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탄금대 여행
친목회에서 년례 행사로 관광을 가는 날이다. 4월 중순의 산야는 온 천지가 꽃이다. 시멘트 벽과 컴퓨터 모니터에 충혈되고 탁해진 안구 정화에는 싱그러운 꽃만 한게 없다. 개나리 진달래 벗꽃들에 花氣를 눈이 목마르듯 쏙 빨아 들인다. 도시의 다듬어진 화려함은 눈을 어지럽히는 반면 좀 성글기는 하나 자연에서 핀 꽃들은 눈을 편안하게 해 준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화려함에는 흥분되는 들뜸이 있고, 자연의 꽃들은 헝크러져 있는듯 하면서도 그 색의 조화가 편안한 마음을 갖어다 준다.
차창 햇살을 비집고 들어온 대각의 햇살은 차의 움직임에 따라 조용한 음악에 맞춰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닌다. 회원들은 끼리 끼리 얘기 꽃을 피우거나 해장술이라며 한잔씩 돌리기도 한다. 곤지암을 지나며 간단한 음식을 배분하여 먹고 노래방 기기를 가동하고 노래자랑을 하며 달렸다. 노래가 모두에게 한바퀴 돌았을 무렵 탄금대에 도착했다. 한시간 가량 관람을 하고 다른 관광지로 이동을 한다며 모두들 탄금대로 걸어 올라갔다. 별로 화려하거나 경치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앞 절벽 아래로 흐르는 달천강이 반원을 그리며 쪽 빛을 띤 탁 트인 광경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내린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은 1592년 신립 장군을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하시어 남쪽으로부터 북상하는 왜군을 물리치도록 명하시었다. 장군은 8,000 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 곳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병사들을 모두 잃고 스스로 절벽에서 뛰어 내려 순절하였다는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 탄금대는 원래 강으로 둘러 싸인 섬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를 봐도 섬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의문이 생기는 것은 여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신립 장군이 왜 이런 불리한 장소에서 10만 왜군을 상대로 전쟁을 하였는지 이해가 않된다. 뒤로는 깊은 물이고, 설혹 강을 건넌다고 해도 수 십길 바위 절벽으로 된 사면초가의 맹지를 빠져나갈 방법이 묘연한데, 어떤 사정이 있지 않고는 누가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훈련이 전혀 않된 수천명의 군사로 10만 왜군과 대전을 하려면 아래 달천강 만곡 부위로 왜군을 유인하여 현 위치인 절벽 위에서 불화살 공격을 해야 함은 병법에 무지한 보통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는데, 어째서 무모한 작전으로 수천의 군사를 몰살시키는 참패를 자초하였을까. 거기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어느 일설에 의하면 남한강과 달천 쪽에 이미 주둔한 병력을 조령쪽으로 이동 배치하기에는 이미 새재를 넘어 조령쪽으로 몰려오는 왜군과 대적하기는 늦어서라고 하였다. 더구나 파발 통신이라는게 필마로 빨리 달려봐야, 왜군을 발견한 통신병이 정보를 갖고 본 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왜군은 조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고 하여 애매한 통신병만 참수를 당했다고 한다. 또 그 당시 우리 군은 농사를 짓던 농민으로 급조된 부역꾼들에 지나지 않는데다 우리 군이 소지한 창이나 활에 비해 왜군들은 조총을 소지하고 있어서 화약의 폭발음만 들어도 우리 이합지졸들은 도망을 쳤다고 한다. 그래서 탈영병을 막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달천강의 수심 깊은 만곡부위에 배수진을 친 것이라는 일설도 있다.
옛날이나 현재나 전쟁은 무기의 우수성이 승패를 좌우한다. 칼로 총을 이길 수 없고 유효 사거리 50미터에 불과한 활로 100 미터 밖에서 쏘는 총을 상대하는 것은 어린 아이와 어른의 싸움과 다르지 않다. 우선 총 소리에 놀래서 사기부터 떨어지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것은 그믐밤에 불 보듯 뻔한 이치다. 탄금대 망루에 서서 강을 내려다 보면서 상상을 해 보니 그 참상이 눈에 보이는 듯하여 가슴이 아려 온다. 천둥 소리를 내는 총을 쏘며 몰려오는 왜군에게 쫒겨 수천의 병사들이 부상 당한 몸으로 강물로 뛰어 둘어 아비규환을 이루다 죽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고 아직도 단말마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마저 아우성치는 병사들의 넋으로 보인다. 공포라는 것. 막상 삶을 포기했을 때는 마음 편하다고 한다. 죽음 전의 공포가 더 무서운 형벌이라고 한다. 앞에서는 왜군이 몰려 오고 옆에서는 총에 맞아 쓰러지는 동료들을 보면서 죽을줄 알면서도 강물로 뛰어 들어야 했던 그 공포를 우리가 감히 짐작인들 하겠는가. 물 속에서 얼키고 설켜 아비규환을 이루다가 죽어갔을 것을 생각하니, 유유히 흐르는 저 작은 물놀이조차도 그들의 허우적거림으로 보인다.
