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핵심 기업 LG 창업스토리
LG그룹 창업자 구인회(具仁會)는 1907년에 경남 진양군에서 3·4백석 지기의 중농인 구제서(具再書)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구인회는 1926년 서울 중앙보고에 진학했으나 1926년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선배·동료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설립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당시 구인회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일본인이 ‘눈깔사탕’ 장사를 통해 점차 사업품목을 확대하는 등 동네상권을 독점하는 것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29년에 협동조합 이사장이 된 구인회는 부산·마산·진주 등지에서 석유·잡화 등을 구입해 마을사람들에게 공급하면서 사업원리를 터득했다.
협동조합 경영을 통해 사업경험을 쌓은 구인회는 부친으로부터 2000원을 받아 1931년에 진주에서 아우 철회(哲會)와 함께 구인회상점(具仁會商店)이란 포목상을 개시했다. 철회 또한 1800원을 투자해 형제간에 공동으로 경영했는데 운수사업도 함께 병행했다.
또한 구인회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쟁특수를 예견하고 광목 2만 필을 사재기해 8만 원이란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940년 6월에는 구인회상점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새롭게 어물 및 청과물을 취급했다. 이듬해인 1941년에는 둘째 아우인 정회(貞會)가 경영에 참여하면서 3형제 공동 경영시대를 맞이한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구인회는 구인회상회를 폐업하고 그해 11월에 부산 남포동 부근에 조선흥업사(朝鮮興業社)를 설립했다. 이는 당시 부산에는 목탄을 주 연료로 하는 일본식 주택들이 많았는데 일본 대마도에서 목탄을 수입해 판매할 목적으로 이 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회사 설립 후 구인회는 경남도청으로부터 화물차 30대를 사들여 운수업과 포목상도 겸했지만 사업은 신통치 못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정회가 화장품메이커인 부산 흥아화학공업사(興亞化學工業社)의 김준환(金俊換)을 만났다. 당시 이 회사의 생산직 직원이었던 김준환은 정회에게 화장품사업이 성업 중이란 정보를 제공했다.
락희화학공업사 설립
이 정보를 통해 구인회 형제는 흥아공업에서 생산한 여성용 화장품인 아마쓰 구리무(크림)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이 무렵에 구인회의 처가 친척인 허준구와 셋째 아우인 태회(泰會)도 경영에 참여했다.
구인회는 흥아공업에서 물건을 받아 서울에서 판매했다. 당시 흥아공업이 부산지역 판권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아마쓰 구리무에 대한 서울 소비자들의 반응이 좋자 구인회는 화장품을 직접 제조하기로 결심했다.
구인회는 화장품판매를 통해 확보한 자금과 고향의 논밭을 처분해 마련한 3000만 환으로 1947년 1월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설립했다. 사장은 구인회가, 부사장은 철회가 맡았으며 허준구는 판매를 담당했다. 그리고 김준환을 스카우트해 생산을 전담케 했다. 공장은 서대신동에 있는 구인회의 집에 마련됐다. 감화조를 비롯해 감화한 원료를 처리하는 방치선반과 압착여과기·향료혼합조 등을 설치했다. 생산초기 직공은 20여명 내외에 불과했다.
▲락희화학공업사 최초 사옥인 공장
락희화학에서 생산한 제품에는 ‘럭키(lucky)'라는 상표를 붙여 출시했다. 당시 전국의 화장품업체는 20여 개 내외로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구인회는 공급에 주력하기 보다는 품질향상에 주력했다.
화장품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구인회는 1949년에 장남 자경(慈暻)을 경영에 참여시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국전쟁기간 동안에 일제 화장품이 대거 밀수되면서 국내 화장품업체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일제 화장품이 뛰어난 데다, 당시 국내 업체들은 선호도가 떨어지는 중국산 향료를 수입해 화장품을 제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락희화학은 중국산 향료보다 50%정도 저렴한 일제 향료를 수입해 제조한 뒤 판매하는 등 품질에 신경을 썼다. 그 결과 ‘럭키’ 크림은 전국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성형사업 개시
이 무렵 구인회는 플라스틱사업에도 진출했다. 쉽게 파손되지 않은 화장품 뚜껑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국산 화장품의 뚜껑 소재는 유리로 되어 있어 쉽게 파손되곤 했다. 이에 구인회는 대용품으로 플라스틱 뚜껑을 제조하기로 한 것이다. 개발은 주로 태회가 담당했다.
