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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여행입니다.
프라하에서 폴란드 아우슈비츠로 가기 위해 체스키데신으로 이동 합니다.
폴란드는 동유럽 여러나라 중 개방이 덜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나라수입의 50%가 관광수입인 이 나라...
오늘은 차 이동 거리가 많아 4~5시간 이상 버스안에 있게 되겠습니다.
폴란드 인구 3800만,
폴랜드는 폴(평지) 과 랜드(땅)의 합성어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평야가 많네요. 버스로 달리는 동안 평지와 높아 보았자 언덕 정도의 낮은 산 뿐.
차창에서 찍은 공동묘지 사진입니다.
마을의 시작과 끝에는 거의 공동 묘지가 있습니다.
묘지에 바쳐 진 꽃은 모두 생화였고,
생화는 곧 다시 찾아 오겠다는 의지랍니다.
묘지 관리는 성당에서 80%, 20%는 나라에서 관리 하고요.
폴란드는 슬라브 보다 깨끗한 물이 있어 질 좋은 보드카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우주선 발사체 쏘아 올리는데 필요한 연료의 원료를 폴란드에서 발명하였답니다.
하여
화학이 발전하여 화장품 원료도 질이 좋아 폴랜드 관광객들의
필수구입 항목 중 화장품이 높은 수위라네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되었고
전쟁기간 동안 폴란드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도 바르샤바는 82%파괴 되었고,
폴란드인구 22%가 감소했다는 가이더의 설명 입니다.
엄청난 피해를 입은 폴란드와 독일의 사이가 결코 좋을리가 없지만,
1971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여
전 세계를 감동시켰고 폴란드에 공항과 고속도로를 건설 해 주고 유럽연합 가입을
적극 지지하며 도와 주는 등 좋은 인상을 심어 주어
오히려 폴란드가 싫어하는 나라는 독일보다 러시아입니다.
올해에는
유로2012 축구대회의 강력 우승후보인 독일축구팀이 이 수용소를 방문 참배하였습니다.
독일 축구협회장은 ,
유태인 학살은 독일 역사 중 잔인하고 비인간적 부분이며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다면
현재도 바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일이 일어 나지 않도록 경계하고
교육하는 것은 독일의 의무이자 책임이라 하였습니다.
독일의 반성과 사죄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일본은
아직도 정신대와 징용자들에게 보상은 커녕 인정도
제대로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보상받을 분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
오슈비앵침(아우슈비츠)은
폴란드 크라코프 (크라카우.마우폴스키에 주의 州都) 에서 1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왜 히틀러가,
폴란드 시골 마을인 이 곳에 유태인 수용소를 만들었을까요?
그당시 폴란드는 유럽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고,
유태인이 가장 많이 살고있었으며,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는 유럽 전역과 기차로 연결 되었으며 교통 요지였습니다.
폴란드 외진 곳이어서 보안성 있었고 숨기고 싶었던 곳을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 입니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서 중학생이 되면 반드시 방문하게 되어 있으니
방문순위는 단연 폴란드 1위,
영국,프랑스,독일,
이스라엘은 학생 수학 여행과 경찰이면 반드시방문,
미국에 이어
우리 한국은 7위의 방문국 입니다.
숙연한 모습. 모두들 표정이 어둡습니다.
저는 일부러 전시 된 모든 것들에 웬만하면 시선을 주지 않고 피해 다녔습니다.
한컷의 사진조차 찍을 수 없었지요.
이 곳에서 유태인만이 학살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는 폴란드인을 아예 말살 시키려 했는데
일 할 사람이 필요 하다는 부하들의 반대로 그리하지 않았고
폴란드를 움직이는 폴란드의 지식인, 정치범, 성직자를 죽이기로 합니다.
지도자인 그들을 죽이면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은 동요하기 쉽지 않으니...
하여
근대고, 고대고 간에 어느 나라든 침공을 하게 되면
제일 먼저 그나라 지식인을 치게 됩니다.
지혜로운 고대 유대인이 전쟁에 지고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할 때
내세운 조건은
대대로 내려 온 종교와 교육은 그대로 두어 달라는 것이었지요.
슬라브인, 러시아인, 집시뿐아니라 독일인이라도 장애인이면 잡아다 죽였습니다.
그밖에 동성연애자,여호와증인,나치당 반대 독일인등...
그 당시 유럽에서 멸시의 대상 이었던 유태인들이 폴란드로 가면
좋은 환경이 기다리고 있다 선전 하여
처음에는 인텔리이며 부유한 유태인들이 자유의지로 기차표를 사서 들어 왔습니다.
