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검 절정도 絶代劍 絶頂刀 제1권 차례 지은이: 서효원·이광주 - 차 례 - 들어가는 말 제1장 버려진 자(者)들, 버려져야 했던 자(者)들 제2장 그들에게 운명(運命)은 없다 제3장 도(刀)를 만드는 노인(老人) 제4장 숙명(宿命)의 도명(刀鳴) 제5장 작은 악마(惡魔)들 제6장 첫 번째의 선혈(鮮血) 제7장 한 자루 도(刀)를 위해, 한 명의 무사(武士)를 위해! 제8장 남(男) 대 남(男) 제9장 무너진 사랑 제10장 절대(絶代)의 길, 절정(絶頂)의 도(刀) 제11장 동영(東瀛)에서 온 인자(忍者) 제12장 십사 세 소녀의 사랑 들어가는 말 刀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순수한 鐵과 뜨거운 땀이다. 그리고 武士들의 비릿하고 끈적거리는 鮮血이다. 刀는 이미 도가 아니다. 도는 정신이다. 도를 이룩하는 것은 무사의 길이고, 또한 匠人의 길이다. 그 길은 너무나도 멀고 고독한 험로이다. 그 길에 오른 자는 많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도달한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길의 끝에 도달한 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자는 그 멀고도 험한 길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누가 가르쳐 준다고 해서 터득되어지지 않는 무사의 길! 그 길이 바로 도의 길이기도 하다. 애절령―! 그는 끝없이 그 길을 걷고자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도의 行路를……! 애써 英雄이 되고자 하지 않았던 고독하고 수줍은 이십 세의 청년! 그는 늘 타인을 떠나 보내고 혼자가 되는 숙명의 孤獨兒였다. 그가 그리도 추종하던 거장의 길, 그 길이 가져다 준 아픔과 기연, 그리고 그를 목메어 기다리며 눈물 짓는 여인, 또한 그의 주위에서 지력을 펼쳐 가는 群花들……. 또 있다. 한 마리의 覇龍이 되고자 발버둥치는 메마르고 고독한 철혈정신의 승부사가! 옥자강―! 그가 추구하는 검은 절대의 劍이다. 그는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사가 되고자 한다. 그는 강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의 사나이……! 하되 애절령이 추구하는 것은 절정의 刀이다. 그는 시대를 초월한 군림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늘 떠돌며 홀로 修業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절대검은 적과 싸워 이기는 검이고, 절정도는 자신을 베어 버리는 극기의 도가 아니던가. 절대와 절정……! 이제 그 파란만장이 펼쳐진다. 神이여! 정녕 당신이 존재한다면 부디 한 자루 검으로 운명을 바꾸려 한 두 반역의 영혼들에게 처절한 저주를 내려 주시기를……! 전 작품 [武林色書]에 보내주신 독자제현의 성원에 거듭 감사 드린다. 이번 작품 [絶代劍 絶頂刀]는 서효원 先生과의 合作品 중 완성도 면에서 거의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秀作이라고 생각하기에 감히 자신 있게 추천해 드린다. 이 안에 武俠의 모든 것이 있다. 사랑과, 野望, 陰謀, 友情, 섹스……. 독자제현께서는 여기서 武俠의 진수를 느끼게 될 것이다. 다음 작품으로는 이광주 作의 [女人江湖]를 집필 중이다. 부디 많은 기대를 갖고 사랑을 보내 주시기 당부 드린다. 일월의 어느 날 雪夜, 여러분의 건강을 빌며……. 龍天小築에서 이광주 拜上. 제1장 버려진 자(者)들, 버려져야 했던 자(者)들 1 옥문관(玉門關)에서 서북(西北)으로 백칠십여 리……. 정녕 인간이 살아가기에 힘든 거칠고 척박한 땅이 있다. 그곳을 가리켜 사람들은 흑풍사(黑風砂)라고 불렀다. 흑풍사(黑風砂)! 그곳은 모든 점에 있어 버려지고 배척 받는 황무지대(荒蕪地帶)였다. 중원인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은 곳이기에 중원에서 패주(敗徒)해온 자들이 기거하는 땅이기도 하고, 또한 변황인(邊荒人)들에게마저 버려졌기에 변황의 대역죄인들이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수백 리 이상에 걸쳐 이루어진 황폐한 사막지대. 사시사철 쉬지 않고 흩날리는 황사풍(黃砂風). 흑풍사는 인간이 살아갈 요건을 거의 구비하지 못한 곳이었다. 하여 이곳은 항상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기운만이 도처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희망을 잃은 패배자들과 죄인들이 모여 살아가는 곳! 하기에 이곳에 활기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흑풍사는 늘 쓸쓸하고 적요하다. 도처에 폐허의 잔해와 황량함만이 머물러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되, 그 누구도 이곳에 정을 붙이지 못했다. 