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배반(背反)의 정사(情事) 1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애절령이 한정낭낭을 찾은 것은 약 한 달이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애절령은 일체 도를 단련하지 않았으며, 오직 낚싯대를 드리우고 소일한 것이 전부였다. 그가 금검화원에 있는 한정낭낭을 찾아 갔을 때, 그녀는 화원 안에서 꽃을 손질하고 있었다. 툭― 투툭―! 그녀는 전도(剪刀)를 손에 들고 꽃가지를 잘라내고 있었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이 자신을 찾아오자 얼굴 가득 자애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대는 천하제일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 한정낭낭이 애절령에게 물은 첫마디였다. 애절령은 담담하게 한정낭낭을 바라봤다. "남아라면 야망이 없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흐음, 하지만이라니……?" "낭낭께서 절 문하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신다면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애절령의 음성은 나직했으되 단호하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의 모습에서 도저히 꺾지 못할 사나이의 결의를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바라보던 한정낭낭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난 지금껏 한 명의 기재(奇才)를 찾고 있었다. 흔히 세인들에 의해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그 자를 죽이기 위해!" "예에?" "세상 사람들은 모를 것이되, 그 자는 천하제일의 위선자다. 본녀는 필히 그 자를 죽여야만 할 한(恨)을 지니고 있지." "아……." 한정낭낭의 눈 속에서 뜨거운 불길이 솟아났다. 증오와 통한의 눈빛이다. 대체, 한정낭낭은 뇌정륭에게 얼마나 깊은 원한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애절령은 문득 한정낭낭에게 묘한 동정심을 느꼈다. 한정낭낭이 한 서린 음성으로 말을 이어갔다. "뇌정륭……! 그는 천하제일의 위선자(僞善者)이다. 그는 그 위선으로 본녀의 가문을 피로 씻었지." 애절령은 흠칫했다. '뇌정륭이 위선자라고……? 내가 본 뇌정륭은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애절령은 되묻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한정낭낭을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문득 한정낭낭의 눈빛이 칼날보다도 강렬해졌다. "뇌정륭은 나의 부친을 비겁하게 제거했다. 과거 내 선부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뇌정륭은 부친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가 부친께서 가장 사랑하는 것을 훔쳐내어 이성을 잃게 만든 다음, 그를 영원히 잠재웠다." '천하제일인……? 그렇다면 한정낭낭의 생부는……?' 애절령이 의아해할 때였다. 한정낭낭이 애절령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지금까지 밝힐 기회가 없었지만 지금에서야 본녀의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본녀의 가문은 뇌정륭에 의해 쓰러진 지하일맥 전륜철왕부(戰輪天王府)란다." 아아,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랴. 지하일맥(地下一脈) 천륜철왕부! 무림사상 가장 강하고 거대한 마도세력이라 불려지는 집단. 한정낭낭이 바로 그 전륜철왕부의 후예(後裔)라는 것이니……. 전륜철왕부는 당시 천하를 지배하던 음부십삼맥(陰府十三脈)이라는 열세 개의 마도세력을 통합하여 무림에 마도의 선풍을 일으켰던 단체였다. 그들이 지닌 바 힘은 무림의 어떤 세력을 합쳐도 막아낼 수 없는 막강한 것이었다. 하되 이십 년 전, 전륜철왕부는 불과 이십대의 한 청년영웅에게 무참하게 붕괴되고 말았으니……. 바로 그 청년이 당금의 무림최고인이라 불리는 군왕정천 뇌정륭인 것이다. 애절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한정낭낭이 전륜철왕부의 후예였다니. 그래서 한이 그토록 깊었던 것인가?' 한정낭낭의 한 서린 음성은 계속되었다. "당시 선부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 뇌정륭은 부친을 제거하기 위해 치사하고 비겁한 음모를 꾸몄다. 부친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납치하여 부친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고 수천리를 달려오게 만들었다. 지친 자와 기다린 자의 싸움……! 그 결과는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푸른 광망이 한정낭낭의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잠시 후,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따라 오너라!" 그녀는 대뜸 애절령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안내하기 시작했다. 2 애절령이 한정낭낭을 따라 간 곳은 하나의 지하석실(地下石室)이었다. 지하석실―. 