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童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에 대하여 이미 대부분의 논문이나 책에서 윤극영의 ‘반달’로 거론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가 어느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많으나 '어린이'지가 우리나라 어린이 잡지로 최초이고 공식적으로 '어린이'지를 통해 동요가 발표되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린이'지를 통해 발표된 동요가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그러나 최초의 동요란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반달’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논문이나 글에는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는 말이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는 ‘반달’이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오래전부터 최초의 동요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왔다. 우선 최초라는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다. 문자 그대로 처음 나온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반달’이 발표되기 이전에 이미 여러 편의 동요들이 ‘어린이’지를 통해 발표되었기 때문에 '반달'이 최초의 동요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동요로 동요에 대표성을 생각한다면 '반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달'보다 먼저 발표된 동요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어린이’지에 반달보다 먼저 발표된 동요
순 | 곡명 | 작사 | 작곡 | 권 | 호 | 대정 | 발표 연도 |
1 | 형제별 | 정순철 | 1 | 8 | 12.9.15 | 1923.9.15 |
2 | 나븨 | 김용희 | 1 | 8 | 12.9.15 | 1923.9.15 |
3 | 고드름 | 버들쇠 | 윤극영 | 2 | 2 | 13.2.14 | 1924.2.14 |
4 | 설날 | 윤극영 | 윤극영 | 2 | 2 | 13.2.14 | 1924.2.14 |
5 | 까막잡기 | 박팔양 | 윤극영 | 2 | 3 | 13.3.4 | 1924.3.4 |
6 | 까치야 | 김기진 | 정순철 | 2 | 3 | 13.3.4 | 1924.3.4 |
7 | 봄 | 윤형모 | 윤극영 | 2 | 5 | 13.5.10 | 1924.5.10 |
8 | 가을밤 | 미상 | 미상 | 2 | 9 | 13.9.11 | 1924.9.11 |
9 | 반달 | 윤극영 | 윤극영 | 2 | 11 | 13.11.1 | 1924.11.1 |
위에서와 같이 이미 '반달' 이전에 여러 편의 동요들이 '어린이'지를 통해 발표되었다. 윤극영의 반달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가 아니라면 정순철 작곡의 ‘형제별’과 ‘나뵈’(김용희라고 적혀있지만 작사인지 작곡인지 알 수가 없음)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가 된다. 그러나 ‘형제별’에 대해 작사 작곡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어 좀 더 치밀한 연구 조사가 필요하다.
우선 작곡에 대해 의문은 제기한 사람은 한용희로 “이 노래는 방정환의 창작 가사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곡조는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곡조가 아니다”
1)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재복에 의하면 “글쓰기를 좋아하던 문학청년 방정환이 소년 운동가의 자리에서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들려준 첫 번안 동요이다.”라고 하여 형제별은 창작동요가 아니라 일본 동요를 번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어떤 동요를 번안한 것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어 번안동요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이재복에 의하면 북한 고려호텔 책방에 있는 노래책에는 형제별이 정순철 작사 작곡으로 나와 있다.
2)그러나 또 다른 우리나라 일반 동요책에는 방정환 작사 정순철 작곡으로 되어 있어 형제별에 대해서 누가 작사 작곡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작사 작곡 모두 강한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라 하기에는 좀 더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나뵈’도 만약 김용희라는 이름만 있으며 작사와 작곡에 대해 명확하지가 않다. 또한 작품으로 볼 때 작품성이 다른 곡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져 습작 같은 느낌을 준다. '어린이'지 초기에 번안동요가 많았다고 하는데 번안동요인지 아닌지를 밝히려면 일본의 동요들을 낱낱이 살펴보아야 한다.
최초의 창작동요에 대한 또 다른 논란은 이유선이 "흔히 윤극영의 반달이 아동음악의 효시라고 생각해왔지만 '반달'(1924년)보다 2년 전에 박태준의 '가을밤', '꽃봉투', '가을', '물새'등 13곡의 동요가 창작 작곡되었다."
3)라고 하는데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박태준이 1920년에 많은 곡들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아래와 같다.
1920년에 반달보다 먼저 발표했다고 하는 박태준 동요
가을밤(이태선)/ 꽃봉투(윤석중)/ 가을(박목월)/ 꼬부랑 둔덕(서덕출)/ 고기잡이 할아버지(윤석중)/ 골목길(김영일)/ 나비와 잠자리(윤석중)/ 매 방패연(윤석중) 눈이 오는 밤(/ 꽃밭(장효섭)/ 눈 (홍은순)/ 물새(윤석중)/ 우리나라 기(윤석중) 7) |
위에 제시된 동요들은 박태준이 공식적으로 발표했는지가 명확하지 못하고 확실한 근거가 없다. 더욱 신뢰가 안가는 부분이 있는데 작사가들의 출생연도이다. 박목월은 1916년 1월 6일 출생하였는데 1920년대 박목월이 작사한 ‘가을’을 발표했다면 박목월이 5세 때 작사했다 것이 된다. ‘가을밤’의 작사자 이태선은 1914년에 출생했음으로 1920년이면 7세 때 ‘가을밤’을 지은 것이 된다. 과연 5세와 7세에 수준 있는 성숙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러므로 박태준이 동요가 최초라는 것에 대해서 확실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어린이’지에 발표된 동요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가장 먼저 발표한 순서가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 시대를 상징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동요로 본다면 ‘반달’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는데 별 이견이 없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반달’이 발표되자마자 ‘반달’은 전국적으로 퍼져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노래로 전 국민적으로 알려지고 애창하는 노래가 되었다고 한다.
4) 이 노래는 멀리 중국과 일본에 까지 알려졌다고 하는데 일본 닛도(일본) 레코드사에서 윤극영의 동요를 음반 제작하고 1936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무일푼이 되었을 때 일본 방송국에서 자신의 작품료를 받아 생활했다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도 그의 노래가 무척 알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극영이 일본에서 뮤직컬 ‘두만강의 노래’를 발표하였을 때 당시 ‘요미우리’신문은 무용가 최승희와 테너가수 김영길과 윤극영에 대해 ‘조선 예술인 도쿄 진출’이라는 특집을 실었다는 것만 봐도 윤극영이 일본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사였음을 알 수 있다.
5) 윤극영의 ‘반달’은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을 주는 노래로 어린이들만 부르는 동요라기보다 전 국민의 노래였다고 볼 때 먼저 발표되었다는 관점이 아니라 대표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최초의 창작동요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