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년은 IMF 를 맞이한 한국이 극적으로 변하는 시기였다.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기껏 길게 썼는데 정사게로 꺼질까봐 이 이상은 언급하지 않겠다 ㅋㅋ
영화사에 길이남을 초대형 대박을 쳤지만 디카프리오는 상을 받지 못했다 ㅋㅋㅋㅋㅋ
영화사에 길이 남을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이 이 해에 개봉되었다.
총 수입 약 18억 달러로 초대형 대박을 치고 10년간 세계 1위 타이틀을 유지한다.
이 영화는 그저 대박난 해외영화가 아니라 우리나라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쉬리 이전 100만 관객을 모은영화가 서편제가 유일한데, 이는 마을회관에서 까지 상영하고 그 수를 집계하는 등으로 해서
정말 영혼까지 끌어모은게 이정도 숫자였다.
근데 타이타닉이 떡 하니 나와서 200만에 가까운 꿈에 숫자를 찍어버리니, 영화관계자들은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97년이 마침 멀티플렉스가 과연 돈이 되는 사업인가에 대해 실험하고 있던 시기였고
한국 최초의 멀티플렉스로 강변 CGV가 나왔을 때이다.
이후 타이타닉이 200만을 찍자 다들 바지에 오줌을 지리며, 아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돈이 되겠구나!!
하는 판단에 CGV의 공격적인 투자, 그리고 여기에 숟가락을 얹은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의 주도로
대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다.
타이타닉에 얼마나 위기감을 느꼈으면, 한석규 등의 국내 유명 배우들이 스크린쿼터제 운동을 하였고
아직까지 이어져서 국내영화 보호에 앞장서다 못해 상영관 독점의 기이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영화로는 넘버3와 비트가 개봉된 년도이며,
다른 영화로는 제5원소, 맨인블랙 이 97년도 띵작이다.
97년도 슈퍼모델 당시 사진... 모델의 상태가?!!?!
아직 슈퍼모델 선발을 여성의 성을 상품화 하는 것이라 삐딱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시기였다.
오히려 슈퍼모델은 여성의 상류사회진출의 발판으로 여겼던 시기이며, 남녀노소 인기가 많았던 시기다.
이때 슈퍼모델들이 연예인으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97년도를 주름잡던 힙합패션
멋과 반항의 상징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시작에는 김건모가 있었고
그 당시 경쟁구도로 최정상의 인기를 끌던 HOT와 젝스키스가 견인차 역할을 했다.
97년당시 슈퍼마켓 모습이다.
현재의 닭다리스낵 아버지격인 치킨스낵(사진 1) 이 눈에 띈다.
의외로 과자봉지들의 디자인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듯 하다.
질소가 과자보다 많은건 여전해 보인다.
97년 당시 바람의 나라 홈페이지 중 소개 페이지 이다.
당시에는 영어가 의무 교육이 아니였다.
때문에 가상공간 옆에 사이버스페이스라고 다시 영어로 표기하는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97년도에서야 영어교육이 초등학교 3~6학년에 처음 과목으로 설정 되었다.
당시에는 그래픽이 있는 멀티게임이 없었고 대부분이 텍스트 기반의 멀티 게임이였던 시대인지라
달리 표현수단이 없어 MUD(multi-user-Dungeon) 라는 용어로 표현한 점이 재밌다.
바람의 나라는 제대로된 기준으로 보자면 MUG게임이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국내에 없던 시절에 너무 일찍 나와버렸다.
조금 후에 영웅문,리니지,울티마온라인 등 본격적으로 그래픽 기반의 온라인 게임들이 출시되자
MUD게임은 텍스트 기반을 가르키는 단어가 되었고 MUD에 그래픽을 뜻하는 G를 붙인
MUG 라는 단어가 유통되기 시작한다.
머그게임, 머드게임으로 나뉘는 시대가 된 것 이다.
지금은 머드게임이 거의 멸종하였고, 머그게임은 더 다양한 장르로 확장하였다.
당시 PC게임으로는 디아블로 1 이 96년 출시된뒤로 왕좌를 지키고있었고 97년 발매된 디아블로 1 확장팩 헬파이어가
주목을 끌고 있었으며, 스토리로 아직까지 호평받는 환세취호전이 발매되었던 해이다.
퀘이크2가 출시되어 100만장 판매의 기염을 토하며 새로운 FPS 대장 자리를 가져가는 듯 했고,
C&C 레드얼럿이라는 전설의 작품이 국내에 상륙하여 웨스트우드 천하가 실현되는 듯 했으나
1년뒤인 1998 스타크래프트의 등장으로 꼬리를 말 수 밖에 없었다.
울티마온라인은 MUG게임계에 혁신으로 유저들 사이에서는 처음 출시된 아이폰급 이였으며, 미려한 그래픽과 수많은 직업
그리고 탄탄한 경제,정치 시스템으로 당시 게이머들의 돈과 시간을 훔쳐갔다.
콘솔에서는 파이널판타지 7이 출시되어 엄청난 인기로 왕좌에 올라 콘솔계를 호령했다.
시티폰의 등장.
사실 시티폰은 대한민국의 서비스 명이며 유럽에서 개발당시 이름은 CT-2 였다.
그래서 시티폰으로 부르게 된것.
당시 예능계의 유재석이였던 김국진이 CF를 찍었다.
삐삐가 지금의 스마트폰 자리를 맡고 있던 시대였고, 휴대폰은 워낙 고가의 물건이라 보급화 되지 못했다.
이에 등장한 저렴한 가격의 보급형 휴대폰이 시티폰이였다.
그러나 중계기가 있는 공중전화박스 근처가 아니면 수신율이 영 좋지않아,
이후 10월 개인휴대통신(PCS) 이 서비스 시작 되기전까지의 과도기 적인 상품에 머물렀다.
