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오카 여행3 - 오래된 견고한 고성인 모리오카 성에 올라 옛일을 생각하다!
7월 9일 아오모리 에서 기차를 타고 하치노헤 를 구경하고는 신간선으로 이와테 岩手 현의
모리오카 盛岡(성강) 에 도착해서 "무사도" 의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 의 동상을 만납니다.
도시 순환 버스인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를 타고는 本町通1丁目(본정통1정목) 에 내려 거대한 바위
를 신체로 모시는 三石神社(삼석신사) 라고도 불리는 鬼の手形(귀노수형) 신사 를 구경합니다.
다시 덴덴무시 でんでんむし 버스를 타고는 7정거장째인 모리오카성터 공원 에 내리니
해자와 오래된 수목 너머로 거대한 성벽 이 보이는데.... 모리오카번
초대 번주인 난부 도시나오가 1615년에 쌓았다는 동북 일본의 거성 모리오카성 입니다.
모리오카성 으로 들어가니 일본의 여느 성에는 반드시 있는 오래된 신사 를
구경하고는 다시 구부러진 언덕길을 올라 모리오카 성 내부로 들어섭니다.
모리오카한 盛岡藩(성강번) 은 이와테 현 중북부에서 아오모리 현 동부에 걸친 지역에
위치해 있던 에도시대의 번 으로 보통은 영주 성을 따서 난부(南部) 번 으로 불립니다.
가이국(야마나시현) 난부향 에 있던 가이 겐지 (甲斐源氏) 가문의 계보를 잇는
난부 가문의 난부 미쓰유키 는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오슈 후지와라씨
정벌 때 세운 공으로 하치노헤 에 상륙하여 난부정 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1590년 임진왜란 2년 전에 황윤길등 조선 사신 이 교토에 왔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읍 오오사카성을 비우고 동쪽 호죠씨의 오다와라성 을 공략하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 전국을 제패했는데도 관동 지방에 100여년을 웅거해온 호죠씨 라!
난부 가문 26대 당주인 난부 노부나오 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오다와라 전쟁 에 참전해서
10개 군을 차지한후 27대 당주 난부 도시나오 南部利直 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동군으로 참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게 영지를 인정받아 모리오카번 초대 번주 가 됩니다.
1868년 메이지유신 무진전쟁 이 일어나니 천황(일왕)을 등에 업은 조슈(야마구치현)번
과 사쓰마번(가고시마현) 등 신정부군 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부터 260년을
일본을 통치해온 에도 도쿠가와 막부군 을 공격하는 무진전쟁 내란 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일본 동북 지방의 여러 번들은 도쿠가와 가문의 은혜 를 입었던 지라.... 난부번 은
막부 오우에쓰 열번동맹 에 가입하여 메이지 신정부에 저항 하였고 이 때문에
기존 영지를 몰수 당하고 대신 시로이시성 일대의 13만석 영지로 감축되어 이봉됩니다.
여기 모리오카성 은 규모가 엄청나게 큰 것이 성 내에도 다시 큰 바위로
내성 을 쌓았는데..... 얼마나 견고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 이네요?
하지만 옛 건물들이야 다 무느졌다고 치더래도 혼마루와 천수각
마저 무느져서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은 아쉽습니다.
일본이 200여개 나라로 난립해 전쟁 으로 날을 지새우던 16세기 센고쿠(전국) 시대
에는 일본에 는 큰 성만해도 1천개 가 있었다지만 전쟁중에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지방의 반란을 예방 하기 위해서 1개 번에
번주가 거처하는 성 하나 를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허물었는데...
메이지유신 후에는 그마저 무느뜨리니 이처럼 흔적만 남은 것이네요?
이후 몇 안남은 성들도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 폭격기 에 의해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몇몇 성들도 현대화 도시 계획 으로 대부분 철거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전쟁과 정책적인 파괴에 화재와 지진을 이겨내고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은 천수각을 갖춘 성 은 일본 전체에서 겨우 12개 정도 라고 합니다.
그중에 자태가 아름다우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역사적 가치가 높은 5개 성이 일본 국보
로 지정되었으니.... 마쓰모토성, 히메지성, 히코네성, 이누야마성, 마쓰에성 입니다.
