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瀑布 1 운봉산의 어느 이름모를 골짜기. 콰아아아아! 콰콰콰콰콰! 엄청난 위세(威勢)였다. 귓전을 떨어 울리는 굉음(轟音)을 동반한 채 삼십 여장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단지 멀리서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인간들의 마음속에 '왜소'라는 두글자를 새겨주기에 충분하였다. 폭포에서 남서쪽으로 백여장 떨어진 곳에 폭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한채의 사당이 세워져 있었다. 이름모를 산 중턱에 세워진 사당치고는 규모가 작아보이지 않았으며, 열린 문 안쪽으로 얼핏 보이는 관운장(關雲長)의 신상에서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지어진 연도가 그리 오래되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인적이 뜸한 듯 군데군데가 허물어져 있었다. 사당의 뒤쪽은 깍아지른 듯한 암벽이 하잖은 인간 세상을 오만하게 굽어보고 있었으며, 정면에는 방원 십여 장의 넓직한 공터가 펼쳐져있었다. 지금 공터에는 사당을 호위라도 하듯이 비슷비슷한 청색 경장을 차려입은 팔 명의 장정들이 제각각 편한 자세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앉아서 조식(調息)을 취하는 자. 옆자리의 동료와 한담을 나누는 자. 멀리 웅장한 모습의 폭포를 바라보는 자. 일견하기에는 무질서한 오합지졸(烏合之卒)들을 보는 듯하였으나, 그들의 주위에서 뻗어나오는 날카로운 예기(銳氣)는 절대로 그들이 범상치 않은 고수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당도하기 조금 전에 가벼운 격전(激戰)을 치른 듯하였다. 아마도 채 한시진이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도 예외없이 청색경장 곳곳에 찢기고 베어진 흔적이 그들 모두가 전투에 뛰어든 난전(亂戰)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며, 심한 상처를 입은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상대의 전력(戰力)이 대단치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경장에 묻어있는 피가 아직 굳지 않았다는 것은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위의 모든 상황으로 보아 전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도, 사당 앞의 공터에 전투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격전지는 이곳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방만한 듯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연신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사당안은 동시에 열 명 이상이 누워도 좋은 정도로 넓었다. 정면에 관운장의 신상과 잡다한 제기(祭器)들이 보였고, 그 뒤로 몇 개의 기둥이 있었고, 그 사이로 오인(五人)의 노소가 앉아 있었다. 두명의 노인과 세명의 젊은이. 그들 중에서 삼인은 이미 낯이 익었다. 바로 점창파의 열양신장 호곤과 신필용 광지, 그리고 아미파의 영명 녹진주였다. 남은 이인은 한 명의 노파와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색 경장 차림의 신태비범(神態非凡)한 청년이었다. 녹진주가 노파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노파는 아미파의 선배 고인쯤 되는 것 같은데...... 남의(藍衣) 청년의 내력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얼핏 보기에도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는 광지에 비하여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있어 보였으며, 팔목 두께가 웬만한 사람 허벅지 보다도 두꺼워 보였다. 오관은 큼직큼직하여 보는 사람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으며, 특히 매기처럼 쫙 찢어진 입은 저절로 친근감이 솟아나오게 하였다. 남의청년과 광지는 이미 친교(親交)가 있는 듯, 서로에게 친밀한 미소를 던지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적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 듯 하였다. 호곤이 점잖은 목소리로 둘의 이야기에 끼여 들었다. "그래, 영존(令尊)께서는 아직 안녕하신가?" 남의청년은 광지에게서 눈을 돌려 호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기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저 못지 않게 정정하십니다." 청년을 바라보며 계속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호남의 을지세가(乙支世家)라면 무림을 영도해 나가야하는 자리......을지천후(乙支天侯), 자네도 부친의 위명(威名)을 좆아 차후 무림을 평화와 안정으로 이끌어가야 할 것이네." 무게가 실린 노파의 말을 듣자 을지천후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약간 고개를 숙여보였다. "정현사태(正賢師太)님의 말씀을 후배 을지천후는 가슴 깊이 새겨 놓겠습니다." 정색을 하고 답하는 을지천후를 바라보는 정현사태의 입가에는 한층 더 잔잔한 미소가 흘러갔다. 더할나위 없이 귀여운 손자를 보는 눈빛이었다. 정현사태와 을지천후! 두 사람 모두 막강한 배경과 더욱 막강한 진재실학(眞才實學)을 갖추고 있는 무림의 절정고수라 할 수 있었다. 정현사태는 아미파의 장문 정명사태(正明師太)의 사저(師姐)로써 현재 아미의 장로직을 맡고 있다. 정(正), 사(邪), 마(魔)......