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魂魔 紫强 1 도천백은 잠결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문득 잠을 깼다. 누군가 호통성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아무튼 매우 시끄러웠다. 침상에서 내려오니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끄응." 간밤에 그는 즐거워 하는 삼인을 보고 욱하는 기분에 너무 과음을 했었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픈게 잠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도천백은 한동안 머리를 감싸쥐고 그대로 방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자신이 교(敎)를 떠나온지 며칠이나 지났는지를 생각했다. '이제 정확히 십칠일이 지나갔구나!' 지나간 십칠일의 여정이 차례차례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애고아인 자신을 거두어 지금까지 키워 주신 분! 사해오호(四海五湖)를 뒤엎을 힘은 있으나 전혀 그러한 마음은 없는 분! '왜, 그런 분에게?' 도천백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자니 여러가지 지난 추억들이 더욱더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 문득 도천백은 바깥에서 누군가 적지주 뭐라고 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적지주?' 아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은 도천백은 이내 한 사람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당가타에서 자신에게 죽은 거미를 닮은 인간. 자신과는 상관없는 당문의 일에 결코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도천백은 이제 이 일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도천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한편, 당경과 관호청은 윤천회가 떠난 이후에도 시간가는줄 모르고 마셔댔다. 두 사람은 비슷한 연배에 은연중 풍겨 나오는 상대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세상사 이일 저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저절로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평생을 두고 얻기 힘든 지기(知己)를 만난 듯했다. 밤을 꼬박 새워도 부족할 지경인데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당표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와 당경에게 다가서더니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관호청은 당표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겨우 어쩌다 한 단어씩 알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가주...... 적지주...... 염라(閻羅)...... 도대협......" 관호청은 당경의 얼굴표정이 언제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들었냐는 식으로 서서히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얼굴에는 더이상 사람 좋은 친근한 미소가 머물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의 분노만이 감돌 뿐이었다. 한순간 당경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표의 보고를 듣다가 당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관호청을 보고 말했다. "관대협, 죄송하외다. 조그만 일이 생겨 잠시 자리를 비워야 겠소. 침실은 밖의 시비를 따라가시면 안내해 드릴 것이오."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나가는 당경을 따라 관호청은 밖으로 나왔다. 바로 뒤따라 나왔는데도 당경은 벌써 십 여장 밖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인시(寅時)경에 일문의 문주를 호출하는 것이나, 밤이 깊은 시각에 군데군데 서있는 무사들을 보아서는 화급(火急)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 발생한게 분명했다. 침실로 안내하려는 시비를 돌려 보낸 관호청은 서둘러 당경이 사라진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저 멀리 대낮처럼 불빛이 환한 곳이 얼른 눈에 띄었다. 당문에 처음 들어올 때 눈여겨 보았던 입구쪽이었다. 아마 이 소란스러움의 이유는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관호청은 서둘러 건물 두 채를 돌아 달렸다. 점점 불빛이 밝아지며 넓은 연무장(練武場)이 보이고, 그 입구에서 두패로 나뉘어져 있는 두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을 보이는 무리에는 당경을 필두로 사천당문의 고수 십여 명이 길게 한 일(一)자로 마치 방어막을 치듯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한 무리가 그들의 전면에 우뚝 서 있었다. '과연 사천당문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들이 누구일까?' 