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江邊의 血鬪 1 관호청은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비참하게 변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삼일 밤낮을 노(櫓)에 시달린 두 손을 보라. 그렇지 않아도 원래 투박하던 양 손이 삼일 동안에 나무껍질처럼 좍 좍 갈라져 있었다.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며 처량함에 젖어 있던 관호청은 뱃전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윤천회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말도 안돼는 가사(歌詞)를 중얼중얼 거리는데, 나즈막히 부르고 있어 그다지 신경 쓰일 것은 없지만, 노를 젓고 있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자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천백이란 놈은 뱃머리에 앉아 조용히 전방(前方)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삼일(三日). 이 기이(奇異)한 세 사람이 동행(同行)이 되어 나룻배를 한척 구해 뱃길을 떠난지 이제 삼일이 지났다. 교대하며 노를 저어 가자던 애초의 약속은 이미 물 건너간지 오래됐다. 관호청은 그때를 회상(回想)하며 한치 앞을 보지 못한 자신의 무지(無知)를 저주했다. 육지로 가기보다는 뱃길로 사천(四川)땅을 가로질러 검각(劍閣)부근에서 육로를 택하는게 청해(靑海)를 거쳐 곤륜산(崑崙山)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첫째 날. 꼬박 두시진동안 노를 저은 관호청은 도천백과 교대했다. 도천백이 노를 잡은 후 배는 춤을 추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물과는 전혀 상관없이. 점점 붉어지는 도천백의 얼굴을 바라보며 관호청은 서둘러 노를 뺏다시피 건네 받았다. 하나뿐인 배를 도천백이 부숴 버리기 전에......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둘째 날. 관호청의 노를 이번에는 윤천회가 넘겨받았다. 노를 건네주면서 관호청은 불안한 감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윤천회는 믿는 관호청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번에는 배가 강가로 달려갔다. 아무리 노 잡는 법을 설명해줘도 소용이 없었다. 마치 강가에 배를 끌어당기는 자석(磁石)이라도 있는 듯, 아니면 원래 마차를 만들 재료로 배를 만들어 자신이 마차(馬車)라 착각하고 육지를 달리고 싶다는 배의 무언(無言)의 반발(反撥)인지? 하지만 관호청은 다시 노를 건네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방향을 고정시켜 주며 윤천회에게 계속 노를 저어가게 하였다. 그리고 정확히 한 식경후! 관호청과 윤천회, 도천백은 강가에 사이좋게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워 옷을 말렸다. 옷을 다 말린 후 뒤집힌 배를 간신히 되돌려 다시 출발했다. 그 이후 노는 관호청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삐꺽! 삐꺽! 열심히 노를 젓고 있는 관호청의 귀에 윤천회의 노래가락이 들려왔다. "왜 사는가! 왜, 왜, 왜...... 왜 죽는가! 왜, 왜, 왜...... 살고 죽는게 내 손에 달렸거늘 왜 그토록 몸부림치는가! 어-허---이--이-이-...... 왜 흐르는가? 어디를 그렇게 가는가? 왜, 왜...... 흐름과 흐름이 이미 정해져 있거늘 왜 거스리는가? 왜...... 어-허---이--이-이-......" 지그시 눈을 감고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토해 내는 윤천회의 낮은 아우성을 듣고 있자니 관호청은 웃기지도 않았다. '저놈이 과연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놈인가? 미친 놈 아냐?' 관호청은 문득 윤천회가 불쌍해졌다. 자기 딴에는 천하에 다시없는 명곡이라도 읊조리는 듯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본래, 간장(肝腸)을 찢어 놓을 듯 듣는 이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할 후렴부가 승냥이 울부짖는 소리 같으니! 다만 몇일 이라도 같이 지내본 자신이 느끼기에 미친 놈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니, 처음보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미친 놈에게 노를 맡기는니 차라리 다소 피곤하더라도 내가 노를 잡자.' 관호청은 흘러가는 강물에 배를 맡기며 편하게 생각했다. 휘-이잉-! 마음을 편하게 하니 불어오는 바람도 새로웠다. 잔잔한 물결과 따사로운 햇살! 마음까지 씻어주는 상쾌한 강바람. 그리고...... 진하게 풍겨오는 피비린내! 피비린내? '엉? 이게 웬 냄새야?' 