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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성철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Ⅳ - 천제굴(闡提窟)
눌인 추천 0 조회 169 11.03.25 22:1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성철스님의 수행처를 찾아서 Ⅳ

 

안정사 주변 수행처 ③ - 천제굴(闡提窟)

 

 

 

토굴, 그리고 봉암사 월봉토굴

 

 

본래 토굴은 2천 5백년전 부처님 당시에 생긴 문화이다. 철저한 무소유자였던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은 일정한 거주처 없이 유행(遊行)하였는데, 마을이 그리 멀지 않은 무덤, 동굴, 숲들에 머물곤 하였다. 토굴이란 바로 그들이 머물렀던 천연동굴이었다. 토굴문화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초기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바위굴이나 큰 바위를 지붕 삼아 흙과 나무를 이용해 간단하게 머물 곳을 만들어 수행하였다고 한다. 토굴의 원형격인 곳이 전국에 몇 남아있는데, 현재 문경 봉암사 뒷산에도 몇 있다.

 

 

봉암사는 879년 신라 헌강왕 5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유일하게 선(禪)만을 정통으로 이어가는 곳이다. 이곳이 근대에 더욱더 유명해진 것은 1947년 성철· 청담· 자운· 향곡· 월산· 법전· 성수· 혜암 등 근현대의 고승들이 오직‘부처님 법(진리)대로만 살아보자’고 결의한‘봉암사 결사’때문이다. 그들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직접 일하고 탁발하면서 철저한 수행을 했는데,‘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는 것은 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규약이었다. 그렇게 일하다 지쳐 선방에서 졸게 되면 “밥값 내놔라!”는 성철의 멱살잡이에 선승들이 마루 밑으로 저만치 나둥그러지곤 했다고 한다.

 

통도사 원당암에는 '봉암사 결사'에 동참한 혜암을 모셔두었다.(2008년 초파일 촬영) 원당암은 해인사를 중심으로 성철의 백련암과 마주보고 있다. 성철이 호랑이라면 혜암은 선비같은 느낌이 들었다.

 

1982년부터 산문을 폐쇄한 봉암사는 일 년에 한번,‘부처님오신 날’인 음력 사월 초팔일에만 절집 문을 연다. 나도 초파일에 두 번, 그리고 문화재청의 용역으로 문경지역의 문화재조사를 할

 때 한번(미리 공문을 보내고 주지스님의 허락을 받고 갔다), 총 3번밖에 가보지 못한 곳이다. 전국의 사찰들이 하나같이 유흥장소화하고 있지만 이곳만은 한국 유일의 출세간의 성지가 된 것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규율을 지키는 봉암사지만 이곳보다 더 처절하게 선지식을 구하는 곳이 있다. 월봉토굴과 용추토굴이 그곳이다.

                                                                                  봉암사 월봉토굴 - 한겨레신문

 

 

월봉토굴은 한겨레신문 조현 종교전문기자가 2007년 말부터 2008년 8월까지 숨은 수행처들을 발굴 소개한 기획연재물 <하늘이 감춘 땅 / 봉암사 월봉토굴(2008년 2월 26일자)>에 소개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기획물은 조계종 총무원의‘제16회 불교언론문화상’에서 신문 부문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고, 후일 한겨레신문에서 『 하늘이 감춘 땅』이란 제목의 책을 펴낸 바도 있다.   

                                              

이글에 따르면 바위를 지붕 삼고 굴참나무로 엮은 월봉토굴은 산과 집, 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곳이란다. 봉암사 한주(閑主ㆍ소임 없이 정진하는 대덕스님)인 월봉(97)스님이 3년 전까지 20여 년간 살았던 곳으로 그의 이름을 따서 사람들이 그냥 부른 것이라고 한다.

 

 

천제굴 옛터를 찾아서

 

 

1988년 원로 사진작가 주명덕이 성철의 옛날 사진과 수행했던 절, 그리고 자신이 찍은 성철의 사진을 모아『포영집(泡影集) 』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였다. 이곳에는 이미 집은 오래 전에 없어졌고 터만 남은 천제암의 사진이 실려 있다고 하나 찾아보지 못하였다. 이 사진을 보면 제대로 지은 집이 아니라 얼기설기 지은 토굴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단다.

