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사진"
- 엘리엇 어윗 / (금세기 최고의 사진작가, 前 매그넘포토스 회장)
NeXT, Adobe, Apple, Microsoft, Netscape,
Sun Microsystems, NetObjects, Intel, Autodesk......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더그 메누에스가 15년간 단독촬영한
실리콘밸리 거장들의 디지털 참호, 그 역사적 일상!
★ 스티브 잡스 미공개 사진 수록 ★
스티브 잡스와 전설적 천재들의 귀환!
아날로그 흑백사진이 들려주는
디지털 선구자들의 숨겨진 이야기
[스티브 잡스와 천재들(Fearless Genius)]은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1985년부터 닷컴버블이 붕괴한 2000년까지, 실리콘밸리 호황기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더그 메누에스(Doug Menuez)의 진귀한 흑백사진과 코멘터리로 재조명하는 책이다. 잡스의 미공개 사진은 물론 수전 케어, 존 워녹, 러셀 브라운, 스티브 캡스, 스티브 워즈니악, 존 도어, 브룩 바이어스, 스티브 케이스, 빌 조이, 빌 게이츠, 사미르 아로라, 빅터 조드, 클레멘트 목 등 디지털 선구자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100여 점의 아날로그 흑백사진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넥스트, 어도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넷스케이프, 오토데스크 등 실리콘밸리 거장들의 디지털 참호에서 인류의 미래를 바꿀 디지털 혁명이 일어나는 역사적 순간을 ‘사람들의 일상’을 포착한 사진들로 기록한 이 책은 기술 혁신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잊힌 실리콘밸리 영웅들의 전성기 모습을 만나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선사한다.
더그 메누에스가 실리콘밸리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1985년, 그때 웹은 없었다. 휴대전화를 가진 이도 여간해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구글을 설립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중학생이었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는 아기였다. 그로부터 15년 뒤 메누에스가 작업을 끝냈을 때, 그에게는 25만 장의 네거티브 필름이 남았다. 그리고 미국인의 절반 가까이가 인터넷을 사용하고 휴대전화를 보유했다. 페이지와 브린은 구글을 시작했다. 저커버그는 음악 재생 장치와 인터넷 메신저 소프트웨어를 해킹하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들이 연 디지털 혁명의 제2막은 몹시 놀라웠다. 하지만 이 책의 원서명 ‘Fearless Genius’가 표상하는 ‘제1막의 천재들’이 위대한 희생을 치른 덕분에 얻은 쾌거였음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닫게 될 것이다.
닷컴 붕괴에 따른 한 가지 부정적 결과는 혁신에 커다란 제동이 걸렸다는 것이다. 위험이 크지 않은 단기 프로젝트에만 사람이 몰렸다. 비록 지금 실리콘밸리는 또다시 멋진 아이디어로 성황을 누리고 있지만, 앱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앱은 빠르게 출시된다. 왜냐하면 투자자들은 이제 자신의 돈을 18개월 안에 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무거운 돈’은 구하기 어렵다. 기후변화 문제 해결 같은 중요한 기술적 개발은 자취를 감췄다. 좋은 소식은 지금의 이 소강 상태가 아마도 정상적 흐름의 일부일 거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술의 25년 주기에 속한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도 "세상을 바꾸는 제품을 매년 구매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25년 전의 기술이 이제야 무르익고 있다. 우리는 요즘의 엄청나게 유용하고 창의적인 제품들을 통해 당대의 약속이 실생활에서 구현되는 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실리콘밸리의 화양연화에 대한 추억과 경의!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1985년부터 2000년까지
실리콘밸리 호황기가 남긴 위대한 유산
1985년 봄, 실리콘밸리에서는 기술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더그 메누에스는 그곳에서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었다. 대단한 무언가를 원했다. 그때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에서 쫓겨나 새로운 컴퓨터 회사 넥스트를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교육을 변혁할 힘을 지닌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게 잡스의 목표였다. 메누에스는 원하던 이야깃거리를 찾았다. 세계 최정상급 기술자들을 매개로 혁신의 정신과 그 실체를 필름에 담는 것!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넥스트에서 잡스와 동료들이 새로운 컴퓨터를 만드는 모습, 즉 제품 구상부터 출시까지 전 과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메누에스의 제안에 잡스가 전례 없는 접근을 허락한 것이다. 잡스는 메누에스에 대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메누에스가 아무런 제약 없이 회사 어디든 드나들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후 3년간 메누에스는 세계적인 기술 천재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의 솔직한 일상적 모습들을 찍을 수 있었다.