흑풍사는 정상적인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정상적인 땅이 아니기에……! 2 폐옥(廢屋). 상당히 너른 폐옥이다. 그곳은 흑풍사에서도 가장 외지고 한적한 외곽지역에 위치해 있다. 흑풍사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버려진 곳으로 인식되는 허름하고 초라한 한 채의 폐옥이 그곳이다. 사람들은 그 장원을 가리켜 청심원(淸心院)이라 일컬었다. 청심원! 실로 초라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곳이다. 하되 청심원에는 적지 않은 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인간들이 아니었다. 하나 같이 나이가 어리고 갈 곳이 없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말해, 이곳은 길 잃고 갈 곳 없는 고아(孤兒)들이 살아가는 고아원(孤兒院)이었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고아들의 수효는 스물여섯 명. 스물여섯의 고아들이 살아가는 청심원의 아침은 채 어둠이 걷히기도 전 울려나는 타종성(打鐘聲)으로부터 시작된다. 땅― 땅― 땅―! 선명하고 요란한 타종성. 청량한 새벽공기를 가르는 타종성은 칙칙한 새벽안개 속으로 날카로운 작살처럼 퍼져 나간다. 채 어둠이 가시지도 않는 새벽, 청심원 안에서 많은 그림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오늘 아침밥은 뭐지?" "흐응, 매염파(梅艶婆) 아줌마가 줄 수 있는 게 꿀꿀이죽밖에 더 있겠어? 이젠 죽을 먹는 것도 신물이 난다구. 마음놓고 실컷 고기나 한번 먹어 봤으면……." "크크! 꿈 깨라 꿈 깨! 아마 하늘이 뒤집혀지면 모를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거다." 툴툴거리며 청심원의 앞마당으로 달려나가는 그림자들은 하나 같이 행색이 초라한 소년 소녀들이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서 기거하는 고아들이었다. 고아들은 타종성에 따라 기상(起床)했고, 졸린 눈을 비비며 채 어둠이 밝아오기 전의 앞마당에 정렬(整列)했다. 채 졸음도 다 가시지 않은 눈길들에 의혹이 다분하다. 왜 이런 시간에 자신들을 깨웠을까 하는 그런 의혹이랄까? 하긴 다른 때 같았으면 반 시진 정도는 더 잠을 자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때이다. 문득 고아들의 눈길에 저만큼 우뚝 서 있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투영되었다. 일순 고아들은 졸음이 단숨에 달아나는 섬뜩함을 느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아직은 희미한 어둠 속 앞마당에는 언제부터인가 누구인가 서 있다. 그곳에 한 인물이 장승처럼 우뚝 선 채 몰려나오는 고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에 한 자루 목검(木劍)을 안고, 석상처럼 버티고 서서 고아들을 노려보고 있는 자(者)! 그는 일신에 칙칙하기 그지없는 회포(灰布)를 걸친 사십대의 사내였다. 일견 사내의 모습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것은 그가 한쪽 눈이 없는 애꾸(獨目)라는 사실에 기인할 것이고, 전신에서 뿜어지는 죽음뿐인 듯한 회색의 기운에 기인할 것이다. "……." 한쪽뿐인 사내의 눈빛은 실로 어두웠다. 가히 깊이를 알 수 없는 탁한 호수(湖水)를 보는 듯한 눈이랄까? 사내는 그 칙칙한 눈길로 정렬한 고아들의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내의 눈썰미가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하게 찡그려졌다. "스물넷, 그렇다면 둘이 없군." 무슨 뜻일까? 그와 함께 사내의 애꾸눈이 예리하게 고아들을 쓸고 지나갔다. 찰나 그의 독안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한 가닥 이채! 그것은 보기에도 써늘한 섬광(閃光)이었다. "또 녀석들인가? 절령(切玲)과 자강(自强)……! 골치 아픈 녀석들 같으니, 툭하면 밤새 빠져나가다니……." 어쩔 수 없다는 뜻인가. 사내는 미미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응의 몸짓이 아닌 다분히 분노의 몸짓이다. 사실 회포사내가 청심원 고아들의 행방에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일컬어 회혼(灰魂)! 그는 이곳 청심원에 있는 고아들을 돌보며 지키고 있는 임무를 맡고 있다. 한마디로 청심원을 책임지는 청심원주(淸心院主)가 바로 그였다. 어느 순간, 회혼의 눈 속에 잔인한 빛이 감돌았다. "크크……! 이 놈들, 그토록 혼이 나고도 또 빠져나가다니…… 좋아, 다시는 이곳의 규율을 어기지 못하도록 해주지." 회혼의 눈길이 더욱 탁해지는 순간이다. 바라보던 고아들의 눈 속으로 공포가 스쳐 갔다. 고아들은 너무도 잘 안다. 청심원의 규율을 어기는 자에게는 어떤 처벌에 가해지는지를……! 그들은 이곳에 없는 두 소년을 생각하며 투덜거렸다. '젠장……! 