사방이 완전히 밀폐된 어두운 공간, 넓은 지하석실은 실로 적요한 적막감이 휘어감고 있었다. 석실 중앙에는 하나의 길다란 수정관(水晶棺)이 놓여 있었다. 수정관은 투명하기 이를 데 없어 안이 전부 들여다보였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을 수정관 앞까지 데리고 갔다. 거기, 한 인물이 죽은 듯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강인하고 위맹해 보이는 오십대의 흑의장년인(黑衣長年人). 특이한 것은, 흑의인의 전신이 흡사 거북등처럼 균열(龜裂)되다시피 찢겨진 모습으로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흑포인이 엄청난 강기( 氣)에 의해 타격을 받고 죽어 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비록 죽었으되, 흑의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마기(魔氣)가 뿜어지고 있었다. 츠으으― 츠으―. 마기는 맛으로 느껴질 만큼 지독하고 가공했다. 하되 그 기운은 흑의인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흑의 인은 가슴에 부러진 한 자루의 검(劍)을 안고 있었다. 마기는 그 부러진 검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르륵! 수정관 속의 흑의인을 바라보던 한정낭낭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통한의 눈물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바로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 내가 그 위선자에게 붙잡혀 간 것을 아시고 폐관수련하던 것까지 팽개치고 하란산(賀蘭山)에서 이곳까지 쉬지 않고 어풍비행(御風飛行)해 날아오셨지. 그 바람에 아버님께서는 잔뜩 탈진한 상태에서 그 자와 대결한 것……." "……으음!" "결국 그 자는 전륜천왕이라 불리시던 아버님을 꺾고 천하제일인의 지위를 쟁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되, 그것은 비겁하기 짝이 없는 승리이다. 차마 승리라고 말할 수 없는……! 세상사람들은 그 위선적인 뇌정륭의 진면목을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의 업적을 소리 높여 이야기할 뿐이다." 한정낭낭의 얼굴에 처절한 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이 메는 듯 그녀는 나중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윽고, 그녀가 어느 정도 냉정을 찾은 듯 애절령을 바라봤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과거사를 너에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대가 내 아들과 같은 느낌 때문인지도……." 애절령을 바라보는 한정낭낭의 눈. 그 눈은 자애롭고 인자한 빛이 가득 넘쳐 흐르고 있었다. 애절령은 슬쩍 그녀의 눈길을 피했다. 더 이상 그녀의 감정에 빠져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정낭낭이 돌연 수정관을 열었다. 덜컹! 이어 그녀는 죽은 전륜천왕의 가슴에 안겨 있던 부러진 반 토막의 검(劍)을 꺼내 들었다. 츠으으― 츠츠츠―. 손으로 집자 더욱 무서운 마기가 뿜어나는 검이었다. 핏빛의 혈검(血劍)! 한정낭낭은 그 검을 애절령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일컬어 마검파천황(魔劍破天皇)이라 한다. 이것은 천하의 다시없는 위선자 뇌정륭의 가슴에 일검을 가할 수 있는 자만이 소유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넌 검의 주인으로서 최적격자라 할 수 있다." "그… 그것은……." 애절령은 애써 사양하려 했다. 그러나 한정낭낭의 권유는 간곡했다. 그녀는 거듭 애절령에게 검을 내밀었고, 애절령은 그녀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검을 받아들게 되었다. 피를 머금은 듯 새빨간 마검(魔劍)! 일컬어 마검파천황. 하되 애절령이 어찌 알랴? 한정낭낭이 건네어준 마검파천황에 실로 엄청난 내력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마도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한 조직이라는 전륜철왕부의 절대지존령(絶代之尊令)이며, 또한 숨어 있는 전륜철왕부의 마공비고(魔功秘庫)를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던 것이다. 애절령은 또한 한정낭낭의 눈 속으로 한 가닥 의미심장한 빛이 스쳐 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어 한정낭낭이 슬며시 손을 앞쪽으로 흔들었다. 스으으―! 순간 그 손짓에 의해 벽 쪽에 있던 하나의 금잔(金盞)과 수정으로 만든 호로병 하나가 손안으로 빨려들었다. 놀라운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수법이다. 그리고 그녀는 금잔에 호로병 안에 담겨 있는 술(酒)을 따랐다. 호박색이 나는 술이 금잔에 가득 채워졌다. 순간 향기로운 내음이 일시에 석실 안에 가득 퍼져 흘렀다. 한정낭낭은 그 술잔을 애절령에게 내밀었다. "한잔 마시거라." "예에, 그게 무엇인지요?" "이것을 마시면 일시에 일갑자의 내공(內功)을 증진시킬 수가 있다. 이름하여 혈화영롱액(血花玲瓏液)이라는 것이지." 애절령은 차마 사양하지 못하고 술잔을 받았다. 이어 주저 없이 받아서 마셔 버렸다. '으음……!' 애절령은 일순간 속이 불타는 듯한 엄청난 열기(熱氣)에 휘말렸다. 그가 마신 술에는 뜨겁기 그지없는 열기가 숨어 있었다. 