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모 선수 시절의 역도산
1949년에는 요코즈나(최고급)와 오제키(2등급)에 이어 3등급인 세키와케에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오제키를 목전에 둔 1950년 8월 25일 새벽 갑자기 스모 선수의 상징인 마게(상투)를 자르고 스모계를 떠나는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이유를 두고 일본 사범과의 불화, 스모협회에 대한 불만 등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민족적 차별 때문에 오제키나 요코즈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스모계를 떠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도산은 공사판 현장감독을 하던 1951년 2월 일본 호적을 취득하고 이름을 모모타 마쓰히로로 개명했다. 이후 요코즈나를 꿈꾸며 스모계 복귀를 원했으나 스모계는 돌출행동으로 자주 눈 밖에 나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구의 백인을 압도하는 경기에 절로 환호와 탄성 터져나와
역도산이 방황하고 있던 1951년 9월 몇 명의 미국 레슬러가 일본을 방문했다. 역도산은 우연히 술집에서 미국인 프로레슬러와 몸싸움을 벌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프로레슬링 입문을 권유받았다. 역도산은 방일한 미국의 프로레슬러 보비 브란스를 상대로 1951년 10월 28일 국기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4개월 후에는 본격적인 레슬링 연마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역도산의 소질을 알아본 보비 브란스가 미국에서 프로 레슬링을 연마하도록 초청한 것이다.
- 역도산(1924~1963)
역도산은 전미레슬링협회(NWA)로부터 프로레슬링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고 1953년 3월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해 7월 레슬링 도장을 개설하고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결성했다. 그에 앞서 7월 18일 일본인들끼리 펼치는 일본 최초의 프로레슬링 시합을 주선했다. 역도산은 1953년 10월 다시 미국으로 건갔다. 세계 최강 루테즈에게 도전하고 거물급 프로 레슬러를 일본에 초빙하는 것이 방미 목적이었다. 역도산은 미국에서 챔피언 도전자 결정권을 따내 루테즈에게 도전했으나 43분 간의 격투 끝에 결국 링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월드 태그팀 챔피언인 샤프 형제를 일본으로 초청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 샤프 형제와 태그매치 경기를 벌이는 역도산.
유도와 스모의 승자를 가리는 대결도 승리해
당시 일본은 TV 본방송이 시작된 지 6개월밖에 안 된 때여서 사람들은 길거리 전파상에 설치된 220여 대의 TV를 보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신바시역 앞에 설치된 TV 앞에는 2만여 명이 운집했다. 그들은 길거리 TV를 보며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환호하며 역도산을 응원했다. 일본의 TV 보급은 프로레슬링의 인기에 힘입어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다.
- 역도산의 경기를 보기 위해 야외TV 앞에 운집한 관중
기무라가 첫판에서 패하자 사람들은 역도산이 대신 복수해주기를 원했다. 그들에게 샤프 형제는 적이었고 역도산은 적을 응징할 영웅이었다. 역도산의 가라테 촙이 샤프 형제를 난타할 때마다 환성과 함성이 일본 열도를 뒤덮었다. 3일 동안 벌어진 경기에서 역도산은 연속 승리했으나 기무라의 패배로 경기는 무승부로 끝이 났다.
그러나 며칠 후 기무라가 “역도산의 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해 막 달궈지기 시작한 레슬링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기무라는 역도산과 별개로 ‘국제프로레슬링단’을 설립한 뒤 “정식으로 경기를 하면 내가 역도산을 이길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역도산이 기무라의 도전을 받아들여 열린 경기는 1954년 12월 22일 1만 3,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쿄의 국기관에서 열렸다. 기무라는 전일본유도선수권을 10년 연속 제패한 유도의 달인이었다. 양측은 이왕 경기를 벌이는 김에 경기를 제1회 일본선수권시합으로 격상하고 양측에서 4명을 더 출전시켜 일본 프로레슬링의 최강자를 가리기로 했다. 따라서 이날의 대결은 역도산과 기무라의 대결을 넘어서 양측 레슬링협회 간 자존심을 건 대결이었으며, 유도와 스모의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대결이기도 했다.