관호청은 바람에 실려오는 진한 피비린내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킁-킁! 냄새의 근원지(根源地)를 찾아 사방을 살펴보는데,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도천백이 보였다. 도천백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저 멀리에 하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림잡아 보기에도 십여 리는 떨어져 있는 듯했다. 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코끝에 이렇듯 진한 비린내를 풍긴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리라. 아마, 대 문파(門派)끼리의 살육전(殺戮戰)이 아니면 대규모 비적(匪賊)떼에 의한 산간 마을의 몰살(沒殺)일 것이다. 관호청은 힐끗 도천백을 바라보았다.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관호청이 막 입을 열어 저곳으로 가보자고 말하려는데, 그제서야 피비린내를 맡은 듯 윤천회가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아니! 이게 웬 피비린내야? 이크? 저기-저...... 저 연기좀 봐. 전쟁 났나 본데!" 두리번거리다가 연기 나는 곳을 발견한 듯, 관호청과 도천백을 번갈아 보며 연기 나는 곳을 계속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좀 봐요. 저기-." 윤천회의 호들갑에도 도천백은 그저 조용히 정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도천백이 전혀 상대를 하지 않자 윤천회는 이번에는 관호청을 보고 굉장한 발견이라도 한 듯 떠들어댔다. "노인장, 저기 봐요, 저기-저기." 관호청이 그쪽을 보자 윤천회는 그제야 자신의 눈썰미를 인정받았다는 듯 의기양양해져 떠들어댔다. "연기 보이죠! 연기! 뭔가 큰일 난 것 같은데?" 윤천회는 말꼬리를 흐리며 도천백을 흘낏 보더니 조심스레 관호청에게 동의의 눈길을 보내며 말을 했다. "저쪽으로 가 볼까요?" 관호청 또한 가보고 싶어 온몸이 간질거리는 형편인지라 도천백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곧바로 무뚝뚝한 도천백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안돼!" 칼로 대나무를 쪼개는 듯 한 도천백의 말에 윤천회의 얼굴색은 똥이라도 밟은 듯 일그러졌다. "흥! 누가 물어봤나!" 낮게 말하는 윤천회의 불만섞인 일갈을 도천백이 못 들었을리 없지만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 쿵! 쿵! 코웃음을 한번 친 윤천회는 벌떡 일어나 노를 잡고 있는 관호청에게 불만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게 맡기고 이제 좀 쉬십쇼." "......?" 이놈이 쥐약이라도 먹었나하고 멀거니 바라보던 관호청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장면이 있었다. 쪼그려 앉아 모닥불을 쬐던 광경이...... '옳아! 이놈이 또 배를 뒤집어 버리려고!' 윤천회의 속셈을 짐작한 관호청은 당황해서 두팔을 내저으며 허겁지겁 말렸다. 하지만...... "노 이리줘요. 노!" "안돼-안돼-! 글쎄 쉬라니까- 쉬어-쉬라고!" "줘요--이리 주라니까!" "안돼. 안된다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인 윤천회의 귀에 대고 소근대며 몇마디를 해주자 겨우 노를 놓고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배만 타고 가면 그 쪽으로 가게 되어 있어. 물길이 그 쪽으로 나 있거든!" 다시 또 쪼그려 앉아 모닥불에 옷을 말려야 하는 짓 따위는 결코 하고 싶지 않았던 관호청은 간신히 윤천회를 달래어 제자리에 앉혔다. 물길이 그 쪽으로 나 있다는 말은 단지 윤천회를 달래기 위해 한 말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몇번인가 와 봐서 부근 지리는 눈을 감고도 환했다. 이제 조금만 더가면 그 유명한 사천당문(四川唐門)이 자리잡은 당가타(唐家 )가 나올 것이다. 지금 연기가 올라오는 지역은 아마도 사천당문으로 가는 지류(支流)와 검각(劍閣)을 거쳐 섬서성까지 뻗어있는 본류(本流)로 나눠지는 곳이리라. 과연, 일다경(一茶頃) 정도 지났을까! 애초의 보일듯 말듯 했던 연기가 진한 비린내와 함께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관호청은 피비린내의 근원지를 보았다. 물줄기가 갈리는 곳 우측 백여장. 한 채의 장원(莊園)이 있었다. 대강 보더라도 한쪽면의 길이만 삼십 여장이 넘어 보이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연기와 피비린내는 바로 그곳에서 피어 오르고 있었다. 관호청이 눈길을 돌려 도천백을 바라 보니, 장원쪽에는 시선한번 주지 않고 여전히 정면 만을 응시 하고 있었다. ...... 낙담한 관호청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마침 자신을 바라보던 윤천회의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번쩍-! 