이어 그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흘렀다. 얼마나 뜨거운 열기인지 애절령의 정신이 일시에 혼미해졌다. 애절령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는 몸을 주체할 수도 없는 현기증을 느끼며 한정낭낭을 바라봤다. "어… 어이해, 술 속에……?" 그 말과 함께 애절령의 몸이 스르르 바닥으로 쓰러져 갔다. 그는 스러지는 순간 혼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그 눈에 의혹이 가득 떠올라 있다. 한정낭낭이 쓰러진 애절령을 묵묵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다분히 미안해하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하는 수 없었다. 너의 고집은 너무도 강해 결코 내 말을 뜻대로 따라주지 않을 것 같았기에……." 어느 순간, 한정낭낭은 손뼉을 쳤다. 순간 한 명의 시녀가 공손하게 시립했다. 한정낭낭은 애절령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공자를 내실로 모시거라." "예!" 시녀가 물러간 후, 한정낭낭의 차가운 두 눈에 다분히 고뇌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으음……! 그 아이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원망하지나 않을는지? 하되 나는 그 아이에게 진정 모든 것을 주고 싶다. 그것은 내 복수 이전의 감정이다. 진정……." 3 애절령을 내실에 눕힌 후, 잠시 후 한정낭낭이 들른 곳은 유불영의 거처였다. 유불영은 막 목욕을 마친 듯 한정낭낭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유불영의 얼굴은 잠시 후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한정낭낭에게 실로 충격적인 명령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정낭낭은 유불영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 ― 애절령의 여인이 되거라! 유불영이 펄쩍 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 사부님 ! 그… 그 자에게 안기라니요? 그처럼 예의도 모르고 무식한 자의 여자가 되어야 하다니요?" 유불영의 얼굴은 정녕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한정낭낭의 얼굴은 위엄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유불영을 향해 차마 거역할 수 없는 근엄한 얼굴로 명령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넌 그 아이에게 안겨라. 너는 그 아이는 반드시 합환(合歡)의 경직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너의 복수를 위한 일이고, 나의 복수를 위한 일이며, 그 아이를 위한 일이다." 유불영은 털썩 꿇어앉았다. "아아, 사부님! 차라리 소녀를 죽여 주십시오. 짐승 같은 그 자에게 순결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유불영의 두 눈에서는 서러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애절령에게 몸을 바치게 된다는 것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바 없었다. 또한 도저히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정낭낭이 더욱 근엄하게 명령했다. "불영! 넌 오직 오늘을 위해 키워졌다. 오늘을 위해 난 너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이제 넌 본녀를 위해 과거의 은혜를 갚을 때가 온 것이다. 만에 하나, 과거 그 비적들의 손에 겁탈을 당할 때 본녀가 널 구해 주지 않았다면 넌 실로 비참하게 무너졌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쯤은 어느 거리의 창기로 전락해 있을지도……. 넌 그 은덕도 잊었단 말이냐?" "아… 아닙니다. 어찌 사부의 구해주시고 키워주신 은덕을 모르겠는지요. 하지만 제자는 도저히 그 자에게 몸을 맡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정낭낭의 얼굴은 더욱 근엄해졌다. "또한 네가 지금껏 구결로만 알고 있는 봉비황무접천신공(鳳飛凰舞接天神功)……! 그 원음지기(元陰之氣)를 지금까지 고이 간직하게 했던 것은 한 사내를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아……, 아무리 그렇다고 하나……." "불영, 넌 이 사부의 한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굳이 네가 죽음으로 마다하겠다면 강요할 마음까지는 없다. 그렇다면 절령 그 아이는 끓어오르는 음욕(淫慾)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 혈맥이 터져 죽어 가겠지. 단지 계집종 하나로 그 음욕을 해소하게 한다면 어렵지 않게 목숨은 건질 수 있겠으나……." 한정낭낭의 얼굴도 굳어졌다. 유불영의 얼굴은 더욱 굳어졌다. 유불영은 한정낭낭이 어떤 한을 지녔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 이래, 그녀는 숱하게 사부의 한에 대해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를 들어오지 않았던가. 하되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낯선 사내에게 자신이 간직해 왔던 평생의 원음지기와 순결을 전부 주어가며 희생당할 수는 없다 여겼다. 