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첫 번째의 선혈(鮮血) 1 청심원의 서북방(西北方). 삼 리쯤 돌아가다 보면 하나의 수초지대(水草地地)가 나타난다.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호수(湖水)라고 하기에는 다분히 작아 보이는 호수가 그곳이었다. 그곳을 일컬어 이곳 사람들은 옥룡담(玉龍潭)이라 부른다. 때는 삼경(三更). 저만큼 허공에 휘영청한 만월이 떠올라 사위를 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옥룡담의 곁에 서 있다. 흡사 석상(石像)처럼 우뚝 서 있는 한 개의 그림자……. 품에 한 자루의 목검을 안고 비정한 눈길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자! 그는 회혼이었다. 회혼은 매일 밤 이곳으로 온다. 매일 밤 이곳에 왔다가 아침이 되어 되돌아간다. 무엇 때문에 그가 이곳에 오는지는 아무도 모르되, 사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밤새워 무공(武功)을 연마하기 때문이었다. 평소 청심원의 고아들이 보는 회혼은 비정하고 잔혹한 모습 그 자체였다. 하되 보라! 지금 호심(湖心)을 고요히 응시하는 그의 눈길이 정녕 허허롭고 무심해 보이지 않은가. 세상의 어떤 감정도 능히 초월(超越)한 눈빛이랄까? 호수의 중심부, 물 속에 담겨 있는 하나의 만월(滿月)이 머물러 있다. 휘이이― 스스스스―. 가끔 불어오는 야풍(夜風)이 주위의 갈대를 흩날린다. 죽음보다 깊은 적막과 아름다운 야경(夜景)……. 옥룡담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헌데 어느 순간이었다. 스― 웃! 회혼의 품속 목검이 소리 없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그의 검은 아주 조용하게 허공을 날아 나갔다. 고오오―. 목검은 호수 위에 박힌 달 그림자를 베어 가고 있었다. 순간 보라! 착각이었을까? 날아간 목검이 호수면을 스쳐 가고, 순간 너른 호수와 달 그림자가 동시에 갈라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찌이어― 어억!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호수와 달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졌다. 정녕 가공할 검세(劍勢)였다. 하되 한 가지 애석한 것은 달 그림자가 완전히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파라라라―. 목검의 기세는 호수의 물결에 미세한 파랑(波浪)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호수와 달 그림자는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것이다. 휘리리릭― 척! 날아갔던 목검이 허공을 선회하며 다시 회혼의 손 안으로 날아들었다. 회혼의 목검은 천천히 거두어 다시 품에 안았다. 그는 원래의 허무한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어 갈라졌던 달 그림자와 호수도 서서히 정상을 되찾았다. 문득 회혼의 눈길 속에 진한 자조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허무한 눈길을 호수에 던지며 나직한 탄식성을 흘렸다. "아아……! 철저한 정(靜)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기에 발검(拔劍) 가운데 검이 흔들려 수면에 파랑을 일으켰다." 회혼은 다분히 절망적이고 허무한 표정이었다. "현재 나의 검(劍)은 삼품(三品)에 불과하다. 호수에 뜬 달 그림자를 파랑 없이 고요히 갈라야만 이품(二品)의 검이라 할 수 있고……, 검을 쓰지 않고 오직 기(氣)만으로 호수와 달빛을 동시에 갈라야 일품(一品)의 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의 경지는 오직 마음(心)으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끓어 버리는 천품지검(天品之劍)!" 회혼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떤 절망과도 같은 암울함이 그의 전신을 휘어 감는다. "아아……! 검의 길에는 끝이 없다. 회혼, 대체 넌 언제쯤이나 너를 꺾은 그 자를 능가할 검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그의 탄식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였다. 돌연 회혼의 애꾸눈에서 한 가닥 눈부신 살광이 폭사되었다. "누구냐?" 패앵! 찰나 회혼의 몸이 팽이처럼 빠르게 돌았다. 그는 뒤쪽에서 들리는 한 가닥 인기척을 들었던 것이다. 찰나 그의 몸은 인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빗살처럼 빠르게 미끄러지며 목검을 뻗어내고 있었다. 어둠 속, 한 명의 인형이 두리번거리며 다가서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다가서는 자(者). 그는 뜻밖에도 옥자강이었다. 한 가닥의 섬칫한 살기가 옥자강의 목덜미에 닿았다. "네놈이로군, 자강!" 얼음장보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회혼이 옥자강의 눈앞에 나타났다. 어느 틈인가? 옥자강의 목덜미에는 회혼의 목검이 닿아 있었다. 만에 하나, 조금만 힘을 준다면 옥자강의 목덜미에는 핏구멍이 뚫리게 되리라. 옥자강은 회혼의 살기를 느끼며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으으! 원주, 검을……." 