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8) 75년 2차 인혁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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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8) 75년 2차 인혁당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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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75년 2차 인혁당 사건
경향신문 입력 : 2003-06-08 18:38:44
1975년 4월9일 새벽. 서울 도심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독립문 옆의 서대문 구치소는 적막했다. 구치소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는 버드나무에서 간혹 흰 꽃가루가 날렸고 망루의 보안등이 저 혼자 빈 운동장을 비추었다. 사형장 가까이에 있는 4동에 수감된 시인 김지하는 모두 고개를 숙이라는 교도관의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온몸을 떨어야 했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인혁당 관련자 8명에게 사형을 집행한다는 소식이었다.
서도원(전 대구매일 기자),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하재완(양조장 경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우홍선(한국골든 스탬프사 상무), 송상진(양봉업), 여정남(전 경북대 학생회장)은 이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내가 죽는 이유는 오직 하나. 조국을 위하여 민족민주운동을 한 것뿐이다. 가족들이 보고 싶다’. 유언장에 차례로 유언을 쓴 그들은 마지막으로 ‘독재 타도, 조국통일 만세’를 절규했다고 전해진다.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은 4·19 직후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민족민주청년동맹의 중심 인물이고 ‘만적론’을 쓴 이수병은 4·19 당시 경희대 민통련위원장을 지내고 민족일보 기자 시험에 수석 합격한 인재였다. 그리고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김용원과 육군 대위 출신의 우홍선, 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6·3시위를 주도한 학생운동 리더인 여정남. 이들은 사실 중앙에는 크게 이름이 나 있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여정남을 제외한 7인의 공통점은 64년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획책한 지하당을 조직’한 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는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발표와는 달리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4명 가운데 부장검사 이용훈과 검사 김병리·장원찬이 20일간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중정)가 발표한 혐의를 찾지 못해 ‘기소할 가치가 없다’며 사표를 내는 검찰파동을 불러일으켰다.
64년 1차 인혁당 사건을 지휘했던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는 74년 중정부장으로 수직 상승해 있었다. 10월 유신의 각본을 만든 장본인은 박정희와 이후락이었지만 사실상 연출자는 신직수였다. 박정희의 뜻이라면 정치적 반대자의 목숨을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도 불사한 그는 64년 1차 인혁당 수사를 담당했다가 이후 밀수관계 부정으로 퇴직한 이용택을 6국장으로 다시 불러들여 수사를 맡겼다. 유신정권에 비판적이되 아무런 국제적 연관관계를 가지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속죄양으로 본보기 처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살인적 고문을 폭로한 ‘고행 1974’ 기고문으로 다시 감옥에 갇힌 김지하에 의하면 당국은 관련자들에게 마지막까지 속임수를 썼다. 수사관들은 관련자들에게 “정치문제니까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면서 “이러다가 적당히 풀려날테니 걱정말고 적당히 대답하라”(하재완 증언)고 얼렀다고 한다. 관련자들도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75년 4월8일 대법원은 8명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이날 박정희는 점증하는 유신 반대운동의 중심에 있던 고려대를 무기한 폐쇄한다는 요지의 긴급조치 7호를 발동했다. 이용택은 인혁당 사건이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설파하는 조지 오글 목사를 추방해버렸다.
설령 전시라 하더라도, 있어서는 안될 비정상적 처형의 행태이며 히틀러와 같은 극한적인 파시즘 체제에서나 있을 법한 법치 유린의 만행인 이 학살은 왜 일어났던 것인가? 과연 인혁당은 실재한 조직이었는가?
‘중정에서 아무리 고문해도 당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안나온다. 당시 진짜 좌익들은 민주·평화·공화 같은 말을 썼지 인민혁명당 같은 생경한 단어를 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수사검사 장원찬). ‘74년 4월20일부터 6월8일까지 중정 조사기간 동안 고문으로 수차례 협심증을 일으켜 졸도하는 등 만신창이가 되었고 검사에게 중정의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하면 다시 중정에 끌려가 고문당하며 조서를 재작성했다’(도예종의 상고이유서). ‘혹독한 고문으로 창자가 다 빠져버리고 폐농양증이 생겨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 취조받았다’(하재완 상고이유서).
한국의 긴박한 정치상황을 세계에 타전하던 뉴욕 타임스의 리차드 헬로런과 워싱턴 포스트의 돈 오버도퍼조차 베트남 티우 정권의 붕괴와 대만 총통 장제스의 장례를 취재하느라 도쿄 지국을 비워둔 상태였기에 사형수 8명은 고립무원 상태에서 참혹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국제법률가협회는 이를 ‘사법살인’이라 명명하고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기록하고 있다.
