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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류자료 스크랩 3·1운동 이후 만주에서 결성된 독립군 무장 부대와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 승리 ①
내생애 추천 0 조회 52 16.09.11 00: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황민호(黃敏湖) 숭실대학교 교수

 

Ⅰ.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과 항일무장단체(抗日武裝團體)의 조직

 

1910년 일제(日帝)의 한국 강점을 전후하여 국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만주(滿洲)·노령(露領) 등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는 무장투쟁에 입각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에 기반을 두었다. 독립전쟁론은 일제가 대륙침략정책을 추진해 가는 과정에서 한국을 강점한데 이어 중국·러시아·미국 등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수립된 독립운동전략 중 하나였다.

 

민족지도자들은 침략적 팽창주의 노선으로 치닫고 있는 일제가 필연적으로 중국·러시아·미국을 상대하여 전쟁을 도발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때 우리는 연합군 일원으로 대일독립전쟁(對日獨立戰爭)을 저극적으로 추진하면 자력에 의한 완전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민족지도자들은 이를 준비하기 위해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만주·러시아 등지에 집단적으로 이주시켜 독립군단을 조직하거나 항일정신에 기반을 둔 한인사회(韓人社會) 구성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1910년대에 들어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보다 구체화되었다. 이들은 만주지역에 강력한 독립운동기지 건설 기반 확립에 전력을 다하였다. 만주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국내에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이점이 있었다. 1860년대부터 이미 한인(韓人)의 이주로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를 형성하였다. 이는 어느 정도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인적·물적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이곳은 국내에 비해 일제의 정치·사회적 압박을 훨씬 적게 받았다. 따라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도 그만큼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민회는 독립전쟁 노선에 따라 서간도지역에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등을 설립하여 항일무장투쟁(抗日無裝鬪爭)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북간도에서는 명동촌(明東村)이 독립운동기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이들 노력은 1920년대에 들어서 재만(在滿) 한인독립군단(韓人獨立軍團)이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실제로 1920년대에 들어 한인독립군단은 치열한 국내진공작전 수행과 혜산진전투(惠山鎭戰鬪)·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 일제의 정규군을 상대로 전승(全勝)을 거두어 이 시기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독립군과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분풀이로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도발하여 무고한 한인(韓人)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밀산(密山)으로 이동한 독립군 각 부대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으로 통합되어 독립군의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노령과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세력의 도움을 받아 소련 영내로 진입하는데 성공하여 안정을 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또 다시 독립군 진영 내부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소련당국의 부당한 박해에 직면하여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는 수난을 겪었다. 이는 20세기 한민족이 거둔 항일독립운동의 성과이자 수난사였다.

 

Ⅱ. 한인사회(韓人社會)의 동향

 

1. 독립군기지 건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의병부대는 장기적인 항쟁을 염두에 두면서 북상도강(北上渡江)을 단행하였다. 함경북도 경성의진(鏡城義陳)의 중심세력인 김정규(金鼎奎)를 비롯하여 김남기(金南基)·최경희(崔瓊凞)·지장회(池章會) 등은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연해주 등지로 집단 망명하였다. 북청·삼수·갑산 일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홍범도(洪範圖)·차도선(車道善) 등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항일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평안북도 태천의 조병준(趙秉準)을 비롯하여 황해도 평산의진(平山義陳)의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전덕원(全德元)·백삼규(白三圭) 등도 서간도와 연해주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항일전(抗日戰)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의병부대는 아직 무기 공급이나 군자금 모집 등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애국계몽운동 세력도 신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전쟁론을 실천에 옮기는데 주력하였다. 안악사건(安岳事件)·105인사건(百五人事件)을 거치면서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 직면하고 있었던 신민회의 회원들은 해외에 기반을 둔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양기탁(梁起鐸)·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여준(呂準)·이회영(李會榮)·이상룡(李相龍)·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유동열(柳東說) 등은 중심인물이었다.

 

독립군기지 건설계획은 주로 서간도지역에 재력이 있는 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을 파견하여 근거지를 마련하는 한편,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우며, 나아가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교육을 실시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토대 마련에 집중되고 있었다. 독립전쟁론은 한말의 의병항쟁 세력과 애국계몽운동 세력이 양자의 이념과 논리를 융합하면서 발전한 독립운동 방략이었다. 즉 당시 의병들과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국권 침탈 이후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 전략을 모색해 가는 과정에서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이라는 새로운 방략을 고안해 낼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면서 이에 대해 ‘군자금(軍資金)’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던 것에서도 경향성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지도자들이 일본과 중국·러시아·미국 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가 독립전쟁을 전개할 ‘최적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의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일정하게 맞아 떨어졌다.