애초에 3년 정도를 계획한 메누에스의 프로젝트는 더 원대해졌다. 그의 카메라는 넥스트에 이어 실리콘밸리의 다른 선도적 기업들로 향했다. 잡스가 메누에스에게 완전한 접근을 허락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각 기업의 책임자들은 메누에스에게 내부의 빗장을 활짝 열어 주었다. 실리콘밸리 거물들의 드러나지 않던 일상이 찍혔다. 어도비의 존 워녹, 애플의 존 스컬리,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클라이너 퍼킨스의 존 도어,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빌 조이, 인텔의 고든 무어와 앤디 그로브, 넷스케이프의 마크 앤드리슨을 비롯한 일흔 명이 넘는 위대한 혁신가와 그들 사업의 숨결이 기록되었다. 그 모든 세월이 15년이었다. 어느덧 닷컴 거품이 꺼지고, 메누에스의 렌즈도 닫혔다. 특별한 한 시대가 저물어갔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보안에 철두철미하여 외부인에게는 문을 꽁꽁 걸어 잠갔다. 하지만 더그 메누에스에게만큼은 속살을 훤히 보여 주었다. 메누에스는 통렬한 실패와 뜻밖의 성공, 그 모든 순간을 현장에서 함께했다. 역사를 만든 순간, 그리고 역사를 만든 이들의 일상적 순간들이었다.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이는 우리 문화와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터였고, 인류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많은 일자리와 부를 창출할 터였다. 그곳에 더그 메누에스가 있었다. 오직 그에게만 접근이 허락되었던 순간들을 각별한 사진들과 소회로 엮은 [스티브 잡스와 천재들]은 아이디어의 힘을 현실로 바꾸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햇빛 찬란한 실리콘밸리에서 허름한 연구실에 갇혀 불철주야 두문불출하며 죽을힘을 다해 디지털 시대를 연 주역들과 조역들을 기리는 헌정이다.
그들은 기꺼이 뷰파인더 안에 들어와 주었다. 내 사진 속 그들에게도 나름의 사명이 있었다. 돈을 버는 것은 중요했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꿀 만한 멋진 물건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인간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기도 했다. 하나의 사명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이 힘들어졌을 때 사람들을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때 돈은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무엇을 걸고 도박을 벌일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만질 수 없는 인간 정신인 이것을 계량해서 사업 기획안에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난관을 돌파한 모든 기술 뒤에는 아마도 당연히 이러한 창조적 힘이 있었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사진 찍을 수 없는 대상을 필름에 담는 일은 더그 메누에스에게 오랜 열정이자 사명이었다. ‘천재성’을 대체 어떻게 카메라로 포착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을 바꿀 개념이 태동해 꿈틀대는 과정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세상을 바꾼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기본적으로 그냥 앉아서 생각하는 것뿐인데. 사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꾼 그 정신세계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메누에스는 대체로 수수께끼 같은 그들의 생각과 태도와 행동과 일처리 방식을 사진으로 은근히 전달해 왔다. 메누에스 본인이 실리콘밸리의 디지털 참호에서 긴 시간을 보냈고, 또 앵글에 담으려는 피사체와 마찬가지로 밀도감 있는 삶을 부단히 살았다. 사진 속 그들은 상상 이상으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었고, 또 줄 것이다. 여러분은 단지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놀라운 기술적 진보로 점철된, 짧다면 짧은 15년 세월의 궤적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 엘리엇 어윗 / 금세기 최고의 사진작가, 前 매그넘포토스 회장