 

 

자료집에는 은봉암에서 하안거를 난 후 모이는 사람이 늘자 성철이 안정사 주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토굴을 지었다고 한다. '안정토굴'으로도 알려진 천제굴은 볏짚을 이은 세 칸짜리 초가집이었다고 한다. 성불을 위해 용맹 정진할 공간을 마련해놓고는‘부처가 될 수 없는 집’이라는 뜻인 천제굴(闡提窟)이라 이름한 것은 너무 역설적이다.

 

돌무지

돌무지 아래 이정표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는 이곳이 가능성이 클 것이라 여겼다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는 이곳이 가능성이 클 것이라 여겼다

 

 

은봉암을 올라가면서 절터를 찾지 못하였다. 은봉암에 주석하는 스님으로부터 '현재 안정사에서 새로 지으려는 지장전 부지 주변이냐'고 여쭈었으나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천제굴 옛터가 있다'고 한다. 폐사(廢寺)터 조사라면 수십 년 경력이 있기에, 또 잡초가 무성하지 않은 계절이기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주춧돌이나 기단 등이 있는 곳을 찾으러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러나 돌탑처럼 만들어 둔 돌무지 두 곳, 그리고 짐승이나 사람의 출입을 막으려고 돌을 얕게 둘러 논 담장 터 한곳 외에 어떤 인위적인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지장전 신축예정부지와 너무 가까운 곳이지만 곳곳에 무너진 담장이 남아있는 이곳이 가능성이 클 것이라 여기며 내려왔다.

 

 

천제굴에서의 생활

 

 

1951년부터 파계사 성전암으로 옮긴 1955년까지, 성철은 통영의 안정사 은봉암과 안정사와 은봉암 사이에 초가삼간의 토굴을 지어 지낸 곳이 바로 천제굴이다. 1952년 하안거를 천제굴에서 났으나 동안거는 협소한 천제굴 대신 창원 성주사에서 났다. 성주사에서 수행 중 49재를 올리고 제비(祭費)를 받고 산신각에서 불공을 하는 등 봉암사 결사에 위배되는 삿된 풍광을 목격하고 성철은 그 길로 보따리를 싸서 천제굴로 돌아왔다. 1953년과 1954년 천제굴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났는데, 이때부터 비구 종단의 정화(淨化)가 시작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청담(靑潭;1902∼1971)· 자운(慈雲;1911∼1991)· 운허(耘虛;1892∼1980)· 향곡(香谷;1912∼1978)· 서옹(西翁;1912∼2003) 등 많은 고승대덕이 다녀갔으며,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거두었다. 처음 시봉은 법전(法傳;1925∼현재)이 맡았다. 후일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였고, 현재 해인사 방장이자 원로회의 의장인 법전은 1951년 성철로부터 이곳에서 도림(道林)이라는 법호(法號)를 받았다.

 

 

성철의 맏상좌로 성철문도회 회장을 맡고 있는 해월 천제(海月 闡提)는 이곳에서 출가한 후 1993년 열반 때까지 40여년을 모신 분이다. 15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 49재를 이곳 천제굴에서 모신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조계종 법규위원장과 해월정사 회주를 맡고 있다.

 

 

법전(法傳)의 약탕기

 

 

성철은 젊은 시절 맹렬한 정진수행이 힘들었는지 늘 탕약을 달여 먹었다고 하는 이곳에서 법전과의 약탕기 얘기는 유명하다. 법전은 탕약을 잘 달이기 위해 저울을 활용했다. 저울의 한쪽엔 약탕기를 달고, 다른 한쪽에는 약탕기보다 조금 더 가벼운 돌을 얹어 둔다. 약을 달이다보면 물이 줄어들게 되는데, 자연히 약탕기 쪽이 가벼워져 균형이 맞게 되면 약을 다 달인 것이 된다. 성철은 저울을 만들어 약을 달이는 솜씨가 참 신기했던지 법전이 기가 막히게 약을 잘 달였다면서 자주 들려주던 옛날얘기가 있다.

 

 

"옛날에 어느 대감이 소실을 둔 거라. 옛날 양반들은 아파서가 아니라 더러 보약을 달여 먹었거든. 어느날 그 대감도 보약을 먹게 되어, 먼저 소실한테 보약을 달여 오라고 했단다. 약을 달이다 보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데, 늘 일정한 양으로 약사발을 가져오는 소실의 지극한 정성에 감탄하면서, 약사발을 들 때마다 '얼마나 정성스러우면 이렇게 약을 잘 달여올까'하면서 그 정성에 흐뭇해했단다.