 

서간도와 마찬가지로 북간도지역에서도 독립전쟁이 전개될 수 있는 구체적인 여건이 조성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이상설과 여준·정순만 등은 1906년 8월부터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들이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청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한 이래 북간도지역에서는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한 수많은 한인학교가 설립되어 독립전쟁의 근간이 되는 인재들을 육성해 나갔다.

 

밀산에서도 봉밀산(蜂密山)일대를 중심으로 한흥동(韓興洞)이라는 한인촌(韓人村)이 형성되어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있었다. 한흥동은 헤이그특사로 파견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과 러시아지역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회장 김학만(金學萬)을 비롯하여 이승희(李承熙) 등이 건설하였다.

 

이밖에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한인기독교 세력도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동휘는 대한제국의 군관 출신으로 군대가 해산된 뒤 적극적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한 인물이다.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기독교를 민족해방운동에 필요한 종교라고 인식하고 전도에 노력하였다. 강화진위대장 재임시인 1904년에도 육영학교(育英學校) 설립·운영을 주도하였다. 특히 그는 강화도를 56개 학구(學區)로 나누어 의무교육을 실시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강화도에 설립된 보창학교지교는 무려 50여개교에 달하는 등 교육열은 급속하게 고조되는 계기를 맞았다.

 

또한 원산·성진·단천 등 함경도와 서북지방 일대를 순회하며 교회와 학교의 설립을 역설하여 100여개교 보창학교(普昌學校)를 각지에 설립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 학교들이 주최하는 연합운동회 개최는 학생들에게 상무정신(尙武精神)을 고취시키는 현장이었다. 정정당당한 경쟁과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는 병식체조 등은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에게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이리하여 보창학교는 대한제국기(大韓帝國期)를 ‘대표’하는 사립학교로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대종교(大倧敎)도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종교의 창시자인 나철(羅喆)을 비롯하여 서일(徐一)·계화(桂和)·박찬익(朴贊翊)·남세극(南世極)·현천묵(玄天默) 등은 북간도 곳곳에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특히 대종교계의 인물들은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파호(靑波湖)에 대종교 북도본사(北道本司)를 설치하고 포교활동을 전개했다. 초기에는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의 준비를 지향하였다. 또 동일학교(東一學校)·청일학교(靑一學校)·의합천일학교(義合千一學校)·동화의숙(東華義塾) 등의 민족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한인자제에 대한 민족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올바른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을 일깨우는 요인이었다. 독립군 양성과 민족지도자 배출은 이러한 가운데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를 맞았다. 이후 중광단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이었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근간이 되었다.

 

2.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의 활동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발전은 1913년 3월에 이르면 간민회(墾民會)와 같은 자치조직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단체는 간민교육회에 기반을 두고 설립된 조직이었다.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는 국자가(國子街)에 본부를 두고 모범농촌 활동을 전개하여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확충에 노력하였다. 한인 학생들을 동원한 도로 보수와 깨끗한 우물 등 위생시설 보완은 한인사회에서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또한 간민교육회는 교육회의 취지를 살려 야학을 개설하는 등 문맹퇴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식산회(殖産會) 조직은 한인 농민들의 경제력 향상을 위한 목적의 일환이었다. 뿐만 아니라 간도지역 각사(各社)에 권학위원(勸學委員) 1명씩을 두어 지세(地稅) 혹은 교육세 등을 징수하여 교육사업에 박차를 가하였다.『교육보(敎育報)』간행, 연해주의『권업신문(勸業新聞)』과 미주『신한민보(新韓民報)』등의 보급은 한인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기여했다.

 

"더욱이 교육회 안에는 연구회라는 것을 두어 이봉우(李鳳羽)가 회장이 되고 도태(道台)의 조선인 교육 및 통치에 관한 자문기관이라고 칭하고 있다. 그 간부들은 평소 학생들에게 중일전쟁 또는 러일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그 기회를 타는 것이 가(加)하다는 선동을 하고 있다."

 

위의 내용에서 보면, 일제는 간민교육회에 대해 별도의 ‘연구회’를 두고 중국당국과 교섭을 통해 한인사회의 교육과 자치문제를 해결하고자 햇으며, 독립전쟁론에 기초하여 학생들의 항일의식 고취에도 힘을 기울이는 독립운동단체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밖에 간도 각지에는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한인학교들이 다수 설립되었다. 정동학교(正東學校)와 광성(光成)·창동(昌東)·북일중학(北一中學)·영신학교(永新學校) 등은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실제로 북간도의 연길·화룡·왕청·훈춘·안도 등 5개 현에는 여러 형태의 학교가 158개교에 달할 정도로 한인사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이러한 간민교육회의 활동은『독립신문(獨立新聞)』을 통해 보도되었다.