그 두 놈들 때문에 하루 종일 비상이 걸리게 됐군.'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그 놈들……, 절령과 자강! 그토록 혼이 나고도 밖으로 도망가는 것을 보면 특이하기는 특이한 놈들……!' 3 흑풍사의 새벽은 한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고아들이 기거하는 청심원보다 먼저 흑풍사의 새벽을 깨우는 곳이 있다. 그곳은 일컬어 천맹가(天盲家)라는 곳이었다. 천맹가는 흑풍사의 시진(市鎭) 가운데 있다. 시진의 가장 한 서쪽에 위치한 다 쓰러져 가는 토옥(土屋)이 그곳이다. 이른 새벽, 그곳에서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나와 흑풍사의 새벽을 일깨우고 있었다. 까― 앙! 까― 앙! 선명하게 울려나는 망치질 소리. 천맹가에서 망치질 소리가 울려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곳은 흑풍사 내에서 유일한 대장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현판(懸板)도 달려 있지 않다. 소문에 따르자면 천맹가의 주인은 눈이 멀은 백발노인(白髮老人)이라던가?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천맹노인(天盲老人)이라 불렀다. 그것뿐이다. 사람들이 천맹노인에 대해 더 이상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그가 수년 전에 이곳으로 바람처럼 흘러 들어왔으며, 이후 하루도 쉬임 없이 망치질을 해대며 쇳물을 끓이고 있다는 것밖에는! 화르르르― 부글부글―! 맹렬한 불꽃으로 달구어진 화로(火爐) 속에는 시뻘건 쇳물이 맹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눈이 멀듯 시뻘건 쇳물이다. 노인(老人)! 그는 빛 바래고 헐은 마의를 걸쳤는 바, 벌써 몇 시진 동안 앉아 끓는 쇳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게 새어 버린 계피학발(鷄皮鶴髮)의 피부……. 지독히도 늙은 노인이다. 그의 피부는 쭈글쭈글하기 이를 데 없는지라 차마 나이조차 추측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적게 보아준다 해도 이미 칠순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깡―! 까깡! 노인은 망치질을 해가며, 가끔씩 쇳물을 바라봤다. 하되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의 동공은 하얗고 투명하다. 흰자위만 가득하고 동공(瞳孔)이 전혀 보이지 않는 눈! 노인은 다름아닌 맹인(盲人)이었던 것이다. 천맹가 안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노인, 그가 바로 천맹노인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천맹노인의 곁, 언제부터였을까? 허름한 옷차림의 한 소년(少年)이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있다. 십오륙 세쯤 되었을까? 이목구비가 꽤가 또렷한 윤곽을 지닌 소년이었다. 잘생겼다기보다는 다분히 개성적인 얼굴의 소유자랄까?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에다, 다분히 날카로운 윤곽이 져 보이는 얼굴……. 하되 다분히 창백한 표정만 아니면 꽤나 매력적인 용모의 미소년(美少年)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火)을 바라보는 눈(眼)! 그 눈은 그 끝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해맑았다. 하되 세상의 그 무엇이라도 빨아들일 듯 집요하고 끈끈한 열기가 그 눈 속에는 머물러 있는 듯했다. 화르르르― 르! 가끔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이어진다. 대장간 안은 어느 순간부터 적요한 침묵의 바다처럼 변했다. 천맹노인이 망치 두드리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다. 일노일소(一老一少), 그들의 시선은 일렁이는 불꽃에 고정된 채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을 말을 잃어버린 화석이 되어 버린 듯했다. 소년이 이곳에 온 지는 벌써 서너 시진이다. 하지만 두 노소는 여태 이런 자세로 마주앉아 있었을 뿐 지금까지 단 한마디 대화도 나눈 바가 없었다. 오랜 침묵을 깬 것은 노인이었다. "절령(切玲)! 불꽃이…… 아직도 푸른빛이냐?" 질그릇이 깨지는 듯 탁하고 나직한 음성이다. 그것은 전혀 감정을 발견할 수 없는 무감각한 음성이었다. "그래요, 노야(老爺)!" 이어지는 소년의 음성! 노인의 음성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그 음성에는 한 점 사심도 묻어 있지 않았으며, 소년의 고집스러운 치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때 천맹노인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불을 돌보도록 해라. 