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타 계간지 <까치11호>
부제 : 무모했으나 순수했기에 가능했었던 우리들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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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학기 동안 논의가 진행되어온 학교 캠퍼스 개발계획에 따라 여름 방학이 된지 1주일이 지나서 사용하던 코트장을 이전하게 되었다. 처음엔 학교측에서 코트장을 만들어 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이왕 옮길 것 빨리 옮기고 그곳에 정을 붙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우리도 서둘러서 코트장에 있는 물품들을 새로운 코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선배님들은 10년동안 정들었던 코트, 우리 10기에게는 비록 1년이란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말 내집 같은 곳이었다. 등나무가 멋들어지게 어울렸던 이곳 코트장에서의 수많은 이야기과 추억을 뒤로 하고 막상 우리 손으로 코트를 파고 벤치를 뜯어내면서 이 정든 코트를 떠나게 되는 것을 실감하였다.
새로 이전하게 될 공대 뒤편 코트장 부지는 말이 새로운 코트지 정말 아무것도 갖추어진 것이 없는 사막 같았다. 아니 그 보다 더 험한 자갈밭이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막상 이전하고 나니 처음 약속과는 달리 학교측에서는 인부조차 없다고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완전히 속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기가 막혀서 망연자실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듯 낙담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그냥 학교의 처분을 기약도 없이 기다릴 수 없어서 우리가 직접 코트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학교측에서 삽과 괭이를 빌려 가지고 말로만 듣고 보기만 했던 일선 막노동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모하기 그리 없는 일이었다. 회원들 모두가 처음 일을 하기 때문에 손에는 물집이 생겨서 그것이 터져 손이 쓰리고 아팠고 남자들의 손에는 완전히 물집 투성이었다. 물집이 터져서 손이 쓰리고 아프니까 주위에 있던 헝겊과 솜을 손에 싸고 괭이와 삽을 들고 일을 계속해 나갔다. 손에 물집이 생긴 것은 여학생 후배들도 예외는 아니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은 지쳐만 가고 집에 가자마자 모두들 잠에 든다고 말들을 했다. 돈이 없어서 시원한 음료수 한 병 제대로 사다주지 못하고 냉수를 마시면서 일을 하고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자 심지어는 버너, 코펠을 가지고 와서 오전에 일을 하고 점심시간에 여학생들과 밤을 해먹고 오후에 까지 일을 하는 날도 있었다. 남들은 도시락과 책가방을 가지고 도서관에서 공부해야 할 때에 우리는 이렇게 여름방학을 통째로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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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어느덧 코트장이 아닌 코트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덧 코트장이 아닌 코너가 서서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초조하기만 했다. 개학 하기전에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기만 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은 한정되어서 모두들 지쳐 있었다. 개학전 하루를 쉬고 개학을 하고 나서도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교는 개학 후에도 학내분규로 수업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코트장 일은 계속 할 수 있었다. 학교는 계속 시끄러웠고 이런 틈에 학교서 중장비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코트면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또 다시 중장비의 등장으로 일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진즉 학교측에서 도와주었으면 방학 동안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2학기 코트장 작업은 방학때 보다 쉬웠다. 그 만큼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학교측의 도움으로 탈의실 기초가 가꾸어졌고, 철망이 쳐지고 어느덧 코트장의 면모가 갖추어 지기 시작했다. 개학 후 한달이 지나 코트장 2개가 우리 손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였지만 아쉬운대로 괜찮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또다시 그 코트장위에 마사토를 뒤덮어야 되지 었지만 그것을 다시 깔아야 할 중기가 와야 하기 때문이다. 패로이더를 불러오게 하기 위해 1주일간 학교측과 실랑이를 했고 그마저도 안 되자 밖에서 공사중인 광주고속 건설부에 가서 그레이더를 잠시 빌릴 수 없을까 하고 부탁도 해 보았지만 모두들 허사였다. 코트장에서 훨훨 날던 지난날이 그리웠고 쿠스타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했다. 몇 칠 후 아침 일찍 현장으로 가서 패로이더를 기어이 끌고 와서 흙을 고르기는 했으나 날씨는 춥고 사람이 나오지 않아 뒷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 한 개의 코트는 완성되었지만 두 개의 코트가 빨리 만들어 져야 할 텐데 정말 걱정이다. 어느덧 세월은 12월을 마무리 지어가고 있다.
