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민주화운동](11)이화여대의 반독재투쟁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6. 13.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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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11)이화여대의 반독재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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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민주화운동](11)이화여대의 반독재투쟁
경향신문 입력 : 2003-06-29 18:31:44
“신문을 보면서도 사뭇 눈물이 북받쳐 견딜 수 없는 이 벅찬 역사의 마당에 하필이면 내 딸이 다니는 학교가 빠졌더란 말이냐…. 서울의 거리가 온통 너와 같은 젊은 세대의 불길로 거세게 타오를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더냐? 그 피의 폭풍이 강산을 휩쓸고 낡고 썩은 것들이 너희 젊음 앞에 굴복하고 만 그 시각에 대체 너는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더냐? 분한 일이다. 네 젊음 스스로 모독한 시대의 고아가 되었구나…”
1960년 4월 말, 한 중앙일간지에 실린 학부모의 글이다. 그는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목포에서 서울의 이화여대에 딸을 유학보낸 어버이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4·19 행렬에서 빠져버린 이화여대생을 향해 준열하게 꾸짖는다. 평범한 아버지가 쓴 글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만큼 천하명문이다.
그렇다. 그 때 이화여대는 근대화의 뒤안길에서 가난으로 신음하고 있던 이 땅의 숱한 여성들의 선망이 머무는 곳이었다. “네 어찌 배지를 달고 태양 아래 활보할 수 있으랴”고 아버지가 말한 배꽃 모양의 은색 배지는 여성 제일의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지성과 교양을 의미하는 엘리트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이화여대는 노도와 같은 혁명과 변혁의 물결로부터 저만큼 떨어져 있었다. 자유·평등·박애와 같은 고귀한 혁명이념조차 모두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프랑스 대혁명 기간이 아니라, 양성평등 헌법 하의 60년대 민주공화국 한국이기에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동선을 향한 젊음의 열정보다는 교양있는 여성 개인의 완성이라는 화두가 오랫동안 이화여대생을 더 강하게 지배하였다. 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더러 이화여대 앞 거리를 징표로 삼아 이렇게 말하였다. 의상실의 호화스러운 쇼윈도 숲 속에 부끄러운 듯이 가까스로 서점 두어개가 숨어 있으며, 학술토론회보다는 5월의 화려한 메이퀸 행사와 쌍쌍파티가 더 관심사인 것이 이화여대의 풍속화였다고.
1973년 11월, 정치와 변혁의 무풍지대였던 이화여대는 순식간에 태풍의 중심부로 떠오르게 된다. 이화여대는 72년 10월유신 이후 첫 대규모 시위인 서울 문리대의 10·2사태가 전 대학의 대규모 반유신 데모를 촉발시키는 데 기름 역할을 했다. 11월12일,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팔천 이화 학우’들을 일깨우고 선동한다. ‘과감히 민주 수호의 구국대열에 앞서 나간다’는 결의와 함께 민주체제 확립, 언론집회 자유보장, 구속학생 즉각 석방이 관철될 때까지 전교생이 검은 리본을 달고 등교하기로 결의하였다. 8,000여 이화여대생의 앞가슴에는 민주주의의 죽음을 조상(弔喪)하는 검은 리본이 만추의 찬바람에 나부꼈다.
교문 앞에서 학생들은 검은 리본을 낚아채려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리본을 빼앗긴 학생들은 학과 사무실에서 제공하는 리본을 곧바로 다시 달았다. 오랜 시간 장롱 깊숙이 잠자던 검은 한복치마는 젊음의 앞가슴에 나부끼는 만장으로 변신하였다. 또한 동대문 시장에서 필채로 구입해놓은 검은 천이 부족함없이 공급되었다.
이보다 1주 앞선 5일, 경북대에서 교문을 박차고 나선 경북대생들의 도청을 향한 시위와 함께 이화여대의 이날 결의는 10·2데모를 숨죽이며 지켜보던 대학가의 심장에 곧바로 불을 지폈다. 서울대 약대·법대의 동맹휴학을 비롯하여 고려대·연세대 등 전국의 대학들은 집회와 시위 등을 동시에 개최한다. 71년 교련 반대시위를 경험하였던 학생들은 경찰과의 가두 충돌을 피하고 다수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동맹휴학, 수업 거부 방법을 택하였다. 숙명여대의 수업 거부, 한신대 교수들의 삭발 등이 이어지면서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일로를 걷자 이에 당황한 당국은 각 대학에 조기 방학을 지시한다. 23일 서울 문리대, 외국어대, 서강대 등의 방학이 시작되었으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서울여대의 기숙사 식사 거부, 서울 치대의 단식농성, 서강대의 시험 거부, 서강대와 성균관대의 가두시위 등이 뒤를 이었다.
28일, 이화여대는 달리는 말에 또다시 채찍을 가한다. 이날 채플 수업이 끝난 후 대강당에 모인 학생 4,000여명은 더욱 강력한 결의문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독재 공포정치 척결, 국민의 기본권 보장, 매판자본의 퇴치와 민족 자주경제체제의 확립을 위한 투쟁을 결의한 선언문은 정치 청정구역에서 안온하고 평화롭게 잠들어 있던 이화여대생들을 흔들어 깨운 사나운 새벽 종소리였다.