구인회는 화장품판매로 벌어들인 3억 환으로 1952년 9월에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하는 한편, 범일동 884번지에 건평 41평의 합성수지공장을 마련했다. 사출기 등을 설치하고 플라스틱제 머리빗과 비누곽·크림뚜껑 등을 생산했는데, 소비자반응이 좋아 ‘럭키’ 플라스틱제품은 원가의 20~30배에 팔려나갔다.
구인회는 플라스틱 세면기와 식기생산 등 점차 품종을 넓히는 와중에서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성형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1953년에 화장품사업을 청산하고 동양전기를 락희화학에 흡수했다.
1953년 11월에는 국내외 판매 및 원료, 기계설비 등의 수입을 목적으로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락희화학은 1954년 5월에 미국 Abbe Engineering Co.로부터 치약배합기 등을 도입해 연지동에 전용공장을 확보하고 치약생산도 개시했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부대를 통해 유출된 콜게이트치약과 국산으로는 동아특수화학에서 생산한 다까키치약이 있었으나 콜게이트치약은 값이 비싸 부유층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절대 다수 국민들은 소금으로 양치질하는 상황이었다.
‘럭키치약’ 판매가 시작되자 수요가 급증했다. 이는 1955년부터 치약을 군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결과 1955년도 대한경제연감에는 자본금 기준 국내 10대기업 중 럭키화학이 4위에 랭크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부터 락희화학은 플라스틱성형사업을 특화해 1956년에는 PCV파이프를 생산했고, 반도상사로 개명해 무역업도 강화했다. 1957년부터는 비닐장판·폴리에텔렌 필름을 생산하는 등 국내 최대의 화학제품업체로 부상했다.
최정상의 기업집단 완성
락희화학이 국내최대의 재벌로 도약할 수 있었던 직접적 계기는 부산에 금성사를 설립한 것이다.
1956년에 락희화학 서울사무소 윤욱현 기획부장은 “평소 전축을 좋아해 전자기기에 대한 관심이 커 라디오를 생산해 보도록 구 사장에게 건의했다”며 “이 무렵 일본 통산성의 백서가 발표되었는데 그 백서에는 석유화학 또는 전자공업이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 분야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에 구 사장은 아직 국산라디오가 없는 점에 주목하면서 사업성을 검토해보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윤욱현을 중심으로 1958년 4월에 라디오·플라스틱 잡화·전기기기 부품·유라이트 등을 생산하는 공장건설계획을 확정하고 기계 및 시설 도입비로 8만5195달러를 책정했다. 9월에는 서독의 라디오기술자인 Henke를 2년 계약으로 고용하고 12월에는 기술요원 확보를 위해 공고 및 공대졸업자들을 모집해 생산체제를 갖추었다.
1959년에는 차관 및 은행융자 등 때문에 주식회사로 전환하고 생산에 착수한 결과 그해 11월에는 국내 최초의 국산라디오인 A-501을 생산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국산라디오에 대한 홍보부족과 외제라디오 때문에 금성사는 출발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도약계기가 초래했다.
1961년에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외제품 배격운동’을 정부차원에서 전개했다. 당시 정부는 이를 홍보할 매체로 라디오를 선정하고 ‘농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한 해 동안만 13만7000대를 파는 등 4억3100만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이후 전화기·적산전력계 등도 생산하는 한편, 1964년 말부터는 동남아·중남미 등에 수출하는 등 급성장했다. 이때부터 ‘전자제품은 금성’이란 말이 소비자들 사이에 회자되어 금성사는 락희화학과 함께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했다. LG그룹이 재계의 전면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직 계열화 구축
금성사 설립을 전후해 락희화학은 제조업중심의 수직적다각화를 전개했다. 1959년 3월에는 자본금 1억 환의 락희유지공업을 설립했다. 락희화학에서 생산하는 치약원료인 글리세린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공장 건설자금은 1959년도 유지 부문의 ICA원조자금 34만 달러 등으로 충당했다.
글리세린은 비누의 부산물인 만큼 비누를 만들면 자연히 글리세린이 생산되었다. 당시 우지(牛指)는 소맥·원면 등과 함께 원조물자로 공급 됐기 때문에 비누공장들은 호황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리세린은 애경유지(愛敬油指)가 독점 공급한 탓에 원료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락희화학은 값싼 우지를 이용해서 비누도 만들고 부산물로 치약원료인 글리세린도 생산하고자 락희유지를 설립했던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비닐제품에 대한 국내수요가 증가하자 1962년 8월에는 자본금 3000만 원의 락희비니루공업을 설립했다. 구인회는 비닐장판·스폰지·레저·건축용 비닐타일 등이 국산화되는 등 향후 비닐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판단해 부산 연지공장의 비닐부문을 분리해 설립했다. 1963년 7월에는 락희화학과 허진구(許晉九)가 50대50 비율로 한국미공을 설립해 서울 구로동에 공장을 건설했다.