10여년 동안 쿠스타인의 정(情)이 들었던 코트장이 학교 캠퍼스 개발 계획에 따라 이전하게 되었고 무책임한 학교당국의 처분에 대해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새로운 코트장을 만드는 문제는 고스란히 써-클 구성원들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는 현실에서 임원단이란 책임감 하나로 지난 여름동안 흘렸던 땀과 노력이 훗날 어떤 평가로 남게 될까?
계절은 어느덧 무더운 여름을 지나 추운 겨울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다. ]
쿠스타 10기 OOO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조각
코트장을 나오면서 뒤돌아 보았을 때 검게 그을린 후배들의 그 얼굴들….
1987년 7월 여름
대학4 학년 ROTC 후보생 2년차 여름방학 시작하자마자 전방 소대장 병영훈련 입소 준비를 하고 전방병영훈련을 떠나면서 코트장에 잠깐 들렀을 때 고생하고 있었던 후배들의 얼굴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무모하다’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성이나 꾀가 없다'는 뜻의 형용사이다.
1987년 뜨거운 여름 맨손으로 코트장을 만들었던 후배들의 희생과 노력을 ‘무모했었다’는 말로 어찌 제단을 할 수 있을까?
대학의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이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거울삼아 배우고 즐기고 하면서 소위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것을 누리고 본인이 경험한 써-클의 생활의 즐거웠던 추억을 지금도 술자리에서 안주삼아 이야기하고는 하지만 이처럼 한 조직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자신들의 온몸을 바쳐서 그 조직을 지켜내려고 했던 사람들의 그때의 일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87년 그 더운 여름날 코트장을 만들기 위해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자발적으로 써-클 구성원 또는 임원단이라는 책임감 하나로 감당하기 벅찬 거대한 벽에 온몸으로 부딪혀 써-클의 새로운 터전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이 그이후에도 아무도 그때 당시의 후배들이 겪어야 했던 절박함이나 노력에 대해서 인정받지 못하고 쿠스타의 역사에서 먼지 쌓여 덮여져 버렸다.
그러나 그 후배들은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졸업을 하고 이후로도 사회진출하고 또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매년 ob/yb 행사를 할 때가 되면 기꺼이 적지 않은 후원을 끊이지 않게 하는 후배들은 보면서 진실로 이 단체에 대해 변치 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후배들을 보면서 부끄러워 지는것은 어쩔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도하고 작은 일에도 다소 과장되개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나 또한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또한 대체적으로 과거에 본인의 어떤 조직에 일정한 역할을 하고 본인이 경험했던 당시 처한 상황에 대해 그 조직이나 단체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자평하기도 하기도 하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변치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직이 소멸되지 않고 앞으로 나가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 또한 1987년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보내면서 소위 ‘도와준다는 것’이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다는 것임을 그때 당시에는 무심했었다.
<쿠스타 ob 밴드>라는 이 공간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지만 우리들의 현재의 이야기만 하는것처럼 허무하고 빈약함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한다. 어느 역사학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지나온 이야기들이 과거에만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있는 실체로 존재하고 그 이야기가 서로 공감을 이룰때 그 토대위에서 개개인의 관계도 더욱 투터워지고 풍부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때 코트장을 직접 만들겠다고 무모했으나 순수했던 후배들의 희생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을 전합니다.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이라도 이글을 보거나 또는 보지 못할 수 있는 10기 11기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부끄러운 고백합니다.
미안했었고 감사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