우리의 일상을 디자인한 수전 케어 [1987년 캘리포니아 소노마]
수전 케어는 컴퓨터 화면의 재미난 아이콘과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녀가 지구촌 수억 명의 일상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해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수전은 초창기 매킨토시팀의 일원으로서 매킨토시용 아이콘과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여럿 디자인했다. 애플에서 스티브가 축출되자 함께 회사를 나온 그녀는 넥스트 컴퓨터의 공동 창업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그녀는 전설적인 그래픽디자이너 폴 랜드(Paul Rand)와 함께 작업하며 넥스트 컴퓨터용 아이콘과 회사 로고의 탄생을 지휘했다. 훗날, 그녀는 다른 많은 컴퓨터 운영체계(OS)의 아이콘도 디자인하거나 재디자인한다. 윈도(Windows)와 IBM의 OS/2 작업에도 참여했다. 사진 속 그녀는 한 사외 워크숍에서 동료 킴 젱킨스(Kim Jenkins)와 함께 스티브의 얘기를 듣고 있다. 당시 스티브는 회사가 직면한 미완의 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킴은 마케팅팀의 중요한 직원으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넥스트로 이직했다. 그녀가 전 직장에서 만든 학원영업부가 주변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큰 수익을 내면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애플의 진짜 경쟁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때까지는 애플이 교육 시장을 싹쓸이했다.
(/ p.39)
새 공장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스티브 잡스 [1987년 캘리포니아 프리몬트]
스티브는 종종 몹시 무례하고 혹평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이따금 복수의 칼날을 갈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도 못하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의 함박웃음과 활력은 전염성 있고, 또 거부할 수 없었다. 넥스트 초창기에 그는 일에 대한 허기로 신나는 발걸음을 하면서 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 사진처럼 순전한 기쁨이 거리낌 없이 터져 나온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스티브가 직원들과 함께 새로 고른 공장 부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들은 낡은 노란색 스쿨버스를 빌려서 타고 갔다.
(/ p.46)
인간인 척하는 스티브 잡스 [1987년 캘리포니아 멘로 파크]
스티브는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손에 쥔 일을 항상 레이저 같은 집중력으로 처리할 뿐이었다. 회사 야유회에서 비치볼을 차는 스티브의 모습은 의외였다. 그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마치 소풍 분위기를 띄우려는 계산된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는 앞선 경험을 통해 직원들이 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제품 배송 단계에서 절정에 이를 업무 행진을 힘차게 이어 가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
(/ p.57)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 [1988년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티]
넥스트 컴퓨터를 공식 출시하기 직전에 스티브는 그의 사무실에 작동되는 시제품 컴퓨터와 모니터, 프린터, 주변 기기들을 완벽히 갖춰 놓았다. 그리고 방문자들의 눈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검은 보자기를 씌워 놓았다. 기술 회사들은 극도로 경쟁이 심하고 비밀스럽다. 심지어 닫힌 문 뒤에서도 예방 조치가 취해진다. 팰로앨토에 있던 넥스트 첫 사옥에 들어서면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에서 찍은 오래된 포스터가 방문자와 직원들을 반겼다. ‘적군 첩자’가 그들 가운데 있으니 ‘말조심할 것’을 당부하는 포스터였다.