회혼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잔혹하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여기 왔는지 이유를 말해라." "보… 보고사항이 있습니다." "보고……?" "그렇습니다, 절령이 탈출(脫出)을 기도했는지라……." 순간 회혼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어림없는 수작! 누구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이제는 드나들던 암도(暗道)마저 막지 않았느냐?" "아… 아닙니다. 놈은 독지(毒池)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찰나 회혼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피어났다. "미… 미쳤군. 독지라니……, 그곳은 나도 건너지 못할 곳이거늘 놈이 그곳으로……? 대체 어쩌자고 그 놈이 그런 미친 짓을 다 한단 말이냐?" "소아귀 때문이올시다. 소아귀가 열병(熱病)에 들었는지라 고칠 약을 구해 오겠다면서……." "크음……." 회혼은 쥐어짜는 신음을 불어냈다. 파― 팟! 이어 그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회혼의 몸은 찰나간에 허공을 가로질렀다. 가히 가공할 빠르기의 일학충천(一鶴沖天)의 경신법(輕身法)이었다. 회혼은 눈 깜박할 사이에 옥자강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는 애절령이 도망쳤다는 독지 쪽으로 사라져 간 것이다. 뒤에 남은 옥자강은 순간적으로 회혼의 경신술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옥자강의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회혼이 사라져 간 방향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중얼거렸다. "크크……, 회혼. 언젠가는 내가 너보다 훨씬 높이 허공으로 날아오를 것이다. 머지않아……." 옥자강의 두 손이 움켜쥐어졌다. 그의 두 눈은 암갈색의 회색(灰色)으로 물들어 갔다. 그것은 다분히 한(恨)의 눈길이었다. 또한 그 눈빛은 마성(魔性)이 깃들여 있는 죽음의 눈이었다. "회혼……! 당신이 아무리 도도하다 해도 곧 패배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오. 만에 하나, 내가 검을 쥐게 된다면 무적의 검을 얻으리라. 세상의 누구도 감히 삼검(三劍) 이상을 막아내지 못할 절대(絶代)의 검을……!" 절대의 검! 그것은 강호에 입문한 자라면 누구나 평생의 꿈으로 추구하는 신화와 전설의 검이다. 옥자강은 바로 그 절대지검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던가. 옥자강의 미소는 흐를수록 더욱 짙어졌다. "크크, 누구도 그 검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고자 하지. 하지만 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리라. 빼앗든지, 아니면 훔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언제고 절대지검을 얻어 천하에 군림하리라." 옥자강의 가슴에 품은 절대의 야망! 그 야망은 정녕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되 세인들은 절대의 경지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은 가히 선택된 인간들에게만 허락된 길이다. 지금껏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그 경지에 오른 자는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소림의 달마대사(達麻大師), 무당의 삼풍진인(三豊眞人), 화산의 옥로검객(玉露劍客) 등등……. 과연 옥자강은 절대의 검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2 청심원의 북방(北方). 그곳에는 끝이 없도록 넓게 펼쳐진 독지(毒池)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흑풍사는 척박한 땅이 도처에 널려 있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청심원의 북쪽에 위치한 독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독지를 혈독지(血毒池)라고 부른다. 그것은 독지가 항상 시뻘건 핏빛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린다던가? 흑풍사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평소 그곳에 접근하지 않는다. 혈독지에는 누구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강렬한 독성(毒性)을 지닌 독물(毒物)들이 득실거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혈독지의 물은 지독한 독수(毒水)였다. 범인이라면 몇 걸음도 떼어놓기도 전에 한줌 핏물로 화해 녹아 내릴 정도로 지독한 독수였다. 수없이 늘어선 기암괴석과 늪지들, 우거진 넝쿨과 수초(水草)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종류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온갖 독물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치이익! 치지지― 지익! 괴이한 음향이 여기저기서 울려난다. 독액을 뿜어내는 독물들의 음향은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혈독지의 밤은 더욱 음산하고 괴기로웠다. 그런 가운데, 누군가가 혈독지를 건너고 있었다. 인영(人影)이었다. 