1962년 5월에는 자본금 10억 환의 한국케이블공업도 설립했다. 5·16직후 정부가 부정축재기업인들에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이득으로 5대 기간산업을 건설해 국가에 헌납할 것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구인회는 종합 전기 공장을 설립해 헌납하기로 하고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유럽·미국 등지를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구인회에게 송배전선공장을 설립하도록 권고, 서독의 Fuhrmeister사와 송배전선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구인회는 이 회사와 295만 달러의 차관계약 체결을 통해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호계리에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1966년에 이 공장은 금성사에 통합되었다가 1969년에 금성전선으로 분리되었다.
1968년 3월에는 미국 Continental Carbon Co.와 50대50의 비율로 합작해 한국콘티넨탈카본(자본금 2700만 원)을 설립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고무제품 보강재로 사용되는 카본블랙이 전혀 생산되지 않았다.
카본블랙은 고무에 탄력과 강도를 더해주는 보강재였기 때문에 고무공업, 특히 타이어제조에는 필수적인 원료였다. 다만 충주 비료공장의 연돌에서 채취되는 탄소알갱이로 고무신을 제조하는 수준이었다.
락희화학은 향후 카본블랙에 대한 수요가 점증할 것으로 예상하고 카본블랙 생산 공장 건설을 고려하던 중에 거래 관계에 있던 미국의 컨티넨탈 카본사가 합작을 제의해 설립한 것이다. 1968년 10월 15일 인천 갈산동의 1만1000여 평의 부지에 공장 건설을 착수해 1969년 9월에 연산 7500톤 규모의 공장을 완공했다.
한편, 1964년 5월에는 부산 국제신보를 인수해 언론 사업에도 진출했다. 1949년 9월 김형두 등에 의해 산업신문으로 설립되었다가 1950년 8월에 국제신보로 개칭되었다. 한국전쟁 중에는 다소 활성화되었으나 휴전 후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사세가 기울어 LG그룹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초대사장으로 국회의원을 역임한 서정귀(徐廷貴)를 임명했다.
이로써 LG그룹은 모기업인 락희화학 산하에 금성사와 한국케이블·반도상사·락희유지·락희비니루·한국미공·국제신보 등을 두어 기업 집단을 형성했다. 이 무렵까지 LG그룹은 화학 중심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손을 잡고라도 먼저 강을 건너라”
동업의 LG를 얘기할 때 이 말 만큼 가장 정곡을 찌르는 말은 없을 것이다. 수년간 LG그룹의 성장을 주도해 온 기본철학이 바로 합작정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정신은 자신에게 없는 기술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한 합작의 방정식으로 독식하려는 경쟁기업보다 LG를 우위에 올려놓는 전략이 됐다. 또한 밖으로 나갈 때에는 합작사로부터 지원사격을 받는 등 후광효과도 컸다.
LG의 합작은 주로 전자사업 분야와 호남정유(현 GS칼텍스)·한국콘티낸탈카본(럭키소재)에서 이루어졌다. 그 중 전사사업 분야는 기술 확보를 위한 제휴가 절실해 많은 신경을 쏟아 부었다. 미국 칼텍스 석유회사와 손을 잡은 호남정유에는 사업 규모가 워낙 컸고, 소재사업의 경우에는 비교적 초창기 사업이었기에 남의 손이 특별히 필요했다.
럭키가 정유 사업에 진출하게 된 배경은 정부의 ‘외자도입법’ 제정과 제2정유공장 실수요자 공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석유사업 진출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제2정유 사업자 선정 시기 당시, 럭키가 칼텍스를 잡은 것은 여러 면에서 탁월한 결정이었다. 원유 공급의 조건부터가 유리했다. 걸프사보다 배럴당 7~9% 쌌고, 유조선 운임 역시 걸프보다 배럴당 20%가 저렴했다.
