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백치미녀(白痴美女)의 사랑 1 낙양(洛陽). 고래로 숱한 왕조들의 도읍지였던 역사의 고도(古都)이다. 낙양은 학문의 도시이다. 그래서 항상 조용하고 적요함이 도시 도처에 머물러 있다. 하되 근래의 낙양은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는 환락(歡樂)의 도시로 화해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이곳 낙양에 하나의 집단이 자리잡은 이후부터였다. 사람들은 그 집단을 일컬어 녹수청청궁(綠水靑靑宮)이라고 불렀다. 녹수청청궁! 낙양의 가장 번화한 곳에 위치한 거대한 궁(宮)이었다. 마치 왕궁을 방불케 할 듯 아름다운 절경 속에 자리잡은 궁이었다. 녹수청청궁은 나타난 지 수년만에 강호의 밤(夜)을 주름잡아 버렸다. 세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밤의 제황(帝皇)이라 불렀다. 근래 녹수청청궁은 철접세가(鐵蝶世家)와 더불어 강호의 가장 뛰어난 이대 신흥세력이라 불린다. 하되 사람들은 모른다. 녹수청청궁의 진정한 정체는 바로 녹림(綠林)을 모두 통합한 녹림맹(綠林盟)이라는 것을……! 그리고 녹수청청궁이 녹림맹의 가장 중요한 분타라는 것을……! 녹수청청궁! 그 웅장함은 녹음(綠陰)과 절경 속에 파묻혀 있었다. 어딜 둘러보아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전각(殿閣)과 정원들뿐.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쾌락과 환희를 안겨주는 장소였다. 이곳에 오면 가히 황제와도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단 일신에 적어도 황금 일만냥(一萬兩)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지만! 녹수청청루(綠水靑靑樓)! 녹수청청궁에서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위치한 전각이다. 이곳은 녹수청청궁의 인물들에게도 철저한 금역(禁域)으로 화해 있는 곳이다. 녹수청청루에는 이곳을 이끌어 가는 한 여인이 기거하고 있기 때문인 바, 사람들은 녹수청청궁의 궁주(宮主)가 동영의 핏줄을 타고난 여인이라 했던가? 그녀의 모습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하되 멀리서 그녀를 지켜본 바에 따르면 그녀는 가히 지상제일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했다. 나이는 십칠팔 세쯤이나 되었을까? 사람들은 녹수청청궁의 궁주가 일신에 커다란 비밀을 지니고 있는 여인이란 것을 아직 모른다. 그녀에게 이미 내정된 남편이 있으며, 그녀가 매일 남편을 기다리며 눈물짓고 있다는 것을……. 단지, 그들은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 오늘도 혈안이 되어 이곳을 찾아든다. 초우(草雨). 녹수청청궁의 궁주(宮主)로 알려진 그 여인의 이름은 초우라고 했으며, 신분은 동영출신이라던가? 그녀는 오늘도 자신의 거처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히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녹의여인(綠衣女人). 십칠팔 세쯤이나 되었을까? 주위의 꽃들이 무색할 정도로 청초하고 유려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늘씬한 미녀. 그 년은 녹수청청루의 안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가련해 보이는 청순한 미녀. 그녀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아, 그녀는 바로 동영 광풍무막의 후예였던 초우가 아닌가. 애절령이 뜻밖에 부인으로 맞아들였던 동영의 작은 소녀! 바로 그 초우가 녹수청청궁의 궁주였던가. 그녀의 얼굴에는 진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가득하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그 분, 그 분께서는 오늘도 오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가 이곳으로 온 지 벌써 사 년, 그 동안 한 번도 그 분의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녀의 일생은 이미 정해졌다.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초우가 기다리는 사람. 그는 바로 애절령이었다. 그녀는 녹수청청궁의 궁주가 된 이래로 하루도 빠짐없이 애절령을 기다려 왔다. '아직 그 분의 소식을 알 길이 없다. 무사들을 풀어 흑풍사를 샅샅이 전부 살펴보았건만……, 아직 그 분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분은 대체 어디에 계신 것일까?' 초우. 그녀가 한없이 상념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소리 없이 하나의 그림자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눈부신 금의(錦衣)를 걸친 꼽추청년. 하되 차림새와는 다르게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를 지닌 자였다. 