난 한숨을 자고 올 테다." 천맹노인은 소년을 아랑곳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극히 절제되고 기계적인 동작이다. 비록 눈이 멀었다고는 하되 그는 정상인과 전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대장간 안쪽에는 허름한 장지문 하나가 나 있는 바, 노인은 곧 그 안으로 사라졌다. 소년은 노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푹 쉬다 나오세요. 노야!" 노인이 사라지고 난 직후, 또 한 명의 인물이 쭈삣거리면서 천맹가의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크크……! 절령(切玲), 또 그 짓거리냐?"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진 음성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는 그림자. 대략 천맹가 안의 소년과 비슷한 또래 정도일까? 그러나 옷차림은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려하다. 그는 일신에 붉은 비단옷을 멋들어지게 걸치고 있었다. 화의소년! 누가 보더라도 눈이 확 뜨일 다시없는 미소년(美少年)이었다. 만에 하나, 얄팍한 입술과 다분히 어두워 보이는 눈빛만 아니라면 그는 가히 전설상의 뭇 미남자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그런 얼굴의 소유자였다. 하되 소년의 전신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또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충혈된 눈빛……, 등으로 미루어 밤새 술을 퍼마셨음에 틀림없었다. 안으로 들어서는 소년. 그는 화롯불을 살피던 소년을 바라보며 비웃음이 가득한 눈길을 던졌다. "애절령! 네놈은 바보에다 백치가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허구한 날 눈먼 장님의 시중을 들어주느라 정신이 온통 빠져 있으니, 크크……." "……." 화롯불을 살피던 소년의 이름이 애절령인가. 그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진지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화의소년의 얼굴에 떠오르는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크크, 네놈이 이곳에서 잔심부름을 한지도 벌써 삼 년…… 그 동안 네놈이 배운 것이 뭐가 있더냐? 은자를 많이 벌었더냐? 아니면 뛰어난 기술을 익혔더냐? 한눈을 팔았다가는 매를 맞기 십상이고, 또한 청심원으로 돌아가서는 그 악마 같은 회혼에게 죽도록 맞아야 하고……, 낄낄! 그렇게 맞을 바에는 차라리 나처럼 술을 퍼마시고 사내가 그리워 몸부림치는 계집의 가랑이 속이나 파고드는 게 현명할 거다." 순간 불을 바라보던 소년이 화의소년을 올려다봤다. "옥자강(玉自 )! 네가 네 생활이 있듯 나는 나의 생활이 있는 거야. 너는 여자와 술이 좋아 도망쳐 나오지만……, 나는 망치질이 좋아 도망쳐 나온다." 비단옷의 소년이 움찔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애절령의 눈빛 속으로 뜨겁게 일렁이는 한 가닥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심혼(心魂)은 잡아끄는 듯한 눈빛이랄까?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애절령은 금방 눈길을 돌려 다시 불꽃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나타난 옥자강이라는 소년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런 애절령의 태도는 실로 엄숙한 바가 있다. 감히 옥자강이라는 소년이 다시 말을 붙이지 못할 정도였다. 옥자강은 진지하게 불꽃을 응시하는 애절령을 향해 투덜거렸다. "젠장……! 네놈의 꼴을 보니 마치 천하거장(天下巨匠)이라도 되는 듯하군." "……." "절령! 네놈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전혀 모르는 놈이야. 우리 같은 천애고아들은 세상을 살아나가는 요령을 알아야 하지. 세상에 그 누구도 우릴 도와줄 자는 없어. 오직 처음부터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 "크크! 누구에게도 도움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나가야 할 바에는 좀 더 현명하고 잔인해져야 하는 거야. 물론 너처럼 미련하고 재주 없는 놈에게는 알려 주어도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야." 옥자강이라는 소년은 계속해서 말하고, 애절령이라는 소년은 계속 묵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요란히 떠들어대던 옥자강이 급하게 허리를 굽혔다. "우웨……! 