어쩌면, 그녀가 지금 거부하는 것은 그 사내에 대한 강한 반발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한정낭낭은 어릴 때 유불영을 구한 이래, 그녀에게 봉비황무접천신공이라는 무공을 연마시켜 왔다. 봉비황무접천신공! 전륜철왕부의 문을 여는 자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원음지기가 그것이다. 유불영은 그 문을 여는 자에게 바치기 위해 오랫동안 봉비황무접천신공을 익혀 와야 했던 것이다. 하되, 지금 그녀는 원음진기를 낯선 사내에게 주기를 목숨을 걸고 거부할 눈치였다. 한정낭낭은 유불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네가 거부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되, 그렇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그가 마검파천황검주(魔劍破天皇劍主)가 될 재목이라는 것……." "마… 마검파천검황주……." 유불영의 숨소리가 일시에 높아졌다. "그렇다. 난 이미 그를 마검파천황검주로 내정했다. 그는 이미 전륜철왕부의 비고(秘庫)를 열 수 있는 마검파천황을 얻었다. 정히 네가 마검파천황검주의 부인(婦人)이 될 행운을 박차겠다면 사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그를 위해 딴 여인을 찾아볼 수밖에……." 한정낭낭은 얼굴을 싸늘히 굳히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에는 다분히 애석하다는 빛이 떠올라 있었다. 순간 유불영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마검파천황……! 그것은 지하에 묻혀 있다는 전륜천왕부의 금지(禁地)를 여는 유일한 열쇠거늘, 그것이 이미 그 자의 것이 되었다고……?' 충격과 놀라움이다. 그녀는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리라 생각했던 물건이건만, 이미 그것이 애절령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니……. 한정낭낭이 유불영을 내려다보다 걸어나갔다. 순간 유불영은 급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사부님. 사부님의 말씀에 따르겠어요." 어찌된 일인가? 유불영은 마지막에 돌연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녀는 애절령을 위해 결국 자신을 희생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한정낭낭의 표정이 그제서야 풀렸다. "호호……, 불영. 난 네가 결국은 이 사부를 거역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그럼 금방 준비하도록 하자." 한정낭낭은 만족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유불영의 허락을 얻어냈기에 다분히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하기에 순간 유불영의 눈 속 깊은 곳에서 스쳐 가는 한 가닥 묘한 기광(奇光)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4 내실(內室)―. 무척이나 아늑하고 화려해 보이는 내실이었다. 사방에는 십여 개의 촛불이 은은하게 일렁이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내실에는 화려한 원앙금침이 깔려 있었다. 일견 누가 보아도 신혼초야(新婚初夜)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였을까? 원앙금침 위에서 가쁜 호흡소리가 들려나고 있었다. "후우…… 후욱……." 그 위, 한 사내가 혼절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애절령이었다. 그가 누운 곳은 한정낭낭이 특별히 마련한 장소였다. 한 마디로 말해 유불영과 초야(初夜)를 치룰 방. 그곳에서 애절령은 가쁜 호흡을 불어내며 누워 있었다. 그는 여태껏 혼절상태였다. 방안에는 오직 그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애절령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되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쉴 뿐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한정낭낭에 의해 마혈(麻穴)이 전부 제압당한 상태였다. 애절령은 전신을 지배하는 뜨거운 열기(熱氣)로 혈맥이 터져 나갈 듯한 고통에 떨고 있었다. 애절령을 지배하는 것은 욕념(慾念)이었다. 무서운 본능(本能)에 그의 전신은 불살라져 버리는 듯 뜨겁게 타고 있었다. 지금 애절령의 옷은 모조리 벗겨진 전라(全裸)였다. 그의 하단전은 무섭게 팽창 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한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섰다. 유불영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아……, 이십 년 동안 고이 간직해 온 순결과, 원음지기를 저 짐승 같은 자에게 주어야 한다니…….'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발길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하되 주체할 수 없게 전신이 흥분되는 것은 정녕 이율배반적인 감정이었다. "후우…… 허억……." 가쁜 사내의 숨소리를 들었을 때 유불영의 흥분은 극에 달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절대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당부를 한정낭낭에게 받은 바 있다. 