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은 플라이릴 -> 베이트릴 -> 스피닝릴 이런 순으로 만들어졌다 합니다. ^^
*** 시계제작자들의 릴 ***
처음 제작된 베이트캐스팅릴의 모양은 지금 사용되는 베이트릴과 흡사 합니다.
George Snyder 가 1810년 켄터키주의 파리(paris)시에 자기 시계점에 처음 내어 놓은
릴과 유사한 모양과 방법으로 오늘날도 만듭니다.
값비싼 플라이로드를 구입하지 않고도 많은 대다수 낚시인들이 그림 같은 파리시 앞 개울에 낚시
가 되도록 만든 이 발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파리시 앞 개울인 Stoner Creek은 완만한 물살과 여울이 지고 소가 적절히 이루어진 아름다운 강
이었습니다. 이 강에는 아주 많은 수의 스몰마우스배스와 스폿티드 배스가 살고 있었지요.
봄철 따뜻한 날이면 2~3파운드의 배스가 수면아래에서 따듯한 햇빛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당연히 그 물고기들을 잡아서 신선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아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것으로 알고 지냈지요.
그러나 이 물고기들이 노는 장소는 낚시하기에 상당히 먼 거리라서 쉽게 잘 잡히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자기 상점에 아름답고 예쁜 수제품 시계와 은세공을 만들어 팔던 Bourbon County
Angler Association 의 회장이던 George Snyder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지요.
1810년 추운 겨울 어느날 아침 그는 이런 문제를 곰곰히 의자에 앉아서 생각하고 있었지요.
이 우아한 유럽 이주민은 아직까지 “hang” “lunker” “wall-hanger” “ them old brown fish”같은
북미의 낚시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답니다. 그러나 그는 블랙배스를 잡는데 어려움은 있었지만
적절한 배스를 잡을줄도 이미 알고 있었지요.
그는 유럽에서 이미 송어나 연어를 잡는 낚시기술을 익히고 있었으며 이런 플라이기술이 그가 이
주한 곳의 깊은 물에 사는 물고기들을 잡는데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플라이가 안되는 곳도 있었지요. 연안에 수초가 무성하여 배스가 놀고 있는 곳까지
플라이를 날릴수 없을만큼 공간이 협소해지게 되었지요.또한 살아있는 생미끼를 플라이로도
날릴 수 없었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플라이장비외에는 별다른 낚시장비가를 구할수 없었답니다.
동시기에 플라이릴중 영국에서는 나무로 만든 Nottingham reel 이 개발되었는데 단지 라인을 감
고 저장하는 기능만 하였습니다.
Charles Waterman이 저술한 “The history of Angling”에 이 nottinggham reel이란게
“재사용이 가능한 진보적인 현대적 감는 기계장치: durable forerunner of modern winches”라
고 쓰여져 있습니다. 그 후 1800년대까지 여러가지 기어시스템을 갖춘 릴들이 생산되었으나 이것
들 역시도 캐스팅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면 백래쉬없이 라인을 보내기란 불가능한 기어구조였
기 때문이죠.
사회적으로 Snyder는 안정적이었고 낚시로 인해 발이 젖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전형적
인 신사였습니다. 그러나 Stoner Creek에서 낚시를 하려면 의심할 필요도 없이 발이 젖는 것은
현대적인 웨이딩부츠가 없었기에 당연한 것이었지요.
왜 그가 낚시줄을 던지고 적절하게 미끼를 배스에게 보낼수 있는 “ 이배수 : double-
multiplying” 기어비를 가진 릴을 개발했는가라는 하는 것에는 언급된 것이 없었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위에 말한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미침내 그는 생미끼를 적절하게 던질 수 있는 이런 릴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Snyder의 릴을 “ 미끼를 던지는 장비:baitcasting instrument”라고 기술합니다.
그는 이 릴을 1812년 그가 살고 있던 지역의 신문인 “ Western Citizen”에 마침내 광고하기 시작
했습니다.