 

"간민교육회의 세력으로 다수의 학교가 도처에 설립되는 그때에 서전서숙 학생의 노적(勞績)이 가장 불소(不少)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명동·광성·창동·북일 등의 중학교도 차례로 일어나고 뇌자구(磊子溝)에는 대전학교(大甸學校)라는 양무적(養武的) 기관도 설립되어 80여명의 건아를 양성하다가 사세의 불리로 도중에 폐지되었지만 현금 중아(中娥) 양령(兩領)에 위국 헌신하는 청년은 그 가운데서 나온 자가 다수이며, 학교뿐만 아니라 사회교육이 아울러 진흥하여 일반 민지(民志)가 부지불각 중에 비변(丕變)되므로 지금은 교사에게 예경(禮敬)만 배중할 뿐 아니라 상당한 월은(月銀)도 있게 되었다. 목하 80여 소학교에 학생의 사상계를 보면 지식보다 오히려 정신이 배가(倍加)한다. 이것은 교육자가 복수주의로 정신상에 최전력(最專力)함이다."

 

이처럼 간도지역에는 간민교육회의 활동을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여러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그 영향의 하나로 나자구에 대전학교 같은 군사훈련을 중심으로 하는 군관학교도 설립될 수 있었다.

 

민족교육 활성화는 사회교육 발전으로 이어져 민지가 크게 변하게 되었다. 특히 교사들은 복수주의(復讐主義)를 강조하는 등 전체적으로 한인사회의 항일정신이 크게 성장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대체로 이 시기의 한인학교에서 중학교는 물론 소학교에서도 병식체조(兵式體操)와 같은 기초적인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의 숭무주의(崇武主義)에 입각한 사회적인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상무교육 강조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굳건한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이었다. 군사훈련과 병식체조 등을 가미한 운동회는 ‘전쟁놀이’를 방불케 하는 교육현장이나 다름없었다. 이는 경쟁적인 교육기관 설립·운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한인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간민교육회의 중심인물은 연길도윤공서(延吉道尹公署)의 외교부 관리였던 이동춘(李同春)을 비롯하여 이봉우·구춘선·박찬익·정재면·윤해 등이었다. 1912년 본부임원은 회장 이동춘, 총무 박정기(朴正基), 연구회장 이봉우, 지회장 조기정(曺起貞), 평의장 손운순(孫雲順), 재무장 허순(許順), 친리원(贊理員) 윤해 등이었다. 회원수는 3백여명에 달할 정도로 한인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였다. 한인들은 자치회 조직을 통하여 일제 통치의 실상과 중국 관헌의 부당한 간섭을 부분적으로나마 인식하는 계기였다. 자치를 표방한 한인단체 결성은 이와 같은 심화된 현실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간민교육회는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자 중국 정부와 한·중 친선과 한인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위해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에서 간민자치회의 기본적인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자치’라는 단어는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자 간민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즉 간민회는 신해혁명의 영향하에 조직된 한인사회 최초의 합법적인 자치기관이었다. 중국 관헌도 북간도 한인에 대한 행정을 집행할 때 간민회와 협력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간민회는 한인사회의 ‘자치’에 대해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던 중국 정부에 의해 1914년 3월경 해산명령으로 잠깐 장업회(裝業會)라는 조직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해산되고 말았다.

 

3. 일제의 민족교육 탄압

 

한인사회의 민족교육운동 성과는 3·1운동 이후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운동으로 표출되었다. 먼저 명동학교(明東學校)·정동학교(正東學校)·배영학교(培英學校) 학생들은 충렬대·암살대·자위국(自衛國)·결사대 등을 조직하고 간도에서 전개된 3·13시위에 참가하는 한편 3월 20일과 4월 12일에 개최된 용정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명동학교·정동학교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조직한 맹호단(盟虎團)은 1919년 5월 용정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방화하는 한편『대한독립신보(大韓獨立申報)』를 발행했다. 이들은 한인(韓人)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군자금 지원과 모집활동을 병행하는 등 독립운동 기반을 구축하는데 앞장섰다.

 

1919년 10월 신흥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암살대는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관청을 파괴하고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삼았다. 1919년 3월 사립 제일국민소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단지결사대(斷指決死隊)는 일본과 개전을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조직되었다가 7월에는 독립운동 군사조직인 정의단(正義團)에 합류하는 등 한인 학생들의 항일활동은 대단히 활발하였다. 이밖에 영신학교와 명동학교 학생들은 학생광복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군자금 모집과 간도지역 한인들에게 국권회복을 내용으로 하는 격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한인학생들의 활발한 항일투쟁이 여러 영역에서 나타나자 일제의 탄압도 강화되었다.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사립학교나 교육기관을 폐쇄시키거나 방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일제는 1920년 10월경부터 본격적으로 30여개교 민족학교에 대해 방화하는 등 민족교육의 터전을 파괴하였으나 한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학교를 건립하는 등 보다 강력하게 저항하였다. 이들에게 학교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자신들을 이끌고 유지시키는 버팀목이었다.

