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밤, 이별, 기연(奇緣) 1 열흘. 애절령이 혈랑곡으로 떠나가고 흐른 시간이다. 열흘이란 기나긴인생 가운데 무척 소소한 시간일 수 있다. 하되 그 시간은 초우에게 있어서는 정녕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더욱이 십사 세 소녀의 기다림이란 더욱 안타깝고 애틋한 것이 아니랴! 하되 초우는 마냥 애절령을 기다리고 있을 단순하거나 어리석은 소녀가 아니었다. 초우는 기다림의 무서움을 안다. 그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다림을 경험했다. 그녀는 생판 얼굴조차 보지 못한 부친을 십수 년 이상 기다려 와야 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사람의 정서를 말살시키는가를 초우는 익히 경험한 바 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더욱 열심히 일을 하며 그 기다림을 잊고자 노력했다. 낮에는 채마밭을 일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폐허로 화한 청심원의 이곳 저곳을 청소했으며, 밤이면 밤마다 자수를 떴다. 자수를 뜨는 것은 애절령이 돌아왔을 때 입힐 옷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을 찔리고, 마치 걸레조각을 기워놓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하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초우의 바느질 솜씨는 점차 훌륭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이미 자신에게 예측 못할 하나의 운명(運命)이 다가들고 있다는 것을……! 칠야(漆夜). 이경(二更)이 넘어가는 시각이다. 초우는 아직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자수를 놓고 있었다. 옷을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황촉불이 일렁이며 소녀의 섬세한 옆 얼굴이 불빛에 투영된다. 동영여인 특유의 귀여움과 순종적인 미를 간직한 귀여운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 귀여움은 몇 년이 지난다면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색으로 변모될 것이 틀림없으리라. 익숙해진 솜씨이긴 하되 바느질이 가끔씩 흔들린다. 그것은 지금 그녀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분은 꼭 돌아오실 것……! 떠날 때 그 분은 내게 약속했지.' 초우는 가슴속에서 치미는 한 가닥 불안을 애써 지우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혈랑곡으로 떠나기 직전 애절령이 했던 약속을 철썩 같이 기억하고 있다. ― 꼭 돌아올 테니 기다려! 광사혼마저 곁을 떠난 후, 지금에 이르러 그녀가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애절령 하나뿐이다. 초우가 잠시 자수를 멈추고 깊은 생각에 잠길 무렵이었다. 문득, 그녀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다. 따가닥! 따가닥! 말발굽 소리는 밖에서 들려왔고, 이윽고 청심원의 앞마당에 멈춰 섰다. '누가……?' 그녀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덜컥! 이어 안으로 들어서는 자가 있었다. "어서 준비하시오, 부인……!" 그는 무척이나 추악한 용모와 왜소한 체구의 소년, 바로 소아귀였다. 어디서 끌고 온 것인가? 소아귀는 청심원의 앞마당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는 상태였다. 몹시 다급해 하는 표정으로 초우를 재촉했다. "지금 바로 나가야 합니다." "어… 어딜……?" "상당히 먼 길이오. 절령이 내게 부인을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소. 빨리 행장을 꾸려 나오시기를……." "아, 상공께서……." 순간 초우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애절령이 자신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니…….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화급히 간단한 행장을 꾸렸고, 잠시 후 소아귀가 끌고 온 마차에 올랐다. 두두두두― 두! 초우를 태운 마차는 질풍처럼 청심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차는 금방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체 소아귀는 어디로 초우를 데려가는 것일까? "이랴, 이 놈들아. 어서 가자!" 두두두두두! 우두두―! 소아귀는 마부석에 앉아 연신 채찍질을 해댔다. 그런데 보라! 그런 그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지 않은가. '절령……!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 넌 모든 점에서 나보다 빼어나지. 너는 축복 받은 재능을 받고 태어났고, 나는 아무런 재능도 받지 못하고 태어났지. 하기에 네가 애써 버리려 하는 초우를 데려 가는 것 뿐이야. 날 원망하지 마라, 친구여……!' 소아귀는 애써 자신을 합리화하고자 노력했다. 사실 그는 초우를 애절령이 있는 곳으로 데려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초우를 데리고 먼 곳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할 곳! 자신의 야망을 꽃피울 수 있는 미지의 장소가 그곳이다.