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두 번째의 패배(敗北) 1 애절령은 꽤 오랫동안 술을 마셨다. 거의 새벽이 다가올 무렵, 애절령의 조탁 앞에는 거의 스무 병도 넘는 주담자가 쌓이게 되었다. 그는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는 술을 마시기 전 한 알의 자수정(紫水晶)을 맡겼는지라 주막주인은 아예 희희낙락한 표정이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주위에서 술을 마시던 자들은 모조리 빠져나갔고, 주막 안에는 오직 애절령만이 남게 되었다. 술잔이 비워지면 다시 따르고, 술이 차면 마시고……. 하되 아무리 많은 술을 마셔도 술에 취하지 않았다. '내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갔고…… 이제 나는 혼자 뿐이다.' 애절령은 진한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강인한 남아라 하나 고독감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더욱이 애절령은 최근 인생최초의 패배를 경험하지 않았던가? 최소한 삼 년 동안은 다시 도전할 수 없다. 그 삼 년 동안 처절하게 몸부림쳐야 다시 한번 뇌정륭을 벨 기회가 있을 것인지……. 애절령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없이 술을 들이키고 있을 때이다. 덜컥! 돌연 주막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꺼― 억! 이제 보니 여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구나. 고연 놈, 이 늙은 땡추를 놔두고 혼자 술을 마시다니……." 고래고래 괴성을 지르며 안으로 들어서는 자. 그는 바로 주육화상이 아닌가. 주육화상이 만취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그는 대뜸 애절령의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킬킬……, 네놈은 술을 마시기에는 아직 어려. 술은 이 땡초가 마실 테다." 주육화상은 술잔을 빼앗아 단숨에 한 잔을 들이켰다. 애절령은 주육화상에게 처음으로 분노를 느꼈다. 그는 거칠게 주육화상에게 술잔을 빼앗아 들었다. "술잔을 주시오. 더 이상 날 방해하지 말란 말입니다." 애절령이 화를 내는 것은 실로 모처럼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항상 해맑고 웃음 띤 얼굴이 아니었던가. 주육화상 역시 뜻밖이었는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오잉? 네놈도 화를 낼 줄 알다니……." 그는 놀란 듯 한동안 애절령을 바라보았고, 갑자기 뜻밖의 제안을 했다. "흐응……, 네놈이 정 술을 마시고 싶다면 한 가지 내기를 하자." "내기요?" "헤헤……! 그렇다. 네가 네 술잔을 지키지 못하고 나에게 빼앗기면 넌 언제고 이 땡초에게 너의 인생 중 사십구 일간을 저당 잡혀야 한다. 어떠냐?" "사십구 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제안에 애절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육화상의 얼굴에 더욱 야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헤헤……, 물론 너만 손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네가 술잔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끄윽, 이 땡초가 너에게 개고기 굽는 비법을 전수해 주겠다. 또 네 곁을 떠나 앞으로 다시는 방해하지 않겠다. 어떠냐?" 애절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육화상의 제안이 다분히 귀찮기는 했다. 하되 그가 다시는 귀찮게 하지 않는다는데 마음이 솔깃했다. 사실 주육화상이 사사건건 간섭하는데 무공수련에 많은 방해를 받아온 것도 사실이 아니던가. 애절령은 술잔을 손에 쥐었다. 이어 온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는 거의 일백 년 내공의 소유자였다. 아마도, 당금 강호에서 그 정도라면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애절령은 두 손으로 술잔을 감싸며 서서히 입으로 가져갔다. 혼신의 힘을 다한 바람에 그의 전신주위로 두터운 강기막( 氣幕)이 둘러쳐지기 시작했다. 츠으으― 우우웅―.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주육화상은 태연하기만 했다. 다만 팔짱을 낀 채 기우뚱한 자세로 애절령을 바라볼 뿐이었다. 애절령은 주육화상을 바라보며 손에 든 술잔을 입술에 대었다. 그가 술을 마셔 버린다면 주육화상은 패하게 된다. 그가 술을 마시기 전까지 주육화상이 빼앗아야 한다. 애절령이 자신이 술을 마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적어도 히죽히죽 웃던 주육화상의 두툼한 입술이 똥그랗게 오므려지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순간이다, 무서운 힘이 일어나 애절령의 손을 홱 끌어 잡아당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손목이 뻗쳐 나가는 듯한 가공할 힘이었다. '웃! 이… 이토록 가공한 힘이 다 있다니……?' 애절령은 기겁하며 급히 두 손에 모든 공력을 집중시켰다. 