헌데 기이한 것은 꼽추청년의 손가락이 하나 같이 절반 이상 잘려져 나가 있다는 것! 아아, 보라! 그 꼽추청년의 모습은 바로 소아귀가 아닌가. 흑풍사 시절 애절령의 하나뿐인 친구였고, 어느 순간 초우를 납치하여 도망쳤던 소년. 그 소년이 벌써 어른으로 장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초우는 소아귀가 방안으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상념이 너무 깊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초우를 바라보던 소아귀의 눈 속에 묘한 불길이 타올랐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질투심과 증오심이었다. '빌어먹을, 오늘도 저 여인은 변함없이 그 놈을 생각하고 있다. 이곳으로 온 지 벌써 사 년이 흘렀건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놈의 그림자에 빠져 있을 뿐이다.' 그 놈…….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애절령을 뜻하는 말이었다. '대체 언제나 초우의 가슴속에서는 그 놈의 그림자가 사라질는지……? 나는 도저히 저 여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수 없는 존재란 말인가?' 그러나 그의 일그러진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소아귀는 표정을 온화하게 바꾸며 그녀를 불렀다. "초우! 오늘도 또 그를 기다리고 있군." 소아귀의 모습은 다분히 공손하다. 마치 상전(上典)을 대하는 듯한 태도랄까? 하되 호칭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초우가 홀낏 소아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돌려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것이 소녀의 운명이며, 삶이라는 것을 가가(哥哥)께서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초우의 음성은 더할 수 없이 차갑다. 소아귀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건 그렇고……, 그 분의 소식은 없나요?" "아직……." "아아! 도대체 나는 언제나 그 분을 뵈올 수 있는 건가요?" "초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오늘도 나는 노력하고 있다. 그 친구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애절령의 소식을 묻는 것은 매일매일의 일과이다. 과거, 초우는 소아귀에게 납치되어 이곳으로 왔다. 초우가 소아귀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납치해 온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그녀는 애절령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살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아귀가 꼭 애절령을 데려다 주겠다는 약속에 마음을 고쳐먹었고, 오늘까지 애절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애절령을 향한 초우의 마음은 절대였다. 세상의 그 누구라 하더라도 지금 초우의 마음속에 헤집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난 사 년 동안, 소아귀는 혼신을 다해 초우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초우는 그런 소아귀에게 일견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 번도 웃음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애절령의 여인이라는 것이다. 초우는 아련한 눈길로 창문 너머 먼 허공을 보며 바라봤다. '아아……, 그 분께서는 초우가 이렇게 성장한 것도 모르시는지? 이제는 진짜 그 분의 품에 안길 나이가 되었건만…….' 과거를 생각하는 것인가? 초우의 두 눈에 한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소아귀는 표정이 싸늘해진 채 초우의 아름다운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두 눈 속으로 무서운 질투의 불길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상심해 하는 것은 보고 있는다는 것은 정녕 가슴 아픈 일. 아아……, 그러나 나는 그 녀석이 내 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소아귀의 손은 자신도 모르게 으스러질 듯 움켜쥐어졌다. '절령, 절대 나타나지 마라. 내 앞에 나타난다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2 최근, 강호는 한 명의 괴무사가 벌이는 풍운(風雲)에 휩싸였다. 얼마 전에는 백패서생이라는 괴객이 숱한 강호고수들에게 전패(全敗)를 하는 괴행을 벌인바 있다. 하되 이번에는 절정일도(絶頂一刀)라는 인물이었다. 