순식간에 끈끈한 감정의 교류가 이어지고...... 관호청은 정말 모닥불 따위를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호기심을 억누르고 모닥불을 멀리하기 보다는, 모닥불을 쬐더라도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편으로 마음이 움직이는데! 작은 갈등을 느끼며 관호청은 조용히 노를 윤천회에게 넘겼다. 한식경후. 터벅......터벅! 강가에서 장원까지 이어진 소롯길을 따라 걸으며 관호청은 이 윤천회란 놈이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바보는 아닐 것이라고 느꼈다. 이번에는 배만 뒤집는 것이 아니라 노까지 부러뜨려 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천하에 다시 없는 무공을 가진 도천백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할 것인가? 손으로 배를 저어 갈 것인가? 아니면 배를 버리고 걸어갈 것인가? 근방에 그 어떤 인가(人家) 하나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저 장원으로 가서 노를 사던지, 아니면 다른 방도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엄청난 우환(憂患)을 당해 자신들이 찾아 가는게 도리가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원은 정말 그 위용이 대단해 보였다. 장원이라 하기보다는 작은 성(城)이라고 해도 좋을만큼 엄청난 크기였다. 관호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했다. '이상하네? 몇년 전인지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그때는 이런 장원이 없었는데? 사천당문이 분타를 설치한다는 말은 들어본적이 없고, 당문의 세력권 안에서 이 정도의 건물을 올리자면 필시 친구가 아니면 적일텐데! 이제 관호청은 어렴풋이 장원 내에서 진동하는 피비린내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어떤 세력과 당문과의 마찰이겠구나!' 하지만 사천땅에서 그 어떤 자가 감히 당문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인지 궁금했다. 관호청과 윤천회는 앞서가는 도천백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 걸었다. 마침내 정문에 도착해보니 애초에 정문이 서 있던 곳에는 높이만 일장여에 달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현판(懸板)이 걸려 있던 위치도 폭약이라도 터진 듯 움푹 패여서 지금도 하얀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도천백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는게 보였다. 아무리 얼음같은 인간이라도 남의 불행에 이런 식으로 찾아가는게 도리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은 정문 앞에 나란히 서서 그 누구도 먼저 들어 가보려 하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도천백이 윤천회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들어가 보아라." "내가......?"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윤천회는 얼굴 가득히 난처한 빛을 떠올렸다. 미친 놈도 도리는 아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는 눈치더니, 관호청과 얼굴이 마주치자 사람좋은 웃음을 흘려 보였다. "헤-헤, 할아버지가 들어가 보시죠." 관호청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개잡놈의 새끼는 난처할 때는 할아버지, 그렇지 않을 때는 노인장이로구나.' "흥." 관호청의 태도에 순식간에 안면이 바뀐 윤천회의 냉소가 들려오고 뒤를 이어 온 산이 무너져라 악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아! 노(櫓)있으면 냉큼 가져오너라! 만약에 셋 셀동안 안 가지고 나오면 이 동정어옹 어르신께서 아예 가루를 만들어 주마." "......?" 윤천회의 악쓰는 소리에 관호청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일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몰랐다. "하나-아...... 두-울...... 세-에-." 과연! 윤천회가 셋을 세기 전에 장원안에서 예의바르고 공손한 대답이 들려왔다. "어떤 개자식이냐?" 거친 음성이 들려왔다 싶은 순간, 두명의 인물이 안쪽에서 뛰어나왔다. 염소수염을 기른 민 대머리의 왜소해 보이는 노인과 칠척이 넘는 신장의 위맹해 보이는 사십여 세의 중년 대한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청의(靑衣)와 백의(白衣)를 입고 있는데 웬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가 흘러 나왔다. 