독일은 1인당 23kg의 짐으로 제한한다는 등 오히려 돈을 받고 수용소로 데려 왔지요.
그들은 값진 법랑 주방 도구를 준비하고 재산을 정리하여 제발로 지옥으로 왔던 것 입니다.
나중에 유태인이면 무조건 잡아 왔는데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보전 한다는 광적인 민족애로 인해
잔인한 학살이 자행 되었던 것 입니다.
독일이 점령한 모든 지역이나 독일의 동맹국에서 체포된 유태인들은
기차를 타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수송 되었고,
이러한 수송은 1942년부터 1944년 여름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패망의 기운이 서리자 독일은 이 잔혹한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수용소 시설을
폭파하는 등 애를 썼지만, 남아 있는 수용소와 살아 남은 자들의 증언이 있어
인류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난방 시설이 없는 기차에 실려
독일 지역의 플로센뷔르크, 작센하우센, 그로스-로젠, 부헨발트, 다하우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에서 수송되었습니다.
이러한 철도 여행은 4일이나 걸렸고, 음식과 물, 잠잘 곳과 담요도 없는 가운데서
기차의 수용 인원을 넘게 실는 등, 무리한 수송 과정에서 이미 20%사망했다니...
기차안에 시설이라고는 양동이 두개뿐,
하나는 마실 물, 하나는 배설물을 담는...
수용소 입구의 철문위 문구 <arbeit macht frei = 일하면 자유로워진다>가
제일 먼저 눈에 띕니다.
심한 노역을 하면 빨리 죽게 되어 자유로워 진다는 말인가? 화가 납니다.
이 곳에 입소하면 줄을 세워 분류 합니다.
물건 처럼...아니, 이미 물건 입니다.
단지 두 종류,
일 할 수 있는자와, 일 할 수 없는자...
120cm의 어린이조차 분류 되어 힘든 노동을 많이시켰습니다.
그 이하 어린이는 무조건 가스실로.
어린이들도 힘든 노동에 시달리다 죽어 갔습니다.
일 할 수 있는자로 분류 된 젊은 남자도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고 맙니다.
워낙 열악한 장소와 부실한 먹거리로 견딜 수 없었으니.
모든 작업은 유태인이, 명령과 감시는 독일인이...
<점호의 광장>
아침에 모두 모여 서서 점검을 받는데 독일일이 화가 나면 19시간을
세워 놓을 때도 있으니 그들의 심술은 대단합니다.
점호의 광장에는 1일 2회 행진곡에 맞추어 롤러를 굴려 10명중1명이 깔려 죽게 했다는데
인간잔인성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이곳 소장이었던 루돌프 헤스가 수용소 내에 있는 자기 집 2층에서
지나가는 수용소인을 사격 연습하듯 쏘아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픽션만은 아닌 것 같네요.
총을 시험한다던가 사격 실력을 확인 하는 건지,
아무 잘못 없는 그 사람이 죽게 되는 장면은
아무리 영화지만 충격 자체입니다.
당시 수용소 소장인 헤스를 사형시키기 위해 급히 제조한 교수대도 있습니다..
헤스가 기거 했던 집 옆에 목재로 된 교수대가 세워져 있는데
이 교수대는 헤스를 사형 시키기 위해 급히 제조한 것입니다.
이 때 참관인으로 참여한 사람이 이 수용소의 수용자 였다던데
어느정도 복수가 되셨는지...
사형 집행 당하기 직전 헤스
약간 편한 일자리도 있었습니다.
캐나다라고 불리는 창고 근무입니다.
창고를 왜 캐나다라 명명 했을까요?
그 시대 미국 보다 부자인 나라가 캐나다였기에 독일은 캐나다를 동경 했나봅니다.
캐나다에 근무하는 유태인은 미모가 뛰어 나거나, 독일인에게 잘 보인유태인이거나.
소피의 선택, 인생은 아름다워, 쉰들러 리스트등 영화로도 여러번 제작 되었고
신문등 여러매체, 학습으로 어느정도 이곳의 잔인 한 짓거리를 알고는 있었지만,
믿을 수 없는 사실을 이 곳에서 확인 합니다....
생체 실험 장소 근처 수용소 창문은 모두 막아 생체 실험 장면을
밖에서 보지 못하게 해 놓았습니다.
총살 현장이었던 총살의 벽,
이벽을 수용소내에서 통곡의 벽이라 했다네요.