정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혹 고수라도 감히 발길을 들여놓을 엄두조차 못내는 혈독지를 야밤에 건너는 자가 있다니……. 철벅― 철벅―. 인영은 느릿하게 혈독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쇠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는 바, 그것을 지팡이 삼아 인영은 혈독지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문득 구름에 가렸던 만월이 드러났다. 이어 달빛에 드러나는 인형의 얼굴은, 뜻밖에도 다분히 앳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아, 그는 바로 애절령이었다. 정녕 옥자강의 말대로 그는 독지 쪽으로 탈출한 것인가? 독지에는 실로 온갖 종류의 독물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그를 향해 독물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독사(毒蛇), 사갈(蛇蝎), 독지네, 독개미……. 애절령은 손에 쇠막대기를 한 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막대기로 독물들을 헤치고 죽여가며 거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코를 찌르는 듯한 강렬하고 역겨운 내음은, 바로 유황(硫黃)의 내음이었다. 애절령은 두 발을 무릎까지 새끼줄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거기에는 독물들을 쫓기 위한 누런 액체, 즉 유황이 잔뜩 발라져 있었다. 유황은 독물들에게 있어 극성(極性)이다. 웬만한 독물이라면 유황 내음만 맡고도 도망치게 마련이다. 하되 십리혈독지의 독물들은 달랐다. 독물들 중 오래 묵은 독물들은 유황마저도 겁내지 않고 애절령에게 덤벼들었다. 퍽! 퍼퍽! 그때마다 애절령은 막대기를 휘둘러 독물들을 후려쳐 죽여야만 했다. 때문에 나아가는 속도는 무척 느렸다. 독지에 들어온 지 벌써 두 시진. 그는 아직 오리 정도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그렇게 독물을 쳐죽이고, 떼어 내면서 얼마나 걸어갔을까? 어느 순간이었다. 끄까까까깍! 묘한 음향에 애절령은 흠칫하며 한 곳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옆쪽, 그는 고목 위에 달라붙은 한 마리의 시뻘건 두꺼비를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듯 시뻘건 몸체와 눈알로 껌벅거리는 커다란 두꺼비였다. 시뻘건 눈알을 껌벅이며 두꺼비는 애절령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녕 소름 끼치는 사악하고 독기 어린 눈빛이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두꺼비는 눈(眼)이 셋씩이나 달린 괴물이었다. 애절령은 보통 놈이 아니라 여기며 건드리지 않으려 애써 느릿느릿 지나쳤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팟! 두꺼비가 애절령을 향해 빠른 속도로 도약해 올랐다. 애절령이 급히 두꺼비를 피해내려 몸을 움직이고자 했다. 그러나 그보다 빨리 두꺼비는 애절령의 어깨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민활하기 이를 데 없는 동작이었다. 놀란 애절령은 급히 손을 들어 두꺼비를 떼어내고자 했다. 찰나였다. 애절령의 뒤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온 것은……! "움직이지 마라., 절령!" 애절령은 손을 멈칫하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쐐애액! 누군가가 저만큼에서 치달려 오고 있었다. 품에 목검 한 자루를 품은 채 눈부신 속도로 치달려 오는 회색빛 그림자 하나! '회혼……!' 애절령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날카로운 외침과 더불어, 애절령을 향해 날아드는 자는 바로 회혼이었다. "그 독물은 일컬어 삼목혈섬(三目血蟾)……! 건드리기만 해도 단번에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절대독물(絶代毒物)이다." 동시에, 회혼의 품에 안겨 있던 목검이 빠르게 앞으로 내밀어졌다. 목검은 소리 없이 허공을 끊었다. 이어 검은 삼목혈섬의 이마에 난 세 알의 눈 가운데 중앙의 눈을 관통했다. 파― 팟! 찰나 관통음과 함께 삼목혈섬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허공으로 솟아오른 삼목혈섬의 여기 저기 독수가 뿌려졌다. 순간 보라. 삼목혈섬의 피가 떨어져 내린 지면과 수초. 그것들이 단숨에 검은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치지― 직! 그 가공할 독성(毒性)에 애절령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짜악! 한 줄기 무서운 충격이 애절령의 얼굴 쪽으로 날아들었다. "멍청한 놈! 정녕 네놈은 죽고 싶어 환장했느냐? 이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겁도 없이 들어오다니……." 애절령은 꼴사납게 나가떨어졌다. 회혼이 무서운 눈길로 애절령을 노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회혼은 애절령을 당장 죽이기라도 하려는 듯 손을 쳐들었다. "이 놈……! 네놈은 족히 일천 대를 맞아야 한다. 아니 아예 죽여 주겠다. 그래야만 다시는 명을 어기지 않을 테니까!" 짝짝짝짝! 회혼은 거듭하여 애절령의 뺨을 수차례나 후려쳤다. "이 놈! 무릎을 끓어라. 살려 달라고 애원해! 