하되, 그녀의 눈빛은 지금 한 가닥 사이(邪異)한 빛을 담고 있었다. '절대 내 원음지기를 저 자에게 바칠 순 없어. 사부에게는 사부의 한이 있듯…… 나에게는 나대로의 처절한 한이 있지. 그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저 자의 희생물이 될 순 없어.' 유불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지독한 증오와 원독의 빛이 일렁거렸다. 이윽고, 단호한 결심을 굳힌 후 유불영은 애절령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어 천천히 원앙금침을 걷어 올렸다. 찰나, 짧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 유불영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의 나신(裸身)이 거기 누워 있었다. 군살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체구…… 그리고 보라, 하단전 쪽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하고 우람찬 사내의 상징을……! 유불영은 오만하고 독선적이지만 아직까지 사내를 모르는 순결한 처녀의 몸이었다. 처녀로서 사내의 적나라한 나신을 쳐다본다는 것은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러나, 유불영은 점차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다시 시선을 애절령에게 주었다. 이어 옷자락에 서서히 손을 가져다 댔다. 나비가 날아갈듯 옷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사르르륵―.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나신(裸身)이 일렁이는 촛불 아래 드러나기 시작했다. 좁고도 둥그스름한 어깨, 두 개의 가슴은 풍만하게 돌출해 있는 바, 흡사 수밀도(水蜜桃)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어 엎어놓은 듯했다. 풍만한 가슴은 조금도 아래로 쳐지지 않았고, 그 양쪽 끝에는 너무도 작고 앙증맞은 열매가 톡 얹혀져 있었다. 아직 사내를 모르는 두 개의 유실은 너무도 작고 귀여웠다. 기름지고 탄력 있는 아랫배의 눈부신 살결과,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둔부, 그리고 쭉 뻗어 내린 흠집 하나 없는 두 다리……. 여인의 삼각지역에서는 아지랑이 같은 봄풀이 풋풋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신비의 계곡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가히 완벽한 여인의 나신. 나신은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신비하고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하되 그 아름다움을 보아줄 사내는 정신을 잃고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그저 가쁜 호흡을 불어낼 뿐이다. 어느 순간, 악독한 결심이 유불령의 눈 속으로 스쳐 갔다. '그래, 야망과 한(恨)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두려워하랴.' 유불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주저하지 않고 몸을 애절령의 몸 위로 포개어져 갔다. 지극히 조심스러운 동작이다. 후욱! 찰나, 촛불이 전부 꺼지고 방안에 칠흑의 어둠이 찾아 들었다. 유불영은 사내의 뜨거운 피부에 자신의 몸이 닿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전신세포가 일시에 곤두서는 듯한 강렬한 감촉과 흥분…… 사내의 몸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유불영은 자신의 하체를 사내의 그곳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흡사 말을 탈 듯한 기마자세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두 눈이 문득 커지기 시작했다. 여인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곳. 그곳으로부터 사내의 곤두선 상징의 육중한 감촉이 둔탁하게 느껴진 것이다. 애무는 없었지만 유불영의 몸도 어느덧 달아오르고 있었다. 초야의 분위기가 그녀의 육체를 달뜨게 했다. 그 은밀한 계곡이 축축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곳으로 사내의 강인한 상징이 밀려들기 일보직전이었다. 유불영은 그 감촉에 진저리를 쳤다. '아, 그 엄청난 것이 내 몸 안에…….' 그녀는 조금 전 곤두선 사내의 상징을 적나라하게 본 바 있다. 도저히 그것이 자신의 몸 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쾌락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 더 앞서는 것이 있었다. '그래, 내 야먕과 한(恨)을 위해서라면……!' 어느 순간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어 둔부를 힘있게 아래로 내리 눌렀다. 찰나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신비계곡이 일시에 터져 나가는 듯한 가공한 파과(破瓜)의 고통이 밀려드는 것을……! 그것은 거대한 불기둥이 하복부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일시에 관통하는 듯한 극통이었다. 영혼이 일시에 하얘졌다. 