(/ p.75)
애플 컴퓨터의 뉴턴 전시상황실 [1993년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애플 프로그래머 세라 클라크(Sarah Clark)가 갓 태어난 아기를 직장에서 돌보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가 마감에 쫓기는 바람에 2년 동안 건물 밖을 거의 나가지 못했다. 아기 낮잠 시간이거나 모유를 먹일 때는 사무실에 커튼을 쳐서 동료들이 알게끔 했다. 애플에는 그녀같이 헌신적인 직원이 많았다. 경영진은 통상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근무시간 자유선택제처럼 근로자 편의를 고려한 제도도 도입했다. 존 스컬리는 여성을 힘 있는 자리에 앉히는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 당시 실리콘밸리에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이 있다. 기계가 어떻게 작동할지, 사용자와 어떻게 상호작용할지 정해 주는 코드를 누가 짰냐는 것이다. 스무 살 남짓한 컴퓨터광 백인 청년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짰다면? 그 사람의 다른 세계관이 기술의 성
격을 바꾸었기 쉽다. 이것은 아주 깊은 차원에서 우리의 행동과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 p.119)
100만 행의 코드 [1992년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프로그래머 피터 앨리(Peter Alley)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잠시 쉬고 있다. 시카고에서 열리는 전자제품 박람회에서 존 스컬리가 애플의 뉴턴을 소개할 시점이 임박한 것이다. 겨우 서른 명의 프로그래머가 100만 행의 코드를 쓰고 있었다. 기한은 1년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그때 존 스컬리가 필립스에서 가스통 바스티앙스(Gaston Bastiaens)를 데려왔다. 참을성 없는 이사회의 압력을 받고 뉴턴을 시장에 빨리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뉴턴의 마이크로칩을 더 빠른 신형으로 교체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프로그램 코드를 전부 새로 짜야만 했다. 경영진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100만 행의 코드 전체를 다시 쓸 기간으로 1년을 더 준다는 것이었다. 얼마 뒤 코 아이소노(Ko Isono)라는 이름의 젊은 프로그래머가 집으로 가서 권총을 장전해 심장에 대고 당겼다.
(/ p.132)
인터넷의 미래를 논하는 존 도어와 동료들 [1994년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클라이너 퍼킨스 코필드 & 바이어스의 유명한 월요 아침 회의에서 존 도어가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월요 회의는 투자 가능성이 있는 회사들을 검토하는 자리였다. 벤처 사업가들은 서둘러 발표를 끝낸 뒤에 결과를 낙관하곤 했다. 클라이너 퍼킨스는 이미 초창기의 인터넷 기업 여러 곳에 투자하고 있었다. 매크로미디어(Macromedia)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중요한 웹 개발 도구인 플래시를 소개했다. 클라이너 퍼킨스는 또 넷스케이프의 출범을 막 도우려던 참이었다. 넷스케이프는 닷컴의 황금광시대를 열게 된다. 클라이너 퍼킨스는 지금도 일류 벤처캐피털 회사로서 건재하다. 그들이 기록한 성과는 그야말로 ‘전설’이다. 도어와 회사가 발굴해 투자한 사업가와 사업체들은 연이어 경이적인 성공을 거뒀다. 로터스(Lotus), 선 마이크로시스템스, AOL, 인튜이트(Intuit), 앳홈(@Home), 아마존닷컴(Amazon.com), 넷스케이프, 구글, 징가(Zynga) 등은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도어는 자신이 투자한 벤처 기업들이 2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추산한다. 오늘날 클라이너 퍼킨스의 투자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유명 인사로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콜린 파월 장군,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3세,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의 공동 창업자 빌 조이 등이 있다. 클라이너 퍼킨스는 성장하는 회사들이 일본의 대기업 계열사 집단인 게이레츠(系列)처럼 재능과 자원을 나눔으로써 성공 확률을 높이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 p.149)
사진 한 장에 50달러 이상 지불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빌 게이츠 [1992년 캘리포니아 라구나니구엘]