그러면 네놈을 살려주고,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수도 있다." 회혼의 손속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기에 애절령의 입안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놈, 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해라. 그럼 살려 주겠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회혼은 별반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매질을 해왔던가? 죽인다는 위협마저도 애절령을 굴복시킨 바가 없거늘, 어찌 이 정도의 매질로 무릎을 꿇을 것인가? 회혼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그때였다. 정녕 회혼의 눈을 휘둥그래지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털썩! 그토록 뻣뻣하던 애절령의 무릎이 돌연 지면에 꿇려지는 것이 아닌가. 이어 애절령은 회혼을 향해 푹 고개를 떨구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으으, 원주(院主)……!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회혼은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애절령을 바라보며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무릎을 꿇지 않을 녀석으로 알았거늘, 어찌 저 놈이 무릎을……?' 회혼의 상식은 돌변한 애절령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때 애절령은 회혼의 다리를 덥석 붙잡았다. "원주! 제발 절 살려 주십시오…… 이곳에서 한 번만 데리고 나가 주세요. 흑흑……." 애절령은 애원하다 못해 펑펑 눈물을 쏟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정녕 애처롭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순간 회혼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다분히 씁쓸하고, 다분히 어이없게 느껴지는 미소랄까? '으음, 그 동안 그토록 놈을 무릎 꿇리기 위해 혹독하게 대했거늘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인가?' 회혼은 슬며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숱한 매질 가운데도 굴복하지 않고 그에게 묘한 패배감을 느끼게 해주었던 소년. 애절령이 이토록 쉽사리 무릎을 꿇을 줄이야……. 그때였다. 회혼의 다리를 부여잡고 애원하던 애절령. 그의 손이 눈부시도록 빠른 기세로 회혼의 아랫배 쪽으로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애절령의 손에는 한 자루 시커먼 비수(匕首)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찰나간 비수가 회혼의 아랫배에 틀어박혔다. 콰악! 그때 회혼은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꼼짝하지도 못한 채 무서운 충격을 아랫배에 느껴야 했다. "큭! 네… 네가……?" 회혼의 두 눈이 부릅 뜨여졌다. 정말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기습이었다. 항상 얼굴 가득 미소를 떠올리고 있던 소년. 아무리 혹독한 매질을 해도 그저 바보 같은 순박한 웃음만 흘려내던 소년. 그런 애절령에게서 누가 감히 살기를 느끼고 대비하였으랴. 비수는 회혼의 아랫배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겨우 자루만 남을 정도였다. 찰나간, 회혼의 얼굴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갔다. 애절령이 찌른 독비에는 다시없는 맹독(猛毒)이 묻어 있었다. 회혼은 애절령을 바라보다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크크……, 그… 그랬군. 이제야 알겠다. 네가 무릎을 꿇은 이유를 이제야……." 회혼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쿠― 웅! 회혼은 빠르게 혼절의 경지에 빠져들었다. 독비에는 맹독이 묻혀져 있을 뿐 아니라, 정확히 기해혈(氣海穴)을 찔렀다. 기해혈은 무공을 익히는 무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혈도 가운데 하나이다. 만에 하나, 파괴된다면 내공이 전부 소멸될 수밖에 없는 사혈(死穴)이기도 한 것이다. 애절령은 혼절한 회혼을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방금 그를 찔렀음에도, 그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정녕 회혼은 애절령의 손에 죽어가고 만 것인가? 3 "와아아! 드디어 자유(自由)다." "만세……! 악마 같은 회혼이 드디어 죽었다. 애절령이 해치웠다. 와하하하!" 야심한 밤, 돌연 청심원 곳곳에서는 때아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물결쳤으며, 많은 아이들이 기쁨에 겨워 날뛰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을 구속하던 악마와 같은 회혼이 드디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애절령이 악마와 같은 회혼을 해치웠다는 소식은 모든 아이들에게 희열을 느끼게 해주었다. 많은 소년들은 애절령을 에워싸고 기뻐 날뛰었다. 