 약으로 직접사용하거나 약방에 팔게 되었다. 1899년 국자감의 금석학자인 왕이룽[왕의영(王懿榮)]이 학질에 걸려 북경에서 구입한 약재 중에 용골에 새겨진 부호가 상나라의 문자임을 확인하면서 용골의 정체가 드러났고, 발굴지가 위안수이강[원하(洹河)]의 소둔(小屯)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