특히 칼텍스가 제공하는 사업자금 4950만 달러는 5년 거치 12년 상환의 장기 차관이었다. 연리도 5.25%로 미국의 우량업체 대출 금리인 6% 대보다 낮았다. 또한 운전자금으로 차관한 1000만 달러를 원유 매입에 활용할 시 무이자로 한다는 조건이었다. 도로·항만·철도·용수 등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소요되는 자금 1000만 달러도 연리 5.25%의 저리였다. 이익잉여금에 대한 배당 역시 럭키 대 칼텍스가 8대 2의 비율로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런 조건 하에 1966년 12월 마침내 럭키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칼텍스와 합작투자협정을 맺고 50%씩 출자해 550만 달러 규모의 호남정유회사를 설립했다.
단기 이익은 아니었지만 럭키나 칼텍스 입장에서는 장기적 이익이 보장되는 정부 인허가 사업에 눈독 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때 정부는 왜 정유 산업 민영화를 결정했을까? 이는 정부가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소득이 늘어나자 전기·석유 등 에너지 소비가 증대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이전의 석탄 중심에서 석유 중심으로 개편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2정유사업자 선정 문제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실수요자 공무가 발표되었음에도 5개월간이나 선정이 지연되자 정치자금설이 나돌았다. 그 이유는 한국석유공업 개발의 타당성 조사를 맡은 ‘아더 리튼 보고서’가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는 “제2정유공장의 시설 규모로 일산 5만5000배럴이 적정하고 제3정유공장은 1971년에 가서나 고려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로서는 막대한 이윤과 거대한 판매고를 지닌 까닭에 민간재벌에 넘길 수 없다는 주장을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급격히 늘어나는 정유 수요를 국가 예산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었다.
처음의 의욕과 달리 사업이 진행되면서 막대한 그룹 돈이 정유공장 건설 쪽으로 흘러 들어가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시장 점유율이 80% 대에 이르는 럭키화학 쪽에서 번 돈을 몽땅 정유에 털어 붓는 것에 대해 몇몇 경영층 인사들은 구인회를 붙잡고 “어떻게 된 거냐”며 따져 묻기도 했다. 마치 럭키가 번 돈을 금성사가 초기에 집어 삼키는 꼴과 같았다. 이때마다 구인회는 구평회를 통해 “장사를 하던 럭키가 기업을 하는 그룹으로 탈바꿈하기 위해선 정유사업 추진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주지시켰다.
당시 구인회는 럭키가 거대한 그룹으로 성장하는 전환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과거 치약과 비누·크림 따위를 만들던 때는 더 이상 아니었다.
1968년 8월 구인회는 미국 경영진단 전문가 치커링과 크레이튼을 초청해 그룹의 경영 상태를 관찰케 했다. 그들은 3개월 남짓 분석한 후 두 가지를 건의했다. 그룹 산하에 분산되어 있는 각 사업부 및 제경 부서를 중앙 집중화 하고 럭키화학의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이었다.
이때 비로소 그룹 내부에 기획조정실이 생겨나고, 정부와 원활한 행정기능 수행을 위해 그룹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구상이 마련됐다. 새로 설치된 기획조정실에는 허씨 가문의 수장 허준구가 취임했다. 이로써 양 집안 간 성장을 위한 협력 체계는 더욱 일사분란하게 진행됐다. 해방과 함께 시작한 부산 시대를 마감하고 이제 바야흐로 럭키가 서울 시대를 열어 나가게 된 것이다.
석유사업의 재탐침 작업
LG그룹은 구씨·허씨 간 동업 정신으로 2004년 그룹 분리 시까지 동고동락해 왔다. 이를 두고 성공적인 파트너십이라 부르고 따라 배울만한 모범 사례로 평가하는 것은 동업의 불모지대인 우리 경영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대단히 긍정적이다. 그러나 특정 파트너십은 사업을 더 키우기 위해서는 깨지기도 한다는 것을 럭키와 칼텍스의 제휴·협력 관계에서 잘 보여준다.
칼텍스 측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인해 제2정유 공장인 호남정유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 럭키는 석유사업을 해 나가며 두 가지 현장 지혜를 얻었다.
하나는 숙명적인 관계인 유공과의 일전이었다. 유공은 걸프사와 합작투자를 한 상태로 국내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싸움을 위해 호남정유는 이이제이 방식을 취했다. 즉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이기는 전략으로, 호남정유가 수입한 원유를 유공에 맡겨 정제케 한 다음, 그것을 다시 호남정유의 대리점을 통해 판매한다는 전략이었다.