채플 수업 맨 끝순서인 묵도가 끝나기 무섭게 김은혜는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 선언문을 낭독한 후 4,000명의 선두에 서서 교문 밖으로 진출한다. 호리병 모가지처럼 긴 교문앞길은 여대생들로 출렁거렸다. 신촌 대로상까지 400여m 이어진 행진의 선두에는 놀랍게도 총장 김옥길과 교수들이 앞장서서 학생들을 보호하였다. 주동자를 잡아채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는 경찰은 보호막처럼 학생들의 선두를 지키는 총장과 교수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
날이 어둑해오자 이들은 기동경찰대와의 대치를 끝내고 교내로 들어와 철야 기도회를 갖는다. 구속학생 석방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12월3일로 예정된 학기말고사를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시위자에 대한 신변 이상이 발생할 때에는 단식투쟁에 돌입한다는 서명에 모든 참석자가 서명한다. 이후 이같은 시위와 기도회는 반복된다.
주동자 김은혜는 고구려 처녀처럼 건강하고 순박한 외양의 마산 처녀. 그녀의 신변을 염려한 학우들은 항시 몇 겹으로 그녀를 에워싸고 돌아다녔고, 김옥길을 비롯한 이효재·윤정옥·이남덕·박은정 등 여성 교수들은 총장공관에 시위 주동자들을 1주일 동안 묵게 했다. 이들에게 비둘기를 날려준 이도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 서대문경찰서 담당기자였던 이부영(현 국회의원)은 학생들에게 쪽지를 보내 김은혜에게 피신할 것을 당부하였다.
71학번 오성숙(전 참교육학부모회 회장), 72학번 정강자·김선숙·정선자 등 집회를 주도한 이들은 서클 ‘새얼’과 ‘POWER’ 멤버들이다. 이들의 선배로 이옥경(미즈엔 편집장), 신혜수(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 장하진(여성개발원장), 최영희(내일신문 사장), 이미경(국회의원) 등이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면서 후배를 격려하였음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이때 한명숙(환경부 장관)은 졸업 후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이들을 지원하였다. 기숙사 213호의 김은혜는 214호 선배인 사감 한명숙으로부터 두터운 겨울내의를 받아들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감옥은 몹시 추우니 따뜻한 내의를 항상 챙겨 입고 다니라는 당부를 듣고서야 그녀는 변장을 결심한다. 친구들이 변장에 필요한 복장과 안경 등 여러 소품을 준비하였고 그녀는 평소의 얼굴과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늠름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해 민청학련 사건이 터질 때까지 용케도 체포되지 않는다.
12월1일 여자대학으로는 동덕여대·상명여사대와 대구의 효성여대 등이 방학 공고가 나붙은 교정에서 조기 방학 철회,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강행한다. 광주일고를 시작으로 경기고·대광고 등 고등학교까지 가세할 기미를 보이자 이들 학교 역시 조기 방학에 들어간다.
마침내 이화여대 교무위원회는 김옥길을 대표로 법무·문교·내무장관에게 건의문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구속학생을 전원 석방할 것과 함께 ‘공개적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쓰고, 읽고,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한 교수단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던 당국은 12월7일 이를 발표한다.
그 사이 방학 첫날인 12월3일, 이화여대생들은 교문 앞과 서울시청 앞에서 건의문이 관철될 수 있도록 압력 시위를 전개한다. 이화여대의 이와 같은 교수와 학생간 상호 신뢰는 이후로도 오래 지속되었다. 다른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분위기는 그로부터 7년 뒤인 80년 5월에 삼엄한 신군부의 계엄포고령 속에서도 전국 대학생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는 중심부로 자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남여고 3인이 梨大선언 주역
이화여대 학생운동 1세대 그룹에 속하는 정강자(도서관학과), 김선숙(신문방송학과), 정선자(국문과). 전남여고 동기생으로 1972년에 입학한 이들은 73년 11월 여성정치선언의 우렁찬 외침이 담긴 선언문을 준비한 주인공들이다.
당시 정강자는 학교 기숙사에, 정선자는 할아버지 집에 기거하였으며 김선숙은 동생과 자취하고 있었다. 당연히 선언문을 철필로 긁어서 등사하는 ‘은밀한 작업’은 김선숙의 자취방에서 이뤄졌다. 정강자는 선언문을 찍어내던 그날을 이렇게 기억한다. “매우 화창한 가을날이었어요. 한장 한장 찍을 때마다 등사기에서 철컥철컥 소리가 났기 때문에 라디오 볼륨을 높여놓고 찍었습니다”
선언 당일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갔을 때 계장으로 보이는 형사는 “대통령이 광주에서 예배를 볼 경우 목사가 너희 아버지고, 광주에서 시위가 일어나면 최일선에서 막을 사람이 너희 아버지고, 광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이 너희 아버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호통쳤다고 한다. 당시 정선자의 부친이 광주 중앙교회 목사이고, 김선숙의 부친이 광주의 고위 경찰간부이며, 정강자의 부친이 학교 교장이었던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자신들의 행동이 아버지에게 누를 끼칠까봐 걱정되지는 않았을까. 정강자는 “예나 지금이나 운동을 하러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없겠죠. 하지만 입학 후 우리 사회의 문제를 깨달았고,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하기 위해 개인적 요구는 접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여성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정강자는 현재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정선자 역시 이 모임의 회원이다. 김선숙은 학생운동으로 징계를 받은 후 졸업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살고 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이영진(시인)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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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종합기획부(02-3701-1156~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46)
[출처] [실록 민주화운동](11)이화여대의 반독재투쟁|작성자 바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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