그런 가운데, 옥자강은 회심의 미소를 흘리며 행장을 꾸리고 있었다. 옥자강은 당장 청심원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자! 빨리 빨리들 준비해라.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 옥자강은 거친 목소리로 아이들을 다그쳤다. 이제 그는 청심원의 대장과 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문득 소리치던 옥자강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애절령. 그는 침상에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다분히 멍청해 하는 표정이 애절령의 얼굴에 떠올라 있다. 어쩌면 그 빛은 자책과 번뇌의 색깔인지도……. 옥자강이 애절령을 향해 웃으며 다가섰다. "절령, 너도 함께 가자." 애절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가지 않아." "가지 않는다고……?" "그래, 가고 싶거든 너희들이나 떠가도록 해." 옥자강의 얼굴에 조소가 떠올랐다. "미친 놈! 여기 남아 뭘 하겠다는 거냐?" 이어 옥자강의 눈길이 소아귀에게 향했다. 침상의 한쪽 구석, 소아귀는 열병(熱病)에 걸린 모습으로 힘없이 누워 있었다. 온몸의 전신에 울긋불긋한 반점(斑點)이 가득하다. 그의 눈길은 옥자강을 향해 가득 애원의 빛을 담고 있었다. 데리고 떠나 달라는 표정이랄까? 그러나 옥자강의 얼굴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는 열병을 앓고 있는 소아귀마저 데리고 간다는 게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때 애절령이 옥자강을 향해 말했다. "부탁 하나 하자, 자강!" "부탁……?" "그래, 나 대신 소아귀를 데리고 떠나다오. 아귀는 몸이 무척 허약해졌으니 잘 먹고 푹 쉬어야 한다." 옥자강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의리! 그래, 그 의리가 밥을 먹여 준다더냐?" 옥자강은 애절령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회혼을 처치한 네 공로가 지대하니 마지막으로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지." 소아귀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반쯤 잘려져 나간 손가락으로 애절령의 손을 세차게 부여잡았다. "고… 고마워, 절령!" 애절령은 희미하게 웃었다. "친구간에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거야. 난 네가 이곳을 떠나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래." "친구! 그… 그래, 우린 친구였지." 소아귀의 두 눈 가득 물기가 번졌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 애절령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우성을 치며 청심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사방으로 떠나간 것이다, 딱히 정해진 보금자리는 없었지만……. 이제, 청심원에는 오직 애절령만이 남게 되었다. 4 청심원의 오른쪽. 한 채의 자그마한 모옥(茅屋)이 자리잡고 있다. 그 모옥은 한 여인이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 기거하는 여인의 이름은 매염파(梅艶婆)였다. 지난 십수 년 이래, 매염파는 청심원 고아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십수 년간 그녀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왔다. 으슥한 새벽녘. 매염파가 기거하는 모옥은 그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콕! 콕! 가금 들리는 미세한 음향이 이어지고 있다. 지금 매염파는 베옷을 기워 가고 있었다. 미세한 음향은 그녀가 옷을 깁는 소리였다. 그녀는 새벽이 다가오는 시각, 다른 때 같으면 이미 잠이 들었을 매염파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오늘 저녁에 그녀는 전혀 잠을 자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옷을 기워 가는 매염파의 얼굴 위에는 처연한 빛이 가득했다. '아아, 비정한 일이야. 자신들을 키워준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해하다니…….' 매염파는 차라리 어이가 없다는 눈치였다. 그녀는 어젯밤 청심원을 뒤흔든 환성소리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를 잘 안다. '이제는 더 이상 청심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고아들도, 회혼도, 나도…….' 그때였다. 덜컥! 돌연 모옥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선 자는 일신에 화려한 금의를 걸친 소년, 바로 옥자강이었다. 매염파는 옥자강을 싸늘한 눈길로 바라봤다. 옥자강은 문가에 기대서서 매염파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헌데 그의 눈빛이 묘하다. 누구에게나 오만하던 그의 눈빛 속에 찰나간 한 가닥 훈풍이 스쳐가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옥자강은 매염파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함께 가시지요." 매염파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난 가지 않아." 