하되 그의 두 손은 어느덧 주육화상의 입술 쪽으로 딸려 가고 있었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입술을 오므리고 숨을 끌어당기는 것뿐이거늘,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백년내공이 무너져 가다니……. 주육화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오므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헤실헤실한 특유의 미소가 떠올라 있다. 그런 가운데 거대한 흡인력(吸引力)이 일어나 거듭 애절령의 두 손을 끌어당겼다. '으으……, 어… 어찌 이런 일이……?' 애절령의 끌려가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해 버텼다. 금방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하되 의사와 상관없이 그의 손은 주육화상의 얼굴 쪽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어 그는 주육화상에게 공손하게 술을 바치는 자세로 잔을 입술 쪽으로 가져갔고, 주르륵! 이어 술잔의 술이 주육화상의 입술 속으로 흘려 부어졌다. 주육화상의 오므린 입술 사이로 술잔의 술은 모조리 부어졌다. 술은 남김없이 주육화상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주육화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통통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우헤헤헤! 이겼다. 드디어 노납이 이겼도다. 이제 네놈의 일생 중 사십구 일은 이 땡초가 차지한 것이다. 우헤헤……." 무엇이 그리 좋은가? 주육화상의 모습은 흡사 즐거워하는 어린아해와 같았다. 그러나 애절령은 아예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럴 수가……? 단지 입놀림만으로 내 일백 년 내공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대체 저 화상의 정체는……?' 애절령의 얼굴이 시커매진 채 주육화상을 바라보았다. 순간 애절령은 정녕 무참한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얼마 전 천하제일인 뇌정륭에게 당한 패배도 이처럼 참혹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일개 파계승의 입놀림에 일백 년 내공이 허무하게 무너지며 패배하다니……. 주육화상은 한참 동안 좋아라 날뛰었다. 그러다가 술병 하나를 꿰차고 휑하니 일어나 밖으로 사라졌다. "헤헤……, 이제 언제고 네놈은 사십구 일을 노납에게 맡겨야 한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주육화상은 순식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절령은 그가 사라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패배의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두 번째의 패배. 패배라는 의미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같다. 하되 두 번째의 패배는 애절령에게 정녕 통렬한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아아……, 이름도 없는 일개 파계승에게 이처럼 철저하게 패하다니……?' 애절령은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리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 순간 무도(武道)의 길이 정녕 끝이 없고 거대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무도의 길은 애절령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山)인지도…….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많다더니……, 그것이 사실이었구나. 아아, 파계승도 이기지 못하는 주제에 천하제일인을 꺾겠다고 득의양양했었다니……?' 애절령은 지독한 실망감을 느끼며 벌컥벌컥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시각 후, 그는 쉬지 않고 거의 열주담자도 넘는 술을 마셨고, 안주는 손에 대지도 않았다. 그는 어느덧 만취상태에 도달했고, 비틀거리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얼마나 충격이 심한지 그는 곧 쓰러질 정도였다. 아직은 새벽이 밝아 오지 않은 시각, 그 어둠 속을 애절령은 비칠거리며 정신없이 걸었다. 그는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고 걸었다. 하되 그의 발걸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 그곳은 바로……? 2 안개가 흐르는 새벽이다. 츠으으― 쓰으으― 쓰―! 오늘 따라 새벽안개는 피부가 축축해질 만큼 유난히 짙었다. 그 안개 사이로, 여명(黎明)이 찾아들고 있었다. 처벅 처벅―. 애절령은 새벽안개를 헤치며 어디론지 걷고 있었다. 오늘 따라, 그는 생전 처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술냄새가 지독하게 풍겨 났고, 걸음걸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칠거렸다. 