달려가며 전방을 바라보던 관호청의 신형이 갑자기 멈춰 섰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무형(無形)의 벽에라도 가로막힌 듯이 기묘한 동작으로 멈춰 섰다. 두 팔은 축 늘어지고 시선은 전방의 한 곳에 못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관호청의 시선이 멈춘 곳. 당문의 인물들과 대치하고 있는 무리들중에서 오장 여 뒤쪽에 따로 앉아 있는 노인. 관호청의 시선은 바로 그 노인을 향해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언뜻 보면 이제 갓 환갑이 지난 듯도 했으며 또 달리보면 백여 세가 넘어가는 듯도 한, 특이하게 이마 한 가운데에 동전만한 사마귀가 달려있는 눈빛이 맑은 노인. 그 노인을 보는 관호청의 두 발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전혀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있으니 떨고 있었다고 이야기해야 맞을 것이다. 덜덜덜덜! 관호청은 지금 억제할 수 없는 공포에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당금무림의 절정고수이며 하늘이 무너져도 눈 한번 깜짝하지않을 괴인 동정어옹 관호청이 지금 한 사람을 보고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것이다. "흐--으으-!" 관호청은 전신에 힘이 빠져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는 느끼지도 못한 채 멍한 시선으로 전방의 괴노인만을 바라보고있었다. "흐-으으......호-혼마(魂魔)...... 자강(紫强)!" 관호청의 입술사이로 흘러나온 한 마디. 혼마 자강?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관호청으로 하여금 단지 보는 것만으로 살맞은 토끼새끼마냥 부들부들 떨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혼마 자강! 그는 바로 삼십 여년전에 중원 십팔만리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혼세이마(混世二魔)중의 한 사람이었다. 혼마 자강이 무림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단 반년에 불과했으나, 당시 그의 혈명(血名)은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그는 그 기간동안에 두 번의 혈겁(血劫)을 일으켰는데, 그 두 혈겁으로 강호무림에서 명성이 혁혁했던 두 개의 방파(幇派)가 단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조리 도륙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 혼마 자강은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중원을 떠나 신강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런 인물이 지금 관호청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전대(前代)무림의 공포스런 존재였던 혼세이마중의 일인(一人)이오, 지닌바 무공의 깊이가 끝이 없다는 마인(魔人)중의 마인이. '트-틀림없다. 이마의 동전만한 사마귀하며...... 어린아이 눈망울 같다하여 동안마수(童眼魔手)라고도 불리우게 되었던 저 특이한 눈빛까지!' 전혀 뜻밖의 인물을 보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관호청은 이대로 몸을 돌려 사라지고 싶었으나 당경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안정시킨 관호청은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당경을 향해 걸어갔다. '오늘 아무래도 사천당문에는 길(吉)보다 흉(凶)이 많겠구나!' 관호청은 마침내 당경의 뒷편에 다다를 수 있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물체 하나가 두눈 가득히 들어왔다. 관(棺)이었다.! 흑색의 관 하나가 뚜껑이 활짝 열려진 채로 전방에 있었다. 그 안에는 참혹하게 갈라진 인간의 시체가 둘...... 아니 자세히 보니 한구였다. 바로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깨끗하게 두조각으로 갈라진 적지주(赤蜘蛛)의 시신이었다. 그제서야 관호청은 이제 이 야밤의 사태가 결코 자신들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마...... 저자들은 장강수로이십팔채의 인물들이겠구나! 그렇다면 혼마 자강은 도대체 저들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혼마 자강이 강호를 횡행(橫行)할 시기에는 장강수로이십팔채는 보잘 것 없는 수적(水賊)들의 무리에 불과했었다. 관호청이 그들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을 때, 당경의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관호청은 풀리지 않는 상념들을 뇌리에서 지우고 시선을 장내에 주었다. 당경의 맞은편에는 칠척이 넘을 듯한 장대한 체구에 두눈에서는 끊임없이 한광이 줄기줄기 뻗쳐 나오는 노인이 있었다. 육순이 지난 지금도 저렇듯이 위맹한 기도를 풍겨내니 그가 젊었을 적에는 얼마나 광망했을지는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당경은 아마도 이 노인의 어떤 요구를 거절한 듯했다. "당가주(唐家主), 굳이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거절하시겠단 말이오?" 