*** 고베 서쪽 히메지성 ***
*** 비와 호수 히코네성 ***
*** 나고야 북쪽 이누야마성 ***
*** 나가노의 마쓰모토성 ***
*** 시마네현의 마쓰에성 ***
도쿄 에도성과 오사카성 이며 나고야성에다가 구마모토성 들이 그 규모는 훨씬 크지만....
미군 폭격등으로 부서진후 시멘 콘크리트로 재건 되었으니 국보가 될수 없는 것이지요!
이런 일본의 기준 으로 본다면.... 화재 후에 재건 되어 박락현상등 부실공사 논란을
빚고 있는 숭례문(남대문) 의 국보로서의 가치와 지위는 어찌되는 것일러나?
방어를 위해 압구를 갈지자 형 으로 만든데다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 혼마루터
에 이르니....... 정자 가 있기로 올라가 성과 모리오카 시내를 조망합니다.
여기 남부 이상 중위의 동상 이 있는데 동상은 사라지고 좌대 만 남았지만
저 동상의 크기나 예술적 가치로 볼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읽어 보니....... 번주 였던 난부 가문의 42대 당주 인 南部利祥(남부이상) 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해 황족인 竹田宮桓久王(죽전궁환구왕) 을 지키다가 전사 했다고 합니다.
그 공적을 기려서는 1908년에 동상을 세웠는데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구리로
만든 동상은 군에 헌납 했다니..... 총알이나 대포알 만드는데 사용되었을라나?
우리 어머니 말씀 중에 왜정 당시 가정집에 놋쇠로 만든 밥그릇이나 숟가락 도 걷어가고
쌀이나 목화 공출 독촉이 얼마나 심하던지 사람들은 독에 넣어 땅에 파묻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 순사 를 따라 다니는 조선인 밀정 이 마을마다 다니며 이를 염탐해 땅을
파고는 쌀독 을 찾아내고, 또 밤에 불도 켜지않고 몰래 목화 씨앗 을 빼낼라치면...
.
저 조선인 밀정 들이 마을에 들이닥쳐서 몰래 목화씨를 발라내던 조선 여인 들의
손톱 까지 뽑아버리는 등 악질적인 짓도 서슴치 않았다고 합니다.
국내에 독립운동 지사 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짓밟은건 부지기수 지요?
1945년 8.15 해방이 되니 저 친일파 밀정 들은 지은죄가 있으니 살기위해 도망 쳤는데...
조선에 진주한 미군 은 사전 준비가 전혀 안된 태평양 주둔군 부대라!!!
중국 주둔 미군이 들어왔으면 협력해 왔던 김구의 광복군 이 국내 치안을 맡았을 것입니다.
미국은 조선을 당장 독립시켜줄 의사가 전혀 없고 신탁통치 를 할 생각이라 기존에 협력해
왔던 김구의 임시정부가 걸림돌이 된다고 보고는 전혀 준비가 없었던 태평양 주둔군 을
진주시켰으며... 임시정부의 귀국마저 불허 하며 이승만을 먼저 귀국 시켜 자리를 잡게
한후 김구등은 1945년 11월 23일 과 12월 1일에 그것도 개인자격 으로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미군은 일본군과 단 한차례의 전투도 하지 못한 400명 정도의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은것인데, 당장
조선의 치안유지 가 급선무가 되니 미군정은 저들 친일파 밀정 들을 불러 순경과 간부로 채용
해서는 조선의 방범과 치안 을 맡겼고, 1948년 이승만 정부 가 서니 독립운동 지사들을 체포해
고문하고 전쟁중 일제 수탈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던 저들 악질 친일파들을 법정에 세워야 하는데.....
해서 국회에 반민특위 가 설치되어 경찰서장 둘을 우선 잡아들이자..... 저들은 백주대낮에
총을 들고 습격해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 하니 사실상 반란 행위 가 일어났는데도,
이승만은 북한을 추종하는 공산 좌익세력이 남한을 공산화 하려고 날뛰는 급박한 정세
에다가, 또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반민족 친일파들을 두둔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집니다.
임종국 씨의 연구에 따르면 이승만 정권 수립후에는 친일 경찰 이 총감 1명중 1명,
관구장 8명중 5명, 도경 국장 10명중 8명, 총경 30명중 25명, 경감
139명중 104명에 그리고 경사 969명 중에 806명을 저들 밀정 들이 차지하였으니...