막사창문은 모두 막아 총살 장면을 막사 안에서 보지 못하도록 해 놓았는데
총살을 시킬 때는 총살 직전 발가 벗겨 총살을 시켰다는군요.
목숨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수치심까지....
수용소는 고압선이 흐르는 2중 철조망으로 둘러 쳐져 있어 탈주가 어렵습니다.
고되고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이 곳을 견딜 수 없어
일부러 뛰어 들어 죽음을 택하는 자도 많았답니다.
실컷 부려 먹다 쓸모가 없어지면 가스실로 데려가 살해하는데
그 가스실이라는 곳에 수용인원의 7배를 집어 넣어 일을 마쳤을 때
모두 기립 사망 하였답니다.
영화에는 가스실에 가스를 분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은 가스 투입구에 가스알약을 쏟아 부으면 공기와 접촉하여
가스화 되어 그 가스로 인해 20분간 고통스럽게 1회에 200명씩 죽었습니다.
가스가 분사 되면 짧은 시간에 큰 고통 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20분이나 손톱으로 벽을 긁으며 죽어 갔던 것 입니다.
문을 열어 보면 그 속에서 조차 살겠다고 문 쪽을 향하여 몰려서 죽어 있다고 하네요.
들어 가면 죽는 줄 알면서도 울면서 어쩔 수 없이 뛰어 들어 갔다는 그들...
죽어 가며 내는 비명소리가 밖에 들리니 가스실 옆에 오토바이를 준비해 놓고
굉음을 내어 그 소리를 흡수 했습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유류품은 재활용 되었는데,
머리카락은 실로 자아 내어 모포나 심지, 카페트로.
가방,안경테,구두,의족,의상 일부도 전시실 가득 쌓여 있습니다.
특히 언젠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가죽가방에 이름,생년월일을 써놓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듭니다.
그 물건 주인 하나 하나 제 나름대로의 사연을 지녔을 것이고,
끝까지 부질 없는 작은 희망을 갖고 죽어 갔을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네요.
어느 여성의 샌들...
지금 바로 신고 강남 거리를 걸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세련 된 멋진 디자인입니다.
예쁜 레이스 달리고 정성스레 십자수를 놓은 앙증맞고 흰 아기 옷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더러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작은 생명들을 살해 했습니다.
내 작고 귀여운 손자가 생각 나네요.
방금 침울 했다가도 그 아이의 맑은 웃음소리는 바로 저를 기쁘게 한 답니다.
내 손자 아이와 같은 이런 예쁜아이들을,
천진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기들을,
어떠한 죄도 짓지 않은 어린이를,
유태인의 씨를 말리려는 목적으로 살해 한 것 입니다.
분노에 치가 떨립니다.
기차에서 내리면 남여로 분리 되었고 여성에게서 아기를 빼았는 장면 입니다.
아유슈비츠에서 악명 높았던 죽음의 천사 - 조셉 멩겔레 (왼쪽에서 두번째)
사진 중에 SS 대위 요제프 멩겔레(Dr. Josef Mengele)를 주목 합니다.
그는 나치의 생체 실험 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장애인, 쌍둥이, 난쟁이 ,임신부들을 대상으로 비정규 과학실험을 실시했습니다.
특히 쌍둥이에 집착하였고 어린이 막사에 들릴때면 늘 사탕을 가지고 가서 주었다는데
어린이들은 이 악마를 천사로 기억할 것 같습니다.
2세 유아에게 페놀을 주사하여 수 시간 만에 죽게 하는 생체실험도 했습니다.
강제로 불임시술과 거세를 실시하였으며 성인을 대상으로는 저체온증에 관한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 못된 인간은 브라질에서 자연사 했다는데...용서 할 수 없는자가 자연사라니?...
이 곳에 끌려 왔던 헬렌 자매의 이야기 입니다.
"모두 벌거 벗고 머리털이 없어 알아 볼 수 없었다.
마침내 서로 찾아 낸 우리는 웃기 시작 했다.
너무나 미친듯이 웃다 보니 나중에는 울음이 나왔다"고 헬렌은 말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이야기 입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머릿발이라는데...
이 곳에 사람은 없었습니다.
공장 기계의 한 부품일 뿐...
머리를 잘린 여인들...옷만 벗으면 여동생이라도 알아 보지 못 하겠습니다...
이렇게 학살 되는 줄 알면서 어찌 반항 한번 없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는데요,
가이더의 설명은
독일에 충성하며 자기 안위를 위하여 동족에 등을 돌린 앞잡이가 있었고요.