이 릴의 소문은 매우 느리게 Bluegrass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830년까지 지역판사이자 낚시광이었던 Mason Brown은 역시도 Snyder의 릴을 가지지 못했지
요. 어떤 경로로 슈나이더릴을 가지게 된 그는 같은 낚시동료이자 친구인 켄터기주 프랭크포트
(frankfort)에 살던 시계점 주인이던 Benjamin Meek에게 이 릴의 기능을 개선할 자문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Meek은 당연히 호응을 했고 따라서 릴의 개량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835년 Meek 과 남동생 Benjamin 은 수제품 개량형 베이트캐스팅릴인 역사적으로도 유
명한 “Bluegrass” 릴을 만들었는데 가격이 무려 50 달러나 되는 고가의 릴이었습니다.
Snyder 와 Meek 의 릴이 단지 “이배수” 현대로 말하면 4:1 의 기어비를 가진 릴을 만들었지만
Meek의 동생은 보석시계용베어링을 넣어서 부드럽게 돌아가는 릴을 처음 만들었을뿐 아니라 나
선형 기어구조를 완성하고 릴에서 오일에 새지 않도록 하는 베어링봉합장치도 개발하게 되었지
요. 1800년대 중 후반까지 여러 많은 시계 제작자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수제 릴을 생산해 내었습
니다. 그들은 캔터키에 거주하며 1830년에서 1850년까지 Meek의 견습생들이었습니다. 그들 중
에 매우 존경받는 릴제작자인 B.C.Milan이 나왔으며 그는 아들인 John에게 판매를 맡겼지요.
이 Millan 의 릴이 1889년 Norway의 Bergin 낚시 용품전에 출품되었으며 1893년 시카고 박람회
에서 국제대상을 받았고 1904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에서 디자인과 기능에서 1
등상을 수상했습니다. 아들이든 John Milan은 1927년까지 이 릴들을 계속 생산해 내었습니다.
1850년에서 1925년까지 다른 켄터키에 거주하는 시계 제작자들 역시도 각자의 릴들을 만들고 있
었습니다. 그들 중의 하나이던 William H. Talbot 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켄터키 프랭크포트
에서 살다가 미조리주의 네바다로 이사한 후 그 곳에서 아주 정밀하고 값비싼 릴들을 생산해 내
었습니다. 그는 캔사스시티로 이사 후 1920년대까지 자기 이름의 상표로 릴을 만들었습니다.
또 한사람인 George W.Gayle 역시도 Ben Meek 의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1882년 그 나름대로
의 독창적이고도 훌륭한 릴을 만들어냅니다. 그의 아들인 Clarence는 1940년대까지 아버지의 릴
을 계속 만들어 내었습니다.
코넷티컷주에서 태생이지만 캔터키 렉싱턴(Lexington)에 생활한 총포상인 J.L.Sage 역시도
Meek의 파트너였던 B.C.Milan 이 1846년 멕시코독립전쟁에 참여한 시기동안 Ben Meek아래에
서 릴을 만들었는데 독립하여 기능이 뛰어난 릴을 만들었지만 역시도 Meek과 Milan의 릴과 디
자인이 유사하단 평을 받았습니다. 1850년에서 1900년까지 Sage는 약 350개의 릴을 만들었습니
다. 이 릴들은 사이즈에서 줄어들었고 완성도가 훌륭했습니다. 물론 독일제 은이나 황동으로 만
들었지요. 이런 캔터키 릴들의 특징은 모두 버팔로의 뿔이 핸들의 손잡이로 사용되었으며
단일 핸들이었고 또한 1850년에서 1900년까지 만들어진 것들은 황동이나 독일제 은으로 만들어
졌으며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예술적인 수공예 시계와 같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특징입니다.