순간 옥자강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다. "가셔야 합니다, 어머니!" 헌데 들었는가. 분명 어머니라고 했다. 물론 청심원의 아이들은 매염파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옥자강의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크크……! 고랑은 제게 있어 죄인이시오. 제가 모르는 줄 아십니까?" "무엇을 안단 말이냐?" "고랑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내 출생(出生)의 비밀…… 난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소이다." 순간 매염파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며 옥자강을 바라보았다. "어… 어이해 네가 그 비밀을 안단 말이냐?" "크크! 나의 부친은 마도의 이단자인 사망혈존(死亡血尊)이라는 강호마왕, 어머니께서는 무산파(巫山派)의 여제자로서 우연히 사망혈존의 눈에 띄어 겁탈을 당했으며……, 그 한번의 정사로 인해 잉태된 저주가 바로 나였지요. 크크크!" 순간 옥자강의 얼굴에는 비통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통한과 저주의 미소였다. "크크……, 그 한번의 정사로 내가 잉태된 줄도 모르고 고랑께서는 사망혈존을 침상 위에서 암살하셨지요. 그러다가 배가 불러오자 세상을 떠돌다가 옥문관 너머에서 자살을 기도하여 혼절했고, 그때 회혼에게 발견되어 구조되었지요. 결국 고랑은 그후 청심원의 식모(食母)로 전락했고……. 제 말이 틀립니까? 크크……." 매염파의 얼굴에는 고뇌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뿐이었다. 매염파는 곧 원래의 근엄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이미 흘러간 과거일 뿐이다." "그런 말씀 마시오, 나에게는 현실이외다." 찰나 옥자강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광망이 폭사되었다. 원한이 가득한 살기어린 눈. 그 눈길이 매염파를 잡아먹을 듯 직시했다. 매염파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아아……! 너의 마성이 너무나 강하구나. 지난 세월이 너에게 한(恨)을 심어준 것이라고는 하되, 어떠한 자비가 너의 가슴속에 쌓인 한을 풀어줄 수 있을지……?" "누구도 나의 가슴속에 있는 한을 풀어주진 못합니다. 적어도 내 야망을 이룰 때까진……!" "아아, 아이야!" "하여간 이곳에서 떠나야 합니다. 적어도 날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아아, 너 혼자서 떠나거라." "난 고랑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하다고……." 매염파는 괴로움이 담긴 눈빛으로 옥자강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일단은 멀리 떠나갈 수 없습니다. 근처의 안가(安家)에 가서 역병(疫病)이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안가라면……?" "크크……!이곳 흑풍사에는 신비장원이란 곳이 있지요. 고랑은 재주가 많으신 분이니 어떤 방법으로든 그곳의 침모(針母)로 들어가실 수 있을 것이외다." "설혹 들어간다 해도 그 많은 소년들을 어찌 다 데리고 간단 말이냐?" 옥자강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냉혹해졌다. "함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랑과 저만 갑니다." "비정하구나, 그들을 버리다니……." 옥자강의 얼굴은 더욱 싸늘해졌다. "절 이토록 비정하게 만든 건 바로 고랑이외다. 나를 자금성의 앞에 버려, 제가 천자의 아들이 되었다면 이렇게 비정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으음……." "고랑께서도 잘 알고 계시질 않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직 차갑고 강해야 한다는 것을! 한 자루의 날이 선 냉정한 마음을 지니지 못하고서는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고랑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아……." 매염파는 기나긴 탄식을 불어내었다. 그녀는 옥자강의 싸늘한 시선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 저 아이의 불행은 오직 나로 인해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지. 저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일임에야…….' 매염파는 결심을 굳혔다. 자신이 손수 낳은 아들을 위해 일생 최초의 힘이 되어 주기로……! 이윽고 매염파가 눈을 떴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난 아직 이곳에서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5 청심원은 꽤나 너른 면적을 지닌 곳이다. 그 가운데 청심원의 뒤편에 있는 작은 구릉(丘陵)도 청심원의 면적에 포함된다. 그곳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 솟아난 곳인데, 그 중에서 한 곳이다. 암굴(岩窟). 청심원이 저만큼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암굴 하나가 있었다. 