호남정유로서는 유통망이 없는 가운데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책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 위탁가공을 통해 석유 제품을 마련하고 남의 유통망을 통해 도강 훈련을 한다는 것이었다.
정부가 인허가권을 부여하는 사업의 특징은 정부 스스로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아킬레스건이 있다. 정유·통신·카지노 등 정부 인허가사업은 정부가 최대의 실력자인 듯 보이지만 스스로 코가 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관련 부처일수록 추진한 일이 꼬일 때에는 속이 바싹 타들어 가기 마련이다.
석유 위탁판매와 석유정제를 유공이 완강히 거절하자 호남정유는 정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정부는 자신이 선정한 사업자임으로 조정과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결국 유공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 호남정유가 생각한 대로 되지는 않았다.
배럴당 2~3달러 하는 원유의 가공료를 70%나 요구하는 등 엄청나게 비싼 요금을 유공이 제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남정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통망이 없는 호남정유로서는 유통망을 확보할 때까지 지불해야 할 수업료던 것이다.
두 번째로 석유사업의 업의 개념에 대한 재탐침 작업이었다. 석유사업이 돈이 된다는 얘기는 단순히 정유 사업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원유도입권·정유권·원유수송권 등이 더 이익 날만한 사업들이었다. 개별적으로도 엄청난 이권인데, 이들을 한데 묶는다면? 당연히 본업보다 훨씬 더 큰 사업거리가 될 수 있다.
이런 판단이 서자 럭키는 칼텍스와의 협력을 이쯤에서 끝내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어떤 명분을 들이대더라도 돈을 더 벌고, 시장을 석권하려는 비즈니스 세계의 생리 그 자체였다.
칼텍스에 대한 선제공격은 럭키 측에서 먼저 시작했다. 구평회는 원유수송권에 도전키로 하고 원유수송을 전담할 호남탱커회사 설립을 공개했다. 그러나 칼텍스는 알짜 사업을 합작사의 몫으로 하지 않고 빼내려는 럭키 측의 시도를 알고 반대했다. 하지만 럭키는 이미 정부가 수출입 물량에 대한 국적선 확충 계획을 갖고 있다는 걸 간파하고 정부의 측면 지원을 유도한 가운데 1년간 지루하고 긴 협상을 진행했다.
미국 업체를 억지로 다루다가는 자칫하다 한·미 양국 간의 갈등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두고 얻어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원유수송권을 얻으려 했으나, 타결 방식을 달리해 단 3척의 탱커로 럭키 측이 원유를 수송한다는 합의점을 찾았다.
원래 합작 조건에는 원유수송은 칼텍스 측이 전담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영참여권에는 원유공급권, 비토권 등 중요한 권한을 몽땅 칼텍스 측이 쥐고 있었다. 이런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구평회는 한국 국적 유조선으로 원유를 수송할 수 있도록 1971년 수송전담 회사인 호남탱커를 따로 만들었다. 이를 기점으로 끈질기게 원유수송 분야를 파고들어 마침내 1987년경에는 수입원유 수송의 89%를 호남탱커가 맡게 됐다.
결국 몇 차례 협상 끝에 칼텍스의 원유수송 업무는 모두 럭키 측으로 넘어 오게 됐다. 럭키는 칼텍스와 합작을 하면서 운도 크게 따랐다. 칼텍스의 원유공급원이 사우디아라비아로 안정적인 원유공급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LG그룹은 1984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 합작으로 자본금 1억 2600만 달러의 플라스틱 공장 NPC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해외투자에도 나섰다. 오랜 공정을 거쳐 1987년에 본격 가동된 NPC는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VCM과 PVC 레진 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고, 해외투자의 노하우 및 기술축적 그리고 석유화학 제품의 수출증대를 가져왔다.
칼텍스가 맺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를 십분 이용해 자체 활로를 뚫은 셈이다. 이 공장의 PVC레진 설비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였다.
금성사의 美공장 진출
제5공화국이 출범한 1980년 12월 럭키그룹 회장실에서는 구씨·허씨 7인 운영회 사람들이 모여 해외 사업과 관련해 마지막 격론을 펼쳤다. 그들의 면면은 회장 구자경과 구태회·평회·두회·자학, 허준구·신구 등 구씨·허씨 양 집안을 일컫는 이른바 ‘럭키 브라더스’와 이헌조 기획 조정실장이었다.