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초우, 그녀는 아직 자신이 소아귀의 음모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직 소아귀가 애절령의 친구라는 점만 철석같이 믿고 따라나선 것이다. 하지만 어찌 알랴? 그래서 두 남녀의 또다른 운명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2 그것은 처절한 혈투(血鬪)였다. 인간대 야수의 싸움! 애절령은 늑대의 우두머리 낭왕과 무려 한 달 밤낮을 붙잡고 나뒹굴었다. 그는 낭왕의 허리춤을 부여잡고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낭왕이 물면 같이 깨물고, 낭왕이 할퀴면 함께 할퀴었다. 인수(人獸)는 사흘을 함께 뒹굴며, 유래 없는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사람과 늑대는 함께 지쳤고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천공(天空) 위로 만월이 활짝 떠올랐을 삼경(三更). 일인일수(一人一獸)는 기진맥진하여 허공의 달을 쳐다보며 벌렁 누웠다. 애절령은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낭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낭왕의 살기 가득한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디서 이런 찰거머리 같은 독종이 나타났느냐는 뜻일까? 그러나 낭왕의 사나운 눈에서는 더 이상 살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한 인간에 대한 경외의 빛이 떠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복종의 눈이랄까? "후후……, 낄낄……." 애절령은 허공을 올려다보다가 기묘한 웃음을 흘려냈다. 그것은 만족의 웃음이었다. 지난 몇 개월, 그는 낭왕을 비롯한 늑대들과 처절한 암투를 벌여왔다. 그런 가운데 애절령은 잠들어 있던 야성의 본능이 서서히 살아나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낭왕은 웃는 애절령을 흘낏 바라보았다. 낭왕 역시 우호의 눈길이었다. 애절령 역시 정이 담긴 눈길로 낭왕을 바라보았다. 낭왕은 한참 동안 기진맥진 누워 있다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어, 낭왕은 등을 애절령에게 내밀었다. "……?" 애절령은 낭왕의 몸짓에 의아해했다. 그러나 금방 낭왕의 행동을 알아차리고 미소 지었다. "날 보고 네 등에 타란 말이냐?" 크르― 릉! 낭왕은 애절령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절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보니 낭왕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영물(靈物)이었구나.' 애절령은 더 망설이지 않고 낭왕의 등에 올라탔다. 낭왕의 크기는 가히 웬만한 황소만 할 정도였다. 애절령이 등에 올라탄 순간, 낭왕이 지면을 박차며 치달리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낭왕은 질풍처럼 치달려 갔다.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애절령은 어지러워 떨어질 지경이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낭왕의 갈기를 세차게 움켜쥐며 달라붙었다. 순식간에 몇 개의 언덕을 넘고 계곡을 건넜다. 얼마나 치달렸을까? 문득 애절령은 자신이 절벽 사이에 나 있는 하나의 동굴(洞窟)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은밀한 곳이었다. 입구부터 수많은 석순(石筍)들이 늘어져 있는 종유동굴(鍾乳洞窟). 꼬불꼬불한 어둠 속을 얼마나 들어갔을까? 이윽고 애절령은 하나의 넓은 지하광장(地下廣場)에 도착했다. 여기 저기 인공이 가미된 흔적이 있는 곳! 지하동굴 속은 갑자기 무척 밝아졌다. 천장에 야명주(夜明珠)가 곳곳에 박혀 있어 주위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곳에 누가 살고 있길래……?' 애절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득 그는 콧속으로 스며드는 강렬한 향기를 풍겨내는 약내음을 맡았다. 오른 쪽에서 하나의 온수(溫水)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부글 부글―. 헌데 보라! 욕탕 안에서 끓어오르는 있는 온수의 색깔이 기이하게도 황금색(黃金色)으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코를 찌를 듯 강렬한 약향(藥香)은 바로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순간 애절령의 입에서는 놀람의 외침이 새어나왔다. 그는 욕탕 속의 온수를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니었다. 욕탕 안쪽에 하나의 좌대(座臺)가 설치되어 있고, 좌대 위에 한 사람이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좌대(座臺)위의 인물은 나이가 칠순을 헤아리는 금포노인(錦袍老人)이었다. 노인은 얼굴이 희한하게도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애절령은 유심히 바라보다 그가 이미 좌화(座化)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유는 금포노인의 눈빛에 전혀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내심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듯하거늘, 전혀 시신이 부패되지 않은 것을 보니 뛰어난 무공을 지닌 기인(奇人)이었던 듯하구나. 