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절대(絶代)의 길, 절정(絶頂)의 도(刀) 1 신비장원에 들어온 이후, 화정영이 애절령을 찾아온 것은 보름만이었다. 그녀가 처음 애절령의 거처를 찾았던 날, 애절령의 거처에서는 경쾌한 망치질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까― 앙! 까― 앙! 애절령은 단도(短刀) 한 자루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절정도를 때려온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기이하게 단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대략 팔촌오푼 정도의 길이의 단도를. 화정영은 문가에 서서 한동안 애절령을 바라봤다. 애절령은 그녀가 다가선 것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착잡하기 그지없는 빛이 가득했다. 어쩌면 분노 같기도 하고, 어쩌면 괴로움 같기도 한……. 그 가운데 그녀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왔어요." "……." 애절령은 아무 대답이 없다. 그러나 화정영의 음성이 말할 수 없이 싸늘하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옥서기의 말에 따르면 그대가 회혼을 찔러 죽이고, 또 세 명의 소녀를 겁간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여인으로서는 묻기 힘든 말. 애절령은 무엇 때문에 화정영이 그토록 싸늘한지 알 수 있었다. 하되 그의 얼굴은 담담하기만 하다. 그는 특유의 냉오한 미소를 떠올린 채 망치질을 계속해 갔다. 깡! 깡―!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침착한 손길로 단도를 때리기를 거듭했다. 화정영은 애절령이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눈빛은 애절령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소리치고 있었다. '바보……! 아니라고 말해요. 당신이 아니라면 나는 절대적으로 당신 말을 믿을 겁니다.' 그러나 애절령은 무정하게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단도는 완성되었고, 그는 완성된 단도에 조각도를 이용하여 도신(刀身)에 무엇인가를 새겨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화정영의 집요한 눈길도 모르는 것인가? 애절령은 도신 위에 아름다운 꽃무늬를 새겨가고 있었다. 각인되는 꽃송이는 목련(木蓮)이었다. 수효는 일천 송이……. 이윽고, 일천 송이의 꽃이 새겨진 단도는 눈부신 명기(名器)로 화했다. 애절령의 장인술은 또 하나의 걸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단도가 완성된 순간, 애절령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느릿하게 화정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단도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날 지금껏 머물러 주게 해주신 소저께 드리는 미미한 보답이외다." "……." 화정영은 자신도 모르게 단도를 받아 들었다. 순간 화정영의 손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할 듯 꽃잎 입술에 침을 적셨다. 이때 애절령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화정영은 흠칫하다가 급히 애절령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 어딜 가려 하지요?" "나에겐 가야 할 길이 있소. 소저가 가야 할 길이 있듯……." "당신은 내게 무슨 할 말이 없나요?" "무슨 말을 원하시오?" "지금껏 당신은 내게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변명할 것이 없소. 단지 아는 건…… 이제 내가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뿐……." 애절령은 화정영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린 가운데 단호했다. 화정영은 더 이상 애절령을 막아서지 못했다. 그녀는 실망과 분노가 뒤범벅된 눈길로 사라지는 애절령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 내게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고 가다니…….' 문득 화정영은 자신이 큰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애절령은 먼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화정영은 나직한 탄식을 흘렸다. "아아……, 다시는 저 사람을 만날 수 없을지도……! 설혹 그렇다 해도 저 사람의 눈빛만은 내 영혼을 잡아끄는 듯한 고독한 눈빛만은 내 뇌리에 살아 남으리라." 쓸쓸하기 그지없는 독백, 여인의 여심은 이른 아침부터 잔인하게 무너져 내렸다. 애절령이 신비장원을 떠나고, 화정영이 한숨을 불어내는 시각이다. 저만큼 건물 뒤쪽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숨어서 화정영을 살피고 있었다. 사이한 눈빛을 쉴새 없이 빛내는 자, 바로 옥자강이었다. 옥자강은 번뇌의 표정을 짓는 화정영을 바라보며 희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크크! 일단 놈을 화정영의 곁에서 쫓아 버리는 일은 성공했다. 