물론 그 앞잡이도 결국엔 가스실로 향 했지만...
수용소마다 그 앞잡이를 심어 놓아 미리 폭동의 기미를 알아 냈고요.
워낙 잔인하고 충격적으로 대하다 보니 감히 대항 할 엄두를 내지 못 하였답니다.
그래도 전쟁 말미인 1944년 10월 7일,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의 시체 소각장 제4호에 배정된 수백 명의 수감자들은
결국엔 학살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이 거세지며,
수감자들은 경비대원들을 살해하고 시체 소각장과 인근 가스실을 폭파하였습니다.
수감자들이 사용한 폭약은
유태인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는 인근 군수 물자 생산 공장에서 빼돌린 것으로,
독일군은 폭동을 진압하고, 폭동에 가담한 거의 모든 수감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리고 폭동에 사용된 폭약을 빼돌린 집단 수용소의 유태인 여성들은
1945년 1월 초에 공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무계획하고 , 짜임새없고 , 수적으로 크게 열세에 있던 그들에게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반란이었습니다.
그래도 성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요.
전쟁 말미에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약 900회의 탈출 시도가 있었고 100회가 성공,
이 수용소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 700명 가량 된다니그들이 살아서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옥 같은 이 곳에서 구출 되었다 해도 고통이 해결 된 것은 아니었어요.
<아우슈비츠에서 생존>의 저자인 이탈리아 시인 프리모 리비는
1987년 계단에서 굴러 자살했고요,
"고문을 받은 사람은 나중에도 계속 고통받는다"고
오스트리아 유대인 철학자 얀 아메리는 적었고,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뒤 33년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명한 이 두 사람이 널리 알려 졌을 뿐, 알려 지지 않은 많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아직도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고통스런 추억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 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환호하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해방된 생존 유대인들 - 1945년 1월 27일
해방된 후 발견 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남자 막사의 유대인들 - 1945년 1월 27일
독일의 패망 후 독일이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 바실리 페트렌코 퇴역중장>
당시 수용소를 포위한 후 해방 시킨 적군(赤軍=러시아군)의 4개 사단 장병들 중
지휘관 바실리 페트렌코 퇴역중장은 실로 참혹한 전투를 많이 경험한 노련한 베테랑입니다.
그 사람은,
"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걸 봤다. 교수형이나 화형을 당한 사람들도 봤다.
그렇지만 아우슈비츠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 할 정도이니
이 같은 만행은 인류역사상 흔치 않은 경우라 하겠습니다.
그를 특히 경악시킨 것은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일부는 유아였는데 나치 군인들이 서둘러 철수하면서 버리고 간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자행한 의학 실험에서 살아남은,
혹은 그 전해 가을 바르샤바의 불운한 반란 뒤에 체포된 폴란드 정치범들의 자녀였는데
나중에서야 페트렌코는
그곳이 아이들을 데려다 죽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과연 히틀러는 왜 유태인학살을 감행 하였을까요?
여러 설이 있는데,
히틀러 개인적인 증오도 이유가 되겠습니다.
유태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새아버지가 비인격적 대우,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히틀러 18세에 어머니가 유방암 걸려 사망.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려 했는데,
미술 면접관 중 유태인면접관이 불합격 처리하여 히틀러의 미술 공부가 좌절 되었습니다.
독일서 성공하자 오스트리아 국적 포기, 독일 국적 취득합니다.
정권을 잡은 후 경제회복과 전쟁군수품의 필요에 쓰려고 유태인 재산을 탈취.
게르만족이 우수민족임을 내세우기위해 장애자를 우선 학살 합니다.
<유럽인들에게 유대인이 미움을 받은 이유>
유럽에서 매춘으로 돈을 벌었고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은 주로 악기 판매로 현찰 보유 많고, 대부분 고리대금으로 축재.
같은 유태인은 이자를 안 받고 ,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일정기간내 갚지못 할 정도의 기간만 빌려주는 등
고이율을 받아 오스트리아인의 피해 많게 되어 반감을 샀으며
유태인 학살 계획에 오스트리아인이 많이 동참.
<도스토예프스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서 유대인만큼 그들이 겪었다는 수모와 고난과 순교에 대해
우는 소리를 하는 족속도 없을 것이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들이야말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주식시장,
그리고 국가의 도덕성을 좌우하는 실질적 군주들이란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이다..."