윤천회는 이미 관호청의 등뒤로 물러나 있고, 도천백은 그저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히 관호청이 은연중 일행의 대표자로 인정되었다. "당신이 동정어옹 관호청이오? " 청의의 노인이 두 눈에 가득 분노와 의혹의 빛을 띄우고 물어왔다. "그렇......소-만." 관호청은 상대방의 질문이 단순히 자신의 별호를 묻는게 아니라 방금전 윤천회의 행위에 대해 묻는다는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순간 마땅히 해명할 말을 찾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별호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관호청의 고개가 끄덕이자 청의노인의 눈빛이 싸늘해지며 말했다. "호-오! 내가 듣기로 동정어옹이 비록 괴인으로 불린다지만 이렇게 경우 없는 인간일줄은 상상도 못......" 청의노인의 말은 같이 나온 백의대한의 성급한 한마디에 끝을 맺지 못했다. "둘째형! 무슨 말이 그리 많으시오? 동정어옹인지 뉘집 똥강아지 인지는 몰라도 일단은 한군데 부러뜨려 놓고 이야기합시다." "셋째, 잠시만......" 만류하는 청의노인의 말이 채 끝나기전, 백의대한의 왼손에 거대한 도끼(斧)가 들렸는가 싶더니 백의대한의 몸이 그대로 관호청을 향해 덮쳐왔다. 쐐액-! 백의대한의 성급한 한마디가 들려올 때 관호청은 이미 이들의 내력을 짐작했다. 이들은 장강수로이십팔채(長江水路二十八寨)중 사인도(死人島)를 관장하는 네명의 형제중에 둘째 청사(靑巳)와 셋째 흑웅(黑熊)이었다. 장강수로이십팔채. 장강을 무대로 날뛰는 이십팔개의 세력(勢力)을 말한다. 정확히 이십팔개의 세력이 있을 때도 있고, 이십칠개나 많을 때는 삼십여 개가 넘는 세력이 형성될 때도 있지만 그 숫자에 개의치 않고 무림인들에게는 어느 시대에나 이십팔채라 불리운다. 아마, 최초로 장강의 모든 세력을 통일(統一)한 자가 그 명칭을 장강수로이십팔채라 명명한 이후로 그렇게 된 것 같다. 당금의 장강수로이십팔채. 삼년전, 한명의 신비인(神秘人)이 나타나 단 일년만에 장강을 무대로 살아가는 군소 삼십여 문파를 통일했다. 각각의 이익에 치우쳐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던 장강수로이십팔채의 근 백여 년만에 이루어진 재통일이었다. 신비인이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한동안 강호를 진동시켰다. 하지만 삼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것도 밝혀진 바가 없다. 모든 것이 구름에 가려진 신비인에게 강호의 말많은 호사가(好史家)들이 '사해용왕(四海龍王)'이라는 별호를 붙여준 것은 근래의 일이었다. 쉬-이-익! 채 도끼가 도달하기 전 밀려오는 부풍(斧風)에 관호청은 좌측으로 비스듬히 신형을 날렸다. 퍼-억! 애ㄲ은 지면을 내리친 도끼는 이내 횡으로 뉘어져 관호청의 하체를 쓸어왔다. 얼핏 중인들의 눈에 관호청의 하체가 도끼의 그림자속으로 말려든다 싶은 순간, 처절한 관호청의 비명성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악-!" 청사는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자신들도 물론 강호의 일류급에 든다고는 하지만, 동정어옹 관호청하면 강호의 절정고수들조차 한수 양보한다는 강호의 노괴물이 아닌가! 그 정도의 고수가 저렇게 허무하게? 하나, 청사의 의문은 이내 허공을 울리는 경쾌한 격타음과 함께 풀어졌다. 짝! "이런 미련한 곰같은 개잡놈의 새끼야! 도끼 좀 잘 휘두르지 못하겠느냐! 하마터면 늙은이 다리병신 될 뻔했다. "크으윽-!" 주르륵! 관호청의 장난기어린 일갈이 들려오고, 흑웅의 고통을 참는 신음성과 함께 그의 신형이 청사의 앞으로 주르르 밀려왔다. 겨우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흑웅을 보니 왼쪽뺨에 시뻘건 손자국이 나있고 안면 전체가 퉁퉁 부어있었다. "커-억, 퉤" 흑웅이 입안에 비릿한 감이 느껴져 침을 뱉어내자 부서진 이빨 너댓개가 한 덩어리의 피와 함께 튀어 나왔다. "크아아아-." 분노에 찬 흑웅이 앞 뒤 가릴 정신없이 튀어 나가려할 때 청사가 서둘러 막아섰다. "멈춰라, 셋째!" 몸을 날려 흑웅의 앞을 막아선 청사가 겨우 흑웅을 진정시키며 신형을 돌려 관호청을 마주보고 섰다. 청사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러 참으며 말했다. "동정어옹, 너무하는 것 아니오? 비록 우리로서는 당신을 어찌 해볼 수 없다지만, 수로이십팔채가 이 치욕을 조용히 넘어가리라 생각하시오?" 관호청은 평소에 자신의 맘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도리를 따져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약한 양민을 헤치는 녹림(綠林)무리라면 개개인을 따지지 않고 버러지만도 못하게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런 관호청의 귀에 청사 따위의 협박이 들려 올 리가 없었다. "굳이 수로이십팔채를 들먹이지 않아도 너희 사인도의 네마리 쥐새끼들만으로도 이 관호청을 겁주기에는 충분하다. 지금도 무섭고 두려워서 다리가 후들거리는구나." 