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 클라우스 해로
- 출연
- 카리나 라자르드, 헤이키 노우시아이넨, 주카 케이노넨, 에스코 로인
- 정보
- 드라마 | 핀란드 | 74 분 |
야곱 신부의 편지 1
(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리뷰를 너무 길어 두 차례에 걸쳐 올립니다. 그런데 제가 조금 후에 피정에 들어가기 때문에 두 번째는 나중에 올리니 양해바랍니다. )
'신부'와 ‘편지’라는 두 단어에 끌려 보게 된 영화, ‘야곱 신부의 편지’는 어제 관람 이후 내내 제 가슴을 잔잔히 울리고 있습니다.
‘신부’는 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단어이니, 자연 이끌리게 되고, ‘편지’는 제가 아직 아날로그 세대인 까닭에 왠지 친숙하고 정이 가는, 잃어버린 어떤 것을 되찾아 줄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진정 마음을 담아 보내는 소통의 수단은 이메일이나 문자보다는 손으로 쓴 편지이어야 할 것 같은데, 게으름 탓에 손으로 쓰는 편지는 점점 먼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기에 편지는 더욱 제게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영화관에서 불이 꺼지더니, 아무 광고, 선전도 예고편도 없이 그냥 영화가 던져졌습니다. 영화는 감옥에서 교도상담자로 보이는 한 남자와 죄수인 한 여인이 나누는 짧은 대화로 시작됩니다.
이 짧은 대화 안에 이 여인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인지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여인, 레일라는 살인죄로 복역하는 무기징역수입니다. 영화 종반부에서 밝혀지게 되는데, 언니를 폭행하던 형부를 충동적으로 살해하게 되고, 자기가 결국 언니의 삶도 망쳤다고 생각하여 언니와도 일체 연락 두절하고 완전히 세상과 마음의 문을 닫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면을 받고 출소하게 됩니다.
세상에 대해 적개심을 지니고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여인, 레일라 스텐은 외모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투박하고 거칠고 무표정합니다. 금방이라도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인상입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어깨 부상으로 메달 획득에 실패했지만 투혼을 보여준 역도 선수 장미란처럼 아주 순수해 보이는, 묘한 여운을 담고 있습니다. 이 묘한 조화를 소화해내는 그녀의 연기는 시선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그녀가 출소 후 제안을 받은 일은 어느 시각장애인 신부, 바로 야곱 신부님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고 답장을 써 주는 일입니다. 교도상담자에게 이런 제안을 받은 레일라는 너무나 시큰둥하지만 그녀는 출소해도 달리 갈 곳이 없습니다. 결국 야곱 신부를 찾아갑니다.
이 영화는 핀란드 영화라고 합니다. 저는 북유럽을 가 본 적은 없지만 핀란드하면 막연히 숲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게 됩니다. 영화에서 먼저 성당의 모습을 비추어 줍니다. 숲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바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보이는 곳에 덩그라니 서 있는 성당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성당에 비해 숲 속에 있는 사제관의 겉모습은 마치 도둑의 소굴처럼 조금은 음침하고 엉성한 무허가 낡은 창고 같은 집입니다. 그러나 사제관의 안의 모습은 불빛과 더불어 늘 끓고 있는 물주전자가 거기 살고 있는 신부의 따듯한 내면을 비추어 줍니다.