애절령이 걷고 있는 곳은 많은 옥답(沃畓)들이 길게 이어져 있는 곳이었다. 너무 술에 취했는지라 그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저만큼에서 바라보는 한 쌍의 눈. "……." 너른 채소밭 사이이다. 이른 아침부터 농사를 짓고 있는 한 농부(農夫)가 있다. 비래관의 누구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채마밭을 가꾸는 중년농군이었다. 그는 바로 세인들에 의해 천하제일인이라 불리어지는 군왕정천 뇌정륭이었다. 뇌정륭은 손에 한 자루 호미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잡초를 뽑다 말고 저만큼에서 비칠거리며 걷는 한 젊은이를 보고 있었다. 애절령이 채마밭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얼마나 술에 만취했는지 십수 장 떨어진 그곳까지 술 냄새가 풍겨올 지경이다. 뇌정륭의 눈길은 한없이 깊고 담담하다. 하되 자세히 들여다본 자라면,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한 가닥 은은한 두려움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아아, 수많은 영웅거효(英雄巨梟)들이 지금까지 나를 노리고 도전해 왔다. 하되 그 어떤 강자에게도 패배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였거늘……, 저 아이…….' 뇌정륭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꽉 움켜쥐어졌다. 그는 천하제일의 거인답지 않게 묘하게도 긴장하고 있었다. '저 아이에게는…… 저 허무한 걸음걸이의 고독아(孤獨兒)에게는 이상한 공포가 느껴진다. 내가 어쩐지 패배할 것 같은 두려움이랄까? 아아! 내 분신과 같은 녀석이거늘…… 내 모든 것을 가져간다 해도 아깝지 않을 녀석이거늘, 저 놈에게 두려움을 느끼다니…….' 군왕정천 뇌정륭.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자아(自我)가 파괴된 모습으로 걷고 있는 애절령에게 공포감이라니……. 그런데 무슨 소리일까? 분신(分身)과도 같은 녀석이라니……? 대체 뇌정륭의 뇌까림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란 말인가? 3 술에 만취된 애절령. 그의 발걸음은 뇌정륭의 채마밭을 지났고,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어느 화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름하여 금검화원(金劍花院)이라 불리는 곳. 금검화원이라면 바로 천하제일의 비정녀 한정낭낭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 아니던가. 여명이 거의 밝아왔을 무렵, 애절령은 소팔진도의 진세를 뚫고 금검화원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꺼억! 낭낭, 후배가 왔습니다. 애절령이 낭낭을 뵙기 위해 왔단 말입니다……." 애절령의 고함소리. 술취한 고함이 요란하게 새벽의 금검화원을 찢었다. 돌연한 소란에 잠자던 새들이 아우성치며 날아올랐다. 잠시 후, 한정낭낭이 기거하는 누각 안에서 두 여인이 걸어나왔다. 한정낭낭과 그녀의 제자 유불영이었다. 두 여인은 느닷없이 새벽에 찾아든 애절령을 보며 전혀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한정낭낭의 얼굴에 떠오르는 빛은 반색인 바, 유불영의 표정은 귀찮은 벌레를 보듯 사납게 일그러졌다 유불영은 애절령을 보며 사납게 욕설을 쏘아댔다. "미친 작자!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새벽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느냐?" 애절령은 비틀거리며 두 여인에게 다가들었다. "꺼윽……! 술을 마시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더라 이 말입니다……." "뭐… 뭐가 어쩌고 저째?" "크크……, 자고로 산(山)을 정복하고자 하는 자는…… 끄윽, 산을 정복하지 못하는 법이지요. 끄윽, 산이 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바다(海)가 바다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비로소 산을 정복할 수가 있다 이 말이지요……." 도대체가 심오막측한 화두(話頭). 그것은 바로 얼마 전 애절령이 신비의 파계승 주육화상에게 들었던 읊조림이 아닌가. 유불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놈, 산이든 물이든 네놈이나 정복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새벽부터 헛소리냐?" 유불영은 사납게 소리치며 애절령을 쫓아내고자 했다. 이때, 돌연 애절령이 토사질을 하기 시작했다. "와악! 왁!" 유불영이 기겁하며 펄쩍 튀어 올랐으나 이미 늦었다. "으흑……." 순간 애절령의 입에서 오물이 세차게 튀어나와 뿌려졌다. 오물은 다가들던 유불영의 옷자락에 자욱히 묻었고, 화원 곳곳에도 질펀하게 뿌려졌다.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악취가 사방으로 풍겨 나갔다. "으으, 네… 네놈이 내 몸에 토사질을……, 으으." 유불영은 울상이 되어 달달 몸을 떨었다. 생각해 보라, 돌연 새벽에 찾아와 잠도 덜 깬 사람의 옷에다 대뜸 토사질을 해 놓다니……. 