그곳은 과거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할 때 사용하던 곳으로서, 지금은 거의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곳이다. 어두컴컴한 새벽녘. 그 암동에는 희미한 유등이 밝혀져 있고, 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이 짚단 위에 누워 있었고, 한 사람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런데 보라, 두 사람은 바로 애절령과 회혼이 아닌가. 회혼은 아랫배에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었다. 회혼, 그는 애절령에게 비수로 암습당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다만 죽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전신은 독으로 인해 시커멓게 변색되었으며, 혼절을 한 듯 죽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후아…… 하아……." 그의 입술 사이로 거칠게 몰아쉬는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그것은 그가 꽤나 위중하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런 회혼의 곁, 애절령이 걱정스런 손길로 그를 간호하고 있었다. '제발 쾌차하시길……!' 애절령은 두 손을 모아 쥐고 기원했다. 그는 차가운 손수건으로 회혼의 얼굴과 상처부위를 거듭 닦아냈다. 그때였다. 슷―. 동굴의 입구 쪽으로 하나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한 명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바로 매염파였다. 그녀가 볼 일이 있었다 함은 바로 이곳에 오기 위함이었던가? 그리고 그녀 역시 아직 회혼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인가. 매염파의 손에는 보자기 하나가 들려져 있었다. 보자기 속에는 한 벌의 베옷이 담겨져 있다. 얼마 전까지 밤 새워서 만들던 바로 그 베옷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밤을 새워 회혼의 옷을 만들었던 것인가. 애절령은 인기척에 흘낏 뒤를 돌아다보았다. 순간 매염파가 나타났음을 안 그는 일어나 가볍게 포권했다. 매염파는 싸늘한 눈길로 애절령을 노려보았다. "절령! 네가 원주를 암살하려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이냐?" 매염파의 얼굴에 떠오르는 기세. 그것은 분노의 빛이었다. "배은망덕한 놈! 감히 키워준 원주를 해하려 하다니……." 매염파의 손이 매섭게 허공을 날았다. 짜악! 그녀의 손은 사납게 애절령의 얼굴에 손자국을 냈다. 그러나 애절령은 전혀 반항하지 않고 매염파의 손길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내가 널 헛 키웠다. 너의 본성이 살모사(殺母蛇) 같은 줄도 모르고 네게 정을 쏟았으니……. 난 지금에야 그것을 후회하고 있다." "……." 애절령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일체의 말도 없이 묵묵하게 매염파의 질타를 받아들였다. 찰나간 매염파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스쳐 갔다. '아아! 역시 된 녀석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일체 변명을 하지 않다니…….' 사실 매염파는 회혼이 독비(毒匕)에 찔린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음모를 꾸민 흉수(兇手)는 바로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핏줄이 아니던가. 그녀는 애절령은 단지 희생자에 불과하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애절령은 변명 한 마디 하지 않았고,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수할 기세였다. 한동안 노려보던 매염파. 그녀는 다시 원래의 인자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사실 매염파는 더 이상 애절령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아아, 네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그저 각박한 세상이 원망스러울 뿐…….' 잠시간 그녀는 안쓰러운 눈빛을 던지다가 회혼에게 다가섰다. 그녀는 회혼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회혼의 옷이 전부 벗겨졌고, 이어 매염파는 이어 온 몸을 깨끗이 닦아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조심스런 손길로 피에 얼룩진 붕대를 풀고 새로운 붕대를 동여매 주었다. 흡사 남편을 보살피는 부인의 손길이 이러할까? 이때 애절령은 볼 수 있었다. 회혼을 바라보는 매염파의 눈 속에 알 수 없는 묘한 여정(女情)이 일렁이고 있다는 것을……! 매염파는 회혼에게 자신이 밤새워 만든 베옷을 입혔고, 잠시 동안 그의 모습을 내려다봤다. 순간 매염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어 그 아름다운 눈 속으로 습막(濕幕)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애절령은 말없이 두 남녀를 바라보며 서 있을 뿐이고……. 얼마가 지났을까? 문득 매염파가 눈길을 거두며 애절령을 돌아봤다. "절령, 웬만하면 너도 떠나거라." 애절령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떠나지 않습니다. 