다시 당경의 다소 분노를 담고 있는 일갈이 들려왔다. "염라태세(閻羅太歲) 막불인(莫不忍), 그대가 호북제일인자로 불린다는 것은 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사천땅. 결코 호북이 아니다!" 당경의 이야기로 전방의 인물이 어떤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관호청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한번 뛰는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번에는 호북(湖北)의 제왕(帝王)이라는 막불인이라는건가! 허허, 도대체 오늘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강호의 초고수(超高手)들이 운집하려나?' 장내에는 막불인의 광망스러운 일갈이 이어졌다. "후후후! 확실히 염라태세라는 명호가 일야천사에 비하면 약간의 손색이 있지!" 막불인은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자신의 오장 여 뒤에 앉아 있는 괴노인을 힐끗 돌아보았다. 당경은 처음부터 마음속에 꺼름칙한 감정이 배어있었다. 방금 막불인이 이야기하며 순간적으로 바라본 괴노인. 막불인의 자신감은 바로 저 노인으로부터 나오는 모양인데, 그 노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경이 괴노인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전대(前代)의 인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떠올려 보는데, 막불인의 음성이 그런 당경의 생각을 더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했다. "당가주, 최후로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소. 적지주를 살해한 놈들을 넘겨주겠소? 아니면 사천에 심어진 당문 기업의 반을 우리에게 넘겨주겠소?...... 지금부터 열을 셀테니 그 안에 확답을 하시오. 하나!" "이런 개같은......" 옆에서 잠자코 듣고있던 당표는 끓어오르는 노기를 억제할 길이 없어 막불인을 향해 뛰쳐나가려 했으나 당경에 의해 저지당했다. 도대체가 막불인의 요구조건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무림인(武林人)에게 있어 명예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두 가지중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당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질 것이며, 이후로 무림에서 발을 붙일 곳이 없어질 것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막불인이 이런 무리한 요구조건을 내건다는 것은 곧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보자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당경은 당표를 저지하면서도 계속해서 괴노인의 정체를 짐작하려고 애를 썼다. '도대체 누구일까?' 관호청이 한 눈에 알아본 혼마 자강을 당경이 몇 번이나 머리를 굴려서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경의 무림에 대한 견식이 미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강이 무림에서 활동한 기간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보다 진정한 이유는 관호청이 젊었을 적에 자강의 진면목을 한번 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셋!" 막불인은 힘차게 수를 세어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괴노인의 꼬리조차 잡을 수 없자 당경은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막불인을 향해 걸어갔다. 막불인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당경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담담한 눈빛을 보았다. 넷을 센다는 것은 이미 무의미하다는 것을 당경의 눈초리는 말해주고 있었다. 막불인은 다가오는 당경을 바라보며 능히 그 뜻을 짐작하고 다시 또 뒷편의 노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도움을 바라는 막불인의 눈초리를 보지 못했는지, 노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할 수 없군. 애초의 계획대로 진행하는 수 밖에......' 막불인은 불안한 내색을 감추고 당경을 향해 마주 걸어나갔다. 당경과 막불인은 삼장 여를 사이에 두고 멈춰 섰다. "후후후, 당가주! 그 알량한 독공(毒功)일랑 오늘 이 자리에서는 쓸 생각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막불인의 다소 과장된 조소가 들려왔다. 아마 긴장된 마음을 약간이라도 풀어볼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리라! 그런 막불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경의 묵직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네놈의 뒤에 서 있는 꼽추, 독타자(毒陀子) 비작(費作)을 믿고 하는 소리냐?" 지금까지의 반 공대(恭待)는 간곳 없고 완전한 반말이었다. 더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천당문과 장강수로이십팔채의 사이에 하나의 긴 선(線)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당경이 같잖타는 듯이 슬쩍 눈길을 주는 곳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키는 오척을 넘지 않을 것 같은데, 꼽추 중에서는 그래도 큰 편이었다. 