친일 민족 반역자 들은 해방후 좌우익 혼란과 6.25 전쟁때 공산주의자를 척결 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등 대한민국 건국에는 1등 공신 으로 크게 이바지 하였는지는 몰라도....
정의가 거꾸로 물구나무 섰으니.... 이후 역대 정부의 친일파 청산도 실패 로 끝납니다.
친일 민족 반역자들이 좌익분자 척결에 앞장서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었을지도?
하기사 친일파 들이 어찌 저들뿐이랴? 을사 5적 외에도, 을사늑약을 지지하고 한일합병을
순종에게 청원한 "일진회" 는 회원수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만명 이 넘는다고 합니다!
러일전쟁에 협력하고 의병 진압에 참가한 일진회 이용구는 100만 회원 이름으로 청원했으니!
송병준 과 함께 일진회를 만든 이용구 는 동학군 북접 5만명을 지휘 하던 자로.... 일본군에 진압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서구 문명의 발전상 을 보고는 마음을 바꾸어 친일파 가 됩니다.
친일파 는 겨레의 선각자로 3.1운동 독립선언서 를 기초한 최남선에 이광수, 최린, 노천명, 서정주,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김동환에다가 가곡 “선구자” 의 작곡가 윤해영과 작사자 조두남 등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이광수 는 “조선인을 적자(嫡子) 로 거두어 주시는 천황 폐하의 은덕 에 감읍하여 우리
"살과 뼈" 까지도 천황폐하를 위해 일본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고 말했던 것이지요!!!
이용구와 이완용, 최린, 최남선과 이광수는 선각자로 애국자 였으나, 조선이 자립 하는 것은
"불가능" 하니...... 차라리 일본인 으로 사는 것이 "겨레를 위하는 길" 이라 여겼을라나?
친일파 들을 회상하니....... 몇년 전에 롯데 그룹에서 형제의난 이 일어나 놀라게 했는데 정작
한국인들이 분노한 것은 신격호와 장남 신동주 가 서로 일본말로 대화 하는 것이네요???
동생인 신동빈은 떠듬떠듬 한국말 을 간신히 하지만 장남 동주 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듯 심지어
한국 기자회견도 일본말 로 해서 사람들이 경악한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해외에 나가 몇대를
내려가도 차이나타운 을 만들고 중화문화 자부심 때문인지 중국 문화를 지키며 중국말을 하고
살지만 재일 교포와 재미 교포는 2~3세를 내려가면 한국말을 전혀 하지못하니 중국인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롯데가 한국 기업 인줄 알고 그중에도 나 같은 부산 ~ 경남 사람들은
롯데자이언츠 에 열광했는데 알고 보니 롯데는 일본 기업(?) 이더라는......
재일교포들이 한국말을 전혀 할줄 모르는 것은 상식인데 한국인들만 모르고 있었다는???
그러니까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은 민족의식 이 있으니 온갖 차별과 불이익을 감수 하면서
조선인 학교에 다니고 한복 치마 저고리 를 입으며 집에서 한국말 을 사용합니다.
반면에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은 일본인 학교에 보내고 집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합니다.
대학에 갈때 등본을 떼어보고 기절 하는 것이니 일본인인줄 알고 자랐는데 한국인 이었다니?
엄마가 한국인이어도 한국말을 못하는데 롯데 신격호 부인은 일본 여인 이니....
동빈이도 어른이 되어 한국 롯데를 맡게되자 필요에 의해 한국말 을 배웠을거라고 짐작됩니다.
그런데 한국이 88올림픽에 월드컵을 치르고 경제발전 을 이루어 관광객으로 일본을 찾아오고
한류로 한국 연속극과 노래에 일본 여성들이 환호 하며, 아베 신조 총리 부인 아키에 며
전총리 부인등 한국어를 배우는 붐으로 인해 요즘은 재일교포도 한국말을 약간은 하나 보네요?
하지만 성공한 재일 교포 중에서 한국말 을 할줄 아는 사람도 있으니 중국의 알리바바에
손 크게 투자해서 무려 3천배 수익을 올렸다는...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인 손정의
씨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1961년 90$ 국민소득이 35,000$ 에 이르고 한류로
한국 위상이 올라가니 이제는 점점 나아지는 듯....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