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구란 서(書), 화(畵), 자수(刺繡), 탁본(拓本), 섬유공예(纖維工藝 : 染織, 手織등), 사진(寫眞)등의 작품을 보존(保存), 보관(保管), 전시(展示) 또는 완상(玩賞)하기 위하여, 족자(簇子), 액자(額子), 병풍(屛風), 서화첩(書畵帖, 帖冊), 횡권(橫卷, 두루마기)등으로 표장(表裝)하는 제반 기술적 방법을 말하며, 넓은 뜻으로는 낡거나 훼손(毁損)된 작품의 보완(補完)과 재생(再生)작업까지도 포함된다.
작품의 원상 회복을 위한 수리(修理)작업은 세척(洗滌), 배접(背接), 충전(充塡), 보채(補彩)의 기술적 과정이 있다. 표구는 원래 일본에서 사용한 용어이며, 우리 나라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을 전후로 쓰기 시작해서 지금은 널리 일반화되었다.
표구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이전에는 표장(表裝), 장배(裝背), 표배(表褙), 장황(粧潢)등의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이 네 가지는 오랜 역사적 연륜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 장황이 가장 오래 전부터 쓰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장황이란 「단장할 장」과 「책꾸밀 황」의 합자(合字)로서 글뜻 그대로, 책을 꾸미고 단장하는 기술 행위를 말한다.
원래 단순한 배접(背接)과 재단(裁斷), 또는 경권(經卷)의 쾌선(掛線)을 치는 작업만을 의미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표구의 개념은 후대에 이르면서 장정기술(裝幀技術)이라는 내용을 포함하게되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수리(修理)와 재생(再生)을 비롯한 보존기술(保存技術)까지 포함하고 있다.
2. 표구(表具)의 목적(目的)
표구의 목적은 작품의 보존(保存), 전시(展示), 완상(玩賞)에 있다. 특히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 대한 원상의 완전한 보전(保全)이야말로 표구의 중요성과 목적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경우,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작품에는 20년 이상이나 지하에서 썩힌 풀을 사용하여 표구를 하는데 이는 수세기 후에 나타날 수 있는 작품의 변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전시나 감상을 위한 측면에 있어서는 작품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배색(配色), 촌법(寸法) 등으로 미적(美的) 조화를 살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내용에 어울리지 않는 배색과 촌법으로 표구하였을 경우, 작품의 내용과 분위기가 크게 훼손되기 때문이다.
3. 우리나라 표구의 역사적개관
고대 표구의 발생은 작품 보존(保存)의 필요성과 장식의 요구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처음에는 찢어지거나 훼손된 작품을 보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작품의 뒷면에 다른 종이를 오려서 보수하는 정도의 극히 초보적인 행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작품 보존의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기술의 진전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배접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배접의 기술이 일반화되면서 작품을 보다 장식적으로 치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역사상 최초의 표장물도 이러한 욕구가 몇몇 창의력 있는 장배가(裝背家)들에 의하여 창제(創製) 되었을 것이다.
표장물 중에서도 병풍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시기는 대체로 중국의 한대(漢代)로 보고 있다. 족자는 북송(北宋)때부터 벽에 걸어서 감상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족자 표구는 원래 티베트의 초기 불교 사원에서 야외용으로 사용하기 위한 불화(佛畵)를 꾸민 것이 그 효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족자의 형식이 중국에 유입되었던 것은 불교 전래 및 융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은 고대 중국의 표구물중 대부분이 경권(經卷,寫經의 두루마기)과 불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표구의 기원은 중국의 한대(漢代)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대 장언원(唐代 張諺遠)의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 의하면, 중국의 표장기술(表裝技術)은 동진(東晋)때에 이르러 그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유송대(劉宋代)에 범엽(范曄)이 나타남으로써 장배기술은 완숙한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표구 기술은 어느 시대에 어떠한 경로로 유입되었는지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고구려는 건국 초기에 「유기(留記)」라는 역사서를 만들었고, 이불란사(伊佛蘭寺)와 성문사(省問寺)를 세워 국가의 초석을 다졌던, 서기 375년까지는 중국으로부터 장배 내지는 기술을 받아들였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 AD.372년)에 중국의 태왕(泰王) 부견(符堅)이 스님 순도를 보내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들여와 불교의 전래가 본격화되었으며, 이때 가져온 경문은 장배 내지는 표장된 일종의 표구물인 경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장배술 내지는 표장술이 유입되었다고 보여진다.
Ⅱ. 표구의 도구,재료,풀(糊)
1. 도 구
(1) 귀얄
①두꺼운 풀귀얄 : 배접지의 풀칠용.
②얇은 풀귀얄 : 종이 사이의 가장자리를 좁게 풀칠할 때.
③어루만짐 귀얄 : 주지(主紙)와 비단의 배접시, 두드리고 쓸어주어 배접지의 밀착도를 높이는 귀얄이며, 보통 말털이 이용된다.
④다짐귀얄 : 족자의 마무리 단계에서 배접지의 효과적인 접착을 위하여 족자 뒷면을 강하게 두드려 줄 때 사용.
⑤축임귀얄 : 건조판의 임시 부착시, 혹은 주지의 자리잡기 과정 등에서 물을 가볍게 뿌려 줄 때 사용하는 귀얄로서, 일명 물귀얄이라고도 함.
(2) 작업대 : 표구의 모든 작업이 이루어지는 넓은 테이블을 말하며, 편백나무판 또는 은행나무판이 좋으나, 너무 고가이므로 요즈음은 주로 합판을 사용한다.
(3) 건조판 : 주지 및 비단의 배접후 이를 건조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나무판으로 보통은 베니아판을 이용한다.
종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다. 3600년∼4000년전, 이집트에서 파피루스(Papyrus)라는 야생의 수초를 이용하여 문자를 기록하였는데, 오늘날 영어의 페이퍼, 불어의 파피, 독일의 파피루 등은 파피루스를 그 어원으로 하고 있다.
파피루스는 나일 강변에 자생하는 높이가 3m에 이르는 매우 긴 수초이다. 이것을 가늘게 쪼개어 물에서 충분히 불린 후에 평평한 바닥에 종횡으로 펴놓아 준다. 여기에 돌같은 무거운 것으로 눌러주면 끈끈한 진이 나오면서 엉기게 되며, 이것을 햇빛에 건조시켜 준 것이 파피루스이며, 이는 곳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이이다. 오늘날과 같은 완벽한 종이의 발명은 중국 후한대(後漢代)의 채륜(蔡倫)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표구용 종이
①서화 배접지 : 주지의 배접용 종이로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것은 약간의 닥지에다 펄프를 다량 섞어서 만든 것인데, 풀기를 묻혀보면 펄프 성분이 많아서 너무 쳐지는 감이 있다. 따라서 간이용의 작품표구에 적당하다고 본다. 전지(全紙) 크기는 149×72.6cm이고, 천 배접지보다 크다. 이는 작품의 배접 과정에서 되도록이면 이어주는 부분인 이음새를 피하기 위한 배려에서이다.
②천 배접지 : 표구용 비단의 배접용 종이로 일반 시중의 천 배접지는 서화 배접지보다 얇고, 풀을 묻히면 쉽게 쳐진다. 이것도 약간의 닥지에 펄프를 섞어준 것이다.
③보통 순지 : 배접지로도 대용하며, 눌러 붙이기 등 여러 용도에 사용할 수 있는 비교적 질긴 닥지이다.