- 기무라를 공격하는 역도산(오른쪽)
4회전까지 역도산 측이 2승 2무의 전적을 기록, 승부는 이미 갈려 있었다. 역도산과 기무라의 마지막 결전은 소강 상태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무라의 왼발이 역도산의 복부를 때리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역도산이 가라테 촙으로 기무라를 무차별 난타하자 심판이 시합 속행 불가능 선언을 했다. 61분 게임은 15분 49초 만에 끝났고 기무라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역도산의 경기를 독점 중계한 방송,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
이날 이후 일본의 프로레슬링계는 사실상 역도산의 독주 체제로 굳어졌다. 반칙 공격을 일삼는 악역들이 연이어 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올 때마다 역도산은 가라테 촙으로 그들을 물리쳐 영웅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1955년 역도산을 주인공으로 한 전기영화 '노도의 사나이'가 개봉되었다. 적자운영에 허덕이던 일본TV도 역도산의 프로레슬링을 독점 중계한 후 흑자로 돌아섰다.
역도산은 김일(1929~2006)의 스승이기도 했다. 김일은 젊어서 유명한 씨름꾼이었다. 체구도 183cm, 90kg이나 되어 당당했다. 전남 고흥의 섬마을에서 태어나 여수에서 우연히 보게 된 일본 잡지에서 역도산과 관련된 기사를 읽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을 결심했다. 김일이 아내와 4남매를 집에 남겨둔 채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것은 1956년 10월이었다. 일본과 아직 수교 전이라 밀항이었다.
- 김일(왼쪽)이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후 스승인 역도산 사진 앞에서 챔피언 벨트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일은 도쿄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요코하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송환을 기다리던 중 “제자가 되고 싶다”고 역도산에게 편지를 썼다. 주소를 몰라 겉봉에 ‘도쿄 역도산’이라고 썼는데도 편지는 역도산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역도산은 일본에서 천황 다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김일은 수감 4개월만인 1957년 2월 석방되었다. 역도산이 손을 쓴 덕분이었다.
김일은 역도산 도장 문하생 제1기 제자로 입문을 했다. 1년 뒤 10살 아래 안토니오 이노키와 자이언트 바바도 역도산의 제자가 되었다. 훈련은 온몸이 매일 상처투성이가 될 정도로 힘들었다. 몸에 난 상처 때문에 병원에서 상처 부위를 꿰메고 돌아오면 역도산은 그 상처 부위를 다시 때려서 피가 터지도록 만들곤 했다. 일본의 전설적인 장사의 이름에서 딴 김일의 일본식 이름 오키 긴타로도 역도산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역도산은 북한에서도 영웅
역도산의 마지막 목표는 세계 최강 루테즈였다. 수차례의 도전에도 번번이 졌던 역도산은 1958년 8월 미국 LA에서 당시 NWA(전미레슬링협회) 챔피언인 루테즈를 마침내 쓰러뜨려 NWA 인터내셔널 선수권을 차지했다.
1963년 1월 역도산은 전격적으로 서울을 방문했다. 북한도 방문을 요청하고 있어 북한을 고향으로 둔 그로서는 민감한 방한이었다. 역도산은 판문점에서 외투와 셔츠를 벗어버리고 "형님" 하고 울부짖었다.
사실 역도산은 고향을 떠난 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42년 6월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스모선수 위문단의 일원으로 만주를 방문할 때 고향에 들른 적이 있고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어머니를 뵙기 위해 방문했다. 1942년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부부의 연을 맺어 이듬해 딸(김영숙)이 태어났다. 딸의 남편이 북한의 전 체육상 박명철이다. 박명철은 장성택의 최측근으로 꼽혀 앞으로 북한에 ‘피 바람’이 불면 희생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역도산은 1961년 11월에도 일본과 북한을 오가는 북송선을 타고 일본에 온 딸과 배에서 상봉했다.
역도산은 북한에서도 영웅이었다. 김일성은 역도산에 대해 3번이나 교시를 내릴 정도로 역도산에 관심이 많았다. 역도산이 죽고 8년이 지난 1971년 3월에는 열사증을 딸에게 수여했다. 열사증은 고인이 된 조국의 영웅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역도산은 1962년 김일성의 생일 선물로 벤츠를 선물했다.
수술 잘못이 부른 39살의 허망한 죽음
- 다나카 게이코와 결혼(1963.6.5)
1963년 12월 8일 밤, 도쿄 아카사카의 신일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역도산은 술이 거나한 상태에서 20대 야쿠자 청년과 시비가 붙었다. 역도산이 먼저 주먹을 휘둘렀고 청년은 품속의 칼을 꺼내 역도산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상처는 경미해 외과병원이 아닌 부근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간단한 봉합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12월 15일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이 수술이 어이없게도 잘못되는 바람에 그날 오후 9시 50분 숨을 거뒀다. 39살의 허망한 죽음이었다.
- 도쿄 혼몬지에 조성된 묘지 옆의 역도산 동상
첫댓글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