근래 들어 재평가 받는 허경영 아재가 대통령 후보로 진지하게 나섰었다.
허경영 비긴즈 느낌이다.
파워 공약의 시발점.
저게 다 이루어졌다면 아마 우리나라는 혼돈과 카오스 였지 않았을까ㅋㅋ
지금 보다는 나을 수도 있을지도?!!
호우!!
로 난리 였다.
트럭이 저렇게 잠수함으로 트랜스폼 할 정도였다.
특히나 부산이 심했다고 한다.
사진은 당시 부산.
호우!!
당시 전국을 호령하던 세진컴퓨터랜드.
팔려간 진돗개가 주인을 찾아 700리(부산에서 진도까지) 를 다시 되돌아온 전설의 실화를 CF로 만들어
감성팔이 광고의 파급력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다.
몽뭉이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받는다.
컴퓨터의 제품명도 진돗개 1,2,3 스리즈 등으로 출시하고,
광고 전면에도 진돗개를 모델로 함으로써, 충성심 강한 이미지와 거부할수없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귀여움과 충성심이라는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 한국 마케팅 역사에 길이 남을 광고를 내보낸다.
이게 제대로 먹혀서 세진천하라 불리울 만큼 규모가 확장되었나, 너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만 하다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97년 당시 뉴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는 하루걸러 하나씩 대기업 그룹이 통채로 무너지던 시절이였으니 오죽했을까.
자고 일어나면 대기업이 하나씩 무너져 놀랍지도 않던 시기이다.
다들 나라가 망하는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정도.
재미있는건, 저 당시 종말론을 예견하던 사이비종교들이 상당 수 인기를 얻어
대형 사이비종교로 발전한 사례들이 나온 것 이다.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 도 있으나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다.
97년 당시 인터피아 홈페이지
이게 무려 유료로 제공되던 홈페이지이다.
국내 홈페이지 들은 대부분 이런식의 디자인 이였다.
대충 샘플로 제공되는 아이콘, 이미지들을 이용해서 링크만 작동하게끔
만들어서 홈페이지라는 이름으로 운영하였다.
한국 최초로 검.경찰이 내걸 수 있는 법정 최고금액의 현상금인 5000만원이 걸린 수배범이
바로 신창원이다.
희대의 탈옥수이며 특유의 쫄티 패션까지 유행을 탈 정도로 관심이 모아졌으며,
각종 루머도 전국각지에서 생성되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실제로 그는 전국 각지에 나타났었다.
좁은 공간을 탈옥하기 위해 20kg을 감량한뒤 철창 두개를 자르고 탈주,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수사망을 뚫고 실제로 전국에서 출몰했을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도망 중에도 무려 100여건의 강도, 절도를 저질렀으며
그와중에 술집종업원들을 꼬셔 은신처를 만드는 등 능력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의 그 신출귀몰함 덕분에 전국 각지의 수많은 경찰들이 무능력에 대해 비난 받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옷을 벗어야했으며, 경찰의 공조 부재, 주민 신고 무시 등 수사력에 허점이 드러나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일각에서는 신창원이 경찰의 바람빠진 수사력을 리부팅 해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다.
저것이 체포당시 입었던 이탈리아 명품 미쏘니의 가품으로 이후 저 제품이 전량 품절되는 기현상을 보였다.
연예인을 보는듯한 시선이 그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아마 범죄자 중에서는 그래도 썩 괜찮은 외모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사회가 그만큼
혼돈.파괴.망가의 형태를 보였기 때문이기도 한 듯 하다.
결국 2년 6개월의 수사끝에 검거되었다.
후에는 아버지의 사망소식을 듣고 자살기도를 하다 실패하여 아직 징역을 살고있다.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의 유괴 납치 살해 사건.
그녀의 생전 사진으로 너무나 이쁜 모습이 안타까움을 더 한다.
1997년 8월 30일 서울 잠원동 한신8차 아파트 부근 뉴코아문화센터에서
영어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초등학교 2학년생인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은
당시 8세의 나이로 또래 아이들같이 밝고 이쁜 학생이였다.
후에 나리양 집에는 총 3통의 2천만원을 준비하라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온다.
경찰은 위치추적을 통해 명동의 커피숍이 발신지임을 알아내어 출동하였고 그곳에는 총 15명의 손님이 있었다.
하여 전원을 조사하였고, 그 중 임산부였던 전현주(당시 28세)는 설마 임산부가 범인이겠어..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용의선상에서 제외시켰으나
조사결과 목소리와 지문이 일치하여 검거되었다.
그녀는 커피숍에서의 조사 이후 위기 의식을 느껴 나리양을 목졸라 살해하였다.
조사결과 전현주는 대학졸업 후 취업에 번번히 실패하고, 유학길에 올랐다가 중도포기,
후에 전문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뒤 연극을 하던 남편과 결혼하였는데
주변사람은 물론 남편에게 조차 거짓말에 능숙하여, 졸업사실 여부조차 남편이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경찰조사에서 조차 빚이 300만원 정도라고 거짓말을 했으나 수사결과 3천만원의 빚이 있었다.
친정으로 부터의 재정지원 없이도 씀씀이를 줄이지 않아 결국 많은 빚을 지게 되었고
이로인해 임산부가 벌인 희대의 살인으로 당시 세상에 미쳐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였다.
출처 - 개드립
|
첫댓글 저때도 혼란햇네
막 대1년땐데, 저때 imf를 기점으로 세상이 확 변한것 같네요 .....
허경영 아재는 꾸준했구나
크..
크..
빡치기 전에 다시 화이트 치토스 살려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