 

그러다 '소실은 저래 정성스러운데 정실인 본마누라는 어쩔까'하는 생각이 들어 큰마누라한테 약을 달여 오게 했단다. 큰마누라는 들쭉날쭉하게 어떤 때는 그릇 가득 가져오고, 또 어떤 때는 탄 냄새가 날 정도로 빠짝 졸여 갖고 왔단다. 대감이 괘씸해서 큰마누라를 친정으로 쫓아버렸단다. 그리고 애첩의 약 달이는 솜씨를 신기하게 느낀 대감은 부엌에 나가 몰래 쳐다보았단다. 양이 많으면 버리고, 졸여서 적으면 물을 부어 맞추는 애첩을 보고 당장에 내쫓아 버렸단다.". "그런데 나도 너희들한테 작은 마누라 약 마이 얻어 먹었제?"

 

 

삼천배의 발원지, 성철식 불교의 성지

 

 

봉암사 결사가 전쟁으로 중도에 그친 일을 못내 아쉬웠던 성철은 이곳 천제굴에서라도 총림의 일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세수 38세에 大德품계를 받고 불가에 작은 이름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를 찾는 신도들이 늘어났다. '부처님을 먼저 찾으라'. '3천배를 하라', '불전에 공양하지 말고 남을 도와주라'는 설법으로 찾는 신도들을 피하였다고 한다.

 

또 고통과 불행에 빠진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는 모든 고통과 악업은 과거생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지어온 업장의 과보'라 하며 업장을 참회하고 자기 자신을 바로 보라고 가르쳤다. 아침예불에는 새로 음역한 '능엄주'를 외우고, 저녁예불 때는 '예불대참회'와 '아비라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이 기도는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라는 비로자나 법신진언을 장궤합장하고 외우는 기도로, 당나라 때 총림의 수행법으로 전해 오던 것이다. 그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어 성철을 쫓는 신도들은 예불대참회, 즉 '108배'와 '대불정능엄신주' 독송 그리고 '화두참구'를 하루 일과로써 빠뜨리지 않고 있으며, 1년에 4회 해인사 백련암에 와서 '아비라기도'를 빠지지 않고 하고 있다.

 

이처럼 삼천배와 법신진언 기도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성철이 주석했던 해인사 백련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천제굴은 삼천배의 발원지이고 성철식 불교의 성지인 셈이다.

 

 

 

불필(不必)스님과 천제굴

 

 

성철은 20세였던 1831년 11월 이덕명(1909~1982)과 혼인을 하였고, 25세였던 1936년 3월 3일 범어사 조실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출가한다. 속명이 수경(壽卿)인 불필은 성철이 출가한지 얼마되지 않은 1937년 5월에 태어났다. 위로 두 언니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고, 모친과 함께 살아왔다. 모친인 일휴(一休) 스님은 출가 후인 1961년 성철과 법률적으로 이혼을 했고 지난 82년 석남사에서 입적한 분이다.

 

진주사범학교 2학년 때 수경은 할머니 강상봉을 따라 천제굴을 찾아 아버지인 성철을 만났다. 당시 꿈 많은 사춘기 여학생이었던 수경의 주된 관심사는 행복과 사랑이었던 것이다.그 때 수경은 성철로부터 '삼세근(麻三斤: 마가 세근이란 뜻)' 이라는 화두를 받는다. 삼세근은 동산수초(洞山守初)선사가 부처님은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화두(話頭)이다. 화두는 공안(公案)이라고 하는데, 선(禪)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정진(精進)을 돕기 위해 사용하는 간결하고도 역설적인 문구나 물음을 뜻한다. 1,700칙(則)의 공안 중에서 삼세근은 《벽암록(碧巖錄)》12칙(則)에 있다.