어젠다 ’92 콘퍼런스에 참석한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빌 게이츠는 대중을 위한 값싼 콘텐츠를 얘기했다. 그리고 윈도 업그레이드가 오랜 지연으로 뜬구름 같아진 일에 관해 기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사회자는 점잖은 듯 신랄한 칼럼니스트 스튜어트 올솝(Stuart Alsop)이었다. 그는 무대 인터뷰를 진행하며 게이츠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윈도 새 버전 출시가 너무 늦다고 게이츠를 들볶았다. 그해 더 나중에, 영향력 있는 TED의 제3회 강연회에서 게이츠는 무대에 올라 디지털 콘텐츠와 사진의 가격에 관한 강연을 했다. 그가 말했다. "누구도 사진 한 장에 50달러 이상 지불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게이츠가 밝힌 대로 그는 시애틀에 최첨단 기술을 접합한 자택을 짓고 있었다. 건축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특히 계속해서 사진이 바뀌는 커다란 화면을 실내 장식으로 설치할 계획이었다. 그가 구상하는 규모에서 이미지 사용권을 얻자면 가격이 비쌀 터였다. 그래서 그는 방대한 양의 영상 자료를 소유하거나 통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사진 자료은행 사업을 꾸리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회사의 원래 이름은 콘티뉴엄(Continuum)이었다. 그들은 대형 이미지의 온라인 유통을 위한 자료은행을 구축했다. TED 무대 뒤에서 조앤 로젠버그( Joan Rosenberg)가 게이츠의 강연 내용에 격분했다. 메인 주에 있는 영상창작센터(Center for Creative Image)의 설립자로서 사진작가의 권익 보호에 앞장서 온 그녀는 게이츠를 향해 사무치는 고함을 토해 냈다. 콘티뉴엄 운영을 위해 루카스 필름에서 데려온 스티브 아널드(Steve Arnold)가 아슬아슬한 순간에 빌 앞에 나서서 조앤을 제지했다. 사진작가들이 그때까지 밥벌이를 해온 전통적 방식이 빌의 선언으로 종말을 고했음을 조앤은 알았다. 실제로 콘티뉴엄은 첫 계약을 하며 작가들로부터 공격적으로 저작권을 빼앗았다. 사진 전문지들이 이 일을 맹비난했다. 콘티뉴엄은 이미지 세탁을 위해 이름을 바꿔야만 했다. 그렇게 ‘코비스(Corbis)’가 탄생했다.
(/ pp.178~179)
투자자들을 위압하는 사미르 아로라 [1999년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시티]
금요일 오후 4시, 그러잖아도 분란이 많은 이사회 회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넷오브젝트 투자자들이 회사의 CEO이자 공동 창업자인 사미르 아로라의 사임을 요구한 것이다. 사미르가 임명한 사장도 함께 내려오라고 했다. 투자자들은 사미르의 전략이 불만스러웠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다른 문제들의 거세지는 압력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미르는 주요 투자자 둘과 고성을 주고받았다. 회의실을 꽉 채웠던 이사들이 퇴장했다. 사미르 홀로 남았다. 실리콘밸리에서는 혁신가와 창업자가 투자자들에게 밀려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전략적 목표가 다르다는 등의 이유를 든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회사 십중팔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사미르 아로라는 고분고분 떠밀리지 않았다. 직책에서 물러나는 일도, 자신의 비전을 포기하는 일도 거부했다. 충격적이었다. 대신에 그는 투자자와 격론을 벌여 그들이 떠나도록 만들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투자자들은 곧바로 돈줄을 끊었다. 결국 사미르는 금요일 오후 4시로부터 한 시간 뒤, 125명의 직원들 앞에서 담화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4년간 피와 땀과 눈물로 세운 공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음을 알렸다. 사미르는 회사 문을 닫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어떻게든 자금을 구해 보겠다고 했다. 빅터 조드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자신을 믿어 주는 이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당분간 임금 없이도 남아서 일해 줄 수 있는 직원들, 그리고 그럴 수 없어 떠나야 하는 직원들에게 말이다. 빅터는 남았다. 팀원들 대부분이 그랬다. 사미르는 자신이 아는 모든 투자자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월요일 정오께 1000만 달러를 입금받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넷오브젝트는 살아났다.
(/ pp.242~243)
작가소개
더그 메누에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1981년 워싱턴포스트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 포춘, 뉴욕타임스매거진 등 유수매체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했으며 런던사진가협회 수여 상, 켈리상을 비롯해 업계 전문지 수여 상 등 업적을 기리는 다수의 상을 받았다. 미국과 유럽에서 수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스탠퍼드 대학교 도서관은 100만장이 넘는 그의 방대한 사진을 취득해 ‘더글러스 메누에스 사진 소장실’을 개관했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