그때, 애절령은 서서히 앞으로 쓰러지며 무너졌다. 쿠― 웅! 그는 화원에 쓰러져 내린 후 곧장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불령의 얼굴이 무서운 살기로 뒤덮였다. "죽… 죽일 놈!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유불영은 두 눈 가득 살기를 떠올리며 급히 손을 쳐들었다. 그때 한정낭낭이 그녀를 만류했다. "그만 두거라." "어… 어찌하여 저 녀석을……?" 그녀는 묵묵히 애절령을 내려다보다 자애로운 웃음을 떠올리며 말했다. "흐음, 일단 그를 정실(靜室)로 옮기고 연자탕(蓮子蕩)을 끓이도록 해라." 유불영은 기겁할 듯 놀랐다. 정실이라면 다름아닌 한정낭낭의 거처가 아니던가. 유불영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애절령을 옮기자면 그의 몸에 손을 대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토사물이 또 그녀의 전신에 잔뜩 묻을 것이 아닌가. 더욱이 만취한 사내를 위해 봉사를 해야 하다니……. 고고하고 오만한 유불영에게는 정녕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하지만 어찌하랴, 그것은 바로 사부의 엄명이 아니던가. 그녀는 애절령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이를 빠드득 갈았다. '이 지저분한 잡종, 머지않아 네놈의 숨통을 꼭 끊어 주겠다.' 유불영은 다짐하고 다짐했다. 4 머리가 터져 나갈 듯 아프다. 애절령은 오랫동안 혼미 속에서 헤매다가 눈을 떴다. 머리가 깨어지는 듯한 숙취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버둥거리다 눈을 뜬 것이다 순간, 그는 전혀 생소한 곳에 누워 있는 자신을 보았다. 그는 푹신하고 화려한 침상에 누워 있었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내가 풍기는 것으로 미루어 여인의 침소가 분명했다. '대체 이곳이 어딜까? 내가 왜 이곳에……?' 애절령은 누운 채 주위를 둘러봤다. 무척 단아하고 정갈한 실내였다. 집기는 거의 없고 장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방의 주인이 무척이나 담백하고 소탈한 성격의 여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애절령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누워 있게 되었는지, 도무지 가물가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 방안을 둘러보던 애절령은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했다. 방의 한쪽 벽면 아래, 열세 개의 금향로(金香爐)가 놓여 있었다. 뭉클―! 뭉클―! 언제부터 향로에서는 향연(香煙)이 자욱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향로의 위쪽에는 열세 장의 인물화(人物 )가 걸려 있었다. 그 그림들은 바로 군마군신(群魔群神)을 제압하는 모습의 전륜천왕(轉輪天王)의 그림이었다. 전륜천왕의 그림은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그것이 어쩐지 애절령의 시선을 집요하게 잡아끌고 있었다. 애절령이 한참 동안 전륜천왕의 그림을 바라봤다. 사르륵! 그때 주렴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며 한 여인(女人)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칠흑같은 흑의(黑衣)를 바닥까지 드리운 미녀, 바로 유불영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는 바,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자탕 한 그릇이 얹혀 있었다. 손수 끓인 것일까? 두 남녀의 눈길이 얼핏 부딪혔다. "……." "……." 순간 애절령의 눈 속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찾아 왔단 말인가? 설마…… 내가 이곳에 와서 한정낭낭에게 결례를 범했단 말인가?' 애절령은 일시에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그때 유불영의 차가운 애절령의 비수처럼 귓전을 파고들었다. "흥……! 꼴 보기 좋더군. 만취된 다음 찾아와 대뜸 토사질을 해놓고, 사부님의 몸에 그 찌꺼기를 묻혀 놓다니……." 하되 그 말이 진실이 아님을 애절령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애절령을 방안으로 안고 들어와 씻긴 사람은 바로 유불영이 아니던가. 그녀는 애절령의 오물을 몸에 뒤집어써야 했고, 악취 가득한 애절령의 몸을 씻겨가며 얼마나 이를 갈아야 했던가. 만에 하나, 한정낭낭이 아니었다면 애절령의 목숨은 백 개가 있었어도 부족했을 것이다. 애절령은 표독한 유불영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ㅉ, 마치 독오른 살쾡이 같군.' 검은 흑의경장을 치렁하게 늘어뜨린 유불영. 그녀는 흡사 독오른 들짐승과 같았다. 접근하기만 한다면 단숨에 물어뜯을 듯한 모습이랄까? 또한 흑의를 걸친 유불영은 묘한 아름다움과 성적(性的) 매력을 동시에 풍겨냈다. 이미 애절령은 그녀의 나신을 본의 아니게 본 바 있다. 하되 지금 흑의를 걸친 모습은 그때보다 몇 배는 아름다워 보였다. 특히 독오른 눈매는 사나움과 더불어 촉촉이 젖어 있는 듯 느껴졌다. '으음……, 대단한 관능미(官能美)를 풍기는 여인이로군.' 