그런데 낭왕이 무엇 때문에 날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애절령이 낭왕을 바라볼 때였다. 크르릉! 낭왕은 애절령의 옷자락을 물고 한쪽으로 끌고 갔다. 애절령이 낭왕을 따라 도착한 곳은 지하광장 안에 있는 하나의 반듯한 석면(石面) 앞이었다. 넓은 석면에는 많은 부조(浮彫)들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부조는 도합 여든한 개…….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 같이 늑대의 형상이었다. 얽히고 설킨 듯한 여든 한 마리의 늑대들의 조각……. 하되 애절령은 조각을 보며 그것이 일정한 하나의 무공초식(武功招式)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뛰어나기 이를 데 없는 오성을 지니고 있다. 하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여든 한 마리 늑대들의 움직임이 하나 하나의 초식을 나타낸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애절령은 부조가 그려진 석면 한 쪽에 금강지력(金剛之力)으로 쓰여진 글귀를 볼 수 있었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석면에 쓰여진 금강지력! '으음……, 조금 전 금포노인이 남긴 글인 모양이로군.' 애절령은 금강지력의 글을 읽어가기 시작했다. < 이곳에 들어오는 자는 노부가 남긴 것을 전부 얻을 수 있다. 노부의 이름은 독행일사(獨行逸師)라 한다. 나는 과거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껴 이곳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가며 모든 진전을 이곳에 남긴다. 후일 이곳의 절기를 얻는 자는 가장 정의로운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며, 또한 낭왕의 인도로 이곳에 들어올 수 있을 것이기에 절대로 배반을 모르는 착한 인간이리라. 그대에게 내가 남긴 모든 것을 준다. > 애절령은 독행일사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독행일사라는 백오십년 전의 강호기인이었다. 그는 강호에서 거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절정고수였다. 하되 어느 날 홀연하게 강호에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가장 믿던 친구들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했으며, 그로 인해 인간세계에 환멸을 느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고 했다. 그런 독행일사가 머나먼 세외의 오지 흑풍사에서 쓸쓸하게 죽어 있는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애절령은 독행일사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하기에 그는 묵묵한 눈길로 벽에 새겨진 금강지력의 글씨를 읽어갈 뿐이었다. < 금단지(金斷池)에 몸을 담그게 되면 피부가 금빛으로 물들고 오래 되면 금강불괴지체(金剛不壞之體)가 될 수 있다. 금단지는 노부가 팔백팔십 종에 이르는 영약선초(靈藥仙草)를 이용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성이 뛰어난 자라면 독생독보팔십일절천(獨生獨步八十一絶天)이라 불리는 노부의 절기를 실전시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그 외에 노부가 발견한 수많은 보석(寶石)의 창고가 있는바, 그곳은 낭왕이 안내해 주리라. 낭왕……! 놈은 노부의 평생을 따르던 충랑(忠狼)으로, 노부 이외에 누구도 주인으로 섬기지 않을 것이다. 하되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낭왕의 마음에 들어 이곳으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대는 낭왕의 주인이라 해도 무방하다. 놈은 나에게 과거 적지 않은 무공초식을 전수 받아 능히 강호의 일류고수(一流高手)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다. 또한 금단지에 몸을 담그었던 까닭에 도검으로 갈라지지 않은 금강불괴의 몸을 지니고 있다. 강호에 나간다면 능히 적잖은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후인(後人)이여! 그대가 누구인지는 모르되, 인간(人間)을 조심하라. 야수(野獸) 이외에는 누구도 믿지 마라. 가장 가까운 자에게 배반을 당하는 아픔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절대로 인간을 믿거나 의지하지 마라. …… 후략 ……> 금강지력의 글씨는 나중에 이르러 한(恨)이 가득한 내용으로 끝났다. 독행일사! 대체 그는 인간에게 얼마나 큰 배반을 당한 것일까? 가슴속의 한(恨)이 얼마나 깊은 것이길래 죽는 순간까지 후인에게 당부를 하고 죽어간 것일까? 애절령은 금단지 상단에 앉아 죽어 있는 독행일사를 바라봤다. 독행일사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애절령은 독행일사를 바라보다 묵묵히 중얼거렸다. "배반을 당한 것은 아마도 선배가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외다. 진실한 마음을 상대에게 주었다면……, 죽어도 배반하지 못할 진실을 상대에게 주었다면 배반당하지 않소." 애절령은 죽어간 독행일사의 처지에는 공감을 했다. 그렇다고 그의 한(恨)에 공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행일사. 과거 그는 괴팍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알려진 바 있다. 