④날개(돌쪼기)용 순지 : 병풍의 연결 작업을 위한 종이로서, 두텁고 매우 질긴 닥지이다.
⑤초배지 : 액자, 병풍의 뜨게 붙이기 용이다. 약간 누런색과 표백을 해 준 흰색의 두 종류가 있다. 햇빛에 비춰보면 일정한 줄무늬가 나타나며, 닥지를 원료로 했기 때문에 비교적 탄력이 좋다.
⑥태지 : 액자 및 병풍의 뒷면 마무리용 종이를 일컫는다. 청색과 연푸른 빛이 약간 도는 회색의 두 종류가 있다.
⑦황지 : 일반적으로 창틀의 초벌과 재벌용에 사용한다. 일명 하드롱지 라고도 하며, 누런색을 띠기 때문에 황지라 부른다.
⑧색지 : 주지의 사위를 둘러주는 윤선(輪線) 및 기타 계선(界線)등을 나타낼 때 사용한다. 일종의 염색지이며, 빨강, 검정, 밤색 등 여러 종류의 색깔이 있다. 금지(金紙)와 은지(銀紙)도 색지의 일종으로 분류한다.
⑨신문지 : 통상 황지의 대용으로 초벌과 재벌지로 많이 사용한다. 주위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가격도 저렴하며, 충이나 균이 신문지의 인쇄잉크 냄새를 싫어하는 이점도 지니고 있으며, 통풍성도 양호한 편이다.
◈ 서화용(書畵用) 종이
화선지(畵宣紙) : 서화용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화선지는 닥나무에다 펄프를 혼합하여 만든다. 화선지는 묵색을 잘 받지만, 심하게 번지며, 찢어지기 쉽고 붓자국이 난다. 또 젖어 있는 동안은 겹쳐 그리기가 어렵다.
①마지(麻紙) : 삼의 껍질로 만드는 마지는, 두께에 따라서 박지(薄紙), 중후지(中厚紙), 후지(厚紙)로 나누며, 색깔에도 흰색과 붉은 색이 있다. 창호지와 비슷한 성질이 있어서 붓자국이 잘 나타나지 않으므로 겹쳐 그릴 수도 있어서 산수화를 그리기에 가장 알맞다. 그러나 농담의 한계가 서로 융합되는 경향이어서 발묵(潑墨) 효과가 떨어진다.
②옥판선지(玉板宣紙) : 두꺼운 종이로 흡수도가 빨라서 1필이나 2필 정도 그리고 난 후에는 다시 붓에 먹을 찍어야 할 정도이다. 따라서 먹의 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상당한 숙련이 필요하다. 또 젖어 있는 동안은 묵색이 아름답고 선명하지만, 일단 마르면 약간 연해지면서 탁해지기 때문에 다시 겹쳐 그리기를 하고, 배접을 하면 젖어있을때와 거의 같은 농도로 되살아나기 때문에 겹쳐 그린 곳이 오히려 진해지기도 하므로 가늠하기 어려운 종이이다. 이것은 두꺼운 종이의 공통인 결점이며, 옥판선지는 마지와 더불어 비싸므로 연습용으로는 적당치 않다.
③당지(唐紙) : 당지는 본래 중국에서 만든 종이를 말하며, 닥나무와 어린 대나무의 섬유가 원료이다. 당지 중, 황갈색을 띠며 두껍고 거친 것을 일번(一番)당지, 연한 황색에 엷고 매끈한 것을 이번(二番)당지라 부른다. 후자가 상질이다. 당지는 화선지처럼 심하게 번지지 않으며 발묵이 좋고 경제적이어서 연습용으로 적당하다.
④창호지(窓戶紙) : 묵색도 좋고, 겹쳐 그릴 수도 있으며, 번짐도 알맞아서 연습용은 물론이요, 직접 제작 할 때도 많이 쓰인다.
⑤화전지(花箋紙) : 중국산(中國産)의 종이이다. 산수, 인물, 사군자, 고기(古器) 등을 목판(木版)으로 인쇄하여 넣었으며 색깔과 문양의 종류도 다양하다. 주로 서예에 많이 이용되는 종이이다.
⑥금전지(金箋紙) : 종이 표면에 고운 분가루를 뿌려 압착시킨 것으로 색깔은 백색, 담홍색, 담람(淡藍), 황색 등이 있다. 일본산(日本産)이며 서예용이다.
탁본 1. 탁본이란 무엇인가 탁본(拓本)은 탑본(榻本),탑본(搭本),사출(寫出)이라고도 하는데 금석(金石)에 새겨진 글씨나 그림문양(紋樣)등을 종이에 대고 찍어 박아내는 것을 말한다.원래 탁본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기술과 방법도 여러 나라로 전래되었으며, 따라서 탁본의 방법도 나 라에 따라 다소 틀린 점이 있으나 대동소이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에 한때 유행되었다가, 조선시대에 관심있는 이가 몇 몇 있었으나 말기에 오경석 등에 의해 겨우 싹이 트다가, 근자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2. 탁본의 의의(意義) 탁본은 모사(模寫)에만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이는 한 사람의 창작에 의해서 저(箸),서( 書),각(刻)된 내용이 한곳에 다 나타나는 일종의 종합예술인 것이다. 작가에 의해 글이 지어지고 서예가에 의해 글이 써지고 각 인(刻人)에 의해 글이 돌에 새겨질 때 바로 세 예술인의 정신이 합하여진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탁본의 묘경(妙境)이라 고 하겠다.
3. 탁본시 준비물(연모,道具) 1)습탁시 ㉠ 무영천이나 가제천, 명주천(사용할 대상의 때에따라 다름) ㉡ 먹과벼루 ㉢ 물붓(표구할 때나 도배할 때 사용하는 붓이면 됨) ㉣ 두드리는 솔(크고 작은것) ㉤ 수건,소창 ㉥ 물그릇 및 물통 ㉦ 먹접시 ㉧ 화선지나 탁본용 창호지(순 닥지로 만든 창호지), 신문지 ㉨ 좁쌀,쌀,콩,녹두 ㉩ 칼,가위,테이프,고무줄,비닐
2)건탁시 습탁에 필여한 재료 외에 건탁용 먹 및 먹지,자(尺) ⊙연모만들기 (1) 먹방망이 크고 작은 것 4개 대개의 경우 솜방망이,좁쌀방망이,톱밥방망이를 통틀어 먹방망이라고 한다. 이는 헝겊에다 솜이나 좁쌀,톱밥 등을 싸서 이에 먹물을 묻혀 사용하므로 먹방망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탁본 대상물에 따라 먹방망이나 결의 헝겊이 달리 쓰이는 게 좋은데,가령 비(碑)를 채탁할 때의 먹방망이는 사방 30cm정도 크기의 명주천이나 가제천을 편 다음 거기에다 좁쌀이나 왕겨를 7대 3의 비율 로 섞어 싸서 고무줄이나 끈으로 묶는다. 원래는 헝겊을 펴고 그 위에 좁쌀을 편 다음 왕겨를 제일 안쪽에다 넣고 싸는 것이 가 장 이상적인데, 사용하다 보면 좁쌀과 왕겨가 이내 혼합되어 버리므로 처음부터 혼합해서 만들어도 무방하다.