애절령은 유불영을 바라보다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더 이상 바라보다가는 묘한 충동에 휘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불영도 애절령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아련한 빛으로 젖어들고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애절령의 강인하고 각져 보이는 듯한 얼굴윤곽이 엿보인다.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함과 고독함을 풍겨내는 사내! '으음, 저 사내에게는 묘한 매력 풍겨나고 있다. 여인을 꼼짝 못하게 할 순수함이랄까? 아니면 절로 사랑을 주고픈 고독미랄까?' 그녀는 문득 애절령을 향한 울컥하는 충동심을 느껴야 했다. 정확하게 말해 그 충동이 어떤 감정인지는 아직 모른다. 어느 순간, 유불영의 상념은 들려오는 음성에 의해 깨어졌다. "그 음식은 날 주기 위해 가져온 모양이구려." "그… 그래요." 유불영은 얼굴이 붉어지며 더듬거렸다. 애절령은 묘하게 웃었다. "후후, 성의를 생각해서 맛있게 먹을 테니 이리 주시구려." 유불영은 흠칫 놀라며 연자탕을 애절령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 위로는 금방 살쾡이 같은 표독한 빛이 떠올랐다. "여전히 뻔뻔하고 파렴치하군요." "그것이 특기인 것을 어쩌겠소." 애절령은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연자탕을 먹었다. 잠시 연자탕을 먹던 애절령의 얼굴이 미미하게 찡그러졌다. "이 연자탕을 누가 끓인 것이오?" "왜 그러죠?" "낭자의 솜씨라면 실망했소이다. 이렇게 맛이 없으니 어찌 시집인들 갈 수 있겠소?" 유불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애절령을 향해 이를 갈며 말했다. "흥, 당신에게 칭찬을 바라지도 않아요. 더욱이 그것은 사부님께서 끓인 것이니……." 그것은 말짱한 거짓말이다. 유불영은 한정낭낭의 명으로 손수 연자탕을 끓인 바 있다. 애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어쩐지 맛이 있는데도 잠시 거짓말을 했더니……. 역시 낭낭의 솜씨일 줄이야……." "이… 이런……?" 유불영은 분노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가 숨을 씩씩대며 애절령을 바라볼 때, 애절령은 다시 유불영에게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소." "……." 유불영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았기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기 금향로의 그림 말이오?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 애절령은 연무를 피워내는 금향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금향로의 표면 위에 있는 열세 명의 인물화에 멎어 있었다. 유불영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금향로를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저 그림은 낭낭께서 친히 그린 그림이에요. 저 그림이 의미하는 바는…… 과거 천하를 지배하고자 했다는 전륜철왕부의 창시자인 전륜칠성자(轉輪七星子)가 음부십삼맥을 정복하는 광경을 묘사한 것이죠." 애절령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전륜철왕부, 음부십삼맥! 그렇다면 여기 두 여인은 과거 지하일맥이라 불렸던 전륜철왕부와 관계가 있단 말인가?" 애절령은 빤히 그림을 바라봤다. 그는 아름다운 유불영의 모습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불영은 고고한 애절령의 모습에 이를 악물었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자……, 언제고 내게 준 수모에 대해 반드시 뼈저린 후회를 느끼게 해주리라.' 그러나 유불영의 눈빛은 어느 순간 힘없이 풀어졌다. 애절령의 고독하고 순수한 눈빛을 보는 순간, 독살스러운 기운 이 절로 스러지고 마는 것이다. '아……, 저 놈이 나의 경쟁자이기는 하되 눈빛만은 너무도 매혹적이다. 흡사 심혼을 빨아들일 듯이…….' 어느 순간 유불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바보 같으니, 저 따위 녀석에게 호감을 느끼다니, 나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큰 일이 있지 않은가. 가문(家門)의 한을 풀어야할…….' 유불영은 다시 사나운 눈길로 애절령을 노려보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애절령의 눈길은 금향로의 인물화에 멎어 있었다. 대체 인물화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애절령을 바라보며 복잡한 눈빛을 하던 유불영은 소리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방안에는 오직 애절령만이 남게 되었다. 애절령은 눈빛도 깜박이지 않고 계속 금향로를 노려봤다. 얼마가 지났을까? 돌연 애절령이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스으―. 