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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야구 이야기(3) 영원한 우상 최동원
Suria 추천 0 조회 416 07.09.25 11:08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후 최동원 투수와 한문연 포수의 하이파이브

 

동원선동열

국내 프로야구 출신 중 한국 최고의 투수가 누구인가를 비교할 때 흔히들 이

사람의 이름을 거론한다.

정말 그들은 메이저리그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한국야구의 기린아 였다

(실제로 최동원은 토론토 블루제이스, 선동열 LA다저스에서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 스타로서 인정받았으며, 강속구의 정통파투수이,

특히 그들 부친의 극성(?)이 유명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랄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프로야구 데이터를 비교하며 선동열의 우세를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놓고 누가 최고의 지존이냐를 나에게 묻는 다면 나는 최동원

이라고 말할 것이다.

데이터를 떠나 전성기 때의 스피드와 타자를 압도하는 낙차 큰 변화구 등 공의 위력은

결코 선동열 못지 않은 아니 선동열을 능가하고도 남는 투수가 아닐까

 

그가 경남고 시절 세상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면서부터 그는 고교야구 선수로선 파격

그 자체였다.

70년대엔 생소했던 안경잡이 투수(그것도 금테안경), 귀여운 얼굴과 여린 외, 크지

않은 키와 호리호리한 체격과는 달리 다이나믹한 투구 폼으로 불 같은 강속구를 뿜어

대는 정통파 투수, 그리고 나를 더욱 의아스럽게 만든 것은 그 시대엔 상상할 수 없었던

어깨상해보험 가입이었다.

보험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시절에 어떻게 사람의 신체를, 그것도 어깨부위 만 떼어

내서 보험을 들 수도 있다는 것이 정말 나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그밖에 고교시절 한 게임에 20개 탈삼진,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 기록, 1회전 부터

결승까지 전 게임 완투능력을 갖춘 철완 등 이미 고교시절부터 그는 한국 야구역사상

최고의 투수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야구인생에서 최절정기(구위를 기준으로)는 연세대 시절일 것이다.

공의 스피드와 낙차 큰 드롭성 커브는 이미 국내수준을 넘어서 있었고 비록 아마추어

야구지만 한미 대학야구와 슈퍼월드컵, 대륙간컵국제 야구 대회 등 국제대회에서

거구의 코쟁이들에게 한치의 꿀림도 없이 한복판에 강속구를 꽂아 넣는 그의 배짱과

공의 위력은 모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디서 읽은 내용이지만 국가대표시절(최동원의 대학시절)과 프로야구 롯데 팀에서

최동원의 공을 직접 받아봤던 심재원 포수의 말에 의하면 프로야구 롯데시절의

최동원의 공의 위력은 연세대 시절의 반도 안됐다고 말할 정도로 공의 위력으로서는

대학시절이 최고의 절정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도 연세대와는 아무 연고도 없었고 우리학교와 맞붙는 게임이 아니었어도 그의 호쾌

한 하이킥 모션의 화끈한 투구를 보려고 홀로 서울운동장을 찾기도 했었다.

 

그는 아마추어 롯데를 거쳐 메이져리그 진출 좌절 등 우여 곡절 끝에 프로야구 롯데에

입단했지만 이미 그때는 절정기를 지나 그의 야구인생은 이미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그렇다)

고교시절부터 대학을 거쳐 실업팀에 이르기 까지 그토록 어깨를 혹사시켰으니 정말

무식하기 그지없는 한국 야구 풍토였다.

그 무식함이 최동원의 야구수명을 결정적으로 단축시킨 주요인이었던 것이다.

하긴 어디 최동원 뿐이랴 고교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들 예컨데 1960년대 경북고의

임신근, 72년 전국대회 4관왕 이자 전 게임을 완투한 남우식(정말 그당시 감독이나

학교 관계자들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중앙고의 윤몽룡, 얼마전 타계한

부산고의 슈퍼베이비 박동희, 인천고의 최계훈 등 수 많은 초고교급 우수투수들이

고교시절의 가혹한 혹사로 일찌감치 투수로서의 선수생명이 단축되거나 기량을 발휘

하지 못하고 잊혀져 간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오직 승리를 위해서라면 한 놈 정도 죽어도 좋다는 심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어린

선수들을 노예 부려먹듯 강제노역에 내몰 수 있는지……

 

어쨋든 그는 그의 영원한 고향인 부산 롯데자이언츠에 1983년에 입단했지만 그 해는

최동원의 명성과는 거리가 먼 너무도 초라한 성적을 냈다.

그러나 1984……

최동원의 프로 진출은 오직 이 한 해를 위해서였고 그의 투혼과 진가를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보여준 의미있는 한 해였다.

그야말로 가을의 전설이었다.

그 해 27승으로 국내파 투수 중 최다승 기록을 올린 최동원의 호투에 힘입어 롯데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삼성과 맞붙게 되었다.

치사한 삼성은 껄끄러운 OB베어스 보다 만만한 롯데를 한국시리즈 상대로 점찍어 놓고

일부러 져주기 게임을 벌여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맞이하는 추태를 연출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7 4선승제인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1,3,5,7차전을 거의 완투 하다시피 하여 4승을

혼자 챙기며 대망의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이후 몇 년 뒤 부진한 성적과 선수노조 결성 주동 등 KBO와 맞서 싸우다

삼성으로 이적하여 결국은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그 때가 겨우 나이 30대 초반 이었다.

고교시절부터 연전연투 모든 게임을 내가 책임진다는 (아니, 네가 책임져라 였겠지 만)

투철한 사명감으로 게다가 철완의 투수라는 메스컴의 부축임 속에 그의 어깨는 날이

갈수록 깊은 상처가 커져만 갔고 야구계는 그 상처가 아물시간을 주지 않았다.

150Km대의 불 같은 강속구, 낙차 큰 변화구, 쳐 볼 테면 쳐봐라 식의 오기, 홈런 맞은

타자에게 한 번 더쳐볼래?” 하며 똑 같은 코스의 공을 던지기도 하고 구속 90Km

안 되는 아리랑 볼로 타자의 핼맷이 벗겨질 정도의 헛스윙을 유도하며 농락하던 능청스러움,

대학시절 선배(박철순)의 구타를 거부하고 글러브를 내던지고 팀을 이탈했던 반항아……

그는 진정한 프로였고 풍운아였고 한국 야구의 영원한 전설이었다.

내가 그의 열렬한 팬이 된지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야구에 있어서 만큼은 최동원

아직도 나의 영원한 우상이다.

부디 마지막 열정을 우리 야구 발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불태워 주기를 바란다.

한화의 투수코치가 아닌 롯데의 감독으로 그리고 다음 WBC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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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9.25 21:09

    첫댓글 현재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이시죠... 미래의 롯데 감독으로 충분할듯...

  • 07.09.26 10:18

    예전에 정말 대단하셨어요. 인기도 엄청났지요. 저는 이 분을 한국인 최고의 투수로 꼽는 답니다. 좋아하기로는 최동원 선수의 같은 연배이자 라이벌이며 최동원 그늘에 가려 늘 2인자였던 김시진 투수를 더 좋아하지요. 그런데 객관적인 성적을 볼 때는 최동원 투수가 최고였다고 생각하지요. 국가대표 배터리였던 이만수 포수가 제일 좋고요.

  • 투구폼이 진짜멋있어요. 옛날에 이봉원이 흉내도 냈었죠.

  • http://blog.naver.com/sasool?Redirect=Log&logNo=140023688789&vi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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