그녀는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너무 큰 고통인지라 비명은 쉽게 흘러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성이 흘러나온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하아― 악!" 5 깊은 늪이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하고 부드러운 늪……. 애절령은 자신의 몸이 한없는 늪 속으로 함몰하는 매끄러운 감촉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것은 정녕 환상의 감촉이었다. 파과(破瓜)의 순간, 유불영은 손을 내밀어 애절령의 마혈을 풀어 주었다. 정신은 혼미하다. 하되 애절령은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을 타고 누르는 하나의 희멀건 여체(女體)가 보이고, 그리고 또 있다. 자신의 가장 예민하고 뜨거운 욕념이 가득 응축되어 있는 곳으로 밀착된 여인의 늪……! 아니 그의 몸은 여체의 가장 깊숙한 곳에 파고든 상태였다. 그곳에서 정녕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쾌락과 열락의 뜨거움이 전해져 왔다. 그는 자신의 몸 위에 기마자세로 앉아 있는 여인의 얼굴을 흘낏 볼 수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는가? 어찌하여 이런 상황이 내게……?' 애절령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욕념 가운데 점차 이성을 되찾아 갔다. 그는 자신이 한정낭낭에게 술을 받아마신 후 혼절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자신의 가장 예민한 곳, 그곳으로부터 여인의 뜨거운 내부가 느끼어진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자신에게 밀려드는 묘한 기운이 있다. 한 가닥 얼음장보다도 서늘하고 차가운 한기(寒氣)랄까? 애절령은 어떤 고통도 참아낼 수 있는 극정지심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그가 어려서 이래 철저한 고독과 인내의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굳이 한정낭낭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이 여인에게 미안할 뿐…….' 애절령은 모든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정낭낭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고자 하며, 왜 유불영이 자신에게 순결지신을 바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아마도 그것은 한정낭낭의 강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때, 귓전으로 한 줄기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서로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 비수처럼 차가운 유불영의 음성에 애절령은 쓴웃음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하에서도 유불영의 독선과 오만은 사라지지 않았던가. '내가 밉기도 하겠지. 돌연 모든 것을 잃게 되었으니…….' 애절령은 자신을 타고 누른 유불영의 차가운 눈빛을 이렇게 이해했다. 유불영의 눈빛은 얼음장 그 자체였다. 대저 사내와 합환(合歡)하는 여인의 눈빛이 이리도 차가울 수가 있는 것일까? 그녀의 음성은 계속 애절령의 귀에 들려왔다. "진기를 운용해서 내 원음지기를 받아들여. 당신이 지금부터 연성해야 할 무공은 혈영제천마공(血影帝天魔功)이라는 것……! 나의 봉비황무접천신공은 당신이 호응을 할 때에만 활용이 가능해지지." 애절령은 한정낭낭에게 얼핏 혈영제천마공을 익히는 수법을 전수 받은 바 있다. 지극한 원음지기를 지닌 여인의 음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 무공의 요체이다. 이것을 완전 터득할 경우 일신이 핏빛으로 물들고, 몸 주위 삼장이 내는 혈무(血霧)의 강기에 휩싸이게 된다던가? 단숨에 이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일대마공을 한정낭낭은 유불영을 통해 전수하고자 하는 것이다. 애절령은 처음 진기를 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전신혈맥은 무섭게 팽창되어 갔다. 어느 순간 애절령은 서서히 진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유불영의 원음지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진기를 거부하면 애절령은 혈맥이 터져 죽어가야 하고, 유불영 또한 전신혈맥이 차갑게 굳어져 죽어가게 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두 남녀는 이제 넘어서는 안 될 합환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직접 범하지 않았다는 상황이 애절령에게 약간의 죄의식을 덜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진기를 운용한순간, 정녕 극랭한 한 줄기 한기(寒氣)가 몸 안으로 밀려들었다. 한음진기는 밀착된 두 남녀의 하복부 쪽에서 일어나 애절령의 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것은 장강대해와 같은 힘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절령은 잘 안다. 원음지기를 모조리 빼앗긴 유불영. 