이미 3년 전부터 금성사의 미국 공장 진출을 설계하고 준비해 왔지만 막상 최종 결정에 이르자 서로간의 이견 차가 극심했다. 비록 미국 진출과 관련해 격론이 오갔지만 결론은 그간 준비해온 대로 ‘추진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것이 그룹의 면모를 바꾸는 길이기도 했고, 정부 정책에 협력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럭키의 미래를 생각할 때, 1990년대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놓는 길이기도 했다.
허신구는 7인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새해가 밝자 방미 길에 올랐다.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벌어지는 전자 쇼에 참가하는 국내 전자업체 대표단들이었다.
“일단 한번 가서 본 후, 북미 시장을 장악할 구상을 해 보자” 일단 둘러본 뒤 전략을 짜보자는 구상이었다.
금성사 미국 생산법인(GSAI) 진출은 현지 판매법인(GSEI)이 자리를 잡았다지만 전혀 녹록지 않았다. 경쟁의 불꽃이 튀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컬러 TV가 연간 1200만대나 팔리는 황금 시장이었지만 한국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겨우 4% 내외에 불과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시장 잠재성이 무궁무진했다.
‘현지에서 생산한 골드스타 제품을 들고 시장에 밀어 닥친다?’ 허신구의 머릿속에는 30년 전 락희화학 시절 서울 을지로 4가 고물상 ‘만물상회’ 2층에 위치했던 락희가 떠올랐다.
‘그때 국산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 소비자들을 보며 얼마나 절치부심했던가. 반드시 국산으로 시장을 석권하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자체 상표를 붙여 진출하는 명실상부한 골드스타의 진출 아니던가!’
허신구는 그간 금성사가 만든 제품이면서도 제니스, RCA 등 주문자표시부착상표 방식으로 수출해야만 했던 북미 시장에서의 종속적 고리를 끊어내야만 한다는 점을 절감했다. 자체 상표를 강화하기 위해 심지어는 골드스타 상표가 붙은 제품을 수입해 가는 바이어에게는 1~2%의 할인율을 적용해 주기도 했었다. ‘내 상품으로 남의 장사 치다꺼리를 하는 게 무슨 사업인가?’ 이제는 그런 절름발이식 사업에서 탈피하고도 싶었다.
허신구는 서울에 있는 이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고, 허씨 가문이 당당히 일궈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자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동업이란 어느 한쪽의 역량이나 역할이 기울면 곧 뒷말이 나오게끔 되어 있다. 안살림 묶기라는 허씨 집안의 역할이 실은 바깥 묶기에 더 적합하다는 평을 듣고 싶었다. 그는 북미시장에 뛰어들기 위해 크고 야심차며 대담한 계획을 품었다.
공장 규모와 제품 라인업 등은 사업의 전개 방식 중 하나이다. 따라서 누가 봐도 빈손으로 공장을 짓는다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봉이 김선달 식으로 빈손으로 공장을 짓기 위해서는 남다른 전략이 수반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럭키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며, 공장의 입지조건은 물론 미국 현지 주정부의 지원정책 등이 맞물려야 한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공장설립은 차질을 빚게 되고, 막대한 투자를 감행하고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허신구 일행은 LA·샌프라시스코는 물론 일본 내쇼날사가 1950년대 말에 공장을 세운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美 자치령)까지 샅샅이 훑었다. 최종적으로 현지조사팀은 앨라배마 주의 ‘헌츠빌’에 깃발을 꽂았다.
이곳은 주지사(폴 제임즈)가 고용 창출을 위해 해외기업 유치에 적극적이었으며 세금·노동력·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또한 헌츠빌은 미국 인구의 50퍼센트가 하루 수송권내에 밀집해 있고 중남미 직행로인 모빌 항이 인접해 있어, 제3국 수출에 용이했다. 금성사 공장을 유치하기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빈손으로 공장을 세운다는 허신구의 계획이 착착 맞아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고용만 해 준다면, 우리 땅에 와서 빈손으로 공장을 세워도 좋다.”
주(州) 발전을 꾀하는 주지사 폴 제임즈의 대답과 함께 앨라배마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공장부지 19만8000㎡(6만 평)을 주정부 재정으로 정지 작업 해주고, 건설자금은 시당국이 산업공채를 발행해 조달해 주는 조건이었다. 가격으로 따지면 3.3㎡당 1만 원 꼴인 셈이었다. 전체 80만 달러 보너스로 공장을 자유무역지대로 지정해 관세와 쿼터 혜택을 주고 전기·가스·용수 메인배관을 시비(市費)로 건설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호박이 넝쿨 채 굴러 떨어지는 격이었다.