(2) 탁묵액(拓墨液) 먹물은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 먹물을 직접 만들거나 좋은 먹을 갈아서 쓰는 것을 옛부터 탁본하는 데에 왕도로 생각했던 만큼 먹물을 갈아서 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더운 여름철에는 병에 담긴 먹물이 3-4일 이 지날 경우 상하기 쉬우므로 먹물에다 소주(燒酒)를 몇 방울 정도 떨어뜨리면 20일 정도는 그대로 보관하여도 무방하다.
(3) 물붓 될 수 있으면 고운 것이 좋다.
(4) 두드리는 솔 양복의 먼지털이용으로 파는 솔이면 되는데, 털이 곱고 고른 것으로 하되 작은 솔과 큰 솔을 갖추어 놓는 것이 좋다.
(5) 수건 세수할 때 쓰는 면수건
(6) 물그릇
(7) 화선지 지질(紙質)이 좋고 어느 정도 종이의 발이 고운 것이면 된다. 전주는 순닥나무를 사용해서 만드는 종이로 유명하다
(8) 칼,가위
(9) 먹접시 납작하고 잘 깨어지지 않는 그릇이면 된다.
(10) 좁쌀,쌀,콩,녹두 등
(11) 체이프,고무줄,비닐(사방 2m 정도) ☞건탁의 경우는 이 외에 건탁용 먹이나 먹지가 필요
4. 탁본하는 방법 탁본하기 전에는 반드시 주인이나 관리인에게 허가를 받고 해야 한다. ① 탁본의 대상물을 상하지 않도록 하여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 ② 대상물 옆에 채탁에 방해가 되지 않고 집어 쓰기 쉬운 곳에 연모를 늘어 놓고 작업에 들어간다. 먼저 종이를 비의 양쪽에 적당한 여유를 두고 자른다. ③ 종이를 비석면에 테이프로 고정시킨다. ④ 종이에 물을 바르며 비석면에 붙인다. 이때 미자법(米字法:米자 모양으로 풀이나 물을 칠해 나간다)을 바르는 것이 좋다. ⑤ 종이와 비석면 사이의 물거품이나 바람을 수건으로 눌러서 제거한다. ⑥ 나타난 문자나 문양위의 종이를 솔로 두드린다. ⑦ 먹방망이로 두드리는 작업이다. 한손에 큰 먹방망이를 가지고 다른 한손에는 그보다 조금 작은 것을 가지고 먹물을 작은 먹 방망이에 골고루 묻히고 이것을 다른 손의 큰 먹방망이에 탁탁 두드려 먹물을 옮긴다. 두드리는 속도는 빠르고 일정한 간격으로 종이위에 수직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것이 요령이며 좋은 방법이므로 결코 힘들게 두드릴 필요는 없다. ⑧ 채탁한 종이를 비석의 면에서 떼어낸다. ⑨ 적당한 크기로 접어두고 비석의 크기라든가 세워지게 된 이유, 세운 이, 글씨쓴 이 등을 메모하고 사진을 찍어 두는 것도 좋 겠다.
5. 탁본의 종류 ⊙ 탁묵(拓墨)하는 데에 따라서 오금탁(오金拓)과 선시탁(蟬翅拓)으로 구별된다. 오금(烏金)이란 문자(文字)외의 종이면 전체 를 새까맣게 먹색으로 채탁하는 방법이고, 선시(蟬翅)란 문자(文字)의 주변이나 글자만 엷은 먹색으로 탁묵(拓墨)하고 남은 지면 (紙面)은 휜 종이 그대로 남기는 방법이다.
⊙ 비석이나 종(鍾) 등 금석문(金石文)이외의 탁본을 일컬어 응용탁(應用拓)이라고 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어탁(漁拓) 과 엽탁(葉拓)이다.
6. 탁본(拓本), 간탁(刊拓)에 알맞은 기후 사찰(寺刹)에서는 목판경(木板經)의 인풀(印出)을 청명 후와 하지 전과 추분 후와 입동 전에 한다. 이것은 이때가 경판(經板)을 인사(印寫),쇄인(刷印)함에 판본(板本)이 잘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먹도 갈아 쓰기에 좋고 잘 상하지 않으며 일을 하기에도 가장 알맞기 때문이다. 여름이나 겨울철에는 판본(판본)이 불어나거나 얼어서 경판이 쉽게 상하므로 이때를 피한다. 다시 말하면 더운 여름철의 직사광선의 햇빛이나 추운 겨울철의 혹한은 반드시 피하여야 한다. 또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채탁을 할 수가 없다.
7. 연모와 탁본물의 보관방법 (1) 연모 ▷ 먹방망이의 경우 헝겊을 풀어서 빨아 말리고 좁쌀이나 콩 등은 따로 그늘에 다 말린 다음 보관하였다가 다시 묶어 쓰면 된다. ▷ 먹물은 20일 정도 내에 다시 탁본을 하는 경우에는 소주 몇 방울을 섞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버리거나 다른 곳에 사용해야 한다.
(2) 탁본물의 보관 -배접- ⊙준비물:물솔,풀솔,보관지(파지),장척(長尺),판(板). ⊙방법 ① 보관용지를 채탁한 용지보다 사방 4-5cm 정도 크게 잘라서 표면을 위로 향하게 하고 채탁한 종이는 뒤집어서 판(板)위에 양쪽에다 널어 놓는다. ② 탁본한 용지를 탁본한 쪽이 밑으로 향하게 놓고, 물솔로 종이 위에 물을 약간 바르든가 물을 뿜어 주름을 완전히 펴서 구겨진 곳이 없게 하여 펴 놓는다. ③ 보관용지는 묽은 풀을 바르면서 번져짐이 없도록 주름살을 펴 나간다. ④ 풀을 칠한 보관용지를 탁본한 종이 위에 씌운다. 마른 솔로 주름을 펴 나간다. ⑤ 보관용지와 탁본한 종이가 붙은 것을 뒤집어 놓고 탁본한 종이 주위에 남아 있는 보관용지에 풀을 바른다. ⑥ 판이나 벽에 붙인다. ⑦ 잘 말려진 다음 종이를 떼어내어 가장자리의 보관용지를 깨끗하게 잘라버린다. ⑧ 작은 작품은 액자에 끼워 두거나 벽에 붙이고 큰 작품은 깨끗한 종이로 싸서 말아 둔다.
사군자란 무엇인가
사군자 교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등 네 가지 식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각 식물의 특유의 장점을 군자 즉, 덕과 학식을 갖춘 사람에 비유하여 사군자라고 부른다. 사군자라는 명칭이 생긴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이며 그 이전에는 개별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 사군자화가 처음 그려진 시기는 고려 시대로 보고 있다. 고려 시대에 이어 조선 초기에도 사군자화가 계속 문인들 사이에 그려졌다. 중기의 사대부 화가인 이정, 오달제, 어몽룡 등은 조선 시대 묵죽, 묵매화의 양식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조선 시대 사군자화는 질적·양적인 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김정희와 조희룡을 정점으로 한 말기의 사군자화는 약간 수그러진 듯하나 김규진, 조석진, 이하응 등의 그림에서 새로운 구도와 필치에 의한 시대적 감각의 표현이 나타났다.