절정일도가 숱한 강호고수들을 상대로 전승(全勝)의 신화를 세우며 파죽지세로 강호를 휘몰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교로운 것은, 과거 백패서생을 패배시켰던 그 인물들을 절정일도는 찾아가 모조리 패배시키고 있다는 것이었으니……. 팔십오 전 팔십오 승! 강호는 절정일도가 벌이는 승리의 신화에 온통 술렁거렸다. 과거, 그 누가 이런 엄청난 파죽지세로 승리의 길을 걸었던가. 있다면 오직 한 사람, 바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린 군왕정천 뇌정륭뿐이었다. 뇌정륭이 걸었던 승부사의 길(路). 그 길을 또 다시 걷고 있는 한 명의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오직 한 자루의 도(刀)를 벗삼아 무적의 전승신화를 세우고 있는 자. 그 자의 이름은 절정일도(絶頂一刀)였다. 절정일도 ! 과연 그는 또 누구인가? 애절령은 사천당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가 소림사에서 하산한 지 어언 세 달. 그 동안 애절령은 숱한 강호의 고수들을 격파하며 사천성으로 들어섰다. 강호에 떠도는 무적의 전승신화 절정일도! 그 자는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애절령이었다. 애절령은 과거 백패낭객이라는 이름으로 백전백패를 기록한 바 있다. 하되 지금, 그는 과거와는 반대로 전승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절령이 자신을 패배시켰던 인물들을 찾아다니는 것은 호승심이나 복수심은 아니었다. 그는 무공을 거의 완성시키는 단계였고, 그러한 승리와 패배의 과정은 무공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경험이었다. 산해성승이 전수해 주었던 소림최고의 절학 산해삼십육결! 그 불가의 정종무학은 전승과 전패의 괴행을 이룩해 가는 가운데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 그가 사천당가를 향해 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 애절령은 과거 사천당가의 인물 가운데 상취도장(常醉道長)이라는 인물에게 도전하여 패배한 바 있고, 이제 과거의 패배를 갚아주기 위해 그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도전(挑戰)하는 자에게 피하는 것은 강호인의 도리가 아니다. 명예를 목숨보다도 중시하는 무림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애절령은 상취도장! 그들은 사천당가의 앞쪽에 있는 벌판에서 만났다. 애절령은 차마 사천당가 안에서 싸울 수 없었기에 상취도장을 정중하게 불러낸 것이다. 하되 그의 모습이 과거와 너무 달라져 있는지라 상취도장은 쉽사리 애절령을 알아보지 못했다. 죽립도 쓰고 있지 않았고, 일신에는 허름했으되 깨끗한 백의(白衣)를 걸치고 있었다. 애절령의 얼굴에는 순수하고 해맑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과거의 칙칙함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상취도장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대가 날 불러낸 절정일도라는 인물인가?" 상취도장은 한껏 거만하게 애절령을 노려보았다. 하되, 애절령은 상취도장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떨려 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이미 상취도장이 애절령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랴. 애절령은 공손히 포권했다. "후배는 절정일도라는 강호말학이외다. 선배께 한 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만……." 상취도장의 얼굴에 일순 의혹이 어린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과거 나에게 패배한 백패서생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 자를 패배시킨 인물들을 찾아가 모조리 패배시켰다는데, 혹시 백패서생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애절령의 얼굴에 순박한 미소가 떠올랐다. "선배께서는 제가 그 자와 동일인이 아닌가 묻고 싶으신 모양인데, 잠시 후, 대결을 하면 그때 그 자와 저의 무공을 비견해 보면 아실 일이 아닙니까?" "……." 상취도장은 입을 다물었다. 차창! 이어 그는 허리춤에 꽂힌 두 자루의 쌍검(雙劍)을 빼어 들었다. 말로 듣는 것보다는 실제로 확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때 바보와 같은 그 자가 지금 눈앞에 있는 자와 같을 리는 없지.' 상취도장이 검을 빼들었을 때, 애절령은 손에 든 도(刀)를 천천히 곧추세웠다. 절정도였다. 애절령의 손에 들린 절정도가 금방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우우우― 웅! 도명(刀鳴)은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절정도는 헝겊에 감싸여져 풀어지지 않았다. 