애절령이 독행일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낭왕이 애절령의 옷깃을 잡아 물었다. "또 어딜 가자는 거냐?" 애절령은 낭왕이 끄는 대로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마를 갔을까? 그는 하나의 거대한 석실에 이르렀다. 막 안으로 들어선 순간, 파아아아! 버언― 쩍! 애절령은 눈이 부심을 느끼며 흠칫 했다. 석실 사방에서 뿜어나는 빛나는 광채는 가히 광채의 산에 도착한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석실 내에는 가히 산더미 같은 발광물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석(寶石)들이었다. 황금(黃金)으로부터 비롯하여, 수정(水晶), 금강석(金剛石), 호박(琥珀) 등등……. 그 종류조차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보물들이 엄청난 양으로 쌓여 있었다. 가히 보물의 산이라 할까? 그것들은 하나 같이 깎이지 않은 원석(原石)들이었다. 아마도 독행일사가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듯했다. 값으로 따진다 해도 가히 중원의 몇 개 성(城)을 살 수 있을 가치가 있어 보였다. 아아! 애절령에게 엄청난 기인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많은 보물을 보고도 애절령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는 담담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호흡 하나 흩트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낭왕을 향해 묵묵히 말했다. "낭왕! 날 한곳으로 데려다 다오. 우선 청심원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청심원에서 떠나온 지 오래 되었으니……. 초우,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구나." 3 애절령은 다시 청심원으로 돌아왔다. 그는 뜻밖의 기연(奇緣)을 얻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보물이나 기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심원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청심원에 돌아온 그를 반긴 것은 음산한 적막감과 고요함뿐이었다. 청심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소아귀도 없었다. 그리고 썰렁하기 그지없는 방안. 애절령은 방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한 통의 서찰(書札)을 발견했다. 마치 지렁이가 기어간 듯 어지러운 글씨가 적혀 있었다. < 초우는 내가 데리고 간다. 너는 모든 것을 지닌 행운아이니 초우를 나에게 양보해라. 그녀를 양보한다 하더라도 너는 다른 행운을 잡을 수 있는 놈이니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너도 검을 쥔 무사(武士)의 뜻이 있다면 후일 나를 볼 수 있으리라. 난 머지않아 강호에서 밤의 황제(皇帝)로 군림할 것이고, 그때 나를 찾아온다면 너에게 최고의 대접을 아끼지 않으마. 너의 가장 절친한 친구 소아귀가 남긴다. > 서찰(書札). 그것은 소아귀가 남겨둔 것이었다. 소아귀는 애절령이 없는 사이 초우를 데리고 어디론지 떠나간 것이다. 애절령은 소아귀의 서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아귀……!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초우를 양보하마. 하지만 한 가지 단서가 있지. 적어도 그녀가 널 원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야." 애절령은 초우와 소아귀를 동시에 떠올렸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는 쉬 사라지지 않는다. "녀석, 초우를 그토록 깊이 생각했었다니……. 하지만 초우가 원하지 않는다면 넌 그녀를 나에게 돌려주어야 해. 나는 그녀를 책임지겠노라고 광사혼에게 약속했으니까! 적어도 사나이의 약속은 함부로 깨뜨릴 수 없는 법이거든." 애절령은 두 사람이 떠나감직한 곳을 바라보았다. 오래 전에 떠나간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하되 애절령은 차라리 초우가 자신의 곁을 떠나간 것이 잘된 일이라 여겼다. "초우에게는 미안한 일이나…… 하나의 부담이 줄어들었다. 초우를 곁에 둔다면 내 수업(修業)에 적잖은 지장을 초래했을 것이다. 초우는 그냥 놔두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소녀……." 애절령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입술을 질끈 깨어 물었다. 그는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낭왕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낭왕……! 다시 혈랑곡으로 가자. 이곳에는 더 이상 내가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애절령은 낭왕의 등에 다시 올라탔다. 그는 이제 드디어 청심원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가 더 이상 청심원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혈랑곡! 지금부터는 그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는 아직 야수의 본능을 얻지 못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