그는 거의 무의식 상태로 손을 앞으로 휘젓기 시작했다. 그의 따라 각기 다른 열세 가지의 동작이 펼쳐졌다. 애절령의 손에서 열세 가지 동작이 이루어지자 열세 가닥의 강기( 氣)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곧장 연기를 피워내는 금향로의 표면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핏! 피피― 핏! 열세개의 향로에 각기 하나씩의 구멍이 생겨날 때, 애절령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런! 나도 모르게 인물화의 손짓에 따라 동작을…….' 애절령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한정낭낭이 아끼는 열세 개의 금향로에 구멍을 뚫고 만 것이다. "아아……, 놀랍구나, 그대의 재능이……." 그때, 돌연 지척에서 한정낭낭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느 틈인가? 한정낭낭이 애절령의 곁에 서 있었다. 애절령의 급히 일어나며 미안한 빛을 떠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만……." 그러나 한정낭낭은 전혀 노여워하는 빛이 아니었다. 대신 감탄의 표정을 얼굴 가득 떠올렸다. "불영, 그 아이는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도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전륜십삼번천지복수(戰輪十三蒜天地覆手)의 오의를 깨닫지 못하였거늘, 넌 이것을 본지 단 반 시간만에 깨닫다니……. 아아! 너야말로 강호제일의 무골(武骨)이로구나." 한정낭낭은 거듭 감탄하는 얼굴이었다. 애절령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한정낭낭이 탓하지 않았으되, 애절령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는 거듭 한정낭낭에게 결례를 사과했다. "후배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선배님, 그럼 이만……." 애절령은 한정낭낭에게 거듭 사과한 후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한정낭낭이 보기 어려워 더 이상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한정낭낭은 떠나는 애절령을 잡을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애절령의 등을 향해 물었다. "아이야, 너는 사흘 후 만월(滿月)이 되는 보름 날 여기에 와줄 수 있느냐?" 한정낭낭의 음성은 자애스러운 정이 가득했다. 애절령의 뛰어난 재질을 발견한 이후부터 그녀의 인자한 빛은 더 짙어졌다. 애절령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다시 오겠습니다." 애절령은 가타부타 대답 없이 떠나갔다. 한정낭낭은 사라져 가는 애절령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오래도록 서 있었다. 이윽고 애절령의 모습은 금검화원의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때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아……, 모든 강호인들에게는 야망과 허영심이 있게 마련, 하기에 그들의 외견상 보이는 모습은 실체보다 과장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아이는…… 저 아이는……." 한정낭낭의 두 눈에는 대견해 하는 빛이 가득했다. "저 아이에게는 허욕도 없고, 과장도 없다. 저 아이는 순수한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에게 보여준다. 어찌 보면 전혀 뛰어나지 않은 모습……, 전혀 뛰어남이 없는 평범하고 고독한 한 사나이의 모습이 거기 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정신(精神)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철심(鐵心)이라는 것……!" 한정낭낭의 얼굴에 떠오른 대견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흡사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저러할까? 아마도, 그녀의 얼굴에 떠올른 미소는 꽤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으리라. 5 애절령은 처절한 패배감에 빠졌다. 그는 거듭된 두 번에 걸쳐 패배(敗北)했다. 그것이 애절령에게 심한 좌절을 안겨 주었으되, 또한 실망과 반성의 기회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 지난 며칠간, 애절령은 무공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예 익힐 엄두도 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가슴속의 패배감이 너무 통렬했기에 도저히 도를 닦을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일까? 그는 꽤 많은 날들을 낚시로 소일했다. 하되, 애절령은 좌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흐르는 시간 속에 패배감과 실망을 묻은 채, 서서히 또 하나의 투혼(鬪魂)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