이정(李霆) 1541(중종 36)∼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묵죽화가.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 지(益州君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正이란 이조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함.)에 봉해졌으며,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묵죽화에 있어서 그는 유덕장(柳德章)·신위(申緯)와 함께 조선시대 3대화가로 꼽힌다. 또한, 그는 묵죽화뿐 아니라 묵란·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고, 회복 후에는 더욱 힘찬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 초기의 묵죽화들이 대개 수문(秀文)의 묵죽화와 같이 줄기가 가늘고 잎이 큰 특징을 보임에 반하여, 그의 묵죽은 줄기와 잎의 비례가 좀더 보기 좋게 어울리며, 대나무의 특징인 강인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는 특히 굵은 통죽(筒竹)을 잘 그렸는데, 통죽의 굵은 입체감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즉, 통죽의 마디를 묘사함에 있어서 양쪽 끝이 두툼하게 강조된 호형선(弧形線)으로 마디의 하단부를 두르고, 거기에서 약간의 간격을 떼고 아랫마디를 짙은 먹으로 시작해서 점차로 흐려지게 하였다. 이 기법은 조선 후기의 여러 묵죽화가들에 의하여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는 〈풍죽도〉에서 대나무의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대나무의 탄성(彈性)을 잘 나타내었다. 화면의 공간감(空間感)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한편, 그는 묵죽화 또는 묵란화에서 토파(土坡)를 묘사함에 있어서는 당시의 산수화의 주류인 절파화풍(浙派畵風)의 영향을 받아 강한 농담(濃淡)의 대조를 많이 사용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립(崔)과 허균(許筠)은 그의 묵죽화의 자연스러움과 사실성을 칭찬하였으며, 이정구(李廷龜)는 “소동파(蘇東坡)의 신기(神氣)와 문동(文同)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중국의 묵죽화는 송대(宋代)의 것보다 명대(明代)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따라서, 그는 소동파나 문동의 묵죽양식도 하창(夏昶)이나 또는 그 뒤를 따른 주단(朱端) 등의 명대 화가들에 의하여 변형된 것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강한 필력과 잘 잡힌 구도를 보이며, 조선 묵죽화의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기년작(記年作)으로는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인 검은 비단 바탕에 금니(金泥)로 그린 〈죽도 竹圖〉가 만력갑오(萬曆甲午), 즉 1594년에 해당하여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이다. 그의 만년작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죽도 雨竹圖〉가 있으며, 여기에 천계임술(天啓壬戌), 즉 1622년의 연대가 적혀 있다. 이밖에도 낙관이 있는 묵죽화는 많이 전한다.
그가 인물화를 그렸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문월도 問月圖〉 두 폭이 개인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두 그림은 모두 절파양식을 강하게 보이는 인물화이다.
〈풍죽도〉를 그린 이정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종친 사대부 화가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문집 등 문헌 자료를 통해서 보면 대나무 그림에 있어서는 당대의 명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헌 자료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보아도 조선 시대의 제일인자로 꼽는데 주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풍죽도〉는 그의 선비다운 기개와 뚜렷한 개성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 한국적인 화풍을 함께 제시하고 있어 한국 묵죽화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다.
〈풍죽도〉는 세 그루의 대나무가 스산한 바람에 스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잎이 흔들리는 방향을 보아 바람이 화면의 왼쪽에서 불어오는 것 같은데, 바람을 맞아 휘는 듯 버티는 대나무의 탄성(彈性)이 절묘하게 그려져 있다. 전경의 대나무는 진한 먹색으로,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 두 그루의 대나무는 옅은 먹색으로 처리되어 있어 공간감이 살아나고 있다. 특히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날렵하면서도 세련된 필법은 선비화가의 풍모를 여실히 보여 준다.
〈풍죽도〉는 지조라든가 절개의 상징형으로 그린 묵죽도에서 느낄 수 있는 경직성이나 근엄함 같은 것은 찾아 볼 수 없고, 선비의 기개를 느끼게 하는 단정함과 정숙함을 그리고 있다. 담묵과 농묵을 구사한 세 그루의 대나무가 창출해 내는 그윽한 공간감은 시적(詩的)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바람결에 밀리는 대나무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의 대나무를 연상케 해준다. 대나무 잎의 묘사에 보이는 세련된 운필에는 기교를 초월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이 배어 있다. 이런 점에서 〈풍죽도〉는 선비 이정의 교양과 인품,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대자연의 섭리가 함께 용해되어 있는 참다운 문인화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표현 기법과 회화 정신
대나무 잎의 묘사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경아식(驚鴉式), 개자식(字式), 분자식(分字式) 이다. 〈풍죽도〉에서는 바람을 맞이하는 쪽의 대나무 잎은 사필경아식(四筆驚鴉式, 네 잎을 까마귀가 놀라 날개를 펴고 달아나는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을 구사하였고, 그 반대쪽 대나무 잎은 첩분자식(疊分字式, 한자의 分字를 여러 개 겹친 모양으로 그리는 방식)과 삼필개자식(三筆개字式, 개字를 풀어 쓴 방식)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처럼 대나무 잎을 그릴 때 한자의 필획을 차용하는 것은 동양화 특유의 서화일체(書畵一體)사상과 관계가 깊다. 서예가로 유명한 조맹부(趙孟)는 서화일체를 강조하면서“바위는 비백법으로, 나무는 전서체로, 대나무를 그리는 데는 반드시 팔분법(八分法), 즉 예서의 일체를 통달해야 한다. 만일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것을 잘 이해한다면 서화는 원래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김정희는 묵란(墨蘭), 묵죽(默竹)에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킬 것을 강조하여, 예서의 획과 묵란의 획을 동일시하였고, 또한 대나무 그림에도 문인 정신의 표현인 서권기(書卷氣)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선비들이 대나무를 즐겨 소재로 삼아 그리는 데에는 대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다른 소재도 많은데 굳이 대나무를 비롯한 사군자를 고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대나무는 다른 식물들과 달리 사계절을 통하여 푸르름을 잃지 않으며 곧게 자라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속성을 지닌 대나무를 동양의 옛 사람들은 군자에 비유하였다. 대나무를 군자에 비유한 최초의 사례는 《시경 詩經》의 위풍(衛風)편의 기오(淇奧) 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제1절의 내용이다.