어느 하나 편애함이 없는 공정한 성격때문에 무림에 큰 분쟁이 일어나거나, 무림성회(武林盛會)가 열릴때면 공증인이나 참관인의 자격으로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에 비하여 을지천후의 내력 또한 조금도 덜하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넘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환칠절검(九環七折劍) 을지천후! 호남 을지세가의 소가주. 신필룡 광지와 함께 오룡중의 일인. 독특한 가전의 검법을 이어받은 그가 검법을 펼쳐내면 아홉개의 고리가 생겨난다고 한다. 어떤 말하기 좋아하는 자의 이야기에서 와전된 것이겠지만, 그의 검법은 오룡중에서 신사(神士)와 더불어 수위를 차지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시 호곤의 음성이 들려왔다. "밖에 있는 사도사검(四刀四劍)은 영존께서 직접 키우셨다고 하던데?" "예. 그들은 부친께서 직접 가르쳐 온 저희 을지세가의 정예(精銳)라 할 수 있습니다." 호곤의 음성에서는 왠지 모르게 아쉬운 빛이 흘러나왔다. 원래 호곤이 물어보고자 했던 말은 '모두 아홉 명이 왔는가?'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을지세가의 정예라 할지라도 이번 호남성 수색작전에 편성된 인원으로는 너무 적은 것 같았다. 더구나, 을지세가는 단독으로 사방(四方)중에서 남서쪽 방위를 책임지기로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을지천후의 자부심 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물음은 햇빛을 보지 못하였고, 대신에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을지천후의 당당한 표정을 한번 더 볼 수 밖에 없었다. 개운찮은 감정이 남아 있었지만 다시 묻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곤의 시선이 을지천후에게서 떨어지자, 호시탐탐(虎視耽耽) 말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녹진주가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을지소협께서는 어제와 오늘 두번에 걸쳐서 우리 일행을 습격한 괴물들이 이번 호남성 실종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녹진주의 음성에는 자기 또래의 헌앙(軒昻)찬 청년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배어있었다. 인생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어 본 호곤이나 정현사태가 애숭이의 설익은 감정을 모를리 없었고, 근래 몇 일간 동행하면서 녹진주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가던 광지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리도 없었다. 눈길을 돌려 녹진주를 마주보는 을지천후의 시선에서도, 자신에 대한 상대의 호기심을 거부하고자 하는 빛은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제 갓 이십을 넘어선 젊은이들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광지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할 것입니다! 아무 연유도 없이 공격해오는 것이나, 그런 괴물들을 키워내려면 비밀을 유지해야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틀림없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녹진주의 질문을 위한 질문은 계속되었다. "괴물들이 이번 호남성 실종사건에 연루되어 있는게 확실하다면, 일각이라도 빨리 집결지인 융회(隆回)로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내일이 바로 칠월 보름인데." 을지천후는 가볍게 미소지었다. "녹소저! 굳이 같은 일을 되풀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일행이 떠나간 후에 겨우 잡은 한가닥의 실마리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을지천후는 잠시 말을 멈추고 녹진주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똑바로 주시하며 얼굴 가득히 화사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서 을지천후가 찾아낸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다는 녹진주의 마음이었다. 자연히 을지천후의 음성에는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내일이 집결 마지막 날이니 아마도 지금쯤은 소림과 무당을 주축으로한 제 일대와, 개벽뢰가와 천하제일가로 구성된 제 사대가 이미 융회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큼니다......한시진 전에 전서구를 날렸으니 내일 이맘때 쯤이면 그들도 이곳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해야될 일은 좀더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을지천후가 이야기하는 동안에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듣고 있던 녹진주가 가벼이 반문하였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일행의 힘 만으로는 무리가 아닐까요? 최소한 그들을 기다렸다가 합류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하하하! 녹소저께서는 자신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 일행의 힘이라면 강호무림의 어떤 문파와도 충분히 자웅(雌雄)을 겨루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호호호! 저는 을지 공자님께서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녹진주의 청량한 웃음소리를 듣자 을지천후는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반대로 옆에 앉아 있던 광지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을지천후가 입을 벌려 막 어떤 말인가를 하려할 때 정현사태가 녹진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주야!" 