애절령은 날이 갈수록 절정도의 살기가 짙어지기에 애써 그 살기를 감추고자 했다. 하되 상취도장은 절정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기겁을 했다. '으으……, 저것이 어떤 도인지는 모르되 지금까지 강호에서 울음을 낼 수 있는 도는 극소수에 불과……. 그렇다면 저 자가 든 도는 도(刀)의 신화로 불려졌던…….' 상취도장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애절령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앗! 절정일도(絶頂一刀)!" 한 마디 폭갈을 내지른 다음 애절령의 도가 허공으로 일획(一劃)을 그었다. 스― 웃! 지극히 단순한 동작이다. 그의 도는 허공 중에 한일(一)자를 쓰고 있었다. 한없이 간단한 동작이련만, 보라! 고오오오―. 어느 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강기( 氣)가 상취도장을 향해 벼락치듯 밀려들지 않는가? 상취도장은 기겁을 할 듯 놀랐다. "으으……, 도기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운데 밀려든다는 것은 도기(刀氣)의 경지를 넘어선 도강(刀 )의 경지……. 으으, 그렇다면 저 자는……." 상취도장은 검을 내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멈추어 섰다. 원래 상취도장은 검을 주특기로 사용하는 무사는 아니다. 그는 사천당가의 인물답게 일신에 지닌바 암기(暗器)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하되, 그는 암기조차 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그는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으으……, 나는 저 자를 이길 수 없다. 상대하려 하다간 내 몸은 찰나간에 두 쪽으로 갈라진다!' 상취도장은 절망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위잉―. 이때 한 줄기 무형의 도강이 날아와 상취도장을 뒤로 이 장여 물러나게 했다. 이어 애절령은 도를 거둬들이며 포권을 하고 있었다. "선배님의 가르침에 감사 드립니다, 그럼……." 그는 멍청히 선 상취도장을 바라보다가는 몸을 돌렸다. 그는 상취도장의 시야에서 느릿하게 멀어져 갔다. "……." 상취도장은 제자리에 서서 사라지는 애절령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아……, 졌다. 단 일초(一招)만에…….' 상취도장은 진한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의 패배감은 통렬한 가운데서도 다분히 자랑스럽기 그지없는 패배였다. '내 패배는 위대한 패배이다. 누구도 저 자를 당해낼 수 없다. 어쩌면 천하제일인 뇌정륭이라 해도……. 왜냐하면 저 자의 도에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포용력이 있기 때문…….' 애절령. 그는 느릿하게 상취도장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얼핏 보면 느리게 보이되 애절령의 걸음은 상당히 빨랐다. 약 반 마장쯤이나 걸어갔을 무렵, 문득 애절령은 느꼈다. 자신을 암중으로 따르고 있는 적지 않은 고수들이 있음을……! '누구일까? 나를 따르는 자들은…….' 그 기세가 느껴진 것은 사천당가를 떠나올 때부터였다. 그가 천천히 걸음을 멈췄을 때, 문득 애절령의 주위를 엄엄하게 포위하며 막아서는 자들이 있다. 휘리릭― 휙! 하나 같이 날렵한 경신술을 발휘하며 둥근 원진(圓陣)을 이루어 늘어서는 자들. 그들은 가슴에는 당(唐)이라는 글씨의 독문표기가 새겨져 있는 바, 바로 사천당가의 고수들이 아니던가. 상취도장의 패배당하는 모습을 숨어 지켜보던 그들이 애절령을 뒤따라 온 것이다. 애절령은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그는 묵묵하게 자신을 포위한 사천당가의 무사들을 바라봤다. "부디 길을 비켜 주시길……! 상취도장과 나는 정당한 승부를 했소. 그 승부에 더 이상의 은원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로 그 순간, 포위한 자들 사이에서 애절령을 향해 걸어나오는 한 인물이 있었다. 백염백미를 길게 늘어뜨린 호안(虎眼)의 노인, 중후해 보이는 모습이 일파의 지존답게 보였다. 애절령을 향해 그는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노부는 사천당가의 가주 날수비황 당무룡……! 소협을 본가로 정중히 초청하고 싶소." 3 애절령은 사천당가주의 정중한 초대에 응해 사천당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사천당가주가 친히 그를 초청한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너무 간곡한 초청이었는지라 애절령은 어쩔 수 없이 사천당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밤이 으슥해질 무렵, 애절령은 당무룡과 술상을 앞에 놓고 내실(內室)에 마주앉아 있었다. 이미 애절령은 당가에 들어선 이래 극진한 대접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당무룡을 비롯한 당가의 인물들에게 많은 술을 받아 마신 상태였다. 