비록 목숨에 지장이 없을 것이되, 아마도 그녀는 일초식 무공도 모를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미안하오, 용서를……!' 애절령의 행동이 급박해졌다. 그는 자신의 몸을 아래쪽에서부터 육중하게 밀어붙였다. 순간 유불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짐을 애절령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절정(絶頂)의 순간 유불영의 원음지기는 마지막 한줌까지 애절령에게 빨려들 것이며, 그때 애절령은 혈영제천마공은 완전히 연성되게 되리라. 언제부터인가? 츠으으― 츠으! 애절령의 몸 주위로 시뻘건 혈무(血霧)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혈영제천마공을 익힐 때 나타나는 자연적인 호신강기(護身 氣)였다. 애절령의 동작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그럴수록 유불영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어느 순간, 유불영은 애절령을 내려다보며 애처로운 신음성을 내질렀다. "아아……, 제발 제발 그만……." 그 말에 애절령은 죄의식을 느끼며 동작을 멈추었다. 일순 그의 진기가 크게 흔들렸다. 순간, 야릇한 한 줄기 미소가 유불영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미소였다. 찰나 애절령의 몸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순간 애절령은 하단전 쪽에서 무서운 힘(力)이 빨려나가는 기운을 느꼈다. 밀착된 유불영의 몸에서 무서운 흡인력(吸引力)이 일어나고 있었다. 애절령의 진기가 흐트러진 순간, 유불영의 몸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고, 그 힘이 애절령의 진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애절령의 눈빛이 일순간 크게 흔들렸다. '아아, 이 여인이 내 진기를 끌어들이고자 하다니…….' 정녕 뜻밖의 상황이었다. 유불영은 한정낭낭의 뜻을 거역하고 오히려 애절령의 진기를 빼앗고 있었다. 애절령은 눈을 꼭 감았다. '아아……, 진기는 능히 빼앗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저 여인은 저항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가 되어 단숨에 폐인이 되든지, 죽어가게 된다.' 어느 한쪽이든 한 사람이 희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애절령은 진기를 끌어들이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이 살고자 유불영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다 여겼다. 그것이 애절령이었다. 그는 너무도 인간적이고 정의롭기에, 차마 자신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유불영은 그런 애절령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다고 여겼다. '호호……! 드디어…….' 그녀는 눈을 감은 누운 애절령을 내려다보았다. 애절령은 모든 힘을 빼고 무저항으로 유불영에게 몸을 맡겼다. 유불영의 몸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애절령이 주도하던 정사(情事)였다. 하지만 지금은 유불영에 의해 주도되는 정사였다. 격렬한 통증이 수반되는 하복부의 깊은 곳으로부터, 무서운 진기가 유불영의 몸 안으로 거듭 빨려들었다. 그런 가운데, 유불영은 참을 수 없는 쾌락과 열락을 느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아… 안 돼! 이따위 작자에게 쾌락을 느끼다니……. 머지 않아 피를 토하고 죽어갈 작가가 아닌가?' 유불영은 애써 자신의 몸에 피어나는 쾌락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육체의 쾌락이란 쉽사리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애절령의 몸에서 거대한 양강지력(陽 之力)이 빨려드는 바람에 전신이 불타버리는 듯하다. 문득, 거대한 쾌락의 불기둥 하나가 영혼을 관통하는 듯한 극렬한 감각이 전신을 후려갈겼다. 찰나 유불영은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아아악……." 유불영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시음이 흘러나오는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이어 힘있게 하반신을 사내의 몸에 밀착시켰다. 뜨거운 양강지력이 무섭게 그녀의 몸 속으로 빨려들었다. 쾌락이 오직 한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화려한 정사(情事)였다. 어느 순간, 대폭발이 일어났다. 화려한 정사의 절정(絶頂)은 한 사내의 처절한 파멸을, 그리고 한 여인을 악녀(惡女)로 새로이 탄생시켰다. "까르르르, 까르르……." 절정의 순간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유불영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순간 애절령은 끝없는 혼절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6 유불영은 모든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것은 악마의 미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고 애절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절령은 엄청난 허탈감을 느끼며 힘 없이 누워 있었다. "……." 