하며 유태인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 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받은 자들은 본인의 체험이나 경험을 침소봉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600만명을 살륙 했다는 이야기도 실제 통계상으로 불가능한 숫자라고 하는데요,
1991년 10월 20일자 벨기에 일간지 Le Soir 에 따르면,
“국제 아우슈비츠 보존위원회는 1990년 11월 400만 명의 희생자를 명시했던
아우슈비츠의 추모석판을 “150만 이상의 희생자”로 표기되어 있는 새 석판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하여 아래 사진을 퍼 왔습니다.
신,구 석판을 비교해 보세요.
- 1990년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있었던 추모석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이곳에서 수감자 400만 명이 나치 살인마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舊추모석판
그러나 교체된 새 추모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곳이 영원히 인류에 대한 절망의 울부짖음과 경종의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이 곳에서 나치스는 150만 명의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이를 살해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끌려온 유태인들이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1940-1945.”
새로 교체된 석판
****1989년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 역사가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 교수는,
이제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 되어 왔던 아우슈비츠의 유태인 희생자 400만 명設이
의도적인 허구임을 인정할 때가 왔다고 밝혔다.
****1990년 7월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은,
이스라엘의 야드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과 공동으로 유태인과 비유태인을 도합해
약 1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두 기관은 이들 가운데 몇 명이 의도적으로 처형되었으며,
몇 명이 다른 원인으로 사망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Y. Bauer, Fighting the Distortions, Jerusalem Post - Israel, September 22, 1989)
****1998년 9월 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아우슈비츠에서 400만 명의 유태인이 독가스로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라는 월터 라이히(Walter Reich) 前워싱턴 홀로코스트 박물관장의 말을 인용 보도했다.
월터 라이히는 보다 사실에 가까운 숫자는 110만에서 150만일 것이라고 밝혔다.
알려진 모든 이야기를 다 믿을 수는 없어요.
하지만,
600만명, 또는는 100만명이 학살 되었다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없는 사람을 그냥 죽였다는 것이 용서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할줄 아는,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사랑을 할줄 아는 우리 사람들이
자국의 이익과 개인의 악감정으로 또는 종교와 사상때문에 이러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 집니다.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아우슈비츠 수용소 문 앞에 새겨진 글
"당신이 이 사실을 기억 하지 못하면 반드시 또 당한다" 는 문귀가 머리속에 한 동안 맴돌았습니다.
그래요,
잊지 말아야지요..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을 빼앗겼던 36년도,
민족상잔으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던 6 .25도...
관람이 끝난 후 수용소측에서 제공했던 마이크수신기를 반납해야 합니다.
수신기를 우리한국인 가이드가 혼자 수집하려는데
손을 다친 폴란드 현지가이더가 아픈 손을 내밀어 자기 팔위에 얹으라고 하네요.
투철한 직업정신입니다.
1시간여 동안 수용소 관람을 마치고 중세기 폴란드의 수도이고
폴란드 최고의 관광명소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크라코프로 90여분 이동합니다.
크라카우(크라코프)
크라코프는 폴란드어, 크라카우는 독일어 명칭입니다.
엉덩이나 궁둥이나 방뎅이나...
중앙시장의 유리제품, 호박가게에서 기념 활영.
독일군 사령부 주둔지 였기에 세계대전의 전쟁 참화를 피할수 있게 되어 옛 폴란드왕국의 모습을 간직 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코프의 중앙광장과 성모마리아성당,직물시장,구시가지를 관광하였는데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중앙광장은 가운데 거대한 직물회관이 있고
양쪽에 넓은광장이 있으며 두개의 첨탑이 높이 솟은 성모 마리아 성당과
구시청은 철거되고 시계탑만 우뚝서 있었습니다.
왼쪽건물 중앙시장, 오른쪽 높이다른 탑은 형제탑이라 불립니다. 성마리아 성당의 탑이지요.
중앙시장 광장은 크라코프의 사교장으로서의 역활을 했던 곳 입니다.
구시가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 4만평방미터로
베니스의 산 마르코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입니다.
<광장 중앙시장>
거대한 직물회관 1층은
각종 직물, 폴란드호박 ,악세서리, 각종 민속 공예 조각품,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서 있고
2층은 18,19c 폴란드 조각과 회화 를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용 되고 있어요.
중앙시장내부 입니다.
<성마리아교회>
1222년 지은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성당.
크라카우중심 중앙시장광장 한켠에 성마리아교회는 랜드마크 역활을 할 정도로
우람하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특이한 두개의 탑은 바로 크라카우의 성마리아 탑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몽고군 침입 당시 적군의 습격을 알리는 감시탑 역활을 했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교로 활동하던 성당.