그는 지금 당경의 꼽추라는 말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눈길을 받고 혈색이 붉어져 있었다. 금시라도 폭발할 듯이 달아올랐으나 사태의 중요성을 감안해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듯했다. 독타자 비작. 그는 당경의 말과 같이 함부로 깔볼 수 있는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꼽추라는 한(恨)을 독공에 승화시킨 입지전(立志傳)적인 인물이었다. 꼽추라는 외견 때문에 성격이 잔인해지고 사악해져 대살성으로 불리우지만, 지닌바 독공만은 가히 절정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흔히 그렇듯이 꼽추였다. 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했지만 당경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는 않았다. '독타자는 이십팔채의 인물이 아닌데 어떻게 행동을 같이하지? 그 옆의 팔인은 아마 이십팔채의 수뇌급 인물들인 것 같은데! 더구나 저 괴노인은 아직 정체도 모르고 있으니...... 오늘 당문은 아무래도 존폐(存廢)조차 장담키 어렵겠구나!' 그때였다. "카하하하, 당경! 노부가 네놈을 두려워해서 지금까지 대우를 해준줄 알았느냐? 네놈이 정 권주(勸酒)는 마시지 않고 벌주(罰酒)를 마시겠다면 소원대로 해주마!" 막불인이 이제까지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은 긴장감을 억누르고 대갈일성을 토하며 당경을 향해 쏘아져왔다. 그의 오른손에는 언제 뽑혔는지 모르는 팔십이근의 혼천일월도(混天日月刀)가 섬뜩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파팍!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한줄기 빛이 당경의 손을 떠났다. 쾌액! 그 번뜩이는 광채가 당경이 발출한 한 자루 유엽비도(柳葉飛刀)라는 것을 막불인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막불인은 허공으로 비스듬히 쏘아올린 신형을 급하게 끌어내리며 혼천일월도를 가슴앞에 세우고 좌측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챙챙! 두번의 격타음이 들려오고, 막불인의 신형은 또다시 좌측으로 빠르게 회전했다. 쉬익! 유엽비도가 귓전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자 막불인은 등줄기에 식은 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당경의 유엽비도는 그의 상상보다 훨씬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 그가 채 신형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그의 콧등으로 두 대의 혈리표(血裡 )가 날아들었다. 막불인은 급히 지면을 구르며 이장여나 이동해서 간신히 당경이 발출한 혈리표를 피해냈다. 파파팍! 당경의 암기들은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당경은 그저 그 위치에 우뚝 선 채 왼팔을 슬쩍슬쩍 흔들고 있을 뿐인데 막불인은 암기를 피하기 위해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이대로는 안된다!' 세불리(勢不利)를 느낀 막불인은 당경의 암기를 피하면서 점차 사정권밖으로 조금씩 이동해갔다. 막불인이 이동해 가는 곳! 좌측 십 여장 밖에 있는 연무장에 우뚝우뚝 서있는, 어둠에 반사되어 군데군데 하얀 빛을 발하는 목인형(木人形)들...... 당경은 암기를 피하면서 연무장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막불인을 보면서 능히 그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예수련을 위해 연무장 사방에 세워놓은 목인형을 방패삼아 자신의 암기를 조금이라도 둔화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비세를 승세로 바꿔보자는 것이리라! "풋!" 막불인의 약삭빠른 행동에 당경은 절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일단 그의 의도를 파악한 이상 그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막불인에게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은 천하의 당경으로서도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2 독타자 비작은 허둥지둥 암기를 피해가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히 얼굴에 드러난 막불인과, 그런 막불인을 느긋하게 쫓아가는 당경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됐군! 이제는 내가 움직일 차례다.' 독타자 비작의 신형이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더니 종내에는 흐릿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마주보며 대치해있는 형국이던 이십팔채와 당문의 두 패거리가, 당경과 막불인이 연무장 쪽으로 십여 장을 이동해가자 장내의 전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십팔채의 패거리 뒤로 연기처럼 빠져나가는 비작의 모습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흠! 과연 사천당문이로구나!' 