의식이 혼미하다. 겨우 눈앞에 있는 유불영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랄까? 이미 애절령의 몸에는 진기 한 점 남아 있지 않았다. 지닌바 진기를 모조리 빼앗겨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완벽한 폐인이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유불영의 전신에서는 은은한 핏빛 운무(雲霧)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애절령이 익힐 혈영제천마공을 오히려 익힌 때문이었다. "호호……." 애절령을 내려다보며 웃는 유불영.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악하고 비정하다. 어느 틈인가? 그녀의 손에 부러진 한 자루의 핏빛 혈검(血檢)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륜철왕부의 문을 열 수 있다는 마검파천황(魔劍破天皇)이 아니랴. 애절령은 한정낭낭이 주었던 마검파천황까지 그녀에게 빼앗긴 것이다. 그러하되, 유불영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 듯했다. "난 네놈에게 원한이 있지. 네놈은 날 처음 보았을 때 처참한 치욕을 주었지. 또한 내 몸을 정복한 최초의 사내이기도 하지. 하기에 난 네놈을 죽일 작정이다." 번쩍! 유불영은 마검파천황을 허공으로 쳐들었다. 검을 내리찍기만 한다면 애절령은 차가운 한 구의 시체가 되어 죽어가리라. "……." 올려다보는 애절령의 눈빛은 허탈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두려움이라든가 분노심마저도……. 그는 정녕 자신을 파멸시킨 유불영에게 어떠한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막 검을 찌르기 직전, 유불영은 이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한정낭낭에게 처절한 한이 있듯, 나 또한 한(恨)이 있다. 나의 한은 바로 사부라 부르던 한정낭낭, 바로 그녀에 대한 한이지." "……." 애절령은 대답조차 못했다. 그는 멍하니 유불영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유불영의 두 눈은 독기로 가득 물들어 갔다. "전륜철왕부는 군왕정천 뇌정륭에게 철저하게 궤멸 당하고 지하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되, 전륜천왕부가 엄청난 힘을 갖추기까지는 또다른 세력들을 짓밟고 올라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음부십삼맥(陰府十三脈)……, 가장 뛰어난 열 세 개의 마도세력이라는 음부십삼맥을 피로 물들이고 그들은 하나의 조직을 완성한 것이다." 그렇다. 전륜철왕부가 과거 음부십삼맥을 하나로 통합하여 욱일승천으로 일어섰던 기세를 세인들은 잘 알고 있다. 유불영의 눈빛은 냉소의 빛으로 바뀐다. "호호……, 나의 신분은 바로 음부십삼맥 중의 한 세력인 혈화무루(血花武樓)의 후예……. 나는 전륜철왕부에게 철저하게 지배당해왔던 가문의 한을 풀고자 몰래 한정낭낭의 제자로 위장한 채 십이 년을 살아온 것이다. 물론 나이 어릴 때 당할 뻔했던 겁탈의 순간도 위장된 것이고……, 호호호!" 아아! 무서운 말이었다. 유불영은 오직 가문의 한을 위해 한정낭낭의 문하에서 십이 년 동안 자신을 속여 왔단 말인가? ― 나는 음부십삼맥의 후예! ― 원한을 갚기 위해 지금껏 숨을 죽이고 지내왔다. 유불영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말. 애절령은 혼미한 가운데 내심 탄식을 해야 흘렸다. '아아……, 원한이 무엇이고 증오가 또 무엇이길래……?' 유불영의 떠오르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유불영은 다시 허공으로 검을 치켜들었다. "이제는 난 모든 말을 했다. 남은 것은 네가 죽어주는 것뿐……." 휘익! 유불영은 검을 내리찍어 갔다. 그때 애절령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유불영을 올려다봤다. "……." 허탈한 눈이되, 그 끝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만큼 맑고 그윽한 눈빛이었다. 모든 매혹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눈이랄까? 그 눈에는 여인의 혼(魂)을 빼앗아 버릴 순수함과 매력이 내포되어 있다. '아……, 저 눈…….' 유불영은 자신도 모르게 내심 외쳤다. 그녀는 손을 멈칫했으며, 한동안 부르르 떨며 애절령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검을 내렸다. 생각을 바꾼 것일까? 유불영은 손을 내리며 대신 얼굴을 애절령에게 가져갔다. 뜨거운 입술이 애절령의 뺨에 천천히 대어졌다. 이어 그녀는 눈을 찡긋했다. "내 몸을 처음으로 안은 사람……! 부디 신의 행운으로 살아나기를……." 유불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아주 느릿하게 걸어나갔으며, 잠시 후 그녀의 몸은 더 이상 방안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방안에는 다만 한 가닥 그윽한 그녀의 체향(體香)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두운 야공(夜空) 속으로, 한 점 부운(浮雲)처럼 날아가 버린 것이다. 애절령의 모든 것을 앗아간 유불영. 아마도 그녀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시는……!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즐독 ㄳ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