성당안에 바오로2세의 동상이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선출 되기 전의 교황은 이태리출신사제이어야만 가능 했으니
비이태리 출신 최초로 교황이 되신 것이니 폴란드의 영광입니다.
성마리아성당은
보통성당과 다르게 첨탑 높이가 다른데,
이는 두형제가 경쟁적으로 탑을 쌓기 시작했는데 형의 탑이 훌륭하여 추종불허되자,
느긋해진 형이 러시아로 불려가 일을 하고 오니 동생이 더 멋진 탑을 쌓아 놓았습니다.
이에 형이 질투하는 맘이 생겨 마침내 두형제가 칼싸움까지 하게 되었고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합니다.
뒤쪽 형제탑(성마리아 성당)이 보입니다.
이 성당은 매 시간마다 종탑에서 "헤이나우"라는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합니다.
1241년 3월 24일 몽골 제국이 타타르족을 앞 세워 쳐들어 왔을 때,
침입을 경고하여 나팔수가 트럼펫을 불었습니다.
그는 연주 도중 안타깝게도 화살을 맞아 숨졌고,
이를 추모하기 위해 타타르족이 물러간 뒤 1320년부터 중도에 멈춰 버린 그대로
종탑에서 매시간 그때의 노래를 연주한다고 합니다.
이번 여행에 카톨릭신자가 많이 참석 하셨습니다.
하여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약속도 아니 하였어도 이렇게 모여 기도 합니다.
기도 중인 우리 회원들...
성마리아교회에 들어 갔을 때 미사 집전 중 이었고
제가 알고 있는 사제와 신자들이 라틴어 자비송(키리에 Kirie)을 응송하고 있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침울 했던 마음과 뭔가 알 수 없는 감격에
벅차게 올라오는 감정을 이길 수가 없어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동 하는 장소마다 웅장한 성당에서 욕심을 기도하며 다녔던 못난 마음이
부끄럽고 슬퍼서..
기도 합니다.
용서 받게 해 주시고
용서하게 하소서를 되 뇌이며 성당을 떠납니다.
<시계탑>
구시청사인데 시계탑만 남아 있습니다.
성발바라 성당 입니다. 오래된 성당인데 아주 작다네요. 설명은 찾아서 나중에 올릴게요.
<미츠키에비치 기념비>
체코의 사랑 받는 민족 시인의 기념비가 서 있는데
이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네요.
국민시인의 기념비
인애씨의 목각인형
인애씨 장부께서 위목각인형 사달라 졸라서 사고 말았는데 참 재미 있는 물건입니다.
보여 달라하니 신이나서 시연을 하는데
아무런 에너지 없이 중력에 의해서만 경사로를 또각또각 소리내며
내려오는 닭 2마리 인형이 신기 합니다.
광장 중앙시장에서 단체촬영
광장 중앙시장을 둘러보고 식당으로...
에피소드3,
식사후 호텔로 가기 위해 버스 승차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3번째 미아 사건 발생.
tc최이사님은 식당에 아직 일이 남았던 2명의 회원을 마져 데리고 오기로 하고
다른 회원들은 현지 가이드를 따라 먼저 이동 하였는데 약속장소에
다 가도록 tc최이사님과 두명의 친구가 영 나타 나지 않았던 것...
꽤 오랜 시간을 길에서 꼼짝 못하고 기다릴 수 밖에...
이번엔 두 회원의 잘못은 없습니다.
식사 후 좀 시간이 걸렸던 것...
tc와 현지 가이더가 통화가 안되어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리 되었구먼.
한참 후 가이드 끼리 전화 통화가 되니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호텔 체크인이 좀 늦어질 뿐.
어떻든 두친구로 인해 이동을 멈춰야 하는 사태가 3번이나 일어나니
회원들 걱정이 좀 커 졌지요.
두친구 본의 아니게 일이 그리되어 많이 난감 했겠습니다.
미아 2명과 tc최이사를 기다리는 중...
아뭏든,
우리 식구들을 모두 찾아 함께 이동하여 버스 승차.
예약된 witec호텔에 도착 무사히 체크인.
내일은 그 유명한 폴란드를 여행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린다는
소금광산으로 갑니다.
22일 부터 25일 까지 운전 해준 기사님과 작별인사...
26일 부터는 머리숫이 없는 기사님이 운전 하십니다.
6월 25일 유한 호텔 입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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