하기에 그의 얼굴은 발그스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애절령을 바라보는 당무룡의 얼굴에는 온통 경탄의 빛이 가득했다. "하하핫!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외다. 소협 같은 젊은 나이에 가히 절정(絶頂)의 도(刀)를 이루다니……." "과찬의 말씀이외다. 그런데 후배에게 긴히 할 말씀이란 무엇인지……?" 애절령이 당무룡을 바라볼 때, 당무룡이 애절령을 향해 호탕하게 웃었다. "프하하핫……, 그렇게 바쁠 것이 무엇이겠소? 본 가주에게는 한명의 어여쁜 딸이 있는 바, 그 아이는 춤 솜씨가 뛰어나기 이를 데 없다오. 우선 그 아이의 춤 솜씨를 보고 난 다음에 차차 이야기합시다. 딸아이는 춤 솜씨가 뛰어날 뿐더러 다시없는 절색(絶色)이기도 하니……, 프하핫!" 짝짝! 당무룡이 손뼉을 쳤다. 순간 안쪽에서 한 명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걸어나왔다. 푸른 보석빛의 취의(翠衣)를 길게 끌며 걸어 나오는 여인. 아, 그녀는 바로 날수비황 당무룡의 장중주라 알려진 당취적이 아닌가? 당취적의 두 눈과 얼굴에는 여전히 멍한 백치미(白痴美)가 떠올라 있었다. 보는 사내로 하여금 범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마력의 미색이랄까? 당취적은 어려서 병마를 앓아 백치가 된 상태라던가? 걸어나온 당취적, 그녀는 애절령에게 절을 한 다음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르르르―. 그녀는 날아갈 듯이 춤을 추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보라! 지금까지의 상황은 과거의 옥자강이 겪었던 상황과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때, 당취적을 바라보는 애절령의 두 눈이 은은한 홍조로 물들어 갔다. 어느덧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백치미녀는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욕정(欲情)을 일으키게 했다. 문득 애절령은 흠칫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 이런……! 욕념을 느끼다니, 행여 어떤 음모가 있을까 하여 음식과 술을 다분히 조심했거늘…….' 그러나 애절령이 어찌 상상할 수 있으랴? 지금 앉아 있는 방석, 그 방석에 무형무취(無形無臭)의 지독한 음약(淫藥)이 묻어 있다가 그의 모공을 통해 몸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을……! 또한 이 순간에도 호흡하는 가운데 폐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애절령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더욱 뜨거운 욕념으로 물들고 말았다. 돌연 춤을 추던 당취적이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르르르― 륵! 훨훨―. 취의자락이 허공으로 날려 올라가며, 여체의 뽀오얀 나신(裸身)이 한 줌 가림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둥근 어깨와 눈부신 젖가슴, 그리고 기름진 배와 움푹 파인 배꼽, 팽만하고 쭉 뻗어내린 두 다리, 하복부의 신비계곡을 가린 울울한 숲……. 당취적은 놀랍게도 취의자락 속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완벽한 여인의 나체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드러났다. 두 가슴은 손으로 감싸쥘 수 없을 정도로 풍만했고, 그 가슴에는 두 알의 열매가 톡 얹혀져 있다. 하복부의 신비계곡은 보일 듯 말 듯 개방되었다가는 사라지곤 하는데……. '으음…….' 애절령은 더 이상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조금 전까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던 당무룡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애절령은 더 멍해졌다. 당무룡의 의도는 이래서 명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딸을 애절령에게 안겨주고자 하는 것이다. 당무룡은 백치의 딸을 애절령에게 안겨주기 위해 다시없는 독한 음약을 시전했던 것이다. 당무룡의 속셈은 자명하다. 그는 막강한 무예를 지닌 절정일도에게 딸을 안겨주고, 그의 무공을 이용해 당문의 배반자인 옥자강을 추적 살해하겠다는 의도를 품고 있었다. 설혹 애절령에게 안긴다 하여 당취적이 오자강과 그렇고 그런 육체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빗나간 부정(父情)! 아니, 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이런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당취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때마다 젖가슴이 출렁거리고, 울울한 숲은 신비의 자태를 가끔 드러낸다. 정녕 사내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하는 지독한 백치의 미였다. 