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이름은 없다
사도행전 4:5-12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이다. 부활절은 성령강림주일 전까지 일곱 주간 동안 계속된다.
세계교회의 전통에 따라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지난 주간에 녹색교회 가입신청서를 냈다. 올해 전국에서 교파를 초월해 14교회가 신청서를 냈다고 한다. 신청서 작성을 하면서 우리 교회가 ‘자격이 참 부족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잘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당장 이번 주 금요일에 실사를 온다고 한다. 아마 전문가들이 와서 녹색교회 자격유무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테면 태양광 발전시설이 있는지, 옥상 텃밭이 있는지 보려고 한다면 낭패이다.
그래도 일단 LED 전등이나, 천으로 만든 절기 배너 이런 것은 눈에 띌 것이다. 14년째 사용하는 색동 배너는 놀랍지 않은가? 소박한 모습도 좋아 보인다. 교회용 승합차가 없고, 일회용 컵도 없다. 그래도 재작년에 보르네오 밀림에 태양광 설치를 지원하고, 1년에 두 차례씩 이웃을 위해 사랑의 집수리에 참여한 일에 대해 자랑할 것이다. 작년에 안양 YMCA 주관 ‘쓰레기를 줄이는 11가지 생활 습관 만들기 운동’에서 1위를 한 것도 드러낼 만한 일이다.
색동교회는 처음부터 ‘하나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내일의 집’을 7가지 비전 중 하나로 삼으면서, 해마다 창조절을 지키고, 정의 평화 생명 운동을 지지한다. 게다가 절약과 검소한 소비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혹은 교회재정운영이 남 돕는 일만 빼면 낭비하는 일 없이 투명하다고 주장할까, 생각이 많다.
벌써 10년 가까운 일이다. 작은교회박람회 참가를 신청했을 때 색동교회를 토착화교회로 분류해 두었다. 아마 이름을 보고 그런 선입견을 가진 모양이다. 내가 항변하였다. 목사가 생활한복도 안 어울리는 사람인데 토착화 흉내도 못낸다.
저마다 남다른 특성이 있지만, 성격 규정을 하려는 것은 쉽지 않다. 색동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젊고 따듯하며 평화로운 신앙공동체’이다.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올해는 지구 평균온도 1.5를 넘어서는 첫해이다. 이제 이 땅의 공동체는 녹색교회, 녹색학교, 녹색가정이 되어야 한다. 녹색 그리스도인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이 변화에 동참할 때 가능할 것이다. 다른 대안은 없다.
1)
오늘 설교 제목은 ‘다른 이름은 없다’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말한다. 그것이 부활 신앙이다.
사도행전은 1세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여준다. 부활절 성서일과 가운데 설교 본문을 사도행전으로 택하는 이유가 있다.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 하는 처음 사람들의 생생한 역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다른 이름은 없다’며 시대정신을 바로 읽고, 과감하게 행동하는 복음전도자였다.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목숨을 걸고 증거하였다.
더 이상 유대교에 소망이 없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졌고, 성전과 제사장들은 타락했으며, 종교 권력은 황제 권력에게 종속되었다. 그 시대의 대표적인 엘리트층인 바리새인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였다. 신앙인으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더 이상 그 세대를 이끌 리더십과 신뢰를 다 잃었다. 그 시대의 종교인들은 율법정신을 버리고 문자주의를 앞세워 오히려 사람들의 삶을 부자유하게 만들고, 죄인으로 만들었다.
이제 부활 신앙을 품은 제자들은 말한다. 이제 다른 이름, 다른 대안은 없다. 오직 예수만이 참 구원자이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이름이다. 오직 예수 이름만 사람들을 구원의 문으로 초대할 수 있다. 예수 이름은 과거의 시대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이끌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슬로건 속에 담긴 메시지가 명쾌하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일로 온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남자 5천 명이 예수 이름을 믿고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전날 백성 앞에서 설교한 일 때문에 체포되었다. 베드로의 설교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어떻게 고침받았으며, 그를 고친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예루살렘 민심이 요동친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당국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입막음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베드로와 요한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계속 심문을 받게 되었다.
다음 날 종교의회인 산헤드린이 긴급히 소집되었다. 의장은 얼마 전 예수님을 심문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였다. 베드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부활했다고 설교하자 그들은 격분하였다. 평소 부활을 부정하는 대제사장 문중과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란 말에 크게 분노하였다. 성난 원고들은 둥글게 에워쌌다. 웬만한 사람이면 벌써 기가 죽을 상황이다.