그 음성에는 다소 힐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 그제서야 녹진주는 자신이 처음 만나는 사내 앞에서 너무 경망되이 행동했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을지천후 또한 정현사태의 노기가 녹진주 일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을지천후는 정현사태를 향해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렸다. "선배님, 후배가 한순간이나마 현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경망되게 행동한 것에 대하여 사과드립니다." "괘념치 말게나." 정현사태의 음성에는 아직도 노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호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젊은이들이 그럴 수도 있지. 사태께선 그만 마음을 푸시구료." 호곤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을지천후에게 앉으라는 표시를 해 보일 때였다.! 돌연 사당 밖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목소리가 중인들의 다소 어색한 감정을 씻어주었다. "소주(少主)! 정체불명의 무리들이 좌측방 오십 여장 밖에서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을지천후는 앉으려던 신형을 돌려 그대로 사당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일검(一劍)! 인원은 어느 정도나 되는가?" "거리가 멀어서 확실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백 명 이상입니다." 중인들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을지천후의 뒤를 따랐다. "어제 오늘 보았던 바로 그 괴물들인가?" "그것도 아직은 단언할 수 없습니다." "흐음!" 을지천후의 입에서 뜻을 짐작할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중인들의 눈으로 광대한 숲의 이곳 저곳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작은 형체들이 보였다. 아직은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숲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는 그들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절대로 여기 있는 자신들에 대해서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일행은 피할 수 없는 일장의 악전고투(惡戰苦鬪)를 떠올렸다. 2 밀실(密室)! 사방 이십 여장이 넘어가는......밀실이라 말하기는 너무 커보이고 대전(大殿)이라 하기에는 작아 보이는 곳. 그 크기에 걸맞게 일장이 넘어가는 거대한 문이 아가리를 굳게 다문채 텅 빈 대전을 지키고 있었으며, 문 위에는 야광주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야광주를 그곳에 붙여 두었는지 실내는 문에서 멀어져 갈수록 빛보다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가장 안쪽은 겨우 희미한 형체만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인지 한 인영이 눈에 익은 은가면을 쓰고 대전 중앙에 서 있었다. 단 한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서. 호흡마저도 끊어진 듯한 그를 보고 있자니......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상태를 영원히 지속해 나갈 것 같았다. 대전내에 음산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는 어둠보다도 몇 배 진한 고요함이, 오랫동안 대전 전체를 휘어감고 있었다. 영원히 깨어질 것 같지 않던 그 침묵은 암흑 저편에서 들려온 나즈막한 음성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갔다. "풍마(風魔)! 보고하거라."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음성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로 암흑속에서 삼사령과 영마에게 명령을 내리던 바로 그 영주라는 자의 사악한 음성이었다. 음성이 들려옴과 동시에 은가면의 고개가 꺾여졌다. 그가 오랜시간 기다리온 것은 바로 이 음성인 것 같았다. "예! 지하로 들어왔던 오인은 마정수로(魔井水路)에 접어든지 이미 이틀이 지났습니다. 수마인(水魔人) 조차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곳이니, 아마도 그들은 마정수로에서 뼈를 묻어야 할 것입니다." "지상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점창파의 열양신장 호곤을 위시로 하여 아미와 호남을지세가의 인물들은 현재, 천뇌폭포(天雷瀑布)에서 멀지 않은 관제묘(關帝廟)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미 지마인(地魔人) 이백을 보내 놈들의 주위에 천라지망(天羅地網)을 펼쳐 놓았으며, 놈들이 날린 전서구중에서 한 마리를 잡은 결과, 남은 구파와 오대세가의 인물들 또한 내일 정오까지 운봉산에 당도할 것 같습니다." "흐음! 너와 같이 온 마교의 인물들은 어디에 있느냐?" "오행마신(五行魔神)은 천뇌폭포에 은신(隱身)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마치자 풍마는 예의 석상과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어둠속의 주인공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였다. 대전내에 다시 음습한 침묵의 공기가 흘러갔다. 