이제는 저 계집을 빠른 시간 내에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남았다. 훗훗……, 일단 가랑이를 벌리게 하고, 살을 섞는 데만 성공한다면 신비장원의 모든 것은 내 소유가 되리라.' 2 애절령은 청심원으로 되돌아온 것은 보름만이었다. 그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폐허의 청심원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낯익은 것들뿐이다. 금방 귀신이 나올 듯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운 장원, 곳곳에 자라난 잡초, 여기저기 널려진 고철덩어리와 집기들, 하되 애절령에게 있어서는 정겹기 그지없는 광경들이었다. 청심원으로 들어서자 애절령은 가슴이 절로 포근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 이곳이 내 고향이지. 비록 혼자 살아간다고 해도 이곳의 삶이 나에겐 가장 어울리는 생활이야.' 얼마 전, 애절령은 화정영에게 오해를 받고 신비장원을 떠나와야 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할 뿐이었다. 생활의 화려함이나 물질의 풍족함은 애초부터 애절령이 추구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 화려함보다는 고독하고 조용한 것들을 애절령은 더욱 사랑한다. 또한 애절령에게는 아직 이루지 못한 목표가 있지 않은가. 절정도를 정복해야 하는 일이 그것이다. 애절령은 손에 든 절정도를 힘있게 움켜쥐었다. '나에게는 내 길이 있지. 화정영에게는 그녀의 길이 있고, 옥자강에게는 옥자강의 길이 있고, 그리고 내 길이란 도(刀)의 길이지.' 애절령은 청심원의 문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그의 눈에서 이채가 떠올랐다. 청심원의 골방 안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소아귀! 넌 소아귀가 아니냐?" 애절령은 앉아 있는 자를 보다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뜻밖에도, 어두컴컴한 청심원의 안에는 누군가가 힘없이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등이 심하게 굽은 꼽추사내는 다름 아닌 소아귀였다. 과거 청심원 시절, 유일한 애절령의 친구였던 소아귀가 바로 그였다. 소아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절령, 이 녀석! 살아 있었구나." 애절령을 바라보는 소아귀의 얼굴에도 반색이 피어났다. "하하, 소아귀! 네가 날 찾아오다니……." "절령……." 두 소년은 서로를 향해 다가섰다. 그런데 막 껴안을 듯 다가들던 소아귀의 걸음이 멈칫거렸다. 소아귀는 애절령을 바라보다 짐짓 안색을 굳혔다. "절령, 꼭 네가 보고 싶다기보다 그냥 지나가다가 한번 들린 것뿐이야." 소아귀는 애써 감정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절령은 소아귀가 진정 자신을 염려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너도 좋아 보이는구나. 소아귀!" 애절령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소아귀는 떠날 때의 모습과는 다분히 틀린 행색이었다. 허름하기 그지없던 과거의 모습과 달리 옷차림과 풍모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검(劍)이 꽂혀져 있고, 옷차림 역시 화려해 보이는 무복(武服)이었다. 강호를 질주하는 녹림영웅(綠林英雄)의 모습이랄까? 소원대로 그는 기연을 얻어 성공을 하고 돌아온 것인가. 소아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기다리기가 지루했던 듯 몇 개의 술호로를 비운 상태였다. "절령, 이제 악마 같은 회혼도 없으니 마음껏 술이나 마셔 보자." "하하, 그럴까?" 애절령과 소아귀는 마주앉았다. 그때 소아귀가 따라주던 술을 마시던 애절령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치잇, 술이 이런 맛이었다니……." 그는 인상을 쓰며 억지로 술을 삼켰다. 처음 마시는 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절령은 사양하지 않고 소아귀가 주는 대로 술을 계속 받아 마셨다. 그런 가운데, 소아귀는 청심원을 떠난 이후의 일을 애절령에게 자랑하듯 장황하게 떠벌렸다. 청심원을 떠난 후 녹림(綠林)으로 들어갔다는 사실, 그 후 절예(絶藝)를 익혀 무공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 이제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살 만한 신세가 되었다는 등등……. 이윽고, 그는 애절령을 향해 간곡하게 말했다. "절령, 넌 이런 곳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녀석이야. 나와 함께 가자. 너라면 어디 가든 대접받을 수 있다." 애절령은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길 떠나지 않아." "왜 떠나지 않겠다는 거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야!" "할 일이라면……, 고리타분하게 쇠를 때리는 장인수업 말이냐?" "후후……." "이해할 수 없는 녀석! 무엇 때문에 이 지겨운 곳에 눌러붙어 있는 건지 정녕 모르겠구나?" 소아귀는 진짜 이해 못하는 얼굴이었다. 애절령은 묵묵한 미소로 답할 뿐 계속 술을 마셔 갔다. 문득 소아귀는 애절령을 바라보다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풍요로움과 허허로움의 극치랄까? 