당시의 일본군 전과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3천명을 사살하고 포로가 450여 명으로 되어 있다. 8천명 중에 단 3명만 살아 도망쳤다고 하니 4천 5백여 명은 강물에 뛰어 들어 순절 아닌 순절을 한 것이다. 아!! 그들은 아니, 우리 선조들의 참혹한 희생 위에서 우리는 지금 경치 좋다고, 기분 좋다고 술잔을 부딛기고 위하여를 외치고 있다. 무엇을 위하여란 말인가. 술병을 들고 충장공 신립 장군의 순절비 앞을 비틀거리고 있다. 그들의 억울한 통한의 소리 하늘을 찌르는 저 달천강 만곡 부위를 배경으로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고 있다. 아, 가슴 쓰리다. 추녀 밑에 모여 앉아서 한가로히 깃털을 다듬는 비둘기가 차라리 밉살스럽다.
그날의 아픔을 저 강물은 지금 어디쯤 흘려 보내고 있을까. 마음이 눅눅해져서 무심히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올라오는 동료가 있다. 벌써 다 내려 왔는데 여기서 혼자 뭘하고 있느냐고 핀잔이다. 버스는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개로 집중되는 시선이 바늘처럼 따갑고 어떤 이는 박수를 치며 비아냥 댔다.
기사님이 신립장군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을 하는데, 내가 전해들은 전설과 너무 달랐다. 나는 유년 시절을 곤지암에서 자라 19세까지 살았기에 신립 장군의 묘소에도 가 보았고, 늘 그 앞으로 지나 다니면서 어른들께 신립장군에 대한 전설을 여러번 들었다. 물론 전설이라는 것은 구전되어 내려오다 보면 변형되고 왜곡되기도 하지만 아주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라고 본다.
신립 장군께서 그렇게 비통한 순절을 하신 후 시신조차 못찾아 애태우던차에 어느 어부가 큰 잉어를 한마리 잡았는데 그 잉어 뱃 속에서 옥관자 한개가 나왔더란다. 분명 장군의 옥관자라고 생각한 어부는 관에 보고를 하였고 임금의 명으로 그 잉어를 그대로 봉합하여 꽃 상여에 모시고 정해진 묘지인 양주땅으로 가는데, 수행자가 뒤따르며 이따금 '장군님'하고 부르면 상여 안에서 '오냐' 하시며 '어서가자 어서가'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런데 충주가 멀어지면서 차차 '오냐' 소리가 희미해 지더니 이천을 막 지나쳐 고개를 넘는데, 대답 대신 기침을 몇번 하시더란다. 그래서 그 고개를 아직도 기치미 고개라고 불린다. 그 고개를 넘어 신둔면을 지나면 넋고개라는 꽤 길고 높은 고개가 있다. 지금은 도로 정비가 잘 되어 있어서 높거나 길어 보이지 않는다. 그 고개를 넘으며, 아무리 불러도 장군님의 기침소리조차 않들리고 조용하여 이제는 아주 넋이 나가셨다고 하여 그 고개 이름을 넋고개라 하였으니, 지금도 곤지암에부터 완만한 오르막길을 가다보면 동원 대학을 외로 끼고 휘여진 고개를 넘게 되는데 그 아픈 사연을 담고 있는 고개인지 그 누가 알겠는가. 서울쪽으로 3키로쯤을 더 가면 묵방리가 있고 곤지암이 나온다. 신립 장군의 상여가 묵방리를 지날 무렵 갑자기 날이 캄캄해지며 소나기가 쏟아져서 전진이 않되어 쉬어서 내일 가자고 하여 그 동내 이름이 묵방리라고 하였고 그 앞에 작은 고개가 아리랑 고개인데, 원래는 임금님의 명으로 그 곳에 머물렀다고 하여 어령고개란다. 이내 날이 어두워지면서 비바람이 어찌나 심하게 불던지 장군의 상여에 얹어 놓은 명정이 날려서 개울 건너 동내(현 곤지암읍 대석동) 뒷산에 떨어졌단다. 그래서 상부에 보고하니 하늘의 뜻이라고 하여 그 명정 떨진 자리에 장군의 묘를 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자리는 신립 장군 부친의 묘소 바로 위에 있다. 그러나 어명도 있고 하여 그 자리에 묘를 쓰기로 하였지만, 풍수지리상 그 산새가 서혈(쥐혈)인데, 맞은편 곤지암 개울가에 큰 고양이 바위가 버티고 앉아서, 쥐가 아래 벌판으로 곡식을 먹으러 내려오지를 못하니, 그 후손들은 배고픈 형상이라고 하여 난감해 하고 있는데, 그날 저녁에 벼락을 쳐서 그 고양이 바위의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명정 떨어진 자리에 묘를 쓰기로 결정을 하니 땅에서 않떨어지던 상여가 가볍게 떨어지더라는 반신반의한 전설이 구전되고 있다.