저쪽 기수 후미를 보아라 (瞻彼淇奧)
푸른 대나무는 청초하고 무성하니 (綠竹)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뼈와 상아를 다듬은 듯 (如切如磋)
구슬과 돌 갈고 간 듯 (如琢如磨)
정중하고 너그러운 모습이여 (瑟兮兮)
빛나고 뛰어난 모습이여 (赫兮兮)
고아한 군자가 거기 있네 (有匪君子)
결코 잊지 못하겠네 (終不可)
<기오>는 기수(淇水) 가의 대나무를 위(衛)나라 무왕의 인품에 비유하여 읊은 시로, 모두 3절로 되어 있다. 3절을 통하여 ‘비군자(匪君子)’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는데, 모두 대나무를 의인화해서 비유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시경》 이후 대나무와 군자 사이가 가까웠던 때는 선비들의 풍류로 유명한 중국 육조 시대(六朝時代)이다. 죽림칠현들이 대나무 숲을 은거처로 삼아 군자를 자처하며 풍류를 즐긴 것이라든지, 왕희지(王羲之)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대나무를 가리켜 “차군(此君) 없이 어찌 하루라도 지낼 수 있느냐”고 하였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해 준다. 대나무에 대한 이와 같은 정서는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고 읊은 윤선도의 〈오우가 五友歌〉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선비화가들은 대나무 등 사군자를 그림에 있어서 작화 태도의 확립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 때문에 사군자를 그리는 사람은 예술의 기법에 앞서서 문학의 교양을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서권기’가 바로 그것이다. 서권의 기운이 없고서는 대나무건 난초건 그 격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였다. 선비들은 그래서 단순한 기예(技藝)는 서권의 기를 구비하지 못한 교묘(巧妙)한 손재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문인화의 기본 정신은 인품과 화품(畵品)을 동일시하는 데에 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대나무 그림이 마치 아무나 손쉽게 기법을 습득해서 그릴 수 있는 화목인 것처럼 착각되고 있는 느낌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볼 때 〈풍죽도〉는 오늘날 잘못된 사군자 그림의 추세에 많은 점을 깨우쳐 주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문인화의 개념
文人畵란 직업화가가 아닌 순수한 문인의 그림. 南宗畵 또는 南宗文人畵라고도 한다. 王公貴族이나 士大夫 또는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그리는 그림을 포괄적으로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림을 직업적으로 그리지 않는 순수한 문인들의 작품이기 때문에 아마추어적인 경향이 강하며, 외형적인 형태를 꼼꼼하게 그리는 工筆보다는 마음속의 사상을 표현하는 寫意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문인 특유의 문인화가 발전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문인화는 詩나 書藝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발전하게 되어 詩·書·畵에 모두 뛰어난 이른바 '三絶'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문인화는 水墨과 淡彩를 즐겨 쓰는 경향이 있고 장식성보다는 그리는 사람의 인품이나 사상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기 때문에 자연 格調가 중요시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중국과는 달리 문인화와 남종화가 반드시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文人이 그린 그림이면 그것이 남종화법을 따른 것이든 아니든 문인화로 분류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예를 들면 조선 초기의 姜希顔은 북종화로 분류되는 南宋의 화원체 화풍이나 明代의 浙派 화풍 등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던 인물이지만, 신분이 文人이었기 때문에 문인화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인화의 예로는 國寶 제180호로 지정된 秋史 김정희가 친 '阮堂歲寒圖'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南宗畵法을 따라서 그린 많은 화원들을 절대로 문인화가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문인화란 어떠한 화풍이나 화법을 지칭하기보다는 화가의 신분에 의거하여 부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1)
1) 安輝濬, 『韓國繪화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구생법이란 무엇인가
구생법(九生法)
글씨는 주변환경이나 쓸 당시의 정신 상태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다. 어수선한 환경이나 맑지 못한 정신으로서는 좋은 글씨를 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변 상황도 그렇지만 서(書)의 직접적인 매개체가 되는 문구나 용품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갖추고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 논한 것으로서 구생법(九生法)이라는 것이 있다. 생(生) 이라고 하는 것은 "새롭다, 혹은 새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곧 썩거나 묵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갖추어야 할 아홉가 지 생(生)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생필(生筆)이다. 글씨를 쓰고나서 붓을 빨지 않아 먹이 굳은 채로 있는 것을 다시 사용해서는 온전한 글씨가 될 수 없 다. 깨끗이 빨아 호(毫)도 가지런히 정돈된 붓이 바로 생필(生筆)이다.
두번째는 생지(生紙)이다. 화선지를 바람이 부는 곳에 놓아 두거나 하면 조직이 팽창해서 글씨를 쓸 경우 먹발이 좋지 않을 뿐 만 아니라 붓이 지면에 닿기 바쁘게 번지게 된다. 오랫동안 바람을 쏘이거나 햇빛에 직접 노출된 화선지는 적합치 않다.
세번째는 생연(生硯)이다. 먼지나 때가 묻지 않은 벼루를 말한다. 벼루에는 사용할 때만 물을 붓고 쓰고 난 후에는 반드시 먹을 깨끗이 닦아서 말려두지 않으면 안된다. 갈아 놓은 먹을 그대로 놓아두면 찌꺼기가 응고되어 좋은 먹물을 얻을 수 없다.
네번째로 생수(生水)이다. 먹을 갈 물은 새로 푼 물이라야 한다는 뜻에서 생수라고 한다.
다섯번째로 생묵(生墨)이다. 먹물은 필요한 만큼만 갈아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겨둔 먹물이 너무 오래되면 광택이 없어지 고 좋은 먹빛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나 즉시 간 먹을 바로 쓰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 먹을 간 뒤 30분 정도의 여유를 두어 먹 과 물이 충분히 용해된 후에 글씨를 쓰는 것이 좋다.
여섯번째로 생수(生手)이다. 글씨는 손으로 쓰는 것이므로 손의 상태가 좋을 때 쓰는 것이 이상적이다. 손이 피곤하면 역시 좋 은 글씨를 쓸 수 없다.
일곱번째로 생신(生神)이라는 것이다. 신(神)이란 정신을 말한다. 글씨를 쓸 때는 고요한 생각, 자기의 정신을 한 곳에 모아 그 야말로 정신을 통일시켜 잡념없는 생생한 기분으로 쓰지 않으면 안된다.
여덟번째로 생안(生眼)이다. 눈의 상태가 나쁘면 글씨를 쓰는데 많은 장애가 생긴다.
마지막으로 생경(生景)이다. 이것은 글씨를 쓸 당시의 주위 환경을 말한다. 날씨도 맑고 주위도 깨끗이 정리된 상태에서 글씨도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철저하게 지켜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실제적으로 이 아홉가지를 모두 갖춘 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다소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이 아홉가지를 마음에 새기고 노력한다면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낙관(落款)은 도장이 아니다
<낙관(落款)이란 무엇이며 낙관과 인장(印章),인영(印影)은 무엇이 다른 것인가?>
雨頌 尹炳朝 (한국전각학연구회 감사)
서론 1. 낙관(落款)의 용어풀이 2. 개자원화보에 나타난 낙관의 정의 3. 낙관의 현대적 해석 4. 낙관의 발생과 변천 5. 낙관의 중요성
6. 낙관의 종류 7. 낙관의 중요 구성요소 8. 화제(畵題)와 제발(題跋) 9. 서화용 인장의 역사 10. 인장의 종류 결론
서론 서화작품에 있어서 주제(主題)와 낙관(落款)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여기에서 주제란 표현하고자 하는 주된 문장, 또는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주문(主文)이라고 불리운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역시 주문(主文) 또는 주제(主題)임에 틀림없지만 낙관이 이와 호응하지 못하면 그 작품은 미적(美的) 효과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작품의 주 내용을 제작하는데는 심혈을 기울이면서도 낙관에 대하여는 그 역할이 부수적이라 하여 큰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더구나 낙관 속에 포함되는 인영(印影. 도장흔적)에 대하여는 그 격의 높고 낮음을 알지 못함은 물론 심지어 낙관과 인장을 동일한 용어로 알고 사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에 관한 문제점을 지적하여 보다 격조높은 작품제작에 도움이 되게함은 물론,낙관(落款),인장(印章),인영(印影)에 관한 용어풀이를 명확히 함으로써 올바른 용어사용을 통한 서예문화 창달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1. 낙관(落款)의 용어풀이
낙관이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인데 낙성관지라는 네 글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낙(落)이라는 글자는 ①떨어지다 ②마을 ③완성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성(成)이란 이룬다는 말이니 두 글자를 합하여 낙성(落成)이라는 것은 완성,준공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관(款)이라는 글자에는 ①조목 ②파서 새긴 글자의 뜻이 있고, 지(識)라는 글자는 ①알다라는 뜻이 있어 ‘식‘이라 발음하고 ②돋을새김한 글자라는 뜻이 있어 ’지‘라 발음한다. 따라서 관과 지를 합하여 관지(款識)란 주로 과거 청동기인 종정(鐘鼎)이나 이기(彛器)에 새겨져있는 명문(銘文)을 말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그 설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첫째, 음각한 글자가 '관', 양각한 글자가 '지'라는 설이 있고, 둘째,외부에 새긴 글자가 '관', 내부에 새긴 글자가 '지'라는 설, 셋째,도안이나 도형이 '관'이고 전각을 '지'라 한다는 설등 3가지가 있어 좀더 연구를 진전시켜야할 부분으로 판단되지만 서화 작품의 제작에 관한 고찰을 함에 있어서는 대체적으로 음각 양각의 문자를 총칭하는 말로서 이해하면 무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唐 歐陽詢書 九成宮醴泉銘 낙관이 묵서(墨書)로만 되어있고 인영(印影)은 없다
2. 개자원화보에 나타난 낙관의 정의 낙관이 언제부터 행하여 졌는지,그리고 낙관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당(唐)이나 육조(六朝)는 물론 한(漢)의 시대에도 일부 서화에 낙관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낙관에 관한 설명으로써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것은 청대(淸代) 초기, 1679년에 발간된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이다. 이 화보에서 낙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정의 하고있다.