은밀히 목적하는 건물을 찾아가는 비작은, 위급한 상황하에서도 요소요소에 배치된 당문의 경계병들을 보며 결코 당문이 생각했던 것 만큼 허술하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하지만 자신이 목적하는 것만 손에 쥔다면 당문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한 건물의 처마끝을 파고 들어가는 비작의 눈에 낯익은 건물이 들어왔다. '저 건물이군!' 자신이 목적하는 건물을 발견한 비작은 어둠에 몸을 동화시키고 여유롭게 경계상태를 점검했다. '앞뒤로 경계병이 넷이고......몸을 숨기고 있는 자가? 지붕위에 하나. 좌측 꽃밭에 하나. 우측 처마 밑에 하나. 모두 일곱이군!' 숫자를 모두 파악한 비작은 뚫고 들어갈 틈을 노렸지만 의외로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하좌우 전체가 막혀있는 것이다. '전후방은 횃불을 밝혀 놓았으니 소리없이 처치하기는 힘들겠고, 좌측이나 우측을 뚫어야 하는데?' 일순간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비작의 눈이 번쩍 빛났다. 지붕위에서 낮게 몸을 움츠리고 있는 자가 자신의 오른쪽은 환하게 볼 수 있는 반면, 왼쪽은 석자 정도 튀어 나와 있는 굴뚝에 막혀 고개를 들어야 볼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지붕에 있는 자만 조심한다면 한명 정도 해치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틈을 발견한 비작은 지체없이 좌측의 꽃밭으로 스며들었다. 츠츠츠츠! 작은 벌레가 풀을 스치는 듯한 경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꽃밭에 은신하고 있던 사내는 아마 목이 꺽여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죽음을 느끼지 못하리라! 소리없이 사내를 처치한 비작은 그대로 몸을 날려 처마끝에 거꾸로 붙어 창문 안쪽의 기척을 살펴봤다. 조용했다. 건물안에 더 이상의 매복은 없는 모양이었다. 스으으! 비작은 빨려 들어가 듯 건물안으로 스며들었다. '어느 방이더라?' 달빛을 받아 흐릿하게 보이는 통로를 비작은 소리없이 돌아다녔다. 마침내! 비작은 찾고 있는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슬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상 주렴너머로 깊은 잠에 빠진 듯한 인영이 보였다. "응?"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작이 바라보는 침상위에는 도저히 일곱살먹은 어린아이라고는 볼 수 없는 커다란 체구의 대한이 누워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비작은 자신이 방을 잘못 찾았는가 싶어 발길을 돌려 나가려했다. 그순간 어디선가 나직이 들려오는 계집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엄마, 엄마!" "......?" 비작은 밖으로 나가려던 신형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눈을 빛내며 침상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있었다! 누워있는 대한의 겨드랑이 사이로 조막만한 아이의 손이 보였다. 비작은 직감적으로 저 애가 당청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놈은 뭐야?' 당청을 끌어안은 채 정신없이 잠에 취해 있는 윤천회를 본 비작은 어리둥절했다. '이년의 애비가 당경이니 이놈은 애비도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호위병?' 윤천회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비작은 뇌리에 떠오르는 한가지 생각에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불어왔다. '그래! 특별 호위로구나!' 비작은 등줄기에 맺히는 땀 방울들을 느끼며 아직 저놈이 ㄲ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했다. 당문에서 소가주의 호위를 위해서 특별히 뽑은 놈이라면 절대로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놈이 방안까지 들어온 자신의 낌새조차 채지 못하고 죽은 듯이 누워 잠만 자고 있지 않은가! 비작은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기필코 사천당문을 멸(滅)하라는 신의 뜻인 것이다. 행여 누워 있는 놈이 이제라도 눈치를 채고 일어날까봐 비작은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서히 소매끝을 흔들었다. 살랑살랑! 비작의 손놀림에 따라서 담배 연기와도 같은 하얀 연기가 방안 전체에 빠르게 퍼져갔다. 평상시에 비작은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만큼의 독을 살포할 수 있는 작은 장치를 소매끝에 해놓았다. 방안으로 흐릿하게 퍼져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비작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병신 같은놈! 저런 놈이 특별호위라고?' 독을 살포한 후 아직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는 윤천회를 내려보던 비작은 한순간 헛바람을 들이켰다. '흡?' 죽은 듯이 누워있던 놈이 갑자기 다리를 들어올리지 않는가? 섬ㅉ함에 저도 모르게 수비자세를 취했으나...... 놈의 올라갔던 다리가 덜덜덜 떨리면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내 가슴을 쓸어 내렸다. '휴! 이제서야 중독된 모양이구나!' 하지만 비작은 놈의 행동에서 어딘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심하게 떨면서 내려오는 놈의 다리. 