관호청의 모욕적인 말을 듣자 청사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출수(出手)를 하자니 상대가 너무 강하고, 이대로 모욕을 참고 돌아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는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이놈을 어떻게?' 청사가 마음속으로 극심한 갈등을 느낄 때였다. 펑! 돌연 장원 내에서 신호탄(信號彈) 하나가 길게 꼬리를 흔들며 하늘 높이 올라가더니 황색빛을 번쩍이며 터졌다. 파파팍! 아마 장원내에 있던 자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응원군(應援軍)을 요청하는 것이리라. 관호청은 긴 꼬리를 날리며 내려오는 황색연기를 보며 비웃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남은 두마리 쥐새끼도 불러 모아야지. 너희 둘만이 가기에는 저승길이 너무 멀어 심심하지." 관호청의 조롱을 묵묵히 참아 넘기며 청사는 어서 대형(大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2 사인도(死人島)를 관장(管掌)하는 네명의 형제. 첫째 적지주(赤蜘蛛), 둘째 청사(靑巳), 세째 흑웅(黑熊), 네째 백호(白虎). 이중에 적지주의 무공은 독보적인 것이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흑웅과 백호의 무공은 대부분을 대형인 적지주에게서 배운 것이다. 겉으로야 형제지만, 삼인에게는 사부와 같은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인물인 것이다. '이제 대형이 도착하면 동정어옹, 네놈쯤은!' 청사는 자신들 네형제가 없을 때 장원을 쑥밭으로 만들고 간자를 ㅉ아간 대형이 어서 와주기만을 빌었다. 관호청만 대형이 상대해주면 남은 저 졸개 두명 정도야 자신의 일초지적(一招之敵)도 안될 것 같았다. 청사는 초조했다. 대형이 당도 하기전에 동정어옹이 금방이라도 손을 써올 것 같았다. 관호청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신경을 기울여 살펴보는데, 정작 본인은 누가 오던지 전혀 꺼리낄게 없다는 태도였다. 뒷짐을 지고 먼 산만 쳐다보는데, 달리보면 귀찮으니 빨리 왔으면 하는 표정 같기도 했다. 청사의 가슴속에 웬지모를 불안감이 피어 올랐으나, 이내 사그러졌다. 일말의 불안감이 가슴속에 자리하기에는 대형의 존재가 너무 강했다. 개개인이 고수아닌 사람이 없고 일개 어린아이라 해도 암기(暗器)를 다룰 줄 안다는 사천당문과의 혈전(血戰)에서 대형이 없었다면? 아마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의 형제들은 이미 차디찬 대지위에 뼈를 묻었으리라! '이제 곧 총단(總壇)에서 고수들이 당도할 것이니 그동안 당문과의 혈전에서 막대한 손해를 봤던 것도 역전이 될 것이다!' 대형을 생각하다가 잠시 생각이 옆으로 흘렀던 청사의 귀에 반가운 장소성이 들려왔다. 우-우--우-! 채 사람이 도착 하기전에 그 목소리만이 먼저 도착해 장내를 뒤흔들였다. 관호청이 고개를 돌려 강가를 바라보자, 이제 막 작은 배에서 내려 날듯이 달려오는 일인(一人)이 보였다. 갈대위에 누워서 보이지 않는 허공을 움켜쥐고 오는 듯 한 경공(輕功)이 무척 특이하다고 느끼는 순간, 그 자는 이미 장내에 도착해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할 수밖에 없는 신법이었다. "응?" 도착한 인물을 보는 순간 관호청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타난 자의 안면. 곰보자국이 얼키설키 얽혀 있는데, 유난히 큰 세 개의 마마자국이 눈을 중심으로 품(品)자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마치 거미의 홑눈을 보는 듯했다. 그제서야 관호청은 왜 저놈이 적지주, 즉 붉은 거미로 불리우는지 알 수 있었다. "풋-." 관호청이 막 광소를 터트리려는 찰나, "푸하하하하--으갸갸갸갸-." 자신보다 먼저 훨씬 통쾌하게 웃어 제치는 소리가 있었다. 이토록 시기적절하게 웃을 수 있는 자가 저 천하의 미친 놈 말고 달리 또 어디 있겠는가! "낄낄낄낄-! 큭......큭!" 정신없이 웃고 있는 윤천회를 보며 관호청은 이 미친 놈이 오늘은 유난히 자신의 마음을 잘 헤아려 준다고 생각했다. "큭-큭-큭......?" 한참을 통쾌하게 웃어 제치던 윤천회는 갑자기 가슴을 파고드는 싸늘한 기운에 저절로 웃음이 멈춰졌다.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섬뜩함에 적지주를 향해 고개를 돌린 윤천회는 두개의 불꽃을 보았다. 지글지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적지주의 눈을 바라보던 윤천회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금방이라도 저 눈에서 쏟아져나온 화광(火光)이 자신의 전신을 휘어 감을 듯 했다. '아이고 이거 야단났네!' 속으로 찬바람을 들이킨 윤천회의 뇌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윤천회는 찌푸렸던 안면을 풀며 가슴을 펴고 당당히 적지주를 향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저벅! 저벅! 