落成款識之省略, 書畵完成時, 作者加寫姓名年月, 或詩句印鑑於其作品之上, 謂之落款 (낙성관지의 생략된 말로서 서화완성시 작가가 성명,연월일 등을 기재하고 혹 작품 위에 싯구나 인장을 날인하여 넣는 것을 일러 낙관이라 한다)
위의 표현을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서화작품을 완성하면서 작품제작 시기나 성명등을 기재한 후 혹 싯구를 적거나 혹 인장을 날인하는 것을 낙관이라 한다는 풀이가 된다. 이 중 "或詩句印鑑於其作品之上"의 부분을 좀더 상세히 고찰해 보기로 한다. 개자원화보라는 책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설명한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싯구를 적는다 함은 바로 화제(畵題)의 기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인장을 날인한다 함은 성명인,아호인 또는 기타 인장으로 작품 제작자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날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자원 화보에서 정의한 낙관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낙관이란 성명이나 시기등을 묵서(墨書)하는 것을 말하지만 혹 화제등의 싯구가 포함되기도 하고 성명인,아호인등의 인장 날인을 함께 병행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黃山谷의 松風閣詩
낙관이 비교적 많이 행하여지던 시기의 작품이지만 낙관이 전혀 없다.중간과 말미에 무수한 인장이 날인되어있지만 황산곡 본인이 알인한 것이 아니고 후세인들의 감상인 또는 수장인 등이다. .
작품에 나타나는 싯구에는 화제 이외에 제발(題跋)이란 것도 있는데 이 제발이 낙관의 일부인가 하는 문제는 단순하게 정의되어지기 어렵다. 최초에는 앞쪽의 것을 제(題)라 하고 뒤쪽의 것을 발(跋)이라 했으며 이를 합쳐서 제발이라고 하는데 현대에 와서 앞쪽에는 문장을 쓰지 않고 짧은 어구(語句)를 적어 제(題)대신 제목이라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제(題)란 그림,글씨의 제목이므로 낙관이 아니라 주제(主題)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발문(跋文)은 작품제작시 동시에 기록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후 별도로 기록되기도 하고,후대에 기록되기도 하므로 역시 낙관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관계로 제발은 낙관과는 별도의 독립된 요소인 것이다.
작품에 날인된 인영(印影)에는 성명인,아호인 이외에 인수인(引首印),압각인(押脚印),감상인(鑑賞印),소장인(所藏印)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개자원화보에서 낙관에 포함하는 인영(印影)은 성명인,아호인 또는 이와 동등한 역할을 하는 인장을 관기(款記)한 묵서(墨書)와 함께 날인하는 것에 국한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감상인,소장인 등은 타인의 인장이며 인수인,압각인은 장식성이 강하여 성명인,아호인과는 그 용도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제작자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는데 필요한 인영까지만 낙관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참고로 전각에서는 인장의 측면에 방각(傍刻)된 것은 측관(側款)이라 하고, 서화 아닌 기물에서 보이는 서명도 낙관이라 할 수 있지만, 이것은 명(銘)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서화작품에 인장을 날인한 것은 송대(宋代)에 시작하여 원대(元代)부터 활발하게 되었으나 당대(唐代) 말까지는 인장을 사용한 예가 드믈므로 당(唐) 시절의 서화에는 당연히 인장이 날인되어 있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낙관이란 묵서 부분에 대한 지칭인데 애초에는 그러하던 것이 점차 인장의 날인이 보편화되면서 기록과 인영(印影)의 유기성 때문에 인장의 날인이 낙관에 포함되어 정의된 것으로 판단된다. 싯구를 넣는 행위 역시 최초에는 행하여지지 않던 것이 차츰 보편화되면서 낙관의 일부로 인식되어지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3. 낙관의 현대적 해석 개자원화보에 의한 낙관의 정의는 위와 같이 해석할 수 있거니와, 그 이후로 서화의 다양화와 더불어 낙관도 다양해져서 주제 이외에 부가되는 글귀나 인영이 여러가지의 유형을 보이고 있으니, 자연히 낙관에 대한 현대적 해석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게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에 와서 어느 부분까지 낙관에 포함되는지를 정의하는 것은 몹씨 어려운 것이며, 어떤 면에서 보면 그렇게 정확히 정의를 내려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있다.
단지,용어의 정의는 연구자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도장 또는 인장을 일러 낙관이라 하는 것은 전혀 그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잘못임을 밝혀두며,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거리인 인사동에서 도장을 새기는 점포에 "낙관 파드립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던가 일부 서화가들이 인장 찍는 것을 "낙관 찍는다" 라고 표현하는 것 등은 바로 시정되어야 한다.
寫經殘券(安弘嵩). 六朝. 400-500년 경의 글로서 말미에 卷第五十五第卄八品 法師慧融經 比丘 安弘嵩란 관지가 쓰여져 있다.
4. 낙관의 발생과 변천
낙관이란 앞의 정의에서도 밝혔듯이 서화의 주제를 보완하는 부수적 위치에 있는 글이다. 그런데 당(唐) 이전의 여러 대가들의 작품에서는 낙관 찾기가 쉽지 않다. 낙관이 보편화 되기 시작한 것은 송(宋)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그 전에는 특별히 낙관이라 할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손과정(孫過庭)의 서보나 당(唐) 말기의 장언원(張彦遠)이 화론(畵論)과 화인전(畵人傳)을 합하여 835년에 편집한 책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에도 그림 감식과 감정, 감상, 용필법,모사법 등에 관한 내용은 있어도 낙관에 관한 언급은 없다.