애절령은 혼신의 힘으로 음욕을 참고자 노력했다. 하되, 그가 중독당한 음약은 실로 지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당취적이 앞으로 다가들었다. 그녀는 너울거리며 지척까지 다가들었으며, 흔들거리는 눈부신 젖가슴이 한 뼘 앞에서 출렁거렸다. "아아……." 혼신의 힘으로 욕정을 이겨내던 애절령. 그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와락 당취적을 끌어안고 말았다. 애절령은 당취적의 몸을 끌어안고 곧장 바닥을 굴렀다. 그는 세차게 당취적의 몸을 타고 눌렀다. 당취적은 사지를 이용해 애절령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것은 다분히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애절령은 한 손으로 와락 당취적의 한 쪽 젖가슴을 움켜쥐었고, 한 손은 하체 사이로 파고들었다. 가슴은 얼마나 풍만한지 한 손으로는 움켜쥘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틈인지 축축하게 젖어있는 여인의 비밀계곡…….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 당취적은 멍청하다. 그녀는 애절령의 손이 여인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을 침범했음에도 그저 멍청할 뿐이었다. 멍한 백치의 눈길로 자신을 타고 누른 사내를 올려다볼 뿐이다. 주르르! 어느 순간 당취적의 멍한 눈 속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길은 문득 한 곳을 향했다. 당취적의 눈길은 그곳에 머물러 움직일 줄 몰랐다. 멍한 백치의 눈 속으로 누군가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무한하게 깃들여 있었다. 애절령의 눈길도 얼핏 당취적의 눈길이 머문 곳으로 향했다. '아… 아니 저것은……?' 찰나 애절령의 전신이 부르르 경련했다. 이어 전신을 지배하던 모든 욕정이 일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당취적의 눈길이 머무는 곳. 벽면에 그림 한 장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한 사내의 초상화(肖像畵)였다. 눈 밑에 희미한 상흔(傷痕)이 그어져 있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절륜한 용모의 미사내. '저… 저것은 자강, 바로 옥자강이거늘, 그가 어떻게……?' 애절령의 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잠시 후, 그는 당취적의 눈길 속에 머물러 있는 묘한 기운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뛰어난 지혜의 소유자, 당취적의 눈빛만으로도 무슨 사연이 있는지를 추측해 냈다. 찰나 모든 음욕(淫慾)이 삼만 장 밖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돼!" 그는 세차게 소리치며 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마지막 순간, 애절령은 이성을 되찾은 것이다. 뒤에 남은 당취적. 그녀는 전라를 드러낸 채 누워 멍하니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직 눈길을 한 사내의 초상화에 고정시킨 채… 4 사천당가의 뒤쪽. 콰콰콰아아― 아! 오십여장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하나의 폭포(瀑布)가 있다. 밤이 삼경에 이르렀을 무렵, 날수비황 당무룡은 폭포수 쪽으로 두리번거리며 다가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잘 나가다가 하필이면 마지막 순간에……." 그의 얼굴 가득 불만이 가득하다. 얼마 전 그는 애절령에게 자신의 딸을 안겨 주려는 음모를 꾸민 바 있다. 하되, 다 성사되어 나가던 일이 마지막 순간 그만 틀어져 버린 것이다. 쏴아아아― 콰콰아아아! 폭포의 물줄기는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며 야음을 깨뜨린다. 폭포를 향해 당무룡이 가까이 다가들 때, 그는 문득 폭포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까― 강! 깡―! 까― 강! 선명한 금속성(金屬聲) 소리였다. 그것은 쇠를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였다. 맹렬한 폭포의 음향 속에서도 그 소리는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기다!' 당무룡은 반색하며 급히 망치질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다가섰다. 어느 순간, 그는 기겁할 듯이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헉! 이… 이건……." 휘익! 찰나 눈부신 금색 물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크르르릉! 이어 들려오는 살기 어린 야수의 으르렁거림! 당무룡은 기겁하며 급히 반격하고자 했다. 뜻밖에도 그를 가로막은 것은 작은 황소만한 크기의 황금빛 늑대였다. 