마치 중풍에라도 걸린 듯이 그 정도가 심해 보이는데, 그에 비해서 신체의 다른 부위는 전혀 미동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거 중독된 증상 한번 희한하게 나타나는 놈이네? 평생 별별 희한한 놈들을 다 봤지만 백화정분(百花精粉)에 중독되어 다리 한짝만 떠는 놈은 또 처음이로구나! 허억?' 저놈의 사지가 어서 축 늘어졌으면 하고 기다리던 비작은 다시 한번 헛바람을 가슴 가득히 들이켰다. 다리의 경련이 서서히 멈추면서 침상에 내려 앉는가 싶더니, 멈추었다 싶은 순간에 이제는 부들부들 떨면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가. 비작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이자식은?' 등에 무엇인가 딱딱한 물체가 느껴졌다. 정신없이 물러서던 자신이 어느새 방문까지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비작은 나즈막히 자신의 귓전을 파고 드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려면 방문은 조용히 닫고 나가라. 꼽..추..!" "흐아악!" 상대의 입김을 귓전에 느낀 비작은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신형을 돌려세웠다. 그렇지만 비작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방안 풍경은 전혀 변한게 없었다. 침상위에 누워 있는 놈은 여전히 벌벌 떨면서 다리를 들어올리고 있었고, 그외에 사람이 숨을 만한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이......이게......?" 비작은 귀신에 홀린 듯했다. 특별호위병의 이상한 중독증세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것 같았다.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그러나 비작은 결코 자신이 잘못듣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현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보다 더욱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확실히 자신이 잘못듣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들려온 음성이 알려주고 있었다. "잘못 듣지 않았다. 꼽! 추! 놈아!" 이미 기다리고 있던 터이다. 비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싶은 순간 그대로 수도(手刀)를 세워 등뒤를 갈라쳐갔다. 쉬익! 하지만 마땅히 들려와야할 격타음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손이 헛되이 허공을 갈라 가는 황당한 느낌만이 전해져올 뿐! "웨, 웬놈이?" 퍽! 비작은 웬놈이냐는 말을 다하지 못하고 콧잔등에 강력한 충격을 받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크으으!" 눈앞이 화끈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코를 감싸쥐니 만져지는게 없이 끈적끈적한 액체만이 줄줄 흘러내렸다. 아마 콧등 전체가 주저앉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작에게 아픔은 두번째 문제였다. "귀, 귀신?" 비작이 고통을 참으며 일어서자, 예의 그 음성이 다시 또렷이 들려왔다. "그렇다. 코없는 꼽추놈아!" "흐아아아!" 비작은 견딜 수 없는 공포에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튀어나갔다. 아니 튀어나가려고 했다. 하나 몸이 무형의 벽에 가로막힌 듯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아-." 너무나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고 입만을 벌리고 있는데, 벌려진 입으로 무엇인가 쑤시고 들어오며 귀신의 한마디가 들려왔다. "애 깰라!" 이어 비작은 평생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충격을 가슴에 느끼며 창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갔다. 와장창. 비작은 머리속이 윙윙거리는 가운데 자신의 몸이 허공을 떠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쿵! 그리고 다시 한번 온몸으로 거대한 충격이 전해오며 허공을 가득 메워오는 유성우(流星雨)를 보았다. '암기다! 피해야 하는데......' 피해야 한다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었고, 독타자 비작은 그렇게 자신의 죽음을 눈으로 보며 떠나갔다. 죽음의 순간에 비작의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살고 싶다는 따위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것은..... 이형환위(移形換位)였어!' 땅속에서라도 솟은 듯이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를 향해 암기를 날렸던 당문의 인물들은, 침입자가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고 너무나 쉽게 죽어버리자 어리둥절한 얼굴들이었다. "이놈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지?" "꼽추 아냐?" "입에 뭔가를 물고 있는데? 자기 소매자락아냐 이거!" 경계병들의 웅성거림이 잠시 들려왔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