서보에는 서예 이론이 상세히 기술되어있고, 역대명화기는 이 책으로 인해 당시까지 의문시 되던 당(唐) 및 그 이전의 회화사가 명백해졌다는 정도의 수준 높은 저술인 만큼 여기에 낙관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것은 곧 결국 당나라까지는 낙관이라 할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이후 송(宋)에 이르러 서화작품에 명사들이 자신의 감회를 나타내는 글과 시문을 기록하는 풍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것이 널리 퍼져 오늘날의 낙관으로 발전한 것으로 본다. 원말(元末) 4대가의 한 사람인 예찬(倪瓚 1301-1374 )은 제관(題款)을 길게 하거나 화찬(畵讚)을 기록한 다음 자신의 인장을 찍었는데 이에 영향을 받아 후세 서화가들이 따라 하므로 서화작품에 낙관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명(明)의 문팽(文彭 1498- 1573)이 자기 도장을 스스로 새겨 사용한 이후 서예가들은 서화용 인장의 활용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러듯 작품의 부가적 설명과 제작자의 신표(信標)가 필수적으로 구비되기 시작하면서 낙관은 서화형식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후 서화에 점차 미학적 개념이 증가되면서 낙관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모하여 왔는데, 현대에는 설명이나 확인의 의미 보다는 미적요소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낙관의 별칭으로서 관(款), 관기(款記), 관서(款書), 관지(款識), 제관(題款), 제기(題記) 등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5. 낙관의 중요성
낙관에는 제작시기,작가의 성명이나 아호 등이 있으니 우선 어느 때 누가 이 작품을 제작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해소될 수 있다. 특히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제작자를 판단하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인 관계로 낙관이 있음으로 해서 진위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作 忍無辱 낙관할 위치를 고려하여 주문(主文)을 작성하고 낙관을 채워 균형을 맞춘 경우이다.
또한 하나의 작품에 주제(主題)만 표현되었을 때엔 단조로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부제(副題)에 해당하는 낙관이 존재하므로써 음과 양, 허와 실이 대비되어 입체감 있는 평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세기 이후의 서양미술은 온통 색의 마술인양 현란하게 빛과 색이 율동한다. 이 과정에서 혹은 원근법이 없어지기도 하고, 명암법이 없어지는가 하면 대상 자체가 보이지 않기도 한다.
대상이 요동치지 않으면 변화를 구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양의 서화는 낙관이 동원되므로서 주제와 낙관이 잘 어우러지기만 하면 주제 자체를 전혀 일그러 뜨리지 않고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구사되는 것이다. 특히 붓글씨작품의 경우 가독성이 중시되는 관계로 마음 내키는대로 형태를 변경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낙관을 적절히 활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낙관에는 인장의 날인이 포함된다. 인장이 찍혀 보이는 자국을 인영(印影) 또는 도서(圖署)라고 하는데 검은색으로 작업한 한 쪽에 빨간 색 인영이 빛나고 있을 때 그 조화로움은 신비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낙관의 모든 묵서(墨書)는 생락하고 인장만 한 방(方) 찍어 주문과 어울리게 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넓은 여백에 단 하나의 붉은색 인영이 주는 미학적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중국의 상류층 인사는 관어(官語)을 알아야 하고 금석(金石)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만치 전각은 문화인의 필수적인 교양인 것이다. 수준 높은 인장을 소장하였다가 검인(鈐印 도장 찍는 행위) 하였을 때 감상할 수 있는 품격있는 도법(刀法)은 동양의 서화작품 아니면 감상할 수 없는 서예술의 진수이다.
송(宋),원(元),명(明),청(淸) 시대처럼 작품제작자의 성명을 밝히고,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검인(鈐印)되는 것이 낙관의 주 목적이라면 낙관은 더 이상 현대미술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현대는 정보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이 방법 말고도 이 정도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방법은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서화작품이 하나의 완성된 실체로서 감상자 앞에 놓이기 위해서는 주제와 낙관이 통일적으로 구성되어 어울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주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이의 부수적 존재인 낙관까지도 미의 창조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상호 유기적 결합을 통하여 미적 효과가 상승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낙관을 소홀히 다룬다면 결국 서화작품은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한 작품 위의 모든 요소들은 그 전달하고자하는 내용의 중요도에 관계없이 동등한 수준의 미적 가치를 지니면서 어울려야 현대인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이다.
왕형렬作 겨울나기 1994 한지 먹 혼합재료 서양회화 양식을 따라 그린 그림대상만 표현되어있고 낙관은 전혀 없다
6. 낙관의 종류
낙관의 형태에는 그 분류기준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작품제작의 동기나 시기, 성명, 아호 등 제작자 자신에 관한 사항만 기재하였을 때는 이를 단관(單款)이라 하고, 받을 사람에 관한 내용까지 함께 적으면 쌍관(雙款)이라 한다. 쌍관일 경우 받는 사람에 관한 기록을 먼저하게 되므로 상관(上款), 제작자 자신에 관한 기록을 하관(下款) 이라 한다. 관기(款記)의 길이가 길면 장관(長款), 짧으면 단관(短款)이라 하는데 길고 짧은 기준은 별도로 정해놓을 수가 없는 문제여서 작품 주문(主文)의 길이, 작품의 크기나 글자의 대소등 제반 여건을 감안하여 판단하게 된다.
7. 낙관의 중요 구성요소
전술한 바와 같이 낙관에 포함되는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중요하고 많이 쓰이는 부분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세시(歲時)
낙관에서 성명과 아호 이외에 가장 많이 쓰여지는 것이 제작년도와 세시(歲時)인데 이의 경우는 한자어로 된 별칭들이 매우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어 이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상대방에 관한 존칭과 자기 자신에 관한 겸칭(謙稱)을 사용함에 실수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결례가 되며 작품의 격을 손상시키므로 각별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손윗분에 대한 존칭
일반적으로 ○○先生, ○○方家 ○○女士 ○○老師 ○○大方家 ○○先生大人 ○○法家 ○○道家 ○○老 OO翁이라 쓰는 것이 좋으며 이어 指正 法正 敎正 正字 正腕 正之 淸賞 淸鑑 淸覽 雅屬 雅正 斧正 正筆 正書 慈鑑 등의 겸사(謙辭)를 쓰면 무난하다.
동년배에 대한 존칭
○○同志 ○○書友 ○○仁兄 ○○同窓 ○○大兄 ○○仁友 등의 존칭을 쓰며 그 뒤에 存念 惠存 留念 留存 淸賞 囑書 命書 雅屬등의 겸사(謙辭)를 쓸 수도 있다.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小妹○○ 小弟○○ 등을 적절히 쓴다.
연하자에 대한 호칭
○○君 ○○孃 ○○學生 ○○賢弟 ○○賢侄 ○○愛孫 ○○愛女 등의 호칭을 쓴다.
8. 화제(畵題)와 제발(題跋)
그림을 그렸을 경우 흔히 화제(畵題)라 하는 글을 병기하는데, 화제란 그림 주제(主題)에 관하여 그 위에 쓰는 시문, 또는 그림의 제목을 말하는 것으로써 역시 낙관의 일부로 해석하고자 한다. 중국 후한(後漢)의 희평석경(熹平石經)으로 유명한 서화가 채옹은 영제(靈帝)의 명에 의하여 적가후오대장상도(赤家侯五代將相圖)를 그리고, 여기에 찬문(撰文)까지 쓰게 되었는데 이 찬문이 오늘날 동양화에 있어서 보이는 화제(畵題)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물론 화제가 없는 그림도 있고, 오직 그림과 인영(印影)만이 존재하는 그림도 있다. 요즈음은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아 전통회화 영역 안에서도 그림 이외의 부수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그림도 많이 보인다. 특히 현대성을 강조하는 그림,글씨의 경우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작품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환영할 일로 보지만, 글씨에 자신이 없어 꼭 필요한 기록마저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전통문화의 특징을 잘 소화하지 못한 결과이므로 매우 염려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글씨나 그림의 주제를 완성한 후 화제나 인영을 적절히 보완하였을 때 비로소 동양미술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화제와는 달리 제발(題跋)이라는 것이 있다. 중국에는 서적 ·법첩,·금석탁본,·서화 등의 앞뒤 여백에 그 유래, 소장가나 감정인의 소견, 감상문, 비평 등을 적는 풍습이 있으며 그러한 특별한 문장을 제발이라고 한다. 따라서 제발은 서화 작품이 완성된 후 별도로 기록되게 마련이다.낙관의 일부라는 견해도 있긴하나 작품이 완성된 후 수백년 후에 기록되는 경우도 있고 별도로 써서 붙여놓기도 하여 작품의 일부로 인정하기 어려운 점도 있는 관계로 낙관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은 무리하다 하겠다.