문제는 베드로가 전날 한 설교였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의회지도자들은 ‘어떻게?’ 앉은뱅이를 고쳤느냐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런 가난뱅이 장애인에게는 어떤 자비심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민중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반대자들의 등장에 긴장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행한 그 기적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 성전과 율법을 독점한 종교권력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물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
자신들이 믿는 모세의 율법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의 이름으로 이러한 능력과 권세가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었다.
베드로는 누구의 이름을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2)
그들이 ‘너희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명쾌하게 답한다. 바로 죽음에서 승리하신 예수의 권세요, 한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예수의 이름이었다.
베드로의 치유 사역은 한 인간의 질병과 장애를 고치고, 그의 삶을 전인격적으로 회복하며, 마침내 영혼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었다. 이 일은 베드로의 능력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만약 베드로가 성전 기도 시간에 쫓겨 서둘렀다면 아마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요청을 귀 담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두 제자에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영적인 능력과 영향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적은 고통 당하는 인간에 대한 영적인 관심을 가질 때, 영향력이 생긴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러하였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부터 열까지가 다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공감이었다. 제자들은 누구보다도 산 증인이다. 게다가 십자가 죽음에서 다시 사신 부활의 증인이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담대히 증언한다. 이전의 베드로가 아니다. 어떻게 이러한 모습이 가능해졌을까?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8).
성령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사도 베드로를 이끄신다. 일찍이 예수님이 말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성령은 재판정에도 용기 있게 진리를 증언하도록 사도 베드로에게 도움을 주신다. 성령은 맞춤형 증인이 되도록 베드로를 도우셨다.
베드로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그 사람을 고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 그를 고치셨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걷지 못한 사람을 걷게 한 것이 그렇게 놀라운가? 그렇다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너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셨다. 가장 큰 기적의 주인공은 베드로도, 앉은뱅이가 아니다. 바로 십자가에서 죽임당했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베드로는 담대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이 이름은 세상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근본부터 흔들게 하는 이름이다. 세상의 특권과 자기 중심의 질서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을 의미한다.
주후 635년, 중국 당나라 장안에 20여 명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시리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중국은 그들이 로마 곧 대진(大秦)에서 왔다고 하였고, 그들이 전한 가르침을 경교(景敎)라고 불렀다. 경교는 수백 년간 당나라에서 활발히 복음을 전하다가, 당나라를 멸망시킨 황소의 난에 크게 박해를 받고 흩어졌다.
천년 후, 1623년 서안에서 어느 회교도가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검은색 비석을 발견하였다. 모두 1800개 한자어로 된 비문이었는데, 여기에 경교의 신앙고백과 그리스도교가 전하려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의 강림 순서로 차례로 소개되는 중에 이런 글귀가 포함되어있다. 미국인 선교사 제임스 레게가 영어로 번역하였다.
‘不畜臧獲(불휵장획) 均貴賤於人(균귀천어인)’즉 ‘노비를 기르거나 매매하지 않고 사람의 구천을 따지지 않고 똑같이 대한다.’
이 말씀은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 천민에게는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닌가? 그리스도교 복음의 본질이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긍휼이 담겨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에는 한 사람의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이 담겨있다.
3)
베드로의 증언은 부활 신앙의 본질이다. 베드로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를 소개한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11).
본래 건축자들이 필요 없다고 내친 그 돌을 하나님께서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버려진 돌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역설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버려지는 경험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고난 당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일을 꺼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긍휼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버린 돌의 체험 속에서 예수의 이름을 강력하게 증거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대답한다. 구원은 십자가에 달리신 나사렛 사람 예수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가 아닌 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다. 새로운 삶, 구원의 삶을 원한다면 예수께로 돌아서라. 오직 예수에게만 구원이 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12).
바울 선교사는 늘 예수의 이름을 자랑하였다. 그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빌 2:9)이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는 이름이었다. 다른 이름은 없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확신과 믿음과 희망을 갖는 일이다. 그 이름은 예수님의 존재와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던 것은 예수라는 주문을 암송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예수 이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소망이 담겨있음을 믿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라는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소망이 2천년을 이어져 왔다.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는 일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에 참여하는 일이다.
여러분은 예수 이름 외에 더 사랑하는 다른 이름이 있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많은 ‘다른 이름’을 강요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다른 이름은 없다.’
혹여 내게 더 화려하고, 더 자극적이고, 더 나를 즐겁게 하는 ‘다른 이름’이 있는가? 그 ‘다른 이름’이 여러분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 ‘다른 이름’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이름을 사랑하고,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제대로 살기 원하신다.
그런 여러분에게 늘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