이처럼 사업이란 나의 필요가 아닌 상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것을 금성사 현지법인 설립 과정은 잘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전략과 주도면밀한 현지분석과 행운이 함께 한다.
한국동란 중 미국 GI(美 군인)들이 부산 국제시장 거리를 배회하며 떠들어대던 ‘럭키’라는 단어는 이름에서 처럼 엄청난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며, 북미 시장에 진출하는 기회를 가져왔다. 바야흐로 글로벌 경영이 시작되는 단초였다.
‘헌츠빌 사태’
사업에서 잘 된다고 안심하는 것은 금물이다. 때로는 갑작스런 역풍이 불어 닥쳐 다른 방향으로 몰아 가기 때문이다.
허신구와 제임즈가 현지공장 설립계획을 발표하기로 한 1주일 전 어느 날이었다. 헌츠빌 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인 미스터 레빈이 전화를 해왔다. 전화통 너머에서 그는 격양된 목소리였다. 불안한 느낌으로 찾아 간 상공회의소 사무실에서 레빈은 자초지종 없이 불쑥 종이를 내밀며 허신구를 노려봤다.
“이게 당신 회사의 실상이오?”
종이에는 1978년 이후 경제 불황에 부진한 국내 전자회사들의 실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국내 라이벌 회사가 레빈을 찾아와 자사에게 유치하라며 금성사를 마구 헐뜯고 갔다는 것이다. 듣고 보니 분노를 넘어 기가 찰 노릇이었다. 누가 만든 뜬소리이건 럭키의 미국 시장 진출에 뿌린 재는 그 의도가 고약했다.
허신구는 속이 쓰렸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헌츠빌에 입지를 잡은 게 경쟁사를 위협할 정도로 성공적인 전략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성사의 위상과 앞으로의 성장성을 점쳐보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당장에 돌연한 문제부터 급히 풀어나가야만 했다.
럭키 현지요원들은 주정부·시(市)상공회의소·신문사 등을 찾아다니며 사과했고,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에 진정을 내어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얼마 후 정부 관여로 경쟁사 요원들이 철수함으로써 ‘헌츠빌 사태’는 잦아들었다.
위기를 넘기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회게법인 쿠퍼스 앤 리브랜드(Cooper's & Lybrand)가 럭키그룹과 금성사의 연차보고서를 공인해줌으로써 신용을 보장했다. 또한 공채발행 은행은 시티뱅크가 향후 금성사 현지생산법인과의 거래를 트기 위해 지급 보증료를 연 0.5퍼센트에 간사수수료를 1퍼센트로 하되 첫 발행임을 감안해 5만 달러로 깎아 주었다.
금성사의 헌츠빌 진출은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1981년 10월 7일 GSAI 준공식에 7인의 ‘럭키 브라더스’가 참석과 6일 후, 뉴욕에서 합작선 및 기술 제휴 선을 위한 ‘럭키의 밤’ 행사가 성대히 치러졌다. 금성사 미국 공장 진출에 허씨는 톡톡히 제 몫을 다 했고 그 공은 동업자와 주주는 물론, LG그룹의 미래로 이어졌다.
똘똘 뭉친 5형제의 단결력
LG는 5.16군사 쿠데타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돼 환수자금 명목으로 안양에 한국케이블(현 LG전선)을 건설해 헌납하게 됐다. 한편, 그에 대한 처벌로 구평회는 고등군법회의에서 6년형을 구형받았다가 6개월만인 1962년 2월 감옥살이에서 선고유예로 풀려남으로써 다시 경영 일선으로 복귀했다.
5.16 시기, 형님을 대신해 감옥에 가는 걸 마다않은 구평회의 우애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논외로 치더라도 구씨 집안의 단결력과 집안의 분위기를 읽게 한다. 어떤 식으로든 똘똘 뭉친 5형제는 결코 부러지지 않는 화살 묶음처럼 LG라는 기업의 주춧돌이 됐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오자마자 차관도입차 곧바로 서독으로 달려갔다. 구평회의 서독행 임무는 아세테이트 섬유 공장 건설을 위한 차관 및 시설재 도입이었다. 아세테이트 섬유는 옷감으로 사용하면 구겨지지 않고 물을 빨아들이지 않아 당시 대인기였다.