여정남에게 사형이 선고되자 변호인석에서 사법살인을 외쳤던 담당 변호사 강신옥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 이전에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 인혁당 사건과 같이 터무니 없는 재판이 이 땅에서 벌어졌다는 것이 치욕스럽다. 마치 중세기의 마녀 재판과 다름없다. 반드시 재심을 통해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영원히 불가능해 보였던 강신옥의 이 절절한 소망은 이후 27년만에 이루어진다. 2002년 9월 국가기구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유신체제의 ‘공작 살인’이었음을 낱낱이 밝혀낸다. 유현석·이돈명·한승헌 등 1세대 인권변호사를 비롯해 사건 당시에 태어나지 않았던 386세대의 젊은 변호사까지 망라된 대규모 변호인단은 2002년 12월 마침내 재심을 청구한다.
인혁당이라는 조직 결성의 증거가 될 만한 강령·규약·감청기록·문서 등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겪다 출소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전재권·정만진·이태환·유진곤·조만호 등이 중정의 고문 악령과 싸우며 남긴 처절한 언행만이 그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인혁당 연루자를 집에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중 사망한 장석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사실들은 우리를 전율케 한다. 중정 수사팀장은 ‘물건’(사건 조작)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조사관은 피의자들이 강력 부인하면 보일러실에서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묶어 ‘뺑뺑이’(전기고문)를 돌린 후 저항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에서 불러주는 대로 진술조서를 쓰도록 했다. 수사 주체를 감추기 위해 중정은 경찰로 하여금 진술조서를 작성하도록 했으며 이후 비상군사법원도 피고인들이 부인한 사실을 정반대로 기록하거나 고문에 관한 발언을 기록에서 누락시켰다.
이 모든 과정은 중정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 4학년 재학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정에서 10차례의 진술조서를 썼던 서중석(현 성균관대 교수)은 시간이 지나면서 ‘주요 시설 방화’ ‘국가 전복’ 혐의 등이 추가되었으며 처음에는 민청학련이 인혁당을 사주한 것으로 했다가 나중에는 거꾸로 인혁당이 북의 지령을 받아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것으로 바뀌어 간 사실을 기억한다.
뿐만 아니다. 유례없는 전격 사형집행도 모자라 사형수들의 유언마저 적화통일을 염원한 것으로 조작했음은 당시 사형집행에 입회했던 교도관들이 증언하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채 사형된 이들의 시신은 그러나 가족들에게 인계되지 않았다. 이들의 구명에 앞장선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 함세웅은 이수병의 시신에 완연히 남아 있던 전기고문의 흔적을 사진으로 소장하고 있다. 장례라도 고이 치르려던 가족의 절규를 뒤로 한 채 이들의 시신은 고문 흔적을 없애기 위해 크레인에 의해 화장장으로 끌려갔다.
인혁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유신 통치에 반대하고 대일 굴욕외교를 비판하며 민족의 자주성을 추구하는 일련의 미약한 흐름이 있었을 뿐이다. 민주적 정통성을 결여한 부도덕한 국가권력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인혁당 사건은 영화가 아닌 현실로 보여주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진실찾기는 이제 단지 시작일 뿐이다. 신이 잠들어 침묵한 ‘25시’, 짐승의 시간에 일어났던 비극으로부터 우리는 무슨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인가?
〈후원/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취재지원/한국언론재단〉
‘빨갱이 가족’ 평생을 멍에
“여름에는 양산 밑에서 울고 다니고, 겨울에는 마후라 밑에서 울고 다닌 우리의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인혁당으로 몰려 사형당한 하재완의 부인 이영교씨(66)는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당시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떨린다. 남편이 1974년 4월25일 아침 목욕탕에 간다며 집을 나선 뒤 5남매를 둔 이들의 가정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돼버렸다. 경찰이 수시로 들어닥쳐 집안을 뒤졌고 심지어 방물장수로 가장해 집 주변을 배회하며 동정을 살피기도 했다.
이씨는 처음 인혁당 관련 기사를 접했을 때 잠시나마 남편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법정 진술을 들으면서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평소 옳고 그름이 분명했던 남편이 첫 재판에서 “백주대낮에 도심에 있는 다방에서 국가 전복을 모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공소사실을 부인하자 검사가 “아직 덜 맞았구나. 이따 더 때려주지”라고 말하더라고 이씨는 전했다.
다행히 5남매는 모두 훌륭하게 자랐지만 그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빨갱이’ ‘간첩의 자식’이 그들의 별명이었다. 특히 동네 아이들이 초등학생인 아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워 “빨갱이의 아들은 사형시켜야 한다”며 끌고 다니는 것을 보았을 때 이씨는 “정말 죽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사형이 집행된 직후 따라다니던 형사가 “아버지 장사는 언제 지내느냐”고 묻자 “아버지 혐의가 풀릴 때까지 지내지 않겠다”고 말했다던 큰아들을 비롯한 자녀들은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를 꺼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마저 그럴 수는 없는 일. 이씨는 장기집권을 위해 정치적 반대자들을 가장 비열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희생시킨 박정희의 기념관을 정부가 세워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한다. “박정희 기념관을 짓자고 하는 사람들은 애국가를 부를 자격조차 없다”는 게 이씨의 지론.
이씨는 남편의 명예를 회복시켜 자녀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고통스런 과거지만 지금도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열심히 알리고 있다.
[출처] [실록 민주화운동](8) 75년 2차 인혁당 사건 |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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