적지주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자니 그 가운데 관호청이 서 있었다. 관호청의 옆을 스쳐가던 윤천회가 돌연 관호청을 보며 말했다. "예? 아니 아니 괜챦아요. 이번에는 제가 처리하죠...... 예? 뭐라고요......? 저 거미같이 생긴 쥐새끼도 할아버지가 처리하신다고......" 윤천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적지주의 신형이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 처음에는 이 미친 놈이 왜 혼자 지랄을 떠나하고 생각하던 관호청은 이내 윤천회의 야비한 속셈을 알아챘다. "에라이......" 홧김에, 자신을 향해 암기라도 발사 하듯이 두팔을 휘저으며 날아오는 적지주를 향해 윤천회를 집어 던지려고 재빨리 손을 움켜 쥐었으나...... '......?' 잡히는 게 없었다. 어디로 사라졌나 살펴보니 벌써 좌측으로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윤천회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 정도면 잔 머리 굴리는 것 뿐만 아니라 눈치도 가히 천하제일, 고금독보라 할 만 했다. 관호청은 급히 고개를 돌려 적지주를 봤다. 휙! 휙휙! 적지주는 허공에 떠오른 뒤 계속해서 양팔을 휘두르는데, 암기를 쏘는 것 같지도 않고 진기를 고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양팔을 사방으로 내쏘는 동작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관호청의 눈에는 정신없는 짓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적지주의 손이 아닌 발에 눈길이 가자 관호청의 입과 눈은 더 벌어질 수 없을만큼 벌어졌다. 적지주의 몸은 허공에 떠 있었다. 상체의 움직임과는 전혀 상관없이 평지(平地)에 서 있는 듯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어......어떻게 허공(虛空)에 떠 있을 수가?' 관호청의 두 눈은 더 이상 찢어질 수 없으리만큼 찢어져 있었다. 평생 저 정도의 경지(境地)는 생각조차 해본적이 없었다. 인간이 새처럼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는 경지. 머리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손끝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관호청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스르르...... 관호청은 피할 생각도 잊은 듯 마치 허공을 미끄러지듯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적지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천백은 한동안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인가 장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얼음을 지치듯이 허공을 미끄러져 관호청에게 다가가는 적지주와, 그런 적지주를 반쯤 정신(精神)나간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관호청이 보였다. 쉭! 몸을 날리면서 도천백은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막 적지주가 관호청의 코앞으로 다가들 때 관호청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그것은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절대절명의 순간, 돌연 그의 머리속에서 천둥처럼 울려퍼지는 소리가 있었다. '앉아!' 쾅! 관호청은 머리가 부서지는 듯 한 충격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쉬-익. 찰나, 그의 머리위를 스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 가가각! 뒤이어 터져나오는 질긴 줄이 끊어지는 소리! 그리고...... 쉬-칵! 무엇인가 절단되는 소리! 무엇이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는 짧은 순간에 각기 다른 세가지 음향이 들려왔다. 도천백은 적지주를 베는 순간, 용케도 관호청이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청사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일 처음 대형은 무영사(無影絲)를 펼쳐내 그 위에 올라서서 단장산(斷腸散)을 암암리에 뿌려냈다. 무영사는 묘강(苗疆)땅 깊은 밀림에 서식한다는 무영지주(無影蜘蛛)의 무색투명(無色透明)한 줄과 곤옥(昆玉)을 섞어 만든 투명한 기형병기(奇形兵器)였다. 일단 펼쳐지면 눈으로는 도저히 식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닿기만 해도 인간의 육체 정도는 가볍게 잘라 버릴 수 있는 무적병기(無敵兵器)인 것이다. 