하지만, 이번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너는 이곳에 남아있거라. 지상의 일은 본좌가 직접 처리하겠다. 장주(莊主)님께서 대막(大漠)에서 돌아오실 때가 되었으니, 그전에 모든 일을 깨끗하게 처리해 두어야 할 것이다." "잘 알겠습니다." "나가보아라." "존명!" 깊게 읍을 하고 난 후 풍마의 신형은 대전내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 * * "하-아!" "사제! 이제는 나와 교대하고 잠시 쉬게나." 신비자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화진도는 신비자를 밀어내고 자신이 부러진 노 조각을 잡고 앉았다. 교대하는 화진도와 신비자를 보며 관호청은 도천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교대하자는 손짓이었다. 관호청은 될 수 있으면 도천백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부를 만한 호칭이 마땅치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대협'이라 하면 무언가 자신이 약세를 보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도소협'이라 부르자니 도천백의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꼭 필요한 말 이외에는 절제하여 온 것이다. 윤천회도 관호청의 상태와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특유의 뻔뻔함으로 도천백에 대한 호칭을 얼버무리고 있었다. "좀더 쉬시오." 무뚝뚝한 도천백의 음성을 듣고 관호청은 배 뒷편에 기대어 앉았다. 촤아아! 규칙적으로 수로에 울려 퍼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일행은 몸도 마음도 서서히 지쳐갔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몇 시진 지나지 않은 듯도 했으며, 또 달리 생각해보면 사오 일 이상이 지난 것도 같았다. 윤천회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더니 지금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이 들었는지 쥐죽은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배가 고프니 코를 골 힘도 없는 듯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음식이 없다 뿐이지 식수는 거의 무한정으로 있다는 것이었다. 관호청은 뱃전에 기대고 허리를 숙여서 손바닥에 물을 담았다. 한 모금의 물을 입에 넣어 혀로 장난을 쳤다.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하고 조금씩 목구멍으로 넘겨보기도 하였다. 아무런 재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 마시는 시원한 물이라면 혀에 시원한 느낌이라도 줄 수 있겠지만, 근래 며칠간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입 안으로 들어간 본 적이 없으니...... 차가운 물의 감촉이 기분 나쁠 정도였다. 하지만 관호청은 여전히 물을 뱉지도 그렇다고 삼키지도 않았다. 그 기분 나쁜 감정이나마 그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속을 멍하니 주시하고 있는 것 보다는 나았다. 일행중에서 누구도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신체에 이상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서는 최대한의 힘을 비축해 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관대협!......관대협!" "으으-응?" 관호청은 신비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물을 가지고 놀다가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밝은 빛에 잠시 눈을 뜨지 못했다. 마음 속에서 '혹시?'라는 단어가 소용돌이 쳤으나, 눈을 떠보니 이곳은 여전히 지하동굴 안이었다. 화섭자를 다 써버리고 마지막으로 하나가 남게 되자 화급한 경우가 아니면 꺼내지 않기로 하였는데 무엇인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 눈을 비비며 관호청은 신비자에게 물었다. 신비자의 안색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무엇인가 잔뜩 기대하는 듯한 표정이기도 하였다. "소리! 소리를 들어보세요." "엉, 무슨 소리?" 관호청은 어리둥절했다. 잠 잘자는 놈을 깨워놓고 이게 웬 개딱지 같은 말인가? "관대협, 정신을 집중해서 잘 들어보십쇼." 신비자의 뒤에서 갑자기 화진도의 안면이 튀어 나오며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관호청은 자신에게 기대의 빛을 보내는 사람이 신비자 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비자의 반짝이는 눈망울 뒤로 화진도와 윤천회의 얼굴이 보이고, 그 뒤로 청광을 번뜩이며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도천백이 보였다. 관호청은 눈을 감았다. 굳이 전 신경을 집중할 필요도 없이 괴이한 음향이 들려왔다. 츠......츠......츠...... 그 소리는 깊은 지하에서 무엇인가가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는 소리 같기도 하였고, 아득히 먼 곳에서 공간을 접어 밀려드는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조화의 울림 같기도 하였다. 관호청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단지 듣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할 모양이었다. 그 소리는 한순간에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관호청이 감았던 눈을 뜨자 초조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네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조금 더 가......?!" 