우웩!" 허리를 굽히는 것과 동시에 그의 입에서 오물이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오물은 절반은 땅에 떨어졌고 절반은 애절령의 전신에 묻었다. 더러운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한동안 음식물을 토해내던 옥자강. 그가 허리를 펴며 입술가를 쑥 문질렀다. "육시랄! 지난 밤 그 계집년이 따라주는 술을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마셔댔더니 속이 완전히 뒤집혔어." "……." 애절령은 여전히 묵묵하기만 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토해진 음식물 따위가 묻은 것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미친 년 같으니라고…… 그렇게 색(色)을 밝혀대니 서방이 요절하지 않고 베길 재간이 있나? 하긴, 그 계집이 어떻든 나야 상관이 없는 일이지. 서방 잃은 계집을 즐겁게 해주고 돈푼 깨나 받아 챙기면 그만이니까. 낄낄……." 순간이다. 옥자강이라는 소년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헌데…… 절령, 넌 경험한 바 있느냐?" "뭘?" "흐흐……, 계집의 속살 맛을 말이야?" "……." "낄낄! 하긴 너 같은 주변머리 없는 놈이 계집을 품어 보았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사내 나이 열다섯에 여자를 모른다는 건 수치야." "……." "끄윽……! 언제고 네게 여자 맛을 보게 해주마. 넌 내 친구니까, 계집 하나쯤 안겨주는 거야 식은죽 먹기……. 끄윽……." 한동안 정신없이 횡설수설하던 옥자강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쿠웅! 옥자강의 몸은 육중하게 바닥에 쓰러진 후 금방 코를 골기 시작했다. 만취한 술기운은 그를 금방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코골음 소리에 애절령은 흘낏 고개를 돌려 옥자강을 바라봤다. 그 뿐이다. 그는 다시 타오르고 있는 화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화로의 불꽃을 바라보는 애절령의 눈빛! 그 눈빛은 불꽃보다도 집요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鐵)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녹일 수 있는 불(火)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강한 불을 만들지 못한다면……, 또한 강한 쇠(鐵) 역시 만들어 내지 못한다.' 애절령의 두 손이 꽉 쥐어졌다. 일견 여인의 손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手)이다. 그러나 그 손에는 세상의 무엇이라도 움켜쥐고 놓지 않을 듯한 집요함이 머물러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불은 흰 불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왔던 불의 색깔은 푸른빛(靑色)……. 아아!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흰빛(白色)의 불을 만들 수 있을지……?' 오랫동안 불꽃을 바라보던 애절령이 어느 순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안쪽에 나 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야(老爺)!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가끔 미세한 음향이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드르렁, 드릉……." 가는 코고는 소리일까? 애절령은 잠시 방문을 바라보다 쓰러진 옥자강을 들쳐업었다. 옥자강은 죽은 낙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애절령은 옥자강을 업고 천맹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흑풍사에서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한 채의 폐옥이었다. 바로 청심원이라 불려지는 곳! 그는 곧 청심원으로부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가 떠난 천맹가 안, 한 줄기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화르르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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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기대.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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