제가 떠난다면 누구도 원주를 치료해 줄 수 없을 겁니다." "회혼은 오래 살지 못해. 길게 버텨야 보름……." "그래도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매염파는 애절령의 고집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녀는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품속을 뒤져 한 가지 물건을 꺼내 애절령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한 자루의 은장도(銀粧刀)였다. "그게…… 뭡니까?" "최후의 경우…… 그것을 쓰도록 해라." 매염파의 그 말은, 간호하기 힘들 경우에는 은장도로 회혼을 죽이라는 뜻이었다. 애절령은 말없이 은장도를 받아 들었다. 매염파는 거듭 회혼과 애절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다. "흑……." 더 이상은 격정을 참을 수 없었는지, 한 가닥의 울음을 토해내며 밖으로 달려나가고 말았다. 더 이상 회혼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음일까? 애절령은 매염파가 건네준 은장도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헌데 그때, 애절령의 귓전으로 힘겨운 음성이 들려왔다. "절령, 그 은장도로 나를 찔러라." 애절령은 깜짝 놀라 회혼을 내려다보았다. 회혼은 눈을 뜨고 애절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되, 그의 두 눈은 혼탁한 죽음의 기운이 가득할 뿐이었다. 애절령은 흠칫했다. "원, 원주! 언제 정신을……?" "쿼크! 조금 전이다. 다만 매염파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기에 눈을 감고 있었을 뿐……." 이미 회혼이 정신을 차린 것은 오래 전이었다. 회혼은 매염파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전부 알고 있었다. "후우 후욱……." 회혼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가 이곳까지 살아온 것도 애절령이 그를 업고 왔기 때문이다. "자강, 그 놈은 대단한 놈이야. 사실…… 절령, 네 독단적으로는 결코 날 찌르지 못해. 모든 것은 자강 그 놈이 시킨 일이겠지." 회혼은 방금에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비록 누구에게도 이야기 들은 바 없으나 그는 모든 전후사정을 거의 꿰뚫고 있었다. "후욱……, 아마 자강, 그 놈은 다시없는 무림의 효웅(梟雄)이 되리라. 어쩌면 무림을 지배할지도……, 쿨룩!" 말을 이어가던 회혼이 기침을 토해냈다. 토해내는 기침 사이로 시커먼 독혈(毒血)이 뿜어져 나왔다. 기실, 그는 절정의 고수였기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범인이라면 독비에 찔린 순간 전신이 녹아 들어가며 한 줌 혈수로 화했으리라. 회혼의 눈길이 갈수록 흐릿해졌다. "절령, 날 찌르고 너도 떠나거라." "전 떠나갈 수 없습니다." "왜……?" "갈 데가 없습니다. 난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천하는 넓다. 너는 착한 놈이니 어디 가서든 대접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회혼은 다분히 자애로운 눈빛을 던졌다. 아마도 그것은 철이 든 이래 애절령이 처음 받아보는 온후한 눈길이었다. 애절령의 얼굴은 슬며시 붉어졌다. 그는 애써 회혼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는 도(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도……! 너는 무사가 되고자 한단 말이냐?" 애절령은 가타부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회혼을 바라보다가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하여간 전 이곳을 떠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를 완성하기 전까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회혼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멍청한 놈! 기껏 가진 야망이란 것이…… 고작 도를 만드는 장인(匠人)이라니……. 쿨룩!" 회혼은 다시 한 모금의 피를 토해냈다. 이어 그는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더니, 푹 고개가 떨구어지고 말았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인가? 그는 다시 혼절의 늪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애절령은 기절한 회혼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이어 독백을 하듯 중얼거렸다. "세상 누구도 나의 가슴속 야망을 짐작하지 못합니다. 설혹 나 자신조차도……." 언제부터인가? 애절령은 자신의 가슴속에 한 가닥의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되 그 야망이 무엇이며, 그 색깔이 무엇인지는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지닌 야망은 가장 하찮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한 세상의 누구보다도 거대한 것인지도…….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했습니다.
잼 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