그런 무영사가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동정어옹은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그대로 목이 잘려져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목석처럼 가만히 선 채 죽음을 기다릴 듯 하던 동정어옹이 대형의 일격이 막 그의 목을 가르고 지나가려는 그 최적(最適)의 시기를 맞춰 단 하나의 활로(活路)인 지면으로 주저앉듯 피해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청광을 내뿜는 사내! 어떤 초식을 ㅆ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그저 신형이 흐릿해 지더니...... 대형이 자랑하는 무영사와 대형의 몸뚱이를 일순간에 두 동강이 내버렸던 것이다. 털썩! 털썩! 청사는 너무도 엄청난 광경에 도망갈 생각도 잊은 채 제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누군가의 전음(傳音)에 제자리에 주저앉은 관호청은 웬지 온몸에 힘이 빠지며 춥고 떨려왔다. "흐으으......" 단순히 방금전에 지나간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득 적지주의 과장된 손동작이 생각나자 관호청은 그때서야 자신이 중독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머리속이 빙빙도는 느낌을 받으며 관호청은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앉아'하던 목소리가 꼭 윤천회의 목소리 같았던 것이다. 정신이 없으니 별 미친 생각이 다 든다고 생각하며 관호청은 암흑의 심연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신을 잃은 관호청을 바라보며 도천백은 난감해졌다. 분명히 중독된 모양인데, 자신은 독에 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다. 그렇다고 어디 숨어있다가 기어 나왔는지 모르는 이 덜 떨어져 보이는 멍청한 이 자칭 언어학(言語學)의 일인자(一人者)가 독에 대해서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도천백이 난감함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갈대숲을 헤치며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촤-악! ㅊ-! 곧 한 사람의 모습이 장내에 나타났다. 그는 오십대의 중년인인데, 좌측팔에 몹쓸 병이라도 걸렸는지 하얀 천을 칭칭 동여 매고 있었다. 중년인은 이미 장내의 상황을 멀리서 보고 있었는지 공손히 포권하며 말했다. "소인은 좌혈수(左血手) 당표(唐豹)라고 하며, 미흡하나마 당문의 총관(總官)직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친구분이 중독된 듯한데 제가 상세를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도천백은 스스로 당표라 밝힌 사내를 잠시 바라보았다. 겸손한 말과는 달리 전혀 미흡한데가 없는 당당함이 흘러 넘쳤다. 허튼 수작을 벌일만한 상황도 아닐뿐더러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또한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설사 저자가 뭔가 다른 마음을 먹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 관호청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맡겨두는 수밖에 없었다. 도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관호청의 맥문(脈門)을 짚어 상태를 보던 사내는 도천백을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분의 중독은 깊지도, 그렇다고 얕지도 않습니다. 단장산에 중독된 증상인데 그 배합정도를 확실히 몰라 이곳에서는 해독이 어렵겠습니다." 당표의 말을 들은 도천백은 물었다. "당문에 가면 해독할 수 있소?" 당표는 공손히 대답했다. "두 시진이면 해독할 수 있습니다." "갑시다." 도천백은 잘라 말했다. 장내에 우연히 나타나 관호청을 해독해 주겠다는 당표. 사실 당표는 얼마전까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이곳 장원을 쑥밭으로 만든 자가 바로 당표인 것이다. 당표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던중 쏘아 올린 신호탄을 보고 궁금해서 되돌아왔다. 장내의 상황을 가만히 숨어 지켜보던 당표는 도천백의 엄청난 무공에 경외지심(敬畏之心)을 느끼고 사귀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일말의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까 해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관호청을 어깨에 들쳐 멘 당표를 선두로 윤천회 일행은 사천당문으로 향했다. 그들의 등뒤에는 적지주의 시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청사의 모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