흡사 인생의 달관자(達觀者)에게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류의 기운이 애절령의 몸에서 은연중 피어나고 있었다. 소아귀의 눈 속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아아, 가히 대자연(大自然)을 보는 듯한 기운……, 대체 놈에게 어찌 저런 무한한 기운이 풍겨난단 말인가? 그 동안 놈은 어떤 기연이라도 얻은 것일까?' 소아귀는 정녕 풍요로워 보이는 애절령에게 어떤 질투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소아귀는 애써 표정을 감추며 싸늘하게 말했다. "하여간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라. 나는 이곳에서 삼일(三日) 동안 머물 것이다. 삼일 후에도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나 혼자 떠나갈 것이다." "……." "나는 이곳을 떠나 동정호의 녹림십팔채(綠林十八寨)로 들어갈 것이고, 떠나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아." "녀석, 아무리 네가 꼬드겨도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아. 내 고집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끄응…… 지겨운 놈!" 소아귀를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애절령을 흘낏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절령, 넌 잘난 체만 하지 세상을 잘 몰라. 세상은 너처럼 쉽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넌 그 도도함 때문에 언젠가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거다." 소아귀는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그는 애절령 때문에 화가 난 듯했다. 애절령은 혼자 남아 묵묵하게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으되 애써 참았다. '아귀, 넌 나를 원하지. 하지만 난 이곳의 생활이 좋아. 아직은 이곳을 떠날 때가 아니야. 그게 무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아직은 이곳에서 할 일이 남았거든.' 3 신비장원. 삼경의 허공에는 휘영청 만월(滿月)이 솟아올라 있었다. 해맑은 월광이 사위를 자욱하게 감싸며 절경을 연출한다. 스슥―. 문득 하나의 그림자가 빠르게 난화루(蘭花樓)로 파고들었다. 난화루라면 바로 신비장원의 여주인 화정영이 기거하고 있는 누각이 아닌가. 검은 그림자는 정원을 가로질러 연못(池)이 있는 곳까지 이르렀다. 순간 그는 연못가의 암석 위에 홀로 앉아 있는 섬영(閃影)을 볼 수 있었다. 백의여인이 암석 위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휘영청 쏟아지는 만월의 달빛……. 달빛에 비친 여인은 월궁항아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여인은 화정영. 밤이 깊었음에도 그녀는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자그마한 비수가 들려 있는바, 일견하기에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뛰어난 검(劍)이었다. 검신 위에는 일천 개의 목련화가 피어날 듯 조각되어 있었다. 비수는 애절령이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만들어 주고 갔던 물건이 아니던가. 지금, 화정영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깊고 푸른 그녀의 벽안(碧眼)속에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이 애절령이라고 했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고 아름다운 눈(眼)을 지닌 사내……!' 화정영은 떠나간 애절령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문득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호오……." 누가 들으면 눈물이 쏟아질 듯한 애절한 탄식성이었다. 그러나 곧 화정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아……, 아니야. 난 세상의 어떤 남아에게도 정을 주어서는 안 되는 무황녀(武皇女)의 신분……. 더 이상 그를 생각하는 것은 번뇌만 쌓여 가는 일이다.' 그녀는 애절령의 모습을 애써 뇌리 속에서 지우고자 노력했다. 하되 한번 흔들린 여심은 쉽게 냉정을 되찾지 못했다. 하여간 화정영이 하염없이 사색에 잠겨 있을 때, 그녀의 거처로 파고든 침입자는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달빛에 비친 침입자는 다름아닌 옥자강이었다. 뒤쪽에서 다가서는 옥자강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옥자강은 아름다운 화정영의 뒷모습을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흐흐! 오늘 밤, 드디어 저 계집을 나의 것이 된다.' 그가 이 장여 곁까지 다가설 무렵이다. 기척을 느낀 화정영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뜻밖이었는지 의아로운 빛이 떠올랐다. "무슨 일인가? 옥서기!" 순간 옥자강은 빠르게 화정영에게 다가섰다. 그는 얼굴 가득 자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화소저가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소." 