추사 김정희의 歲寒圖. 작품 제작시 본인이 직접 써넣은 장문의 제발이 유명하다. 인영이 여러군데 보인다.
제발이 성행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이며 문학에서는 구양수(歐陽修)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의 글이 많다. 제발은 주로 제작자 아닌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종종 작가 자신이 써 넣는 경우도 있다. 제주도에 유배당한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에 그의 제자 이상적(李尙迪)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하고 아울러 의로움을 칭송하는 장문의 발문을 달아 그가 지닌 지조론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제발은 또 다른 말로 발문(跋文),화발(畵跋), 제시(題詩), 화찬(畵讚)이라고도 한다.
왕형렬作 겨울나기 1993. 한지. 먹. 담채 한국화이지만 거의 여백을 두지 않은 그림으로서 우측 하단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인영만 보인다.
9. 서화용 인장의 역사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인장은 은주(殷周)시대의 것이다. 그 후 춘추전국시대와 한(漢)시대에 많은 인장들이 사용되었지만 모두가 실용적인 일상사에 사용되기 위한 인장들이었다.그 만치 인장의 역사가 깊으며 수많은 각종 인장들이 출토되어왔다. 인장이 가장 발달하였던 시기는 한대(漢代)였지만 작품에 찍은 것은 보이지 않고 그러한 현상은 당(唐)의 말기까지 계속된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장은 서화용으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관기(款記)와 아울러 인장이 서화작품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대적 의미를 지닌 인장의 초기의 창시자는 명(明)의 문팽(文彭)과 하진(何震)으로서 실용적인 용도에 국한하던 인장을 자신이 직접 새겨서 서화작품에 찍기 시작하였는데 이 것이 형식화 되었다. 이후 인장이 서화에 예술적 필수품으로 등장하면서 오늘날처럼 당연히 서화작품에는 인장이 날인되게 된 것이다.
또한 수장인, 당호인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므로써 인장 및 인영 자체가 서화와 함께 감상의 대상물이 되었다. 더욱이 원대(元代)에 들어서는 아름다운 화유석(花乳石)과 청전석(靑田石)이, 명대에는 수산석(壽山石)이 인장의 재료로 개발되어 서화가들의 애호를 촉진하게 되었으며 또한 작가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인장을 새기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술로서의 인장, 즉 전각이 발전해 가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고 이 바탕이 서화 작품의 예술성 향상에도 일조를 하게 되었다.
10. 인장의 종류 인장을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공무에 사용하는가 아니면 사무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으로 구분한다. 그 중 서화에 쓰이는 인장을 사인이라 하는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1.새겨진 내용에 의한 구분
성명인(姓名印)
서화 제작자의 성명을 새기며 주로 백문(白文. 음각)으로 새긴다.
아호인(雅號印)
서화 제작자의 호를 새기며 주로 주문(朱文. 양각)으로 새긴다.
당호인(堂號印)
서화제작자의 당호(堂號)를 새기며 헌당인(軒堂印) 또는 재관인(齋館印)이라고도 한다
길어인(吉語印)
주로 작품의 여백에 찍게 되며 아름다운 문구를 새긴다.
화압인(花押印)
이름을 새기되 문자를 약간 흘려서 도형처럼 새기며 서압인(署押印)이라고도 한다. 주로 초서나 행서 등으로 써서 새긴 것인데 오늘날의 사인(signature)과 같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관리들이 많은 문건에 일일이 수결(手決)하기가 번거로우므로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새긴 인장이 있는데 이를 수결인(手決印)이라 하며 결재 등 공무에 사용하였다. 수결인은 화압인과 모양은 유사하나 화압인은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도는 구분이 분명하다.
초형인(肖形印)
사물의 모양을 새겨넣은 인장이다.
장서인(藏書印)
책을 획득하였을 때 소유주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며 수장인(收藏印)과도 거의 동일한 용도로 쓰인다.
감정인(鑑定印)
서화용품을 감정하였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다
감상인(鑑賞印)
화용품을 감상하였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찍는 인장이다.
이 이외에도 여러가지 용도의 인장들이 있으나 그 사용이 흔치 않거나 서화용이 아닌 관계로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2. 찍히는 위치에 의한 구분
작품을 제작한 후 기본적으로 찍는 인장은 성명인이나 아호인이다. 대개의 경우 이 인장을 날인하고나면 제작이 마쳐지지만, 여백이 남아 그 자리에 인장을 날인하여야만 작품성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당호인등 적절한 인장을 골라서 찍게 되는데 그 찍히는 위치에 따라 명칭이 달리 주어진다.
인수인(引首印)
주로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 찍으며 수인(首印)이라고도 한다. 원대(元代) 이비(李泌)가 단거실(端居室)이라는 당호인(堂號印)을 찍은 것이 그 효시(嚆矢)인데 당호인 이외의 인장을 날인하는 것은 격이 높지 못하다는 주장도 있다.
요압각인(腰押脚印)
작품의 허리 부분에 찍히면 요압각인이다.
압각인(押脚印)
작품의 아래 부분에 찍히면 압각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유롭게 위치를 선정하여 찍을 수 있는 관계로 위의 3가지 인을 총칭하여 유인(遊印)이라 한다는 설이 있으나,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로써 학문적 품격이 높지 못하다는 견해가 일본 서예계에서도 발표된 적이 있는 용어이다.
3. 인장에 관한 용어 인장은 인(印), 신(信), 인신(印信), 도장(圖章), 새(璽), 인감(印鑑),도서(圖書)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도서(圖書)와 인장(印章)의 합성어로서 도장(圖章), 또는 인(印)과 장(章)의 합성어로서 인장(印章)이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인장을 찍는 행위를 날인(捺印),압날(押捺) 또는 검인(鈐印)이라 하며, 찍혀있는 흔적에 대하여는 인영(印影), 인흔(印痕)등의 말로 표현한다.
결론 낙관은 어디까지나 서화의 주제(主題)에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첨가장치였으나 서예가 현대화 되어감에 따라 점차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져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닥아오는 세계에서 요구하는 서예는 보편성을 갖추고 정통성을 자랑하는 서예가 아니라, 개인의 심성을 중시하고 새로운 실험을 중시하는 맞춤형 서예가 될 것이다. 따라서 서화작품의 내용은 과거에 비해 많이 시각미술로 변모해야할 것이며 따라서 화폭의 주 내용의 변화만 가지고 만족할 수는 없는 관계로 낙관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미의 창조에 활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충분히 익히고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 귀중한 소재를 표현대상에서 제외하고 넘어가는 우를 범할지도 모르는 일이며, 이러한 자기 성찰에는 서예용어의 올바른 사용도 포함되어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