성철 글씨 - '삼세근(麻三斤: 마가 세근이란 뜻)'

 

 

 

틈만 나면 화두(삼서근)를 들었던 수경은 교생실습을 위해 진주 인근 초등학교로 출근해야 하는데, 학교 대신 월명암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부산사범을 졸업하고 수행 차 머물고 있던 백졸(百拙, 속명 이옥자)을 만난다. 월명암은 전북 부안 내소사 주변에 있는 유명한 암자가 아니라, 진주시 미천면 안간리에 있는 비구니들의 암자였을 것 같 것 같다. 이곳에는 2010년 12월 21일 보물 제1686호로 지정된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晉州 月明庵 木造阿彌陀如來坐像)이 있는 곳이다.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문화재청 사진)

 

 

그 후 수경은 성전암으로 성철을 찾아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 참선 공부를 하러 가려고 집을 나왔다.'고 출가결심을 이야기 한다. 이 때 '급할수록 둘러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불필(不必)'이라는 법명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이옥자도 '백졸(百拙)'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1961년 3월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정식 비구니계도 함께 받았다.

 

 

1961년 3월 정식 비구니계를 받은 통도사 금강계단(2011년 3월 12일 촬영)

 

 

정식으로 비구니계를 받은 후 불필과 백졸은 함께 본격적인 운수납자(雲水納子)의 길로 나선다. 문경 대승사 묘적암, 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리산 도솔암 등을 두루 돌아 다녔다. 그리고 1969년 성철의 지시로 은사 인홍(仁弘)이 있는 석남사로 돌아왔다. 석남사 심검당에서 3년 결사(結社: 일체 외부로 나가지 않고 선방에서 수행하는 것)를 시작했다. 3년 결사가 끝나갈 무렵, 마지막 1백일간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72년 가을 3년 결사를 마친 뒤 다시 심검당에서 1백일 장좌불와(長坐不臥: 눕지않고 수

행하는 것)를 시작했다.

 

석남사 모습(2011년 3월 13일 촬영)

 

 

불필이 창건한 금강굴(金剛窟)

 

 

1976년 불필은 원래 지명이 오가리(五佳里)인 곳에 비구니들의 수행처인 금강굴(金剛窟)을 창건한다. 보현암과 나란히 자리한 금강굴은 해인사 산내 암자 중에서 원당암과 함께 가야산 주봉이 보이는 유일한 암자이다. 오가리(五佳里)는 다섯가지의 아름다움 - 청룡과 백호와 전망(展望)과 문수보살의 정진과 보현보살의 교화 - 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불필이 하안거를 제외하고 주석하는 곳으로, 내가 1991년 경 인연을 맺은 후 10여회 이상 찾은 곳이기도 하다. 초파일에는 거의 격년으로 찾았는데, 사실 불필스님의 법문이나 스님 방에서의 다과보다도 밥맛이 너무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나라의 강화와 고창 그리고 화순에 있는 고인돌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해 각국에서 모인 UNESCO 전문위원들과 함께 맛본 화순 운주사의 공양 다음으로 밥맛이 좋았다고 생각된다.

 

원당암 모습(2007년 4월 초파일 촬영)

원당암 모습(2008년 4월 초파일 촬영)

금강굴 모습(2007년 4월 초파일 촬영)

금강굴 모습(2008년 4월 초파일 촬영)

 

 

성철이 잠시 머문 금강굴

 

성철이 세수 80이 넘어 잠시 머문 곳이기도 하다. 공사 중인 백련암의 소음을 피하여, 찌는 듯 한 퇴설당의 더위를 피하여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서 성철은 『성철스님 법어집』 11권과 선종의 종지를 담은 『선림고경총서』 37권이 완간되는 것을 보고 두 달 만에 백련암 퇴설당으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퇴설당으로 옮기자 말자 열반을 앞둔 게송(偈頌)을 하나 남긴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

 

 

그리고 그해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해인사 퇴설당에서 '참선 잘 하그래이'라는 유훈을 남기고 조용히 입적한다. 세수 82세, 법랍 58세.

 

백련암 모습(2008년 4월 초파일 촬영)

 

백련암 게시판 (2008년 4월 초파일 촬영)

 

 

성철스님부도(2008년 4월 초파일 촬영)

 

 

이 글은 성철스님의 일대기를 담은 장편소설인 정찬주가 쓴『산은 산, 물은 물』, 성철스님의 홈페이지( http://www.sungchol.org/ )의 여러 자료 등을 참조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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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3.26 19:05

    첫댓글 덕분에 도량 참배잘하고
    많은 공부를 배워 가네요.
    정말 정성이 대단합니다.
    저녁 공양 맛있게 드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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