괴이한 소리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것이 자신의 죄라도 되는 양, 어눌한 음성으로 말하던 관호청이 갑자기 말문을 닫더니 두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저......저저!" 관호청은 보았다. 자신에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일행이 미쳐 보지 못하는 것을! 동굴벽이 조금씩이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일행중에서 누구도 노를 잡고 있지 않는데도! "흐른다. 흘러! 와하하하하!" 중인들 또한 지금은 관호청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두 알고 있었다. "이야아아!" "역시, 그래도 물은 흐르고 있었어!" 모두들 좋아서 어쩔줄을 몰랐다. 막혔던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행 모두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점점 빠르게...... "크케케케케!" "으아아악!" 다른 이들의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까지 관호청과 윤천회의 기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두사람의 괴성이 중인들에게 주는 느낌은 전혀 상반된 것이었다. 관호청이 내지르는 소리는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환희의 외침이었고, 윤천회의 괴성은 말 그대로 비명소리였다. "으아아아......" 윤천회의 비명소리에 관호청의 음성은 묻혀버렸다. 관호청은 의아한 눈으로 윤천회를 응시했다. 중인들 역시 연유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윤천회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누구도 윤천회에게 비명을 지르는 까닭을 직접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뭔가 다른 속셈이 있어서 일행의 주의를 끌려고 하는 수작일 것이 뻔해 보였다. 공연히 잘못 물어보았다가 그 수작에 말려들어 간다면, 그 이후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한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지금 윤천회의 괴성에서는 작위적인 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중인들은 거의 동시에 윤천회에게 주었던 시선들을 거두어 들였다. "으아......으아......으아악!" 윤천회의 비명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중인들은 곧 윤천회가 비명을 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배는 점차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아마 이 부근에 지금까지 왔던 지하수로와는 다른 별도의 수로를 통해서, 많은 양의 지하수가 한꺼번에 유입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 발견당시만 해도 그저 '흐르는 구나'를 알려주던 물살이 점차로 빨라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탄력을 받아 맹렬히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그와 더불어 조금 전부터 들려오던 괴이한 음향이 이제는 똑똑하게 귓전에 들려왔다. 츠와아아...... 윤천회의 비명이 높아갈수록 그 음향도 또한 점차 커져갔다. 중인들의 가슴에 진한 불안감이 떠올라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배는 더욱더 빨라지더니 이제는 가공할 속력으로 쏘아나가고 있었다. 파라라랏! 화섭자가 신비자의 손에서 긴 꼬리를 날리며 맹렬히 타올랐다. 일행은 모두 두손을 굳게 쥐고 배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여행의 저편에 무엇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더욱 두려웠지만......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가라면 갈 뿐이었다. 관호청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울려오는 또 다른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처절한 울부짖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가지마! 가면 죽어!' 파라라락......팟! 순식간에 화섭자 하나가 밑둥까지 다 타서 날아가 버렸다. 중인들에게 화섭자가 꺼져버렸다는 것은, 동굴에 다시 암흑이 찾아왔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주었다. 그것은 중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작은 희망의 빛마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순간, 일행이 속해있는 세상에는 꿈도, 희망도, 무림도, 원수도, 사랑도......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쉬이이이이! 전신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과, 그 사이를 뚫고 미지의 공간으로 빨려들어가는 일행 오인. 그리고...... 천지종말(天地終末)을 알려오는 굉음(轟音)! 쿠와아아아아......! "......?" 일행은 갑자기 자신들의 신체가 허공에 붕 떠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맛보며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기분이 이러할까? 굉음의 정체는 거대한 지하폭포였다. |
첫댓글 즐독 ㄳ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