 

191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지역 한인사회는 국내에서 망명해 온 애국계몽운동세력과 의병항쟁계열의 민족운동가들이 독립전쟁론에 입각하여 교육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정체성 정립은 한인사회 내부의 항일역량 강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1920년대 초기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지속적인 항일무장투쟁에서 독립군이 일제를 제압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4. 일제의 한인사회 분열책동

 

한인사회의 독립의식이 강화되자 이에 대한 일제의 대응도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갔다. 1919년 9월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재등실(齋藤實)은 민족운동에 대한 억압책의 일환으로 친일세력에 대한 육성·지원책을 획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보민회(保民會)와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는 만주지역에 설치되었다. 이 조직을 설립·운영한 주체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이었는데, 보민회는 당시 가장 강력한 친일조직의 하나였다. 보민회는 제우교도(濟愚敎徒)를 중심으로 일진회(一進會) 회원이었던 이인수(李寅洙)·최정규(崔晶圭) 등이 1920년 6월 16일 흥경에 본부를 두고 설립한 단체였다. 이 단체는 단순한 친일조직이 아니라 일종의 밀정조직으로서 일제 관헌의 힘이 미치지 않는 한인사회의 동향을 파악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보민회 총본부의 회장인 이인수였으며, 흥경현 지부회장은 백형린(白衡璘), 환인현 지부장은 길은국(吉隱國), 통화지부회장은 이동성(李東成)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일진회의 간부 출신이었다. 이인수는 1920년 2월에 창립된 제우교의 발기인이었을뿐 아니라, 재등실 총독이 부임한 이래 여러 차례 총독을 접견하였다. 보민회는 총독부의 직접 지휘 아래 있는 재만(在滿)총영사관, 영사관과 간도주재원 일고병자랑(日高丙子郞), 간도주재 무관 재등(齋藤) 대좌(大佐)의 지휘 감독 아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검거에 협력했다.

 

조선인민회는 보민회와 달리 치안유지가 어느 정도 가능했던 도시나 그 변두리에 설립되어 총독부 행정 말단기구로서 성격과 탄압기구의 방조기관적인 기능을 갖는 특이한 친일조직이었다. 이 단체가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13년 11월 안동에서였다. 이후 1916년과 1917년에 훈춘·용정·두도구·연길 등 주로 일본영사관 소재지에 조직되었다. 1918년 8월에는 하얼빈과 1919년에는 봉천·무순·길림·장춘 등지에도 설립되는 등 확대를 거듭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일본 정부의 보조와 지도로 조직이 더욱 확충되었으며, 1931년 만주사변 직전에는 전 만주에 34개소나 설치되었다.

 

조선인민회는 1921년 현재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북간도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다. 연길현에는 용정촌·동불사 등 10개 지회, 화룡현에는 남양평 등 3개 지회, 훈춘현에는 흑정자 등 3개 지회가 설치되었다. 조선인민회는 한인자제들에 대한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인들의 민족의식의 성장을 방해하고자 노력하였다. 일부 민회에서는 금융부를 설치하여 한인들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강화했다.

 

이밖에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은행에서는 1917년 3월 간도용정촌에 출장소를 개설하는 등 한인사회에 대한 경제적 통제를 본격화하였다. 조선은행은 1909년 안동현에 출장소를 개설한 이래 일제가 만주에서 수출초과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환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1920년 현재 봉천·대련·장춘·개원·하얼빈·전가전·영구·길림·용정 등 18개곳에 지점 및 출장소를 설치하여 만주지역에 대한 경제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었다.

 

조선은행 용정출장소의 경우 대출과 예금 등에서 대륙침략의 기능을 수행하고 잇었는데, 간도에서 영업활동을 하고 잇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한인들의 원성의 대상이었다. 동척이 대출을 실시하면서 획득한 토지매각대금의 관리를 용정출장소에서 위탁관리하기도 하였다. 이는 일제의 간도지역 토지수탈에는 동척과 용정출장소가 영역의 구분을 가리지 않고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수탈당하는 토지의 상당수가 재만 한인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상황에서 용정출장소는 간도지역에서 일제의 상권 확장과 재만 한인에 대한 토지 수탈적 측면을 동시에 가지면서 영업활동을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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