Jonathan과 Benjamin Meek 은 시장성 있는 베이트캐스팅릴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없는 부속
을 스위스에서 주문해습니다. 또한 이 시기 기어를 짜르기 위한 기계역시도 캔터키에 달랑 한대
뿐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기의 캔터키 릴의 기어란 렉싱턴아래에 위치한
단빌레(Danville)에서 이 한 기계에서 모두 깍아진 것들입니다.
이런 캔터키 릴의 시대는 1898년 미시건에 사는 릴제작자인 William Shakespeare가 처음 작동
되는 레벨와인드 장치를 개발해냄으로서 종말을 고합니다.
Shakespeare는 켄터키릴이 리트리브할 때 사용자의 엄지 손가락을 적절히 조절하지 않는다면
줄들이 들뜨게 되어 다음 캐스팅시 백래쉬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고 매우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Shakespeare 릴의 레벨와인드 시스템이 대부분의 낚시인에게 받아 들여지면서
Shakespeare회사는 성장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이후 다른 회사들 역시도 이 시스템을
대부분 채용하게 됩니다.
Shakespeare회사 광고문구는 “ 정밀한 시계 만들 듯: built like a fine watch” 였지요.
레벨와인드 시스템이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미국의 낚시인들이 인공루어를 사용하게 되었습
니다(과거엔 생미끼였다는 이야긴가). Shakespeare의 Marhoff릴은 새로 소개되어지는
james Heddon’s Dawagiac minnow(circa 1898)나 Wood expert 같은 탑워터루어 양대 회사
의 루어를 사용하는 모델로는 아주 이름 높은 릴이었습니다.
Paris에서 시계를 만들었던 George Snyder는 결코 “flippin” “ pitchin” “titanium-plate”
“antireverse” “synchronized levelwind” “fast-thumbar” 같은 단어는 듣지 못했을겁니다.
또한 그가 만든 릴의 후예들이 미국을 넘어서 수십만달러를 벌어 들이는 아시아권에까지
생산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테지요.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지금 릴을 만드는 회사들의 만드는 릴들이 애초에 그가 생각했던 물에 발이 안 빠지도록
하려고 만들었던 릴과 동일한 기능을 낚시인에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역주: 아부가르시아의 릴은 1950년대 중반에 미국에 소개되었습니다.
부록: 스피닝릴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늦은 시기이군요..
미국에서 1930년대 중반까지는 레벨와인드베이트캐스팅릴이 우세했습니다.
그후 새로운 스타일인 스피닝릴이 만들어졌습니다.
1884년 스코틀랜드의 Perth에 살던 Peter Malloch가 스피닝릴을 만들었는데
Illingsworth에 살던 Bradford Worsted 무역상의 후계자인 Alfred Holden이 가져다가 영국내에
서 팔았는데 이 릴이 현대의 open –face 스피닝릴과 유사한 모양입니다.
그 후 영국의 Hardy 형제와 프랑스의 Pezon-Mitchel이 이 Illingsworth’s 개량 스타일의 릴을 만
들었습니다. 1935년 Bache Brown이 Luxor reel을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했습니다.
Luxor reel은 field & stream잡지에 소개되면서 여러 낚시인에게 사용되었지만
이차대전까지는 낮설은 낚시장비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전쟁후인 194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광범위하게 받아 들여졌습니다.
스피닝릴이 받아들여진 이유중 백래쉬가 없고 베이트캐스팅릴에 필적할 만한 조력의 향상이 있
은 후 갑자기 낚시인의 태클박스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던지기 쉽고 베이트릴로서 접근하기
힘든 곳까지 작은 루어를 날릴 수도 있어 대 유행으로 번졌습니다.
현재로 스피닝릴은 소아에게도 베이트릴의 어려움이나 루어선택에 제한이 없이 캐스팅이 가능
해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첫댓글 제손에 들려있는 스피닝릴이 수없는 시행착오와 개선들 끝에 나온 물건이었군요......오늘부터라도 더욱 이뻐해주어야 겠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릴의 역사..무엇이든지..쉽게 탄생하는것은 없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