화정영의 큼지막한 눈에 의아한 빛이 어렸다. "내 마음이라니……?" 그때였다. 옥자강이 손을 벌려 돌연 화정영의 교구를 와락 포옹해 버렸다. 화정영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아앗!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녀는 너무나도 돌연한 옥자강의 태도에 혼비백산했다. 옥자강의 얼굴에 더욱 자신만만한 미소가 피어났다. "후후……! 당신이 평소 날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이다. 오늘처럼 아름다운 밤, 우리 두 사람이 하나로 합쳐지기엔 너무 적당한 밤이오." 찰나 화정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제서야 그녀는 옥자강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이다. 옥자강의 얼굴은 화정영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다가들었다. 그는 다짜고짜 화정영의 입술을 정복할 요량이었다. 화정영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짜― 악! 순간 다가들던 옥자강의 뺨에서 경쾌한 격타음이 터져 나왔다. 화정영의 섬섬옥수가 눈부시게 그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분노한 화정영의 일격에 옥자강은 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크으윽!" 그의 얼굴은 단숨에 찐빵처럼 부풀어올랐다. 화정영이 누구던가. 여인이기는 하되 막강한 무공을 지닌 일대고수! 옥자강이 그녀의 일격을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화정영은 나가떨어진 옥자강을 내려다보며 매섭게 소리쳤다. "무례한 자! 감히 본녀가 누구라고 그 따위 수작을 부리느냐?" 그녀의 화난 음성은 밤하늘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옥자강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소… 소저! 소저도 내게 마음을 두고 있지 않소? 그런데 왜 그런 소리를……." "닥쳐라. 네놈 따위가 감히 본녀를 능멸하다니……. 그 동안 신세가 가련하여 인정을 베풀었거늘, 본녀의 호의를 핑계 삼아 야수처럼 마각을 드러내다니……." 화정영은 금방이라도 쳐죽일 듯 손을 쳐들었다. 내공이 실린 화정영의 손. 그 손에 격중된다면 누구든 단숨에 피떡이 되리라. 그러나 화정영은 결국 살수를 쓰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순후한 성품의 화정영은 옥자강을 노려보다 홱 몸을 돌리고 말았다. 그것이 옥자강의 오판을 부채질했다. "젠장! 어차피 서로 좋자는 일인데 내숭을 떨 필요까지는 없지 않소?" 옥자강은 화정영이 처녀의 부끄러움 때문에 애써 반항하는 것이라 여기는 눈치였다. 그가 다시 화정영을 향해 다가서고자 할 때였다. 휘익! 휘― 익! 돌연 정원의 주위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하나 같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날아내리는 자들. 일신에 무복을 걸친 사나워 보이는 천축무사들이었는바, 그들은 순식간에 옥자강을 철통 같이 포위했다. 화정영의 노한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신비장원의 무사들이었다. 무사들의 눈에는 노한 살기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카카! 쳐죽일 놈! 감히 네까짓 놈이 가주님을 농락하다니……." "크크크! 오늘 네놈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감히 본가의 지존을 능멸하려 한 죄가 얼마나 큰지 똑똑히 알게 해주마." 잔인한 눈빛을 흘리며 다가드는 신비장원의 무사들. 파파― 팟! 그들은 찰나간에 옥자강의 마혈을 제압했다. "으으……." 옥자강의 얼굴이 시커멓게 질렸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무사들이 얼마나 무섭고 잔인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유화가문은 천축과 중원을 통틀어 가장 지독하고 잔혹한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사람 죽이는 것은 장난처럼 해치웠고, 특히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것을 즐기는 자들이었다. 옥자강은 신비장에 들어온 이래 많은 침입자들의 죽어간 시체를 본 바가 있다. 시체들은 행여 신비장에 무엇이 있나 하고 도둑질을 하러 온 자들이 대부분이었는 바, 하나 같이 사지가 잘리어져 나간 채 비참하게 죽어간 후 늑대 밥으로 던져졌다. 그런데 지금, 옥자강은 자신이 그런 신세에 처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무사들은 옥자강을 제압한 후 히죽거리며 웃었다. 그들의 눈빛은 핏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의 눈빛이었고, 악마의 눈빛들이었다. 옥자강은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느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악!" 4 "으악! 사… 살려줘!" "으아아!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들. 제발 목숨만…… 으아악!" 그날 밤, 신비장원 내에서는 밤새워 처절한 비명성이 울려 퍼졌다. 