지금은 길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학교 후문 왼쪽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 가운데에 큰 바위가 두개 있고, 바위 사이에 수령이 400년이나 된 향나무가 있다. 당시는 그 바위가 고양이 바위라는 것도 모르고 올라가 놀기도 하였는데, 경기도 지정 문화재 자료 63호인데도 관리가 전혀 않되어 있어 2,3층 건물이 앞을 가로막아 아는 사람만이 겨우 찾을 수 있다. 신립 장군의 묘소 아랫 동내에는 아직 그 후손들인 평산 신씨들이 여럿 살고, 그들은 우리 나라의 장례문화와 아랑곳 없이 역장(부모 산수 위에 아들 묘를 쓰는것)도 마다 않는 단다. 그리고 그들은 대를 이어 잉어를 잡지도 먹지도 않는단다.
노래 실은 버스는 국도 변에 서서 환영하는 벗 꽃 길을 어지럽게 달린다. 옛날에 외국에서 대통령이나 귀빈이 오면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앞에 달리는 차 바람에 벗꽃이 활짝 웃으며 어린 손을 흔들고 있다. 목적지는 약수로 유명한 초정리 탄산 온천이다. 점심을 먹고 온천욕을 하고 나오면 귀경하는 것으로 오늘의 일정 끝이다.
귀가길은 전례대로 관광 버스 춤이다. 조용한 음악은 어느새 힘찬 날갯짓으로 춤을 달고 나른다. 술은 춤의 윤활류이다. 어느새 음악은 춤을 잔뜩 실어 무거운데, 좌석은 텅 비어 버스는 엉덩춤을 추며 가볍게 달린다. 서울까지 오면서 잠시도 빈 음악을 돌리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 전 탄금대에서 눅눅했던 마음은 오간데 없고, 술과 춤의 아수라들로 흥청이는 이 무례한 화상들을 어찌하오리까. 하늘에는 맑고 깨끝한 가슴을 갖은 보름달이 멀뚱히 내려다 보고 있는데. *
첫댓글 저팔개 선생님의 글을 보고나니...탄금대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에 감사히 머물다 갑니다.
안녕하세요. 이선생님.
여행이라기보다 동내 친목회에서 관광을 간 것이데,
관광이 아니라 발광들을 하고 와서 마음의 죄를 지은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내일은 주말. 좋은 날씨에 아카시아 향 가득한 산야에서 즐거운 휴일 되세요.
슬픈 역사와 전설이 가슴하프게 합니다.
유비무환이라 죽어서 슬픈 전설이 아닌 살아서 보람있는 스토리를 남겨야 겠네요!
안녕하세요. 허선생님.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에 이처럼 슬픈 역사를 갖고
역사에 호소하는 가슴 아린 곳이 많지요.
고려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외침으로 늘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아픔에 이골이 난 민족입니다.
이 시대, 오늘을 살면서 눈살 찌푸려지는 권력 싸움에 너무 안타깝고 국력이 쇠잔해지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역사는 늘 창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써서 들여다 보면서 다시는 그런 아픔이 없게 대비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탄금대에 서린 슬픈 역사를 열두대가 말해주지요.
제가 사는 충주를 다녀가셨다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