5.16군사정부가 종합경제재건위원회를 설치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차에 경제주체를 선정하고 자본을 조달하는 핵심과제에 LG도 협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군부와의 악연은 훗날 2대 회장인 구자경 대에까지 이어진다.
‘1976년 7월 1일 현재 주요 기업인 사회활동 현황’을 살펴보면, 구자경 럭키그룹 대표가 전국경제인연합회부회장, 한독경협위위원장직과 함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인이 그만큼 정치권력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얘기이다.
창업자 구인회의 넘치는 사업가적 열정과 투철한 기술 개발 마인드는 오늘날 LG를 있게 한 살아 있는 경영 정신이다. 그러나 LG가 대기업으로 성장해 가는 데에는 보다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그것은 정부와 민간 간의 오랜 애증 관계다. 1960년 초의 이 같은 상황은 한국 재벌 기업들이 이후 완전히 자리 잡는 배경이 된다.
독과점의 빛과 그림자
LG기업사를 보면, 럭키그룹을 성장시킨 제품에는 독과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치약·합성세제·TV·세탁기·냉장고·선풍기·전화기 등등 오늘날 LG를 있게 한 과거의 이 같은 독과점 품목들은 LG의 빛과 그림자를 이루었다.
당연히 남보다 먼저 뛰어 들어 국내외 시장을 선점하고 기술 혁신을 꾀한 측면은 밝은 면의 총체를 이룬다. 에컨대 치약은 독과점적 성격을 띠다가 경쟁기업이 나타나자 곧바로 품질개선과 가격우위를 점하며 경쟁사를 물리쳤고, 그 결과 고객 이익으로 돌린 면이 없지 않다.
또 미국 PX에서 흘러나오는 물건과 일대 한판을 벌이는 과감한 도전과 투자를 통해 ‘국산’의 입지를 끊임없이 넓혀 왔다.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조그마한 지식도 없던 척박한 경영환경에서 근대적 기업을 만든 것은 지금으로 봐도 대단하다는 평가다. 민족자본이 형성되기도 전에 일제의 의해 짓밟힌 국내 산업 여건에서 유일하게 우리가 지니고 있던 토지자본을 상업자본·유통자본으로 전환시킨 것은 시대를 성큼 앞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전기전자·석유화학 등 근대적 기업군을 형성하며 막대한 고용 창출과 자체 기술을 확보한 공로는 불확실성을 딛고 한발 한발 전진해 온 글로벌 기업 LG의 창의력의 결과로 평가된다.
반면 소비자의 희생 위에서 대기업이 부를 쌓았다는 비판은 좀처럼 피하기 어렵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마음껏 누린 결과 부의 확장 속도나 범위가 광폭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경쟁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제품 가격을 과도하게 높여 받기도 했고, 독점상태가 계속되었더라면 그 같은 행태가 지속되었을 거라는 지적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대한민국 재벌 기업은 정경유착의 수혜자라는 비판이 늘 제기된다. 그럼에도 그룹으로 커가는 중에 겪었던 성장통이나 규모의 경제도 크게 작용하고, 그룹을 유지하는데 든 유명세 등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LG와 GS는 이제 과거와는 여러 면에서 현격히 다른 그룹으로 분리됐다. 나라의 국격을 높이는데 기업의 역할이 크다는 것은 글로벌화가 가속화될수록 더 피부로 느껴진다. 플라스틱 빗과 세숫대야, 치약 따위나 만들던 회사가 글로벌을 논한다는 것은 어쩐지 격세지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물건이 그 시절엔 가장 최첨단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다.
LG가 처음부터 중후 장대한 사업군을 거느리고 글로벌 시장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한 것은 아니다.
구씨·허씨 동업이 고객을 향한 것이든 자신의 부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든, 대한민국 기업의 상생 모델을 찾는 데에는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창업자 구인회는 사라졌으나 그가 지향한 바는 오늘날 LG와 GS 내부에 살아 있다. 그것이 독점이익과 기업가 정신 사이에서 완강히 버티고 있는 구인회 정신의 핵심일 테고,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두 개의 상반된 입장을 조율해 내는 구인회의 치열한 기업가 정신이다.
물론 이런 전 과정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업은 오로지 사람이라는 점이다. 새로운 사업을 통해 없던 시장을 만들어 내고 시대의 흐름을 이끈 초발혁신가들이 있다는 점이다. 누구든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이뤄 낸 매우 특별한 혁신의 본질을 꿰뚫고 지배한 사람들 말이다.
<출처=한국재벌사, 이한구 저>