옥자강, 그는 인생을 통틀어 가장 처절한 수모를 당해야 했다. 그는 많은 신비장원 무사들에게 돌아가면서 고문과 매질을 당했으며, 그 덕택에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러져 나갔다. 뿐이랴, 잔혹한 매질 가운데 살점이 너덜너덜해졌으며 그 바람에 잘난 모습조차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하되 그는 비굴할 정도로 통사정을 했고, 그 덕택에 간신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가 어느 정도라도 운신(運身)하기 위해서는 닷새는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리라. 옥자강. 그는 오관(五觀)이 온통 일그러졌고 전신은 퉁퉁 부어 올랐다. 모든 피부는 채찍질 가운데 갈라지고 터졌으며, 전신은 칭칭 붕대를 감았다. 팔과 다리가 하나씩 부러졌기에 나무를 대서 고정시켰으며, 그 바람에 지팡이가 없으면 움직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모습은 가히 목내이(木乃伊:미이라)를 방불케 했다. 지금, 그는 팔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 절뚝거리면서 문을 나서고 있었다. 지난 닷새 동안 옥자강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만에 하나, 매염파의 정성스런 간호가 없었다면 아마 열흘 이상은 더 누워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 상처가 절반도 낫지 않았다. 하되 그는 이를 악물고 거처를 나서고 있었다. 먼길을 떠날 듯, 그는 간단한 행장을 꾸린 상태였다. 그의 두 눈은 시퍼런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크으……, 두고 보자. 언젠가는 이 수모를 반드시 돌려주고 말 것이다. 그때 너희들은 이 옥자강이 얼마나 잔혹하고 강한 인간인지 똑바로 인식하게 되리라.' 옥자강은 빠드득 이를 갈았다. 범인이라면 걷지도 못할 중상이었으나, 그는 무서운 투지로 고통을 참으며 먼길을 떠나고 있었다. "정녕 가려느냐? 자강……!" 절뚝거리며 뒷문을 나서는 그를 따르는 한 여인이 있었다. 매염파였다. 옥자강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생모. 그러나 옥자강은 그녀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항상 매염파 때문에 자신이 불행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위인이었기에! 옥자강은 매염파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날 붙잡으려 하지 마시오. 이곳을 떠나겠소이다. 그리고, 이곳의 잡종들을 단숨에 제압할 만한 힘을 얻기 전까지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소이다." 매염파는 안쓰러운 눈길로 옥자강을 바라봤다. 그는 다친 아들이 떠나는 것을 무척이나 걱정하는 눈치였다. "자고로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잘못 오르려 하다가는 반드시 떨어져서 다치게 되는, 그 진리를 넌 알아야 한다." "흐흐……, 그런 말씀 마시오. 어머니의 인생과 내 인생은 다릅니다. 어머니는 불행을 운명으로 받아 들였으되 난 다르외다." 매염파는 옥자강의 눈빛을 보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옥자강의 눈빛이 너무도 강한 살기로 이글거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무엇이라도 태워버릴 분노와 한의 살기(殺氣)였다. 매염파는 긴 탄식을 하며 말했다. "아아……, 강아! 넌 무사가 되려 하는구나. 무사가 되지 마라. 검(劍)으로 일어나는 자는 검으로 망하게 된다." "흐흐! 인생은 단 한번 승부로 결판이 나기 마련이외다. 특히 남아는 더욱 그러하지요. 자고로 남아란 얼마만한 승부에 자신을 내던졌느냐에 따라 평가되기 마련……! 기왕 무사가 될 바에야 가장 큰 승부수를 던지겠소이다." 문득 매염파는 자신이 아들을 붙잡을 명분이 없다 여겼다. 절뚝 절뚝―. 이윽고 옥자강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 그는 비틀거리면서 칠야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옥자강은 아주 서서히 신비장원을 떠나갔다. 매염파는 장탄식을 하며 언제까지 자리에 서서 떠나는 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아! 아들아, 내 아들아…….' 문득 매염파의 귓전으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멀어져 가는 옥자강의 음성이었다. 나직하고 느리되, 그것은 단호하기 그지없는 음성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絶代)의 검을 얻을 것이오. 절대의 검을 얻는 그 날…… 당신은 천하제일인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듣게 될 거외다. 어머니!" 절대의 검(劍)! 옥자강은 그 검을 찾아 떠나갔다. 하되 애절령이 추구하는 것은 절정의 도(刀)가 아니던가. 절대의 검과 절정의 도! 비록 검도(劍刀)라는 차이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길은 하나로 통하게 마련이다. 옥자강이 절대지검을 찾아 떠나는 그 순간부터 바야흐로 강호의 풍운은 시작이 된다. 절대의 검과 절정의 도를 찾는 풍운의 남아들! 뜨거운 피로 청춘(靑春)을 불사른 두 사나이의 이야기는, 이제 드디어 시작된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