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소사(三蘇祠)
삼소사로 가는 길목에는 사방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어떤 것은 아래는 흰색이고 2층은 붉었다. 흰색 건물에 증축을 붉은 벽돌로 한 집들이었다. 외관보다 내실을 기하는 중국인들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건물모습이다. 하지만 어딘지 정돈되지 못한 듯 어수선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희뿌연 안개 사이로 흐르는 강물조차 도시 분위기를 더 침침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신축중인 건물들의 다양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미산보다 번화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삼소사는 나도 익히 들었던 소동파로 알려진 소식을 비롯, 그의 아버지인 소순과 동생인 소철의 사당이다. 삼부자(三父子)가 모두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다니 사당을 꾸며 제사를 지냄직했다. 이곳은 소씨 삼부자의 출생, 성장지다.
소씨 가문은 원래 비단 장수였다. 학문을 가까이 접하는 집안이 아닌데도 삼부자의 문장이 그처럼 출중했다는 것은 그들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측천무후의 영향이 컸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특히 소동파는 3절로 유명하다. 시(詩-글), 글씨, 문인화가로 유명하며 유(儒), 불(佛), 선(仙)의 윤회를 통달한 문인이기도 하다.
<소씨 삼부자를 모신 사당인 삼소사>
입구를 들어서니 오래된 나무들이 느긋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입구 우측의 나무를 앳된 모습의 현지가이드가 설명했다. 수령 천 년이 넘은 고목으로 소순의 나무다. 나무 둘레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울타리 틈새마다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자손번성을 의미하는 사람들이 사서 걸어놓은 것이다.
정문 양쪽으로는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모두 수나무여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이 나무들 역시 천 년이 넘은 고목이다. 생산을 않으니 병충해도 없다는 설명에 슬그머니 웃음이 흘렀다. 나무의 건강이 소씨 삼부자 문장의 건장함을 의미하는 듯해서 여느 나무와 달리 보였다. 무엇이든 의미를 갖고 보면 다르게 보이는 것 같다.
<수령 1000년이 넘었다는 은행나무>
삼소사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형태였다. 전체적으로 ㄷ자 구조였다. 입구인 전층을 지나니 빨갛고 노란 색색의 초들이 꽂힌 마당이 드러났다. 사당 정면에는 소순의 소상이 있었다. 갈색 복장에 왼손에 푸른 책을 든 모습이었다. 좌측 보라색 복색은 소철의 소상으로 오른 손에 하늘색 부채를 든 모습이었다. 부채를 들고 있는 것은 소식보다 벼슬은 더 높았음을 뜻한다고 했다. 소식의 소상은 우측에 있었다. 푸른 복색에 양손으로 푸른 책을 펼친 모양으로 들고 있는 모습이다. 학문의 깊이를 의미하는 소상이라고 했다.
삼부자의 소상을 보고 나오니 뒤편에 적벽회고가 새겨져 있었다. 모택동이 쓴 100자시(詩)라고 한다. 한시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모택동이 쓴 시라는 의미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곳을 돌아나가는 데 우물이 있었다. 깊이가 17m나 되니 빠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이 물을 먹고 문장이 났다지만 들여다보니 먹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일지 않았다.
"목가산당"이라고 쓴 현판아래 마른 나무로 만든 산 형태의 모형이 있었다. 그것이 소씨 삼부자를 일컫는다는 목가산이었다. 나로서는 목가산이 생소했다. 나무로 만든 가짜 산 정도로만 이해될 뿐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모양이 신기해서 지나는 길에 몇 번을 더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집에 와서 소순이 지은 <목가산기>를 읽으니 비로소 그 모습이 이해되었다. 비단장수에서 문장가가 되기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고행이 따랐을 지 짐작할 수 있었다. 큰 나무토막이 수백 년 동안 물과 모래 사이를 흐르다보면 큰 산의 형태를 띨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니 이리 깎이고 저리 부러지며 골짜기와 봉우리를 만들게 되었으리라. <목가산기>와 목가산의 의미를 안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나에게 큰 보람이었다.
<소순의 "목가산기"에 나오듯 소씨 삼부자의 모습을 닮은 목가산>
목가산당 아래 연못은 너무 지저분했다. 바짝 마른 연잎들이 전하는 아쉬움을 안고 소씨삼부자의 모습을 밀랍으로 만들어 놓은 곳으로 갔다. 소동파는 성격이 쾌활하고 할 말을 다 하는 문장가였다. 그런 성격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는데 동생 소철이 위로하는 모습을 실제 모습처럼 만들어놓았다. 소철은 과묵했다고 하니 정치풍파를 피했던 것 같다. 그러니 형보다 학문은 못해도 벼슬은 높았을 것이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어디서나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적이 많게 마련이다. 문인들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게 한 곳이었다.
소동파의 동상 앞에서 단체 촬영을 했다. 약간의 더위를 느끼며 우거진 나무사이를 지나니 ‘연오산(連鼇山)’이라는 글씨가 양각된 바위가 나타났다. 그 글씨에는 큰 의미가 있었다. 오(鼇)는 용의 아홉 아들 중 첫아들로 으뜸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연오산은 소동파 형제가 연이어 장원한 것을 자랑하려는 아버지 소순의 벅찬 마음이 만든 말이다. 글씨는 소순이 빗자루로 휘갈겨 쓴 것이라고 한다.
<소순이 두 아들의 연이은 장원급제를 기뻐하여 빗자루로 휘갈겨 쓴 연오산의 모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