늑대는 다름아닌 낭왕(狼王)이었다. 당무룡이 다가설 때 낭왕이 애절령을 호위하고자 막아선 것이다. "낭왕! 그만 둬." 그때 낭랑한 한 줄기 음성이 들려왔고, 낭왕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다가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당무룡은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포수의 아래쪽, 한 명의 인물이 정좌하고 앉아 망치질을 하고 있는 모습이 있다. 애절령이었다. 그는 한 자루 녹슨 도(刀)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망치로 절정도를 두들기다가 흘낏 당무룡을 바라봤다. "소협, 여기 계셨구려." 당무룡은 반색을 지으며 애절령에게 다가섰다. 순간 당무룡은 흠칫하며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찰나, 애절령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한기(寒氣)가 그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헛……! 가공할 기운이다. 가히 강호의 절대고수만이 풍겨낼 수 있는 초절한 기도가 저 젊은이에게 느껴지다니…….' 당무룡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아, 이런 거대한 기도를 뿜어내는 자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굳이 있다면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뇌정륭 정도랄까?' 애절령의 전신에서는 엄숙한 기세가 뿜어 나왔다. 온화한 얼굴 가운데, 엄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 그는 묵묵히 당무룡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서늘했고, 그 눈빛은 당무룡의 내심을 단숨에 꿰뚫어 보는 듯했다. 당무룡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소협! 어찌하여 이곳에 와 계시는지……? 우리 딸아이가 지금 소협을 찾고 있소이다. 오직 소협만이 우리 여식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소." 애절령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조금 전 발생했던 일은 소생의 의지력이 부족했기에 일어났던 불상사……, 가주의 부정(父情)을 탓하지 않겠소이다. 모든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고, 후배는 떠나겠습니다." 애절령의 음성은 물처럼 담담했다. 하되, 당무룡은 애절령에게 다시 말을 붙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애절령은 도를 갈무리하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어 그는 낭왕의 등에 올라탔고,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멀어져 가는 그의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음성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옥자강! 그가 가주의 딸을 슬프게 했다면 그도 언젠가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을 것……, 부디 영애에게 축복이 있기를……!" 순간 당무룡의 얼굴은 일시에 붉어졌다. 상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런 인물에게 딸을 안기려 한 행위가 얼마나 파렴치했는지를 그제서야 그는 절감했다. '아아, 저런 담백한 청년에게 그런 짓을……?' 당무룡은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애절령은 낭왕을 탄 채 사라지고 있었다. 당무룡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서 더할 수 없는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다. 갑자기 그는 애절령의 뒷등을 향해 소리쳤다. "절정일도! 이후 본 사천당가는 그대의 영원한 벗이 되기를 자청하오." "……." 애절령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만 묵묵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당무룡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만에 하나! 당신이 위기에 빠진다면 우리 사천당가는 문인의 절반을 죽이더라도 기꺼이 그대를 도울 것이오." 애절령의 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어둠은 그와 낭왕의 모습을 완전히 삼켜 버렸다. 하되 당무룡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라져 간 애절령의 얼굴에 가장 인간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으리라는 것을……!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