무엇보다 제 눈을 사로잡는 풍경은 사제관으로 들어오는 길입니다. 가로수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우체부, 그리고 그의 야곱 신부님을 부르며 편지가 왔다고 외치는 소리는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적막 속의 울림입니다. 레일라가 낡은 가방을 들고 사제관에 가는 모습과 더불어 처음 나타나는 숲길이 저에게 향수 같은 친밀함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저는 핀란드는 물론, 북유럽에 가 본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레일라와 야곱 신부의 첫 만남. 투박함과 거침, 세세함과 부드러움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대비를 이루면서 묘한 분위기는 숨을 죽이게 합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 그리고 이어지는 식사 안에서의 나눔은 대화가 별로 없지만 거기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야곱 신부는 레일라가 자기 옆에 앉도록 배려하지만 레일라는 단호하게 자기 찻잔을 들고 멀리 떨어져 앉습니다. 닫힌 마음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야곱 신부님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이면서도 비교적 능숙하게 레일라의 찻잔에 물을 따라주고 그녀를 편안하게 느끼게 해 주려고 애씁니다. 야곱 신부님의 행동을 꿰뚫으려는 듯 바라보는 레일라의 표정은 이런 상황이 너무나 못마땅합니다. 신부님이 정말 앞이 안 보이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긴 칼을 들고 신부님 눈앞에 바짝 대며 흔들어 보일 때는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정작 레일라가 신부님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야곱 신부님께 배달되어 온 편지를 읽어주고, 신부님이 불러주는 대로 답장을 써주는 것입니다. 야곱 신부님에게 온 편지 내용은 대개 사람들이 자기들의 마음의 짐을 나누는 내용입니다. 하여 야곱 신부는 레일라가 읽어주는 편지 내용을 듣기 전에 오늘은 어떤 마음의 짐을 덜어주어야 하느냐는 멘트를 합니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자기들의 짐을 누군가가 덜어주기를 바랍니다. 야곱 신부님은 자기가 편지를 읽고 그들에게 답장을 해 주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일이 아주 중요한 일이라는 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야곱 신부님이 처음에 레일라에게 이렇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주길 바라고 우리는 그들을 하느님께 다가가게 하지요. 하느님의 자녀들 중에 어느 누구도 쓸모없는 사람들은 없고, 또 그들이 누군가에게 아주 잊혀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편지가 더 이상 오지 않고, 자기가 하던 일을 되돌아보면서 이번에는 야곱 신부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일을 하느님을 위해 하는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반대였나 봐요.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나 봅니다.”
이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해 나누는 편지가 오지 않자 야곱 신부님은 자기가 하던 그 일이 결국 눈이 안 보이고 더 이상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자기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였다고 토로합니다. 늙고 병들고 외로운 신부에게는 마음의 짐을 나누는 편지가 바로 자기의 외로움을 위로하고 그 외로운 마음의 짐을 더는 통로였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더 이상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중의 깨달음이고, 다시 서두로 돌아가면 야곱 신부님은 정말 진지하게 편지 내용을 듣고 거기에 가장 적절한 성경 구절을 찾아 답을 해 주면서 편지를 보내 사람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고 애쓰고, 주소가 없어 답장을 할 수 없을 때는 진지하게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기 반해 레일라는 신부님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사뭇 귀찮아합니다. 편지의 일부는 버려진 우물에 던져 버리기도 하지요.
한편 영화에서 춘향전의 향단이처럼, 약방의 감초처럼, 문득문득 나타나는 인물이 우편배달부입니다. 그는 신부님이 무기징역수였던 레일라를 조수로 받아들인 것이 못마땅한 세상의 시선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는 레일라를 바라보며 한편 겁을 내면서도 경멸과 무시하는 내면의 시선을 감추지 않습니다. 레일라의 우편배달부를 대하며 그와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은 세상에 대한 적개심과 마음의 문을 걸어 닫는 그녀의 마음에 대한 상징성으로 여운을 남깁니다.
우편배달부가 숲길을 달려오며 외치는 소리, 야곱 신부님은 그 자전거의 페달 소리만 들어도 우편배달부가 새 자전거를 마련한 것을 압니다. 그 우편배달부는 어느 날 밤에 혹시 레일라가 그 신부에게 어떤 해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에 몰래 와서 염탐합니다. 레일라에게 끌려나온 그는 신부님은 좋은 분이고 당신은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니 떠나라고 그녀에게 소리치지요.
그 후 우편배달부가 숲길를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다가 레일라를 보고 샛길로 빠지는 장면이 두어 번 나타납니다. 우편배달부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모습에서 그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편지를 전달하지 않고 도망을 가는 것으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실은 이제 더 이상 야곱 신